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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승장진론 하권
[무위의 뜻: 허공ㆍ택멸ㆍ비택멸ㆍ진여성]
이와 같이 관행(觀行)을 닦은 자는 총괄적인 모습에 의해, 유위(有爲)의 속성이 공함을 깨닫지만 무위(無爲)의 속성이 공함은 미처 깨닫지 못한다.
무(無)를 드러내 깨달음을 나타내지 못하고 무분별의 지혜를 깨닫지 못하여 수행이 진전돼도 궁극적 깨달음을 얻지 못하기에 계속해서 말한다.
그러므로 무위는 실체로서 있지 않아 생기하지 않으니 마지 허공의 꽃과 같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여기서 간별하여 주장하는 것은 곧 최상승(最上勝)의 진성(眞性)이니, 뜻을 간별할 필요가 없다. 간별의 의미는 반드시 앞과 같이 알아야 한다.
진성에서 무위(無爲)가 공하다는 주장을 세우지만 세속에서는 아니다.
유위가 아닌 까닭에 무위라 이름한다. 유위와 반대되는 것이 곧 무위의 뜻이니, 곧 허공(虛空)ㆍ택멸(擇滅)ㆍ비택멸(非擇滅)ㆍ진여성(眞如性)이다.
이른바 앞서 제거한 법처(法處)에 속하는 것이다.
택멸(擇滅) 택(擇)은 지혜를 뜻함. 지혜로써 번뇌를 소멸시킨 열반의 상태. 비택멸(非擇滅) 택(擇)은 지혜를 뜻함. 따라서 지혜로써 소멸된 것이 아니라는 뜻. ① 지혜로써 소멸된 것이 아니라 생겨날 인연이 없어 번뇌가 생겨나지 않은 상태. ② 지혜와 관계없이 본디 청정한 있는 그대로의 모습. |
허공의 속성이 공함을 깨닫는 과정을 우선 나타내 보이겠다. 이해하기 쉽기 때문이니, 허공에만 질애(質礙)의 사물이 있지 않아, 세간에서는 모두 공하다는 말을 하기에 허공을 문(門)으로써 삼아 나머지 무위(無爲)의 공성(空性)을 깨닫게 한다.
즉, 세간이 아는 허공은 진성에서 공하여 실체로서 있지 않으니, 이것이 곧 주장명제이다.
진성(眞性)은 실재하지만 허공은 없다는 주장을 세운다.
두 주장을 모두 허용하여 ‘생기하지 않기 때문에’ 혹은 ‘가립(假立)에 의해서는 생기하지만 불생(不生)의 법이기 때문이다’라는 이유를 든다. ‘허공의 꽃’은 실체가 없고 또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동법의 비유를 세우려, 이품(異品)을 부정하면 부동법(不同法)의 비유가 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앞과 같이 알아야 한다.
어째서 여기서 비량을 건립하는 것인가?
이른바 진성에서 보면 허공에는 실체가 없다.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나 지혜 있는 자도 모든 생기하지 않는 것은 다 그 속성이 실체로서 없기에, 마치 허공의 꽃과 같다고 안다.
이 주장의 이유로 ‘생기하지 않기 때문에’라는 간략한 명상(名相)을 들고, 다시 또 다른 이유인 ‘작용의 대상이 없기 때문에’ ‘작용의 주체가 없기 때문에’ ‘괴멸이 없기 때문에’라는 그와 같은 이유로써 무위의 자성을 부정한다.
이 까닭으로 상응하는 대로 다 이유가 될 수 있다. 마치 ‘당신은 새가 가까이 오지 못하게 이 연유를 잘 지키시오’라는 명령을 받고 근접하지 못하게 지키며 고양이와 쥐 등을 금지시키는 것과 같다.
비바사(毘婆沙) 논사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비난을 한다.
“만약 무위에 실체가 없다는 주장을 한다면 이 주장은 옳지 않다.
