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제법보최상의론 하권
[제일의(第一義)]
여기서 설한 뜻은 제일의(第一義)이다.
이것을 떠나서 따로 제일의는 없다. 이 제일의는 모든 법을 거두어들인다.
이것은 생각할 수 없는[不思議] 진실한 말이며 행이다.
있음도 떠나고 없음도 떠나고, 지혜도 아니고 어리석음도 아니다.
적음도 아니고 많음도 아니며, 모습도 없고 성품도 없다.
비추어 도달하는 바가 없으며, 지혜로도 알 수 없고, 식으로 식별할 수 없다.
자성에 상즉[印]하지도 않고 자성을 상리[離]하지도 않는다.
취하지도 않고 버리는 것도 없어, 취하고 버리는 모습을 떠난다.
여실한 지혜로부터 출생하는 것으로, 출생하는 것에 따르고 언설하는 것에 따르고, 취하는 모습도 없고 거두어 갈무리하는 것도 없다.
마음이 사량할 바도 아니니, 알 수 없기 때문이다. 눈이 본 것이 아니라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마음은 자성이 없기 때문이다.
마음이 자성이 없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이 스스로의 성품[自性]도 없고, 다른 성품[他性]도 없다.
자타 두 종의 차별이 없기 때문에 곧 일체법의 자성이 상응한다.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으며, 모이는 것도 없고 흩어지는 것도 없으며, 지혜도 아니고 어리석음도 아니다.
조그마한 법도 있지 않아, 드러내 보이는 것도 없으며, 비추어 도달할 것도 있지 않다.
[무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그 각각의 보리종자와 그 각각의 모습을 드러내어 헤아리기 위한 까닭이다.
만약에 그 각각의 모습에서 능히 무아(無我)를 관한다면, 보리의 종자 또한 생하는 바가 없다.
모든 보살마하살은 자성이 진실하여 훌륭한 방편으로써 세간에 출현하여, 큰 자비의 마음을 일으켜 증험한 바가 있음을 보이지만,
모든 보살의 자성은 진실로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식의 법[識法]은 의혹을 멀리 떠나, 조그마한 법이라도 생기할 것이 없다.
‘나’와 ‘나의 것’은 공하며, 모습이 드러나 알고 나타내 보이는 것이 없다.
식의 모습[識相]은 광명이며 자성이 없다.
그러나 광명의 성품, 그것은 성품이 스스로 항상 하는 것이므로 ‘나’의 모습의 성품은 광명이 없다.
광명이 없는 가운데 어떻게 광명의 모습이 있다고 설하는가?
모든 광명이 능히 어둠을 깨뜨리는 것과 같다.
그러나 어둠과 밝음은 가까이 하지도 않고, 합하지도 않는다.
가까이 하지 않기 때문에 밝음이 어떻게 능히 깨뜨리며, 합해지지 않기 때문에 어둠이 어떻게 깨뜨려지는가?
만일 밝음과 어둠이 서로 멀리하면 또한 모두 얻는 것이 없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밝음이 능히 어둠을 깨뜨리는 것은 상즉(相卽)하는 것도 아니고 상리(相離)하는 것도 아니다.
그 가운데에서 결정코 실로 분별할 수가 없다.
어둠이 비록 깨뜨려짐이 있을지라도 능히 깨뜨리는 법은 없다.
능히 깨뜨리는 법은 따로 분량(分量)이 없다. 왜냐하면, 깨뜨림은 머무름이 없다고 하기 때문이다.
이것으로 말미암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생하는 것이 있다. 연으로 생하기 때문이며 허깨비와 같이 이루어진다.
허깨비와 같은 법에서는 그 어리석음ㆍ어둠 등은 또한 번뇌가 아니다.
단지 지혜의 장애가 되어 헤아림이 없기 때문이며, 식의 분별을 떠난다.
또한 광명이 생기하는 것도 아니다.
이 두 가지 참된 성품은 모두 분별이 없다.
이 가운데 끝을 보아, 실로 얻음이 없다.
