|
보살영락경 제2권
4. 용왕욕태자품[2]
[형상이 없는 법, 모양없는 허공]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만일 어떤 중생이 이 하나의 게송을 듣고서 외우거나, 읽어 지니거나, 남을 위하여 해설하거나, 그 뜻을 분별하면, 뭇 마군이 틈을 얻게 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이들 중생은 모두 지나간 세상에서 뭇 행을 갖추었고,
일찍이 다시 무앙수(無央數)의 부처님께 공양을 올렸으며,
서원이 순수하고 정숙해서 저마다 원을 발하였기 때문이니라.
‘만일 내가 후생에 일생보처의 보살로부터 바른 설법을 들으면,
곧 저 부처님에게서 탁 트이면서 크게 깨달아 생겨남도 없고 일어나고 멸함도 없는 법을 얻게 되리라.’
어떠한가, 족성자야. 만일 한 사람이 있어, 이 말을 문득 설하여 이에 내가 형상이 없는 법을 알아서 형상을 통해 가르치고 허공의 상(相)을 알아서 실(實)을 통해 가르친다면,
이 사람이 이 뜻을 일으켜 세우겠느냐, 그렇지 못하겠느냐?”
당시 무외대호(無畏大護)보살이 있었다.
이 삼천대천세계를 지나면 부처님 나라가 있는데, 그 이름을 현호(賢豪)라 말하고 부처님의 명호는 보현(普賢)이라 하였다.
무외대호보살은 그 국토로부터 와서 총지를 얻어 불퇴전(不退轉)에 서 있었다.
그가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부처님 앞에 나아가서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꿇어앉아 합장한 채 부처님께 여쭈었다.
“세존이시여, 형상 없는 법을 형상을 통해 가르치고, 허공의 모습 없음[虛空無相]을 모습을 통해 가르치시니, 매우 어렵고 몹시 어려워서 끝내 미치지 못하겠나이다.
왜냐하면 허공은 형상이 없어서 능히 물들이거나 더럽힐 수 없거늘, 어찌 형질(形質)이 있는 것을 통해 가르칠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할 것입니다.”
부처님께서 무외대호 보살에게 말씀하셨다.
“족성자야, 이것은 오히려 얻을 수 있지만, 일생보처 보살로부터 이 법을 듣고자 함은 끝내 얻을 수 없느니라.
왜냐하면 모든 법은 수(數)가 없는데, 어찌 수가 없는 가운데서 수 있는 법을 행하겠는가?
반연의 대함이 없는 법이 반연의 대함이 있겠는가?
허공의 법에 형질이 있겠는가? 이 일은 그렇지가 않느니라.
다만 부처님의 큰 자비를 널리 펴기 위하여 중생을 교화하여 굳건함을 세우게 하고, 도의 가르침을 펴서 모든 법을 분별하되, 말이 없고 설함이 없으나,
세상에는 어리석음과 미혹함이 많아서 시비의 마음을 일으키길
‘이는 새는[漏] 법이냐, 새는 법이 아니냐?
이는 반연하여 대하는 법이냐, 반연하여 대하는 법이 아니냐?
이는 수호해 지닐 수 있느냐, 수호해 지닐 수 없느냐?
이 법은 아(我)가 있느냐, 아(我)가 없느냐?
이는 세속의 법이냐, 열반의 법이냐?
이 법은 물들어 집착한 것이냐, 물들어 집착하지 않은 것이냐?
이 법은 수(數)가 있느냐, 수가 없느냐?
이 법은 단멸하느냐, 단멸하지 않느냐?
이 법은 찌꺼기로 흐리느냐, 이 찌꺼기로 흐리지 않느냐?’라 하고,
다시 서로 경계하여 각자 말하길
‘이것을 익히느냐, 이것을 버리느냐?
이것을 배우느냐, 이것을 그냥 두느냐?
이것은 배우는 법이냐, 배우는 법이 아니냐?
이것이 성문의 법, 벽지불의 법이냐, 성문의 법, 벽지불의 법이 아니냐?
이것이 보살의 법이냐, 보살의 법이 아니냐?’라고 관(觀)하기 때문에 최정각을 이루지 못한다.
왜냐하면 모습에 집착하는 관(觀)은 제1의 공관(空觀)이 아니기 때문이니,
구함도 없고, 모습도 없고, 또한 지견도 없어야 비로소 공관을 이루느니라.
대저 모든 법을 관찰하면 아(我)가 없고 수명도 없으며, 찰토(刹土)를 보지 않으며, 경계를 분별하는데도 의지함이 없고 의지할 대상도 없다.