공처(空處) 및 등지(等至)에는 곧 소연(所緣)이 없는데, 어떻게 있다는 말을 하는가? 그렇기에 장애가 없는 것이 곧 허공의 모습이 된다.”
이에 흑은 방편 때문에 비량(比量)을 세워 말한다.
“공처(空處)와 등지(等至)에는 실제로 소연(所緣)이 있다. 혹은 경계가 실체로서 존재하면 등지이기 때문이며, 이와 같이 등지는 소연의 경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그밖에 등지나 연(緣)처럼. 그밖에 등지나 저 소연은 유위이기 때문이다. 이미 속성이 공함을 변론하면 동법의 비유는 없다.
이것은 승의제에서 허공의 모습을 변론하는 것이다. 세속에서 허공을 세워도 실체로서는 존재하지 않고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 마치 허공의 꽃처럼. 이 비량(比量)에 의하여 세워진 ‘실체의 존재’는 있지 않다. 곧 내가 말한 이유 때문에, 그대가 말하는 ‘등지는 소연의 경계이기 때문이다’라는 이유는 결정상위(決定相違)의 과실이 생긴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세운 뜻은 성립한다. 장애가 없기 때문이다.”
우리 부파나 다른 부파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만약 ‘진에서 허공이 실체로서 없으니 생기하지 않기 때문이다’라는 이 말의 뜻에 준해 볼 때, 생기하는 것에는 다 실체가 있다.
만약 ‘생기해도 실체로서 있지 않다’는 말을 하면 이 이유는 동품(同品)에 편재하지 않아 이유의 속성을 못 이룬다.”
이것은 곧 뜻에 준한 것이며, 상사(相似)의 오류이고 불성의 오류와 비슷하다. 이것을 판정하여 ‘생기하지 않는 것은 다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을 할 수 있으나 ‘실체가 없는 것은 모두 다 생기하지 않는다’는 말은 못한다.
다시 ‘꾸준히 쉴 사이 없이 발생하는 것’은 동품(同品)에 편재하지 않고 또 원인을 허용하기에 이것에 오류는 없다.
다른 사람이 힐난하여 말한다.
“허공에는 속성이 있으니 세간 모두 알기 때문이다. 꽃에도 속성이 있으니, 올발라(嗢鉢羅) 등은 세간에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공과 꽃의 두 종류는 상응하지 않지만 속성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허공의 꽃’을 비유로 세우는 것은 성립하지 않는다.”
이 힐난은 옳지 않다.
이 허공의 꽃의 비유는 여섯 번째의 전의사훈석(轉依士訓釋)에 의해 보면, ‘공의 꽃’이기 때문에 ‘허공꽃’이라 이름한다. 이것은 이미 있는 것이 아니기에 비유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도리에 의해 관행을 닦는 자는 곧 바로 허공의 속성이 공함을 깨닫고, 택멸(擇滅) 등의 세 무위(無爲)의 속성이 공도리임을 깨달아야 한다.
비바사 논사가 택멸무위(擇滅無爲)를 부정하는 것을 듣고 참지 못하여 다시 이러한 힐난을 한다.
“부처님께서는 ‘택멸은 유위와 대치되기 때문에 출리(出離)라 이름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만약 ‘없다’는 비방을 말하면 그대들은 또다시 주장에 위배되는 과실이 생긴다.
또 세손께서는 ‘즐거움이나 욕심 등의 작용을 감수(感受)하는 것이 다 없어졌으면, 이를 이름하여 열반적정미묘(涅槃寂靜微妙)라 한다’는 말씀을 하셨는데 어째서 없다는 말을 하는가?”
세존께서는 화현된 유위의 경계에 관해 꾸준히 염리(厭離)를 닦아, 무위의 경계를 즐거워하지 않으셨기에, 세속의 입장에서 택멸ㆍ출리ㆍ열반적정미묘가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이다.