또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촉(觸)ㆍ작의(作意)ㆍ수(受)ㆍ상(想)ㆍ사(思)ㆍ욕(欲)ㆍ승해(勝解)ㆍ염(念)ㆍ정(定)ㆍ혜(慧) 이와 같은 것 등은 심소유법(心所有法)이다.
그것은 모두 이 보리의 모습이고, 그리하여 그 하나하나는 자성이 청정하다.
만약에 어떤 법이 보리의 모습이 아니라면, 자체의 이치가 상응하지 않는다.
마치 허공과 같이 자성이 청정하니, 그러므로 그 지혜의 성품 또한 그렇게 청정하다.
만일 ‘나’의 모습[我相]의 실로 있는 바가 없음을 안다면, 곧 그 식심(識心) 또한 다시 생함이 없다.
만일 식이 생함이 없다면, 모든 법은 마땅히 어떻게 있는가?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모두 진실로부터 생하는 것이며, 모든 법은 인연이 화합하여 곧 생한다.
비록 생한다고 할지라도 실체가 없어서, 있는 바가 없다.
모든 법은 허깨비와 같고, 식심도 허깨비와 같고, 연(緣)도 허깨비와 같다.
이와 같으므로 식은 연으로부터 생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지혜의 성품 또한 허깨비와 같아서 분별하는 것이 없으며, 헤아려 아는 것이 없다.
모든 법의 자상은 지혜로 알려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언설만 있을 뿐, 모두 상응하지 않는다.
이 가운데에서 만약에 능히 모든 분별을 떠난다면, 생하거나 멸하는 것을 모두 다 멀리 떠난다.
연(緣)하여 생함은 허깨비와 같고, 생한 것 또한 허깨비와 같다.
어떻게 허깨비와 같은 가운데 실로 생함이 있겠는가?
마땅히 알아야 한다.
식심 그것이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지혜 또한 허깨비와 같다.
지혜가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아는 바도 또한 허깨비와 같다.
지혜와 아는 바 모두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생하는 법 또한 그러하다.
생하는 법이 허깨비와 같기 때문에, 모든 법 또한 그러하다.
마치 사람이 허깨비로 지어진 모양을 보는 것과 같다.
[무아의 모습]
그와 같이 생한 것은 곧 세 가지 현상이 있다.
세간의 모든 행 또한 이와 같다.
그와 같이 생한 것은 역시 세 가지 현상이 있다.
만일 이 마음에서 보는 것이 있다면 곧 언설과 짓는 일이 있다.
만일 마음 없이 헤아린다면, 곧 사랑하는 대상이 없다.
마음이 없고 사랑이 없다면 법이 어떻게 있겠는가?
만약에 나의 모습[我相]이 있고, 나의 것[我所]이 있다면, 봄[見]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나와 나의 것이 없다면, 어떻게 봄이 있겠는가?
그 보리의 모습 또한 어떻게 증명하겠는가?
이 무아의 모습[無我相]은 이와 같이 알아야 한다.
모든 허깨비의 법[幻法]은 있는 바가 없다.
허깨비와 같이 나타난 것을 설하여 ‘있다’고 한 것이다.
‘있다’는 성품[有性]과 ‘없다’는 성품[無性] 그것은 자성의 성품이다. 이 성품은 집착 없이 모든 곳에 나타난다.
만일 법이 ‘있다’면, ‘없음’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이 ‘있음’ 또한 현전하지만 체[體]가 없다.
만일 법이 ‘없다’면 곧 ‘있음’과는 상응하지 않는다. 이 ‘없음’ 또한 현전하지만 실[實]이 있다.
그러므로 생함이 없고 또한 거두어 갈무리함이 없다.
이로 말미암아 마땅히 알아야 한다.
만일 법이 ‘있다’고 말하면 이와 같은 것은 ‘있음’이 아니다.
만일 이와 같은 ‘있음’이 아니라면, 곧 ‘없음’에 상응한다.
이 가운데에서 ‘있다’라고 말한 것은 결정하여 기록할 수 없다.