이것을 법관(法觀)이라고 하나니, 공하여 있는 바가 없느니라.
이와 같이 관하는 자는 모든 법이 고요하므로 도의 열매도 고요하고, 증득을 받음도 또한 고요하다.
가령 보살의 공관(空觀)이 이와 같더라도 모든 희망에 대해 문득 뒤바꿈이 없고, 중생을 도와 이롭게 하면서도 대애(大哀)를 발해서 부처님의 법을 일으켜 세우느니라.
하지만 비록 중생을 제도하더라도 중생이란 생각은 없으니, 공관(空觀)의 보살이 어찌 제도함에 제도를 하고 있다고 여기겠는가? 이 일은 그렇지 않다.
[열 가지 무아법]
만일 보살마하살로서 이 공관(空觀)을 얻은 이는 열 가지 ‘내가 없는 법[無我法]’을 문득 얻어서 구족하나니,
어떤 것들이 열 가지인가?
여기에서 무외야, 보살마하살이 족성자이든 족성녀이든 불법의 대중에게서 깨끗하고 더러움의 차별을 보지 않고, 또한 너와 나의 분별을 일으키지 않고,
이것은 법신(法身)이고 이것은 사욕신(思欲身)이라는 생각을 일으키지 않으면,
앞서 지나간 세상을 알고 뒤에 오는 세상을 살핀다.
이는 모두가 청정해서 나라는 생각이 없는 것이니,
이를 보살의 공관(空觀)이며 무아(無我)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무외야, 보살마하살이 법복을 가지런히 정돈하고 발우를 잡고서 오는 세상ㆍ지나간 세상ㆍ지금 세상의 모든 부처님이 성(城)에 들어가 교화하는 것을 살펴볼 뿐,
큰 부자와 하천한 이를 가려보지 않고, 그 가운데서 나와 나의 두 소견을 일으키지 않나니,
이것을 보살의 공관이며 무아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무외야, 보살마하살은 수없는 부처님의 세계와 장엄 청정한 국토가 평탄하고 바른 것을 볼 뿐이지,
오늘날 부처님 국토의 더럽고 추악함은 말하지 않느니라.
또 잡고 있는 뜻이 청정해서 사소한 상념도 없으니, 생각 생각이 일정(一定)하여 식(識)이 흘러서 치달리지 아니하나니,
이것을 보살의 공관이며 무아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무외 보살마하살아, 중생은 물들고 집착해서 몸에 의지해 공(空)을 알고, 보살은 공의 지혜로 3세(世)에 의지함이 없으니,
이것을 보살의 공관이며 무아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무외 보살마하살아, 모든 부처님의 교화는 본래 청정함이 없으며 또한 다른 것도 없나니,
이것을 보살의 공관이며 무아라고 말하느니라.”
부처님께서 무외 보살마하살에게 말씀하셨다.
“혹 어떤 족성자의 여인이 바라밀[度無極]의 다함없는 법장(法藏)을 행하고 온갖 보배의 화만(華鬘)으로 스스로를 장엄하게 꾸미는데,
이와 같이 다함이 없으면서도 다함을 보지 않고, 그 가운데에서 ‘다하면서도 다하지 않음’을 성취하면,
이것을 보살의 공관이며 무아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무외야, 보살마하살은 여러 부처님의 한량없는 색상(色像)도 본제(本際)의 고요한 법에 들어간다고 마땅히 보아야 한다.
의취(義趣)를 분별하여 색(色)의 본래 없음을 알아서 널리 법계에 들어가 중생을 교화하고 인도하는데, 색의 모양을 보지 않고 중생을 교화하는 것,
이것을 보살의 공관이며 무아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무외야, 보살마하살은 부처님의 성스러운 지혜와 깊고 오묘한 곳간을 얻어서 네 가지 일에 두려움이 없고,
여덟 가지 결박과 집착을 여의어서 여덟 가지 해탈을 얻고,
법을 비처럼 내려서 윤택하게 하여 늙고 죽음을 없애고,
사자의 우렁찬 소리를 부르짖는 뜻이 금강과 같고, 피차와 중간을 여의어서 물들어 집착함이 없나니,
이것을 보살의 공관이며 무아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무외야, 보살마하살은 차츰 친근히 해서 숙명통을 익혀 무수한 아승기겁을 관찰하여야 한다.
아무 나라의 아무 부처님과 여러 부처님들은 비록 열반을 나타냈지만 멸도(滅度)를 취하지 않았고,
중생의 발자취를 청정하게 하는데 게으름을 품지 않았고,
겁의 수효로써 중생을 싫어하거나 근심으로 여기지 않았고,
또한 다시 열반의 쾌락으로써 멸도를 취하고자 하지 않았고,
마음은 허공과 같아서 적시어 더럽힐 수 없었나니,
이것을 보살의 공관이며 무아라고 말하느니라.