마치 부처님께서 ‘화생(化生)의 유정(有情)이 있다’는 말씀을 하신 것처럼, 무위열반(無爲涅槃)이 있다는 말도 그와 같다. 그 존재를 허용하기에 주장에 위배되는 오류는 없다. 다만 진성의 입장에서 택멸을 부정할 뿐이다.
그러므로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제 존재가 열반의 존재를 살펴 구한다면 우린 어리석은 그들을 외도의 제자라 말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 또한
‘여래께서는 생사 및 열반을 보지 않으셨다. 열반이란 여래께서 가립(假立)한 것이다. 여기서 모두 열반의 자성은 없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또 사성제를 비방하는 과실은 없다.
‘세제에서 존재의 애욕이나 괴로움은 궁극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출리ㆍ열반적정미묘에는 전도가 없다’는 말을 하셨기 때문이다.
승의제의 입장에서는 존재의 애욕이나 괴로움은 궁극적으로 발생하지 않아 본성이 적멸하니, 이를 멸성제라 이름한다’는 말을 하지 못한다. 이 성스런 가르침 및 말씀하신 이치로 인하여 ‘진성에서는 그러므로 택멸이 없다’는 말에는 과실이 없는 것이다.
옳지 못한 또 다른 정리론자가 다음과 같은 힐난을 한다.
“무위는 실체로서 없다는 주장을 하였는데, 무위가 이미 없으면 세우는 주장도 성립하지 못하며 의지하는 것도 성립하지 못한다.
허공의 꽃이란 없기 때문에 유법(有法)은 성립하지 못하며, 주장ㆍ이유ㆍ비유 모두에 다 과실이 있다.”
이 힐난은 옳지 않다.
인상[想]의 시설력(施設力)은 있으나 질량과 부피가 없는 사물을 허공이라 이름하고,
지혜의 택멸[簡擇]로 인하여 번뇌가 전혀 생기하지 않으면, 이를 비택멸(非擇滅)이라 하고,
또한 뭇 연(緣)이 없어 일체 법의 생기가 없는 것을 비택멸이라 이름한다.
일체 집착하는 바가 전혀 없는 것을 진여(眞如)라 이름한다.
인상의 시설력에 의해 가립을 용인하여, 허공 등은 그러므로 차별이 드러나지 않는다.
모두 힘을 용인하여, 총괄적으로 유법(有法)을 세운다.
차별을 부정하면 공지(共知)하는 것이 다 없게 되니, 이를 종법(宗法)으로써 세운다.
저 생기하지 않는 것 등을 공지하는 것이 인법(因法)이다.
이 까닭으로 주장과 이유에 오류가 있지 않다. 허공의 꽃은 사실 있지 않아도 이 불기(不起) 등의 법은 유법으로서 속설이 없는 것을 속성으로 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세우려는 목적과 내용이 성립하여 유법에는 불성의 오류가 없다.
비바사 논사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이 또한 옳지 않다.
택멸은 실체로서 있다. 도(道)에는 소연(所緣)이 있기 때문이며, 번뇌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실체가 없는 법에는 이 사실이 있을 수 없다.”
이 말은 오로지 이품(異品)만을 부정하고, 허공의 실유성(實有性)을 부정하기 때문이다.
앞에서 이미 논파하였으니 거듭 집착해서는 안 된다.
경량부의 논사들은 모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허공 등은 다 실체로서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하면, 이렇게 비량에는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가 생긴다.
만약 이 뜻이 질량과 부피가 있는 색 등이 무(無)를 실체로 삼는 것이라면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아니며, 그 무(無)를 변론하는 것이기 때문에
무위가 실체로서 없다는 주장은 실체의 존재성에 대한 집착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것이고
또한 부수적으로 실체의 비존재성에 대한 집착을 부정하는 것이 된다.”
동엽부(銅鐷部) 논사가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틈 사이의 물질들을 허공이라 이름한다. 자기주장에서는 허공은 유위라 주장하기 때문이니,
그대가 무위를 부정하면 이미 성립한 것을 다시 세우는 오류가 생긴다.”
