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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개정행소집경 제4권
무슨 까닭으로 ‘기타림(祇陀林)’이라고 이름하였는가?
옛날 승군왕(勝軍王)이 그 이웃나라와 싸워 이겼는데, 그때 마침 태자가 탄생하였기에 전승(戰勝)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숲이 그 태자의 소유가 되었으므로 기타림이라고 불렀다.
부귀와 자재(自在)가 한량없이 장엄되어 모든 백성들이 보고 즐거워하였으며, 이 숲속에 사람들의 재물로써 널리 경영하고 다스리고 수호하여 즐거이 노닐 수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그 숲은 빽빽하고 울창하였으며, 가지와 잎이 무성하여 시원한 그늘이 널리 퍼져 있어서 모든 뜨거운 햇빛을 가려주어 여름에는 매우 청량하였고 겨울에는 매서운 바람이 없었다.
비가 내려도 진흙탕이 없었으며, 기이한 꽃이 내는 향내가 주위에 두루 넓게 퍼져 있었고, 굽은 가지가 누워 있는 모양이 마치 우산과 같았다.
경위(警衛)들이 많아서 도둑들이 있다는 소식을 듣지 못했으며 그 땅은 맑고 수승하여 환희원(歡喜園)과 같았다.
무슨 까닭으로 ‘급고독(給孤獨)’이라고 이름하였는가?
의지할 곳 없는 이들에게 음식을 나눠 주고 두루 공급하는 까닭이다.
비나야장(毘奈耶藏) 가운데 자세히 그 일을 밝힌 것과 같다.
그 장자(長者)는 지난 세상 선근의 힘으로 말미암아 세존께 공양과 공경을 청하고자 하여, 먼저 여래께 정사(精舍)를 만들어 드렸다.
곧, 백천 구지(百千俱胝) 황금의 가치가 있는 태자의 땅을 사서 마침내 그 뜻을 이루었다.
그리하여 사방으로 갖가지 기교(奇巧)한 기술을 가진 자를 불러 모아 최상의 궁전과 누각을 만들었는데, 문ㆍ들창ㆍ흐르는 샘ㆍ목욕할 수 있는 연못 및 갖가지 장엄을 모두 다 갖추었고, 높고 준엄한 담장으로 주위를 둘러쌓았다.
이에 장자가 왕사성으로 가서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배하고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지금 부처님께 사위성으로 가실 것을 청하옵니다. 오직 여래의 대자비로 허락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그곳에 있는 가람(伽藍)은 광대하고 청정하여 모든 제자와 함께 와서 편안히 머무실 수 있습니다.”
장자가 이렇게 말씀드리고 돌아간 뒤에,
왕사성의 선적(善寂)이라는 한 장자가 세존께 이렇게 말씀드렸다.
“모름지기 그곳으로 가지 마소서.
제가 마땅히 부처님을 위하여 정사를 만들어 세우겠으니, 부처님께서는 그곳에 머무십시오.”
마침내 부처님께서 저 사위성에 이르시니, 장자는 자기가 만든 가람을 여래께 받들어 보시하였다.
그러자 부처님께서는 그를 측은히 여겨 곧 받으시고 나아가 그 지방의 여러 곳을 칭찬하셨다.
“최상의 길상이며 제일 안온(安隱)하여, 과거의 모든 부처님도 이 땅에서 모든 중생들을 이롭게 하고 안락하게 하였다.
너는 이전의 부처님께 오랫동안 덕의 근본을 심었는데, 옛날의 원력(願力)으로 말미암아 지금 다시 이와 같이 하는구나.”
그때 외도가 있었는데, 이름을 마다즉치나(摩多喞致那)라고 하였다. 그는 풀로 만든 암자에 살면서 고행(苦行)을 닦고 익혔는데, 세간의 모든 중생들의 지혜를 말하고 논함에 두루 통달하였다. 그가
“기타림은 으뜸가게 뛰어나고 미묘한 곳이며 모든 사치가 극에 달한 곳인데, 어찌 부처님과 비구들이 얻어 수용하는가?”라고 하였다.
부처님께서 이것을 아시고 대방편으로 저 같은 무리들을 가엾이 여기시어 말씀하시기를,
“나의 모든 제자들은 고제(苦際)가 다하고 출세간의 경장ㆍ율장ㆍ논장에 잘 통달하여 번뇌를 끊은 까닭이다”라고 하셨다.
이에 세존께서 저 외도를 위하여 가타를 설하셨다.