다시 다음으로 무외야, 보살마하살이 끝없는 지혜로 중생을 구제해서 극히 먼 곳인 항하 모래 밖에 하나하나의 모래가 다 항하의 모래가 되느니라.
이와 같이 계산해서 한 번 돌고는 다시 시작하는데, 이와 같이 팔방(八方)과 상하를 두루 채우고 또한 허공의 한량없는 경계에 노닐면서 중생을 반드시 구제하여 타락시키지 않지만, 스스로 신통지혜의 과보를 칭찬하지 않느니라.
이것을 보살마하살의 열 가지 무아법이라고 하느니라.
일생보처로서 태(胎)의 분수가 다한 이는 곧 응해서 행하느니라.”
이때 자리에 있던 색계(色界)와 욕계(欲界)의 천자(天子) 19해(垓)의 무리가 즉각 정인(頂忍)을 얻었고,
다시 무수한 여러 하늘과 세상 사람들이 공관진신(空觀盡信)의 행을 얻었고,
여러 야차ㆍ용ㆍ귀신은 3존(尊)을 믿고 향하여 삼보에 귀의함을 받았다.
[보살을 목욕시킬 때]
부처님께서 다시 족성자에게 말씀하셨다.
“그때에 보살이 금궤 위에 있었는데, 국왕과 거사ㆍ하늘ㆍ용ㆍ귀신과 시방의 보살들이 각각 공경을 표하면서 보살을 목욕시켜 드리고자 하였느니라.”
당시 이름이 월정(月精)인 보살이 있었는데, 여러 보살 가운데 가장 상수(上首)였다.
그가 위의를 거두어 지니고 법복을 잘 다스린 뒤에 즉시 자리에서 일어나 꿇어앉아 합장한 채 게송으로 찬탄하였다.
존귀하사 이제 걸림 없으신 분
삼계의 티끌에 물들지 않으시고
8해탈의 탕(湯)으로 씻으시니
세상의 물이 어찌 감당하리오.
마음의 때가 다하니 밝고 맑아서
안과 밖에 걸림이나 막힘이 없어라.
강과 바다와 하천과 샘물의 근원은
이 목욕물로는 오래 청정하지 못하네.
옛날 옛적, 유리(琉璃) 연못
선두(禪頭) 용궁에 계실 때
뜻을 오로지하여 대승을 발해서
애욕의 마군을 기어이 멸하셨나니,
이제 이미 본원(本願)을 이루어
삼계에 짝할 분이 없도다.
원하노니 무외(無畏)의 평상에 오르셔서
물로 목욕하심이 어떻습니까?
하늘에 태어나기 예순 두 차례
나술(那術)의 겁수(劫數) 동안
하늘은 다섯 가지 음악을 연주해서
복(福)의 음향을 울리니 자연의 과보니라.
법신의 뭇 지혜를 갖춰서
걸림 없는 도를 연설하시고
두루 마치신 뒤에는 이 생(生)을
가유라위성(迦惟羅衛城)에 의탁하셨노라.
지금 세상에 있는 세 가지 재앙[三災]을
3명(明)의 과보로 멸해 없애고
세 가지 지혜[三慧]로 세 가지를 요달하여
3요(要)를 이제 갖추셨나니
세 가지 평등으로 3세를 보사
삼계의 유(有)에 물들지 않으시고
3분의 법신을 갖추셨으니
삼계에 높으신 이여 이 절 받으옵소서.
여러 곳에서 와서 모인 중생,
여러 하늘과 수륜귀(須倫鬼)
모두 각자 기뻐하고 날뛰면서
공경해 받들며 공양을 일으키도다.
앞과 뒤에서 청묘(淸妙)함을 호위하며
나아가 유리동산에 이르러선
오른쪽으로 연꽃 가지를 잡으니
신(神)을 내려 남섬부주에 나셨도다.
태어나서 땅에 떨어질 적에
청정하기가 자마금(紫磨金) 같고
하늘땅이 여섯 번 반복하여 진동하고
신령스런 감응에 여러 하늘이 이르렀네.
지옥의 여러 가지 문초와 형벌은
일시에 모두 쉬어버리고
청정하여 티와 더러움 없음이
물에 집착하지 않는 꽃과 같도다.