유위의 자성은 앞서 부정한 것과 같은 오류가 생기기에 옳지 못하다.
비바사 논사와 독자부의 집착은 많은 부분이 같아 마땅히 그와 같이 논파해야 할 것이다.
상응(相應) 논사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승의보다 높은 승의는 없기에 진여는 일체법의 승의가 된다. 그러므로 승의의 입장에서 진여가 공하다는 말을 하면 이치라 할 수 있으나 진여에 실유(實有)가 없다는 말을 하면 이치라 해서는 안 된다.
왜 그런가?
출세간의 무분별지 및 후득청정세지(後得淸淨世智)가 무위(無爲)의 경계를 연하는 이것이 바른 이치인 것이다.”
진실한 이치가 마땅히 아니다.
세간의 지혜가 무위의 경계를 연하면 마땅히 바른 이치가 아니고, 이와 같이 지혜가 유위의 경계를 연해도 도리가 아니다.
진여가 실체에 집착하지 않으면 도리다. 이 실유성은 힐난을 이른다.
진여를 연하는 지혜는 진실한 출세간의 무분별지가 아니다. 소연(所緣)이 있기 때문이고, 또한 유위이기 때문이다. 세간을 연한 지혜와 같다.
그러므로 경전에서 말한다.
‘만수실리(曼殊室利)여, 지혜의 눈으로써 무엇을 보는가?’
답한다.
‘지혜의 눈에는 보이는 것이 없다.’
또한
‘무엇을 승의제라고 말하는가?’
답한다.
‘여기서 지혜도 오히려 작용하지 않는데 하물며 여러 명자(名字)랴.’
또한
‘범지(梵志)여, 여래의 보리는 능히 현관(現觀)하지 못한다.’”
계경에서 말한다.
“‘만수실리여, 무엇이 진리를 보는 것인가?’
답한다.
‘여기서는 법으로서 보고 기억하는 것은 없다.’”
이들의 여러 계경에서는 무분별지를 현관하는 것 및 진여를 연(緣)하는 것을 용인하지 않는다.
진여는 진실한 승의가 아니다. 진여에는 소연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색(色) 등과 같다.
또 그대는 “승의 위에 다시 승의는 없다”는 말을 한다.
이와 같은 말이 만약 그 위에 공이 없는 까닭으로 공이라 이름한다.
비단옷 위에 다시 비단 옷이 없는 것은 소나 양치는 사람 등도 공지(共知)한다. 그것도 마땅히 진리를 보는 자라고 이름해야 한다.
또 악견(惡見)들을 대치하기 위하여 이와 같이 공이라 한다. 승의 위에 다시 승의가 있다는 이러한 악견은 일찍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정하여 이와 같이 공하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또 그 진여는 실유성(實有性)이 아니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비량(比量)의 이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여래가 생사 및 열반을 보지 않는 것은 바르게 이해하고 알기에 전도를 일으키는 번뇌가 있지 않은 것이나, 본성은 궁극에는 무생(無生)을 자성으로 한다.
이와 같이 바른 지혜의 본성은 궁극에는 정지(正知)도 아니고, 부정지(不正知)도 아니다.
이 성스런 가르침에 의해, 진여만이 일체 분별의 영원한 사멸을 알기에 실유성이 아니며, 비유(非有)를 떠난 것도 아니기에, 진성진여를 변화의 형상으로 삼아 법신을 성취한다.
공을 관하여 대치도(對治道)를 얻고 일체 분별과 변계소집의 종자가 의지하는 이숙식(異熟識) 속에 있는 분별 등의 종자를 남김없이 영원히 단멸한다.
인연이 없기에 궁극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본성은 발생하지 않아 본성은 상주(常住)이다.
이것을 여래의 나투신 법신이라 이름한다.