너희들이 비록 큰 용과 같다고 하나
오히려 탐욕에 물들었으며
칭찬과 비방의 두 가지에 있어서는
곧 그것에 동요되는 바가 되었다.
몸에 만약 많은 상처가 있으면
파리가 뒤따라 다니는 것과 같이
3유(有) 속을 순환하는 것이
마치 벌레가 똥 무더기 속에 사는 것과 같다.
그러자 그 외도가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서 마음으로 깨달아 게송으로 부처님을 찬미하였다.
여래께서 세간에 나시어
지혜의 해[日]로써 모든 암흑을 깨뜨리시네.
이에 나의 미약하고 열등한 지혜는
무엇으로 말미암아 깨닫겠는가?
설령 다겁(多劫) 동안에
다시 백천(百千)의 혀로
부처님의 공덕을 칭찬한다 해도
조금도 다할 수 없어라.
부처님께서는 하늘 가운데 신선이 되어
중생의 모든 행을 아시고
4위의(威儀) 가운데
오직 중생[含識]을 이롭고 즐겁게 하는구나.
그때 사위성에는 많은 외도와 바라문과 총명하고 지혜로운 자들이 있었는데, 부처님께서 이곳에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앞 다투어 와서 힐난하였다.
그러자 여래께서는 방편으로 마땅함을 따라 설법하셨는데, 마치 사자가 포효하여 여러 짐승들을 겁주는 것처럼 모든 이들로 하여금 밝게 깨닫고 모든 어리석음과 어둠을 여의게 하였다.
그 중에 어떤 지혜로운 자가 있었는데, 이름을 라호라(羅護羅)라고 하였다.
그는 부처님의 덕을 찬미하는 것을 듣고서 게송으로 말하였다.
대비무상존(大悲無上尊)께서는
오로지 남을 이롭게 하는 행만을 닦고
세상의 명문(名聞)을 구하거나
재산을 증장(增長)시키지 않으셨네.
처음 왕궁으로 내려와 태어나셔서
사방으로 둘러보시고는
미소를 지으며 사유하시어
모든 군유(群有)를 제도하셨네.
이때 또 묘비동자(妙臂童子)가 있었는데, 역시 가타를 설하며 부처님을 찬미하였다.
모니존 대선(牟尼尊大僊)께서는
모든 법의 요체를 잘 설하시어
희망이 없는 것을 여의고 넘어서서
듣는 이들이 모두 이익을 입었습니다.
모든 하늘과 세상의 사람들이
모두 다 함께 공양 공경하고
십력존(十力尊)께 귀명하며
오직 섭수(攝受)되기를 서원합니다.
이 기타림과 급고독원은 다섯 가지의 인(因)으로 말미암아 모두가 애락(愛樂)을 일으키는데,
첫째는 넓게 성(城)의 중앙에 위치한 것이고,
둘째는 비구가 걸식하기에 멀지 않은 것이며,
셋째는 그윽하고 고요하여 모든 시끄러움을 여읜 것이며,
넷째는 청결하여 온갖 모기와 등에가 없는 것이고,
다섯째는 착한 사람들이 그 가운데 많이 노닌다는 것이다.
이러한 까닭에 세존께서는 매우 즐거워하시며 이곳에 머무셨는데,
여실지(如實智)로써 머무시어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는 행(行)을 여의셨으며,
일체의 공덕으로 의지하고 현현하여 10력(力)을 구족하셨으며,
복지(福智)로 장엄하여 저 세간의 제일 도사(導師)가 되신 까닭에 능히 중생의 선근을 성숙시키셨으니,
마치 연꽃이 진흙탕에서 나는 것과 같이 자기의 이익과 다른 이의 이익이 모두 원만한 까닭이다.
이때에 승군왕이 모든 백성과 모든 외도와 바라문들과 함께 다 기원정사(祇園精舍)에 왔다.
그리하여 합장하고 지극한 마음으로 부처님의 발에 이마를 대어 예배하였다.
그러자 불세존께서 모든 유정을 가엾이 여기셔서 두루 거두신 까닭에 모든 이견(異見)을 깨뜨리고 신해(信解)를 내게 하셨다.
불선인(不善因)으로 말미암아 5취(趣)로 치달아 흐르니, 마땅히 정법(正法)에 의지하여 생사에서 벗어남[出離]을 구하도록 그들을 위하여 6념(念)의 법을 잘 설하셨다.
“선남자야, 나의 법 가운데 가르침을 믿어 받아서 여러 바른 견해를 모두 갖추어야 하니, 이를 염불(念佛)이라고 한다.