시방 여러 부처님 세계의
여래 등정각 부처님들
각각 그 나라에서
사부대중에게 선언하셨나니,
‘오늘 사바세계에
부처님께서 내려와 출현하셨나니,
영원히 3악도에 있는 중생에게
불쌍히 여기는 마음을 베푸신다네.’
맑고 밝은 녹야원에서
올바른 법륜을 굴리시니
오랫동안 굶주린 자를 위해
감로의 법으로 적셔주도다.
8정도를 존귀한 이 홀로 깨치시고
12인연도 다 궁구하셨으며
다함없는 강과 바다의 보배로
온갖 사람을 배부르게 하셨도다.
가령 겁으로부터 겁에 이르기까지
부처님마다 그 덕을 찬탄해도
오히려 능히 다 펼 수 없거늘
하물며 나의 반딧불과 같은 빛이겠는가?
옛날 옛적 무외(無畏)의 세계인
불현(不眴) 국토 안에서
처음에는 말 없는 법 살피다가
남이 없는 지혜는 못 얻었는데,
무궁한 법을 연설할 수 있는
언교(言敎) 속에서 태어나길 서원하여
오늘 그 시기가 이미 이르렀으니
바라건대 존귀한 법륜을 굴려 주옵소서.
[법과 중생의 성품은 자연이며 청정하다]
이때에 보살의 심의(心意)가 맑고 깨끗해서 익숙히 보면서 아무 말이 없이 속으로 스스로 생각하였다.
‘내가 오늘 남들에게 법문을 설한다면, 청정한 불퇴전(不退轉) 경지는 ≺나≻의 성품을 품지 않음을 강론하리라.
모든 법은 자연(自然:스스로 그러함)이며, 생겨난 것도 또한 마찬가지니라.
사람의 근원에 따라 법을 설하겠다.
법의 성품은 스스로 그러해서 변하거나 다름[變異]이 없거늘, 어찌 중생에게 법을 받을 이가 있으랴?
중생은 본래 청정해서 더럽게 물듦을 보지 못하니, 지혜를 세우고 크나큰 서원의 마음을 발해서 중생을 찾아 알아보니 모조리 다 청정하다.
본래 청정한 자연이요,
무아(無我)의 자연이요,
무형(無形)의 자연이요,
인물(人物)의 자연이다.
어떤 것이 본래 청정한 자연인가?
아득한 옛날 이래로 생사(生死)에 유전하면서도 뜻을 발하여 도를 구하였고 나아가 열반에 이르기까지 본래 스스로 청정하였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본래 청정한 자연이라 말하느니라.
어떤 것을 무아의 자연이라 하는가?
본래 있다가 지금은 없고, 지금은 있으되 본래는 없으며,
또한 나와 나의 근본은 유(有)에서 생겼다고 말하지 않고,
또한 다시 유(有)가 나로부터 생겼다고 말하지 않으며,
나는 스스로 내가 있지 않음을 모르고 있으며, 스스로 있지 않음을 모르고 있으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아의 자연이라고 말하느니라.
어떤 것이 무형의 자연인가?
형상이 없는 것은 식(識)이고, 신(神)이고, 목숨이다.
이 세 가지 구절의 뜻은 항상 존재하면서 변하지 않는다.
공(空)에 있으면 공이 되고, 형상에 있으면 형상이 되고,
있음[有]에 있으면 있음이 되고, 모습[相]에 있으면 모습이 되고,
모습 없음[無相]에 있으면 모습 없음이 되어서 무형의 식(識)은 공성(空性)으로 저절로 그러하니,
이것을 이름하여 무형의 자연이라고 말하느니라.
어떤 것이 인물의 자연인가?
인물을 찾아 궁구하지만 그 소굴을 볼 수 없고,
의식은 허깨비 같아서 본래의 근원에 도달할 수 없고,
어리석음과 미혹함이 서로 이어받아 아버지를 말하고 어머니를 말하며,
나라ㆍ재산ㆍ처자에게 차츰차츰 온갖 상념을 내고, 3유(有:界)에 물들어 집착한다.
나는 이제 벌써 버려서 영원히 처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자연히 공의 지혜를 밝게 통달하니, 공의 지혜가 저절로 그러하므로[自然] 여러 가지 법도 또한 그러하다.
여러 가지 법도 저절로 그러하므로 바른 깨달음에 이르는 것도 또한 저절로 그러하다.
일체의 법들은 다만 가짜 명호(名號)일 뿐이니 호칭[號]으로 인하여 이름[名]이 있음도 또한 다시 저절로 그러하다.
저절로 그러함[自然]을 논하여 설하면 문득 논하여 설함이 되나니, 일어나고 멸함이 없는 법, 이것을 이름하여 인물의 자연이라고 말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