여러 경에서 말하는 것과 같으니,
“만수실리여, 여래라는 것은 필경 본래부터 발생하는 것이 없는 말이다. 상주하여 발생하지 않는 법, 이것을 여래라 이름한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
만약 ‘진여가 언어를 떠났어도 이것이 실유다’라는 말을 하면 곧 외도가 자아를 명상(名想)으로 차별하여 진여라고 했던 것이 된다.
저 진여는 비록 실체로서 있으나 승의에서는 존재ㆍ비존재 등의 분별은 성립하지 않는다.
아자(我者) 역시 그와 같고 그 또한 자아를 계탁한 것이다.
진여는 곧 실유(實有)ㆍ주변(周遍)ㆍ상주(常住)로서 업을 짓는 자와 받는 자이며 분별을 떠난 것이다.
언어가 작용하는 곳이 없고, 분별 각혜(覺慧)를 연하지 않아 분별을 떠났다고 한다. 그 가르침 중에 ‘언설을 행하지 않고 심의(心意)를 증득하지 않는 것을 자아라고 말한다.
아상(我相)도 이미 그러하니, 그래서 ‘진여를 연한 지혜는 능히 해탈을 얻지만 자아를 연한 지혜는 해탈을 얻지 못한다’라는 말을 다시 하면 이것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가?
또한 언어는 없지만 실체로서의 속성은 있기 때문이니, 오로지 붕당에 집착하여 그와 같은 말을 하는 것뿐이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와 같이 비슷한 자아 및 진여의 실유(實有)ㆍ비존재[非有]를 믿을 수 없다.
다시 모든 존재에 관한 자세한 쟁론은 번쇄한 문장을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받아들여지기 어렵기 때문에 그만두겠다.
진실로 감로에 들어 이미 모두 분별하여 마쳤다.
[3계의 일체]
다시 동류의 승(乘)과 열등한 승이 있어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12처는 유위와 무위를 섭수되기에 반드시 자성이 있다. 고(苦) 등의 16성행(十六聖行)이 사성제(四聖諦)를 관하여 견수(見修)하고 두 방법을 정진 수습하여 잘 보고 닦아 일체의 삼계에 포함된 번뇌의 불꽃을 끊어 또한 삼계의 뭇 괴로움을 그치게 하기 때문이다.”
만약 모든 법의 성공(性空)을 열어 보이지 못하면 누가 장차 이와 같이 과실을 버리고 누가 다시 이와 같이 공덕을 잘 닦을 수 있는가?
삼승(三乘)에는 자량과 근성(根性)과 승해(勝解)의 차별이 있으나, 성도(聖道)를 현관하려면 마땅히 차별이 없어야 한다.
이와 같이 일체를 다 믿고, 번뇌장(煩惱障)을 제거하려 하기 때문에 세속의 이치에 의탁하여 방법을 차별하는 것이다.
만약 법무아성(法無我性)의 증득을 떠나 소지장(所知障)을 영원히 단절할 수 없다면 대사(大師)가 약간의 해탈을 이루어도 마땅히 해탈이라 말해서는 안 된다.
해탈에는 차별이 없는가?
실유라는 이 말은 모두 다 해탈번뇌장(解脫煩惱障)이기에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일체종(一切種)에서는 아니다. 비유하면 털구멍과 그 틈새 허공은 속성은 같아도 차별이 없지 않은 것과 같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승과(勝果)의 작용인 여의신통(如意神通)을 일으킬 수 없고, 증득한 것은 진실한 궁극적 경지는 아닌 것이 된다.
또한 부수적인 논의는 그만하고 정론(正論)을 변론해야 한다.
관행을 닦는 자는 이미 우리 주장이 허공(虛空) 등을 계탁하여 공함을 깨닫고, 또 다른 주장에 의해 분별된 자성 그대로 사대부(士大夫)ㆍ극미(極微)ㆍ자재(自在)ㆍ시간ㆍ방위 등의 말이 공함을 장차 깨닫는다.”