만약 즐거이 바른 법을 널리 들으며 이치대로 사유하면 이를 염법(念法)이라고 한다.
모든 비구에 대해서는 마땅히 선지식이라는 생각을 내어 존중해야 하니, 이것을 염승(念僧)이라고 한다.
모든 선법(善法)을 사랑하고 즐기며 받아서 거두어들이고 위의를 갖추어야 하니, 이것을 염계(念戒)라고 한다.
항상 부처님과 스님들께 음식을 보시하며, 이와 같은 인(因)에 머물러야 하니, 이것을 염시(念施)라고 한다.
항상 즐거이 모든 대보살들을 예경(禮敬)하고 부처님의 칙령을 잘 따라야 하나니, 이것을 염현성(念賢聖)이라고 한다.”
만약 모든 중생이 부처님의 설법에 의지하여 정사유(正思惟)에 머무르면 의혹을 제거하게 되고, 정념(正念)에 의지하면 산란함이 없어진다. 이를 6념(念)이라고 하니, 모든 선(善)을 자라나게 한다.
무슨 까닭으로 ‘비구’라고 이름하는가?
능히 영원히 모든 번뇌를 끊는 까닭이다.
세간의 모든 태어남의 괴로움, 늙음의 괴로움, 병듦의 괴로움, 죽음의 괴로움, 근심과 슬픔과 괴로움과 번뇌[憂悲苦惱], 5취온(趣蘊)의 괴로움, 구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괴로움,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 증오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 등 이와 같은 모든 고통이 다 사라져 없어져 버리는 까닭이다.
이는 세간의 5취온이 괴로움임을 밝혀서 이와 같은 설법을 하신 것이다.
어떠한 뜻으로 ‘태어남’이라고 이름하는가?
세존께서 설법하신 바와 같이 저 유정들은 갖가지 행을 지어 명근(命根) 및 온(蘊)ㆍ처(處)ㆍ계(界) 등을 불러 감응하고 전전상속하여 5근(根)이 발생한다.
5근이 생겨난 까닭에 중동분(衆同分)이 생겨나며, 이것이 불어남으로 말미암아 형색(形色)이 원만하게 되니,
이것을 이름하여 ‘태어남’이라고 한다.
어떠한 뜻으로 ‘늙음’이라고 이름하는가?
세존께서 설법하신 바와 같이 행온(行蘊)이 옮겨가고 무너지며, 모든 근(根)이 쇠약해져서 몸의 형태가 굽어지고 살갗이 말라가고 피부가 늘어나 주름이 생기고 검은 점과 사마귀 점이 많이 생기고, 행동거지가 굼뜨고 느리며 다닐 때는 지팡이에 의지해야 하며 피로함을 감당할 수 없어 다른 사람의 도움을 빌린다.
이와 같은 ‘늙음’의 상에 두 가지가 있는데,
첫째는 다른 사람이 시중드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이고,
둘째는 의지하고 믿을 데가 없는 것이니,
이를 이름하여 ‘늙음’이라고 한다.
어떠한 뜻으로 ‘병듦’이라고 하는가?
세존께서 설법하신 바와 같이 4대(大)의 증감으로 계(界)가 고르지 않으니, 마치 독사와 같이 온갖 고뇌(苦惱)를 일으킨다.
이에는 두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안에서 병이 일어나는 것이고,
둘째는 외연(外緣)으로 해를 입는 것이다.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업보가 초래하는 것이며,
둘째는 횡난(橫難)으로 침손되는 것이며,
셋째는 남의 저주를 받는 것이다.
자세하게 분변하면 무수한 종류가 있으니 중풍ㆍ가래ㆍ옴ㆍ문둥병ㆍ악창ㆍ기침ㆍ설사ㆍ열독ㆍ파리하고 수척해지며 몸이 쑤시고 아픈 것 등을 일러 ‘병듦’이라고 이름한다.
어떠한 뜻으로 ‘죽음’이라고 하는가?
세존께서 설법하신 바와 같이 이른바 저 유정들이 중동분(衆同分:중생의 공통성질)을 버리고 모든 온(蘊)이 어지럽게 흩어지고 온기가 점점 미약해지며 명근(命根)이 단멸되는 것이다.
이에는 두 종류가 있는데,
첫째는 자진(自盡)이며, 둘째는 왕예(往詣)이다.
처음의 것에 다시 세 가지가 있으니
명근은 비록 다하였지만 그 복이 다하지 않은 것,
그 복은 다하였지만 그 명이 다하지 않은 것,
명과 복이 함께 다한 것이다.
