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단금강반야바라밀다경론석 중권
[머무름 없는 마음]
묻기를,
어떤 마음이 곧 이 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이기에 버려야 하며, 굳세게 부지런히 노력해야 하는 것인가?
또는 어느 곳에서 이 보리심의 원인을 버리지 않고 정진을 구하게 해야 하는가?
게송으로 말하였다.
이것을 일러 인변제(忍邊際)를 증득했다 하고
이것을 마음의 방편이라고 말하네.
이것은 초지(初地) 승의(勝義)의 마음에 들어가서 인변제행(忍邊際行)을 증득한 것을 말한 것이니, 머무름 없는 마음이 곧 이것이다.
경문에 이르기를
“마땅히 모든 생각을 여의고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의 마음을 발하여 일으켜야 한다”고 말했으니,
무슨 까닭인가?
이것은 머무르거나 집착함이 없는 마음이 생겨나는 원인을 밝힌 것이다.
만약 물질 등의 처소에서 머물거나 집착하는 마음이 있으면, 이런 사람은 틀림없이 불과(佛果)를 구하고자 매진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모든 보살은 마땅히 머무는 곳 없이 보시를 행하여야 한다’고 한 글의 뜻은
보시가 여섯 가지 바라밀을 포섭한다는 것을 밝히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곧 머물러 집착함이 없는 마음을 일으켜 방편을 행하는 것이니,
이렇게 하여 인욕바라밀을 증득하고 나면 비록 다시 괴로움을 만난다 해도 큰 보리의 마음을 버리지 않음을 말한 것이다.
묻노니
어떻게 마음을 내고 수행하여야 유정(有情)들을 이익 되게 할 수 있으며, 또한 유정을 이익 되게 하는 일에 머물지 않을 수 있는가?
이것은 취하고 버리는 것에 대한 설법에서와 같다.
묻노니
의심을 떨쳐버릴 수는 없는가?
답하기를
보살은 마땅히 이와 같이 보시를 행하여 모든 중생들을 유익하게 해야 한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말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은 바른 수행이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원인이 되지만
유정(有情)의 일과 모습에 대하여
모두 제거해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하네.
이는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여기에서 ‘바른 수행’이라고 말한 것은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는 원인을 말한 것이니,
곧 중생을 이익 되게 하면서도 유정이 간직하고 있는 모습엔 집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중생은 없다]
어떤 것을 유정의 사물과 모습이라고 말하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저런 일을 취(聚)라고 말한다.
저 중생이라는 것은 곧 명자(名字)로 시설(施設)된 것인데, 이것을 가지고 중생이 의지하는 일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무엇을 바른 수행이라고 하는가?
중생이라는 사물의 모습은 다 제거해야 하는데 저 명자로 말미암아 생각하는 것은 곧 생각이 아니니, 그것은 곧 그 자체(自體)는 본래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곧 저 중생이란 실제로 중생이 아닌데 5온(蘊)을 가지고 중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저 중생은 자체가 없기 때문이니, 이것은 나와 법에 성품이 없음을 밝힌 것이다.
무슨 까닭에 불세존께서 모두 갖가지 생각을 여의었는가?
이것은 나와 법, 이 두 가지 관념이 다 본래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가장 수승하고 미묘한 일을 성취하는 법]
어떻게 가장 수승하고 미묘한 일을 성취할 수 있는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가장 수승한 일은 그 생각을 제거하는 것이며
모든 세존은 비교할 대상이 없는 것은
참다운 견해와 서로 호응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서술한 것인가?
저 두 가지는 실제로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닌데 모든 대사(大師)들은 억지로 그 생각을 제거하려고 한다. 그러나 모든 여래(如來)는 진실한 견해로 더불어 서로 호응하고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과(果)와 인(因)의 자리에 머물지 않는다면 어떻게 저 과의 인을 알 수 있는가? 이미 이런 의심들이 생겼을 것이 아닌가?
경에서는 답하기를
“묘생(妙生)아, 여래는 진실한 말을 하시는 분이니라”라고 하셨는데,
여기에 네 구가 있다.
게송으로 말하리라.
과(果)는 인(因)의 자리에 머물지 않지만
이것이 곧 저 과보의 원인이 되니
세존께선 진실한 말씀만 하시기 때문에
마땅히 네 가지가 있음을 알아야 한다.
이 진실한 말의 성품에 네 가지가 있다.
무엇이 네 가지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요점을 세워주고 하승(下乘)을 설해주며
또한 대승(大乘)의 이치도 설해 주는
여러 가지 수기(授記)한 일들
어느 것 하나 어긋남이 없어야 하네.
부처님께서는 요기(要期)를 세웠기 때문에 원래 불과(佛果)를 구함에 있어 허망하거나 거짓이 없다.