여기서 자성사부론자(自性士夫論者)는 이러한 힐난을 한다.
“우리 주장은 삼계(三界)의 일체는 모두 공화(空華)와 비슷하게 전변하니, 허공의 꽃은 없지 않은 것이다. 그것에 의래 동법의 비유를 이루어, 세운 주장과 상위되기 때문이다.”
지금 힐문하겠다.
그대는 삼계의 일체는 다 허공의 꽃처럼 전변한다는 말을 한다.
이와 같이 삼계는 곧 허공의 꽃인가, 허공의 꽃이 아닌가?
삼계(三界)가 다 허공의 꽃이라면 자기주장 및 공지(共知)와 위배되기 때문에 도리가 아니어야 마땅하다.
삼계가 곧 공화가 아니라면 이것은 곧 동법의 비유가 없어지게 되어, 그대의 본래 주장에 과실이 성립한다.
만약 과실이 없다면 ‘허공의 꽃은 없다. 소리는 삼계에 자성이 있기 때문이다’라는 말을 하고 다시 관찰해야 한다.
그대는 우리의 ‘허공의 꽃은 없다’는 말을 동법의 비유로 삼는가?
‘허공의 꽃’을 동법의 비유로 삼는가?
만약 그대는 우리의 ‘공화는 없다’라는 말을 이른바 동법의 비유로 삼는다면 이것은 잘못된 관찰이다. 우리는 ‘허공의 꽃’을 동법의 비유로 삼기 때문이다.
만약 ‘허공의 꽃’이 동법의 비유라면, 즉 삼계가 아닌 것이다. 마땅히 ‘삼계가 있기에 그 또한 있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 이 말은 그대 자신의 지혜가 경미함을 드러낸 것이다.
또 부정의 주체는 부정의 대상을 수승한 것으로 삼는다. 부정하는 내용을 부정하여 이미 공능이 바로 다 없어져서, 다시 차별을 부정하는 것을 표시할 수 없다.
이와 같은 힐난의 말은 앞에서 이미 다 해석하였기 때문에 지혜로운 사람이 마음으로 믿는 것은 아니다.
수론(數論) 논사는 다시 다음과 같은 말을 한다.
“우리는 친현(親現)으로써 최승의 사대부를 세울 수 없으나 공지(共知)로써 변이(變異) 취합(聚合)하여 방편을 세운다.
저 실체로서의 실유(實有)란 이른바 모든 현사(顯事)가 존재의 속성의 원인이 됨을 말한다. 종류이기 때문이다.
일체 존재의 종류는 다 존재의 속성을 원인으로 함을 볼 수 있다. 마치 향나무 조각 등과 같이, 현사는 이미 종류가 있기에 유성(有性)을 원인으로 한다. 이와 같이 현사에는 능히 받는 자가 있고, 받는 작용이 있기 때문이다.
모든 받는 작용마다 다 받는 자가 있음을 본다. 마치 바라문이 받는 음식처럼, 현사(顯事)는 이미 받는 작용을 하기 때문에 받는 자가 있다.
앞에서 말한 비량(比量)은 다시 적량(敵量)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것은 세속에서 만약 총상(摠相)으로써 현사(顯事)를 세워 유성(有性)을 원인으로 삼아 차별을 변론하지 않으면 다시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만약 현사를 세워 즐거움 등을 원인으로 세우면 곧 동법의 비유가 없어 이유도 역시 성립하지 않는다. 즐거움 등의 종류는 함께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만약 비량으로서 이유를 세워 ‘4온(蘊)은 다 괴로움ㆍ즐거움ㆍ어리석음의 속성이 되며, 이것은 5온의 속성이기 때문이다.
마치 수온(受蘊)처럼’이라고 말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며 수온에 섭수되지 알아 동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 그대의 ‘사대부’가 여러 체상(體相)에 편재하는 적취의 뜻이 있으면 곧, 온(蘊)의 뜻이다. 이것에 의해 사대부의 원인은 부정인을 이룬다.