두 번째의 왕예에도 세 가지가 있으니
첫째는 자왕(自往)이며, 둘째는 타예(他詣)이며, 셋째는 자타상우(自他相遇)이다.
다시 세 종류가 있으니,
첫째는 게으름이고, 둘째는 계를 허무는 것이며, 셋째는 과보가 다한 것이다.
게으름으로 말미암아 그 혜명(慧命)이 끊어지고,
계를 허묾으로 말미암아 모든 위의가 깨지며,
과보가 다함으로 말미암아 내외(內外)의 권속이 둘러싸고 슬퍼하니 연민으로 버리고 갈 수 없다.
이것을 이름하여 ‘죽음’이라고 한다.
어떠한 뜻으로 ‘근심[憂]’이라고 하는가?
마음속으로 서러워지고 비탄함이 마치 불에 핍박당하는 것과 같고 또한 이글거리는 태양에 구워지는 것과 같고 물이 끓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근심’이라고 한다.
어떠한 뜻으로 ‘슬픔[悲]’이라고 하는가?
눈물이 흘러내려 목이 메어 말을 하기가 어려운 것이니,
마치 효자가 자애로운 아비와 다른 친속을 추모하는 것과 같다.
모든 것이 다 그러하여 마음이 고요하게 가라앉지 않으니,
이것을 ‘슬픔’이라고 한다.
어떠한 뜻으로 ‘괴로움[苦]’이라고 하는가?
자르고 찔러서 극심한 고통을 받아 즐거움과는 서로 다르며 5식신(識身)과 함께 상응하여 영납(領納)하니,
이것을 ‘괴로움’이라고 한다.
어떠한 것을 ‘번뇌[惱]’라고 부르는가?
비유하건대 마른 나무가 불길에 타오르는 것과 같이 저 유정으로 하여금 번민하고 탄식하고 불안해하며 마음이 어지럽고 의식신(意識身)과 함께 상응하여 영납(領納)하니,
이것을 ‘번뇌’라고 한다.
어떠한 것을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괴로움’이라고 부르는가?
이른바 구하는 것에 상응하는 모든 일에 있어 미처 뜻대로 얻지 못하여 마음으로 매우 피로함을 내는 것이니, 마
치 도공[陶家]의 물레와 같이 이 마음이 따라서 구르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사랑하는 이와 헤어지는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즐거운 경계와 상응하는 권속(眷屬)에 있어서 모든 색상(色相)이 찰나에 변하는 것이다.
어떠한 것을 ‘증오하는 이와 만나는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이른바 일체 상응하지 않는 사람에게 서로 혐오하는 마음을 내지만, 도리어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설한 ‘태어남’ 등의 차례는 점점 구르며 서로 추구하여 모두 열뇌(熱惱)가 되니, 마치 광야의 사슴이 타오르는 불에 갇히면 능히 스스로 탈출하지 못하여 끝내 불에 타고 마는 것과 같다.
오직 여래께서 처음 내려와 탄생하실 때 선법을 증장시키고 적정하고 안온하여 체성(體性)이 자연스러워지고 모든 열뇌를 여의는 것만은 제외하니, 계경의 게송에서 이르는 바와 같다.
모든 부처님께서 세상에 나투신 즐거움이여
바른 법을 연설하시는 즐거움이여
대중승가가 화합하는 즐거움이여
모든 선행을 닦게 하네.
만약 부처님께서 세상에 출흥하지 않으셨다면
삼계(三界)에 어찌 즐거움이 있겠는가?
부처님께서 출현하신 까닭에
우리들은 안락을 얻었도다.
모든 유정은 선하지 않은 씨앗이 그 인(因)이 됨으로 말미암아 괴로움의 나무라는 경계가 능히 생장하여 항상 3독(毒)의 괴로움이라는 불에 타게 된다.
저 세간의 부귀와 즐거움과 같은 일에서 다만 다른 이야기만을 들으니, 무엇으로 말미암아 알 수 있겠는가?
광야의 험난한 나쁜 길과 모래와 자갈과 가시밭길을 내달려가며, 모든 고생을 받아서 스스로가 구제되기를 빌지만 귀의하여 나아갈 곳이 없다.
이와 같이 유정들은 지난 세상의 선의 근본이 부족하여 악도(惡道)에 깊이 빠져서 윤회하며 전전하는 것이 다함이 없는 것이다.