하열승(下劣乘)과 대승(大乘)에 대한 모든 수기(授記)에 조금도 거짓이 없기 때문에 여기에서 그 차례를 따라 “
진실한 말, 여여(如如)한 말, 거짓이 없는 말, 달라지지 않는 말”이라고 하여 서로 배속(配屬)시켰다.
여래께서 성문승에 대하여 괴로움 등의 네 가지 진리를 말씀하신 것은 모두 진실하여 헛되지 않으며,
그 대승에 대하여 법에는 성품이 없음을 설하니 설명한 진여는 곧 실지(實知)와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여래가 곧 이 이치를 알고 계시므로 일체시(一切時), 즉 과거ㆍ미래ㆍ현재에 대하여 수기한 바가 그 말한 것과 같아서 모두 거짓되거나 속임이 없기 때문에 여래라고 말한 것이다.
[여래의 말씀은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다]
경에 이르기를
“여래께서 증득하신 법과 말씀하신 법은 곧 진실한 것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은 무슨 뜻인가?
게송으로 답하겠다.
법[彼]을 증득하지 못한 채 따르기만 한다면
이는 진실도 아니고 거짓도 아니니
법문을 듣고 증득할 과보(果報)에만 집착하는 이에게
그를 다스리기 위하여 선설(宣說)하셨네.
모든 여래께서 설하신 법에 대하여 이 설법에서 저것을 증득하지 않기 때문에 곧 저것을 수순한다. 저 설법으로 말미암아서 친히 안으로 법을 증득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 말 속에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이것은 진실이 아니요, 그것을 따르기 때문에 또한 이것은 거짓말도 아니다.
‘나는 현재 최상의 깨달음을 증득했다’고 한 것은 곧 문구(文句)의 도리에 의거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이다.
묻노니
무엇 때문에 세존께서는 스스로 중생들의 요구에 부합하는 말을 세워서 나의 이 말은 진실한 말이라고 해놓고 또다시 내가 설한 법은 진실도 아니요 거짓도 아니라고 하였는가?
한 마디 말에 두 가지를 겸한다는 것은 이치로 보아 믿기 어렵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의혹 때문에 이렇게 답하였다.
“말한 것대로 집착하는 이가 있기 때문에 그에게 말하기를
‘모든 성인은 곧 무위(無爲)로부터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나 그 진여의 성품은 어느 곳이나 두루 있다’고 하였다.”
[불과는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라야 얻을 수 있다]
어째서 불과(佛果)는 머무름이 없는 마음이라야만 능히 얻을 수 있다고 말하는가?
머무르지 않는 마음은 또 어느 때나 항상 존재하는 것으로서 곧 진실한 바탕의 진여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어떤 이는 이것을 얻는데 어떤 이는 이것을 얻지 못하는가?
이런 의심을 제거하기 위하여 어둠 속에 들어가는 비유를 들어 말한 것이다.
이것은 무슨 뜻을 밝히려 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리라.
진여는 어느 때 어느 곳에나 항상 있건만
그 참다운 성품을 얻지 못하고
무지(無知) 때문에 머무름이 있으니
지혜가 있으면 머무름 없이 진실을 얻는다.
여기에서의 뜻은 진여의 성품을 말한 것이다.
비록 이것이 어느 때나 항상 하여 두루 있으나, 지혜가 없어 머무르는 마음이 있는 까닭에 곧 진여를 증득할 수 없으면 이것은 마음이 청정하지 못하다는 뜻이고,
지혜가 있어 머무르는 마음이 없는 까닭에 곧 진여를 증득할 수 있으면 이것은 청정하다는 뜻이다.
그러나 불세존은 곧 진여(眞如)에서 나타나셨으니, 이런 이치 때문에 머무르는 마음이 있으면 진여를 증득할 수 없다고 한 것이다.
이러한 까닭을 게송으로 말하리라.
지혜가 없으면 꽉 막힌 문과 같으니
지혜는 어둠을 밝히는 광명과 같아서
능대(能對)와 소치(所治)가 되어
득(得)과 실(失)이 눈앞에 나타난다.
‘어둠과 같다’고 한 것은 곧 어둠과 서로 비슷하다는 뜻이다.
이 어둠을 가지고 저 무식(無識)함에 비유하였고,
저 햇빛을 가지고 지혜가 있고 안목이 있는 것에 비유한 이치도 이와 똑같으니,
경문에 잘 갖추어 서술하고 있다.
그러므로 능대(能對)와 소치(所治)가 되어 득과 실이 눈앞에 나타난다고 말한 것이니, 그 호응하는 바를 따라서 안목이 있는 이는 밝음으로 능히 대할 수 있는 것이다.
밤이 다 지나고 새벽이 되면 밝은 빛이 나타나 다스려야 할 바[所治]를 깨뜨림으로써 깜깜한 것을 없앤다. 밝은 해가 떠올라 그 광명이 이미 앞에 나타나면 그 햇빛이 이미 중생의 색상(色像)을 비추므로 볼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