또 그대의 ‘즐거움’ 등은 각각 의미가 달라 능히 낱낱의 주장을 세울 수 없으나, 이것이 온성(蘊性)이기 때문에, 이유명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승의에서 실체로서 향나무 조각이 있어 유성(有性)을 원인으로 한다면 모든 이가 용인하는 것이 아니기에 동법의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또 세속에서 만약 총상에 의해 모든 현사(顯事)에 ‘받는 자가 있다’는 주장을 세우고 차별을 변론하지 않는다면 다시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세간이 공지하는 젓이고, ‘받는 자’가 있기 때문이다.
만약 현사(顯事)에 실체로서 ‘받는 자’가 있고 상주(常住)하고 주변(周遍)하는 사(思)를 자성으로 세운다면 동법의 비유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체상(體相)은 모든 바라문이 허용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만약 승의에서 동법의 비유가 성립하지 않고, 받는 자와 음식 모두 실유성이라면 모두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앞에서 말한 비량은 인식수단과 위배됨이 있지 않다.
승론자(勝論者)들은 다시 이렇게 말한다.
“숨을 내쉬고 들이쉬고 눈을 감았다 떴다 하는 생명의 운동이나 감각기관의 변상(變相)에는 반드시 형상의 대상이 있다. 이것은 능상(能相)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횃불 등을 보는 것처럼.”
이 세속에서 만약 총상으로써 저 모든 모습에 반드시 형상의 대상이 있다고 주장하고 차별을 변론하지 않으면, 다시 이미 성립한 것을 세우는 것이 된다. 세속에서는 자아가 없지 않음을 공지(共知)하기 때문이다.
만약 그 상에 형상의 대상인 자아[我]가 상주하고 편재하여 즐거움 등이 의지하는 곳이라는 주장을 한다면 다시 동법의 비유가 안 돼, 세우는 주장과 위배되기 때문이다.
설령 승의라도 그와 같은 비유는 불성(不成)의 오류가 있다. 시간ㆍ방위ㆍ공간 등은 이 도리로 인하여 또한 마땅히 부정되어야 한다.
승론(勝論) 논사는 다시 이러한 힐난을 한다.
“극미와 의(意)를 우리는 무위(無爲)라 주장하고, 공을 세우는 이유인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란 이유는 스스로 성립 못하는 이유이다.
만약 이 두 가지가 유위에 섭수되어 공하여 ‘연하여 발생하기 때문에’란 이유를 들면 다른 것이 성립하지 않는 이유이기에 공성(空性)을 깨닫는 것이 전혀 성립하지 않는다.”
만약 의(意)와 극미(極微)를 세속에서 곧 무위라 허락한다면 이것은 어려움이 생겨, 세우는 주장 또한 무위가 아닌 것이 된다. 지혜는 발생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색 등처럼.
이와 같은 ‘동이(同異)의 속성이기 때문에’ ‘생각[念]에 발생하는 원인이 있기 때문에’라는 구절의 다른 원인도 장차 설하겠다. 또 모든 극미도 무위가 아니고 성립시키는 원인이 되기 때문이다. 마치 실 따위처럼.
이와 같이 저 나머지 ‘집합 및 분산(合離), 수(數)의 동이(同異)’ 등의 이유에 의해 상응하는 대로 장차 말하겠다.
흑은 두 극미가 이루는 거친 사물은 상주의 원인이 아니다. 이것은 성립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마치 병 등처럼.
이와 같이 그 나머지 ‘작용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괴멸하기 때문에’ ‘이것은 유(有)의 원인이기 때문에’라는 이들의 여러 원인에 의해 상응하는 데 따라 장차 말하겠다.
이 도리에 의하면 의(意)와 극미라는 다른 망집은 다 자성이 공하니, 이 까닭으로 말한 것과 같은 오류는 없다.