마치 배우가 그 형색을 바꾸는 것과 같으니, 설령 사람으로 태어난다고 해도 빈궁한 집에 태어나고 어머니의 태속에서도 갖가지 고통을 받는다.
왜 유정이 태장(胎藏)에 처하여 온갖 고뇌를 받는다고 하는가?
세존께서 설법하신 바와 같이, 처음에 태어남의 인연이 맺어질 때에 그 부모의 붉고 횐 두 물질의 부정(不淨)을 연(緣)으로 하여 점차 증장하여 그 형질(形質)을 이루며, 생장(生藏)의 아래와 숙장(熟藏)의 위에 머무는데, 처하는 그 중간은 매우 악취가 풍기고 더럽다.
어머니가 포식하거나 굶주리거나 갈증 날 때 몸의 사지가 움직이고 굴러서 염욕(染欲)의 일에 모두 그 고통을 받는다.
또 출산하려 할 때에는 어머니의 태속에 머무는 것이 즐겁지 않으며, 깨끗하지 못한 생각을 일으켜 생문(生門)을 향해 나아간다. 두 손이 잠시 태아의 몸 부분에 닿아도 커다란 고초를 받으며 극심한 열뇌를 거듭한다.
저 처음 태어난 자식은 기갈(飢渴)로 말미암아 소리 내어 울고 어머니를 향해 젖을 구하는데, 젖은 또 피가 바뀌어 만들어진 것으로서 먹어도 충분치 못하여 그 열뇌를 받는다.
차츰 영아(孾兒)가 되어 누운 채로 똥오줌을 싸며, 어떤 때는 재롱을 피우지만 도랑에 떨어지기도 하는데 이것을 태어난 이후에 받는 열뇌라고 이름하니, 다른 세간의 사람들 역시 모두 이와 같다.
또 저 유정은 나이가 점점 장대해질수록 색력(色力)이 충만해져서 교만하고 방자하고 방일하여 생각마다 오욕진경(五欲塵境)을 추구하고, 염혜(染慧)로 말미암아 탐닉하고 집착하며 버리지 않으며, 스스로를 정(情)에 맡기다가 어느덧 죽음에 이른다.
무엇을 늙고 쇠함의 모든 괴로움이라고 하는가?
형색이 파리해지고 얼굴의 뺨이 움푹 패고 어그러지며 치아가 듬성듬성해지고, 머리털이 세고 빠지며 목과 팔ㆍ가슴ㆍ어깨의 뼈가 모두 드러나고 따뜻한 기운이 점점 미악해지며 음식이 점점 줄어든다.
마치 하늘을 나는 새가 새장 안에 갇히면 나날이 점점 야위고 수척해서 오로지 터럭만이 쌓이는 것과 같다.
아침에 한 일을 저녁에는 곧 그만두고 잊어버린다. 처음에 베풀고자 하지만 후에는 나태해지고 물러서게 되며, 말하는 것이 마치 어린아이와 같아서 기약할 수가 없고, 혹은 때때로 종일토록 입으로 말을 하려 하지 않는다.
밤낮으로 오직 잠자는 데만 열중하나, 잠을 자고 싶어도 잠을 이루지 못한다.
수시로 헐떡이고 기침을 하며 아픈 곳을 말하고자 하나 말이 분명하지 않다.
마치 멀리 떠나온 사람이 오랫동안 머무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것처럼, 그가 하는 모든 일은 뜻대로 하기가 어려워진다.
조금이라도 마음에 맞지 않으면 곧 슬퍼하고 괴로워하며, 친한 친구가 위로하고 깨우쳐주면 마땅하게 여기고 스스로 편안하게 생각한다.
눈으로 경계(境界)를 봐도 능히 수용할 수 없으며 모든 쾌락의 일은 다만 귀로 듣는 이야기일 뿐, 뜻은 놀러 다니고 싶어도 발이 능히 움직여주지 않는다.
오직 안석[几: 앉을 때에 몸을 기대는 기구]과 지팡이를 빌어서 그 동반자로 삼게 되며 여인들의 비웃음을 사게 된다.
때문에 옛날에는 모든 근(根)이 건강하여 온갖 욕락(欲樂)을 수용하였으나 찰나에 변하고 무너지게 되었다고 생각하며, 깊이 스스로 후회하고 괴로워하기를,
‘오래 살아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니,
이것을 늙고 쇠한 것의 열뇌행상(熱惱行相)이라고 한다.
무엇을 병듦의 괴로움이 갖는 열뇌라고 하는가?