[법계의 성품]
법계의 자성은 마땅히 이와 같이 설해야 한다.
만약에 모든 색법이 실유(實有)하는 체라면, 제일의(第一義)에서는 그러나 있는 바가 없다.
그러므로 이 가운데 모든 지어진 현상[事]은 모두 허깨비와 변화신[幻化]으로부터 분별하여 일으킨 것이기 때문이다.
법이 성품이 있거나 법이 성품이 없는 것은 본래 스스로 이와 같다.
성품이 있는 것이 아니거나 성품이 없는 것이 아니거나 또한 이와 같다.
성품이 있음과 성품이 없음을 자성이 상응한다.
성품과 성품이 없음은 마음의 분별의 아니다.
만약에 언설로 설한다면, 모든 법은 하나하나 자성이 없다.
만일 언설로 설한다면, 모든 법은 다르고, 다름의 자성이 없다.
모든 법 가운데 자성의 성품은 없어서 얻을 수 없다고 설한다.
모든 부처님은 삼세에 따라서 전전하며 널리 세간의 일체 중생에게 모두 해탈을 얻게 하지만, 모든 부처님의 계[界]는 증장(增長)의 인(因)이 없으며, 그것은 또한 증장의 성품이 없다.
진실한 성품 가운데 모든 부처님께서 항상 계신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네 가지 종류로 분별한다.
이른바 있다거나 없다거나 둘이거나 둘이 아닌 것이다.
세간은 허깨비와 같고, 마음 또한 허깨비와 같아서, 어떻게 설함이 없는데, 설한 바가 있겠는가?
모든 법은 공하여서 모든 집착하는 것을 떠나고, 그 진여의 성품은 떠나지 않는다.
여기에서 희론(戱論)으로 분별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뜻으로 말미암아 모든 법은 성품이 없다고 이와 같이 설해야 한다.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부처님의 정등정각(正等正覺)은 성품도 아니고, 성품 없음도 아니다. 성품과 성품 없음 모두에 집착을 떠났기 때문이다.
이것은, 즉 공도 아니고, 또한 공 아님도 아니다. 공과 있음의 중간에 또한 세울 수 없다.
그러므로 모든 법은 생함도 없고, 성품도 없다.
생함도 없고 성품도 없기 때문에 모든 유(有)의 모습에 따라서 곳곳에 나타내 보인다.
그러나 그 모습의 뜻은 집착하여 얻을 것이 없으며 실로 취할 성품이 없다.
이것이 곧 진실이다.
모든 법은 생함이 없으며 또한 멸함이 없다.
그 모든 법은 모두 동일한 모습이다.
이 중에는 이와 같이 동일한 모습이기 때문에, 곧 모든 법은 더러움도 없고 깨끗함도 없다.
만일 모든 법이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면, 마땅히 모두가 번뇌의 종자로부터 허망하게 생기한 것임을 알아야 한다.
만일 모든 법이 생함이 없다고 설한다면, 그것은 단견(斷見)을 더하는 말이라고 한다.
만일 모든 법이 멸함이 없다고 설한다면, 그것은 상견(常見)을 더하는 말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은 언설을 떠난 것으로, 생한다고도 할 수 없고, 멸한다고도 할 수 없다.
일체법 중에 생하거나 멸하는 것은 실로 조그마한 법도 얻을 것이 없다.
만일 능히 그 두 종류의 더하는 말을 떠난다면, 곧 일체의 법은 단절함도 아니고 항상함도 아니다.
성품이 있음과 성품이 없음의 성품은 스스로 진실하여, 이 가운데 조그마한 법도 모습을 얻을 수가 없다.
하나의 현상이 실로 전전할 수 있는 것은 없다.
모든 법이 비록 생겨나도 실제 존재는 없는 것이고, 이 가운데 또한 다시 실제 경계도 없는 것이니, 지혜는 허공과 같이, 모든 유(有)의 모습을 떠난다.
지혜와 허공은 모두 다 평등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