이른바 모든 어리석은 성년의 건장한 이들이 방일하고 욕심에 집착하다가 점점 겁약해지며 병고(病苦)와 질병에 얽혀서 온갖 고통이 눈앞에 나타난다.
착한 사람들이 그것을 보고 깊이 연민을 내어 좋은 말로 가르치고 이끌어 그들로 하여금 발로참회하게 하지만 그 말을 듣고 나서는 걱정하고 두려워하며 악도에 빠질 것을 두려워한다.
단정한 외모도 병으로 무너지며 아주 훌륭한 음식도 먹을 수 없게 되며, 비록 부귀(富貴)에 처해 있어도 빈궁한 사람과 같다.
세상에 지혜로운 이가 있어 항상 스스로를 성찰하니 병의 괴로움은 사랑하고 즐길 만한 것이 아님을 마땅히 알라.
마치 우박이 어린 벼를 상하게 하는 것과 같이 갑자기 그 영화롭고 성대함이 손상되며,
마치 뭍에 오른 거북이 항상 물을 생각하는 것과 같고,
마치 밝은 낮에는 달이 그 빛을 잃은 것과 같으며,
갈증에 핍박받는 사람이 마른 우물에 떨어지는 것과 같으며,
기름이 다하면 등불이 오래 지속될 수 없음과 같으며,
썩은 담장은 견고한 감옥이 될 수 없는 것과 같으며,
어리석은 아이가 남들에게 업신여김을 받는 것과 같으며,
저 미친 코끼리가 연꽃이 핀 연못을 짓밟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일러 병듦의 괴로움이 갖는 열뇌라고 한다.
어리석은 이들은 어떤가?
수도 없이 탐닉하고 집착하여 수명이 줄어들고, 선근을 불태워버려 무명(無明)에 덮이게 되어 사악하게 생활하고 사악하게 구하며 저 세간의 음식과 의복을 탐한다.
몸과 마음의 번뇌가 정지(正智)를 파괴하고, 적정한 산림(山林)에 의지하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는다. 대승경전을 수지 독송하고도 능히 견고하게 청정한 계(戒)를 지키고 보호하지 못한다.
어떻게 해야 깨달음의 언덕으로 나아갈 수 있을까?
만약 마음이 적정해져 탐욕의 경계를 버리거나,
혹은 먼저 지은 모든 방일한 행을 모두 다 싫증내고 다시는 생각조차 않기를 마치 더할 수 없는 원수를 마음으로 보고 싶어 하지 않는 것처럼 하고,
사탕수수의 찌꺼기로는 다시 맛을 낼 수 없는 것처럼 하고,
불타버린 마른 나무처럼 남김없이 완전히 없앤다면,
이와 같이 깨달은 사람은 염마라왕(琰摩羅王)의 핍박을 받지 않는다.
또 모든 여인은 온갖 것에 탐하고 심술궂으며 원망하고 시기하는 마음을 품고 즐겨 주재(主宰)하니,
마치 새는 병에 부정한 것을 담은 것과 같고
마치 암말의 음장(陰藏)은 매우 혐오스러운 것과 같고,
독약을 맛있는 반찬에 섞는 것과 같고,
원한으로 칼을 잡으면 주변을 살피지 않는 것과 같고,
저 불더미에 닿으면 열뇌를 일으키는 것과 같다.
만약 탐욕의 경계를 즐거워하면 마음은 곧 헷갈리고 어지러워져서 모든 범행(梵行)을 깨뜨려 마치 계(戒)가 없는 것과 같으니, 그 즐거움의 인(因)을 잘라버려야 한다.
혜명(慧命)을 상실하면 죽음의 군대가 앞에 나타나니 오직 혼자서 가야하며 저 험난한 곳으로 나아가도 능히 구할 자가 없으니, 모두 염욕(染欲)으로 말미암는다.
모든 망념(妄念)을 일으키고 제부끄러움[慚]과 남부끄러움[愧]이 없으며 지족행(知足行)을 버리면, 세간 사람들의 갖가지 비방을 사게 된다.
무엇을 죽음이라고 하는가?
게송에 있는 바와 같다.
지혜는 가장 수승한 눈이고
어리석음은 가장 무거운 어둠이다.
병은 반드시 그 원한에서 말미암으며
죽음은 제일의 두려움이라 불린다.
마땅히 뜻으로 정법(正法)을 즐거워하고
지혜로 수행을 잘 하면
이러한 까닭에 목숨을 마칠 때
결단코 험난함을 여의게 된다.
이를 일러 죽음이 지닌 열뇌라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