[공의 건립]
위에서 말한 것처럼 수론(數論)ㆍ승론(勝論)의 구의(句義)를 여러 도리에 의해 부정하였다.
무의(無衣) 등의 논의에 집작한 말의 뜻도 상응하는 데 따라 공(空)을 세우겠다.
이와 같이 여러 오류들을 제거하였다.
관행(觀行)을 닦는 자는 바른 비량(比量)의 힘에 의해 자타의 두 주장에 집착하는 무위의 속성이 공함을 깨닫는다.
지혜의 사다리의 힘에 의해 이미 성공에 증입하였어도 뛰어난 수행력 없이는 마땅히 제거해야 할 소지장(所知障)을 영원히 끊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다시 정근으로써 뛰어난 수행을 익혀야 한다.
만약 여기에 일종(一種)이 있어 무위 형상[無爲相]의 유간(有間)이나 무간(無間)으로서 다시 현행(現行)해도 곧 이치대로 저 성(性)이 공함[空]을 관하여 저 상(相)을 제거하면 현현하지 알아 모든 법을 깨닫는다. 자성을 떠났기 때문이다.
그 성은 본디 공하여 성공으로 말미암기 때문이니, 형상이 실체를 이루지 못하면 곧 무상(無相)이 된다.
무상으로 인하여 원하는 것이 없게 되면 무원(無願)이 된다.
상구(相垢)를 여의었기 때문에 원리(遠離)를 이루고, 또 원리의 속성이 있기 때문에 번뇌를 연해도 궁극에는 발생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적정을 이룬다.
원하는 것이 없다면 곧 무원(無願)이 된다. 그러므로 적정(寂靜)을 이룬다.
자성에 일어나지 않기 때문에 무생(無生)을 이룬다.
또 무생에 의해 무상(無常), 고(苦)가 있지 않고 또 무아(無我)도 없다.
또 발생이 없고, 무상(無相)에 의거하기 때문에 무상의 만행으로서 일체 법을 관하여 무이(無二)를 깨닫는다.
이 행상(行相)으로 인하여 꾸준히 익히고 뛰어난 수행력을 증장한다.
이와 같이 뛰어난 수행력의 힘 때문에 추상(麤相)을 제거하고 현현하지 않아, 이로 인하여 작용하는 바의 행상이 없으니, 이른바 유위와 무위의 행상을 취한다.
장님이 추상을 떠나면, 청정한 눈을 얻어도 먼저 취한 형상들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여기서 비록 이미 무성(無性)을 얻었지만 공 등의 분별현행으로 인하여 공용이 있는 마음은 상속하여 머물고 있어, 아직 움직임이 없는 앎을 얻지 못한다
공 등의 분별이 현행한다면 출세간의 무분별혜를 장애한다.
버리기 위하여 용맹정근하고 이와 같이 관찰하라.
승의에서는 그러므로 공성(空性)의 경지에 관한 공 등의 분별도 실유가 아니다. 연에 따라 발생하기 때문이다. 마치 환상 등과 같다.
[일체법을 관하지 않음]
이와 같이 꾸준히 수행하고 다시 공 등의 분별을 잘 제거하면, 그것을 제거하기 때문에 공(空)ㆍ불공(不空) 등의 두 치우친 견해를 멀리 여의고, 다시 그 공 등의 행상으로써 일체 법을 관하지 않는다.
마치 “반야바라밀다(般若波羅蜜多)를 바로 현행(現行)할 때,
그 색(色)에 대해 상주(常住)라 관하지 않고 무상(無常)이라 관하지 않는다.
즐거움이라 관하지 않고 또한 고(苦)라 관하지 않는다.
아(我)라 관하지 않고 또한 무아(無我)라고 관하지 않는다.
적정이라 관하지 않고 부적정(不寂靜)이라 관하지 않는다.
공이라 관하지 않고 또한 불공(不空)이라 관하지 않는다.
또한 상(相)이라 하지 않고 또한 무상(無相)이라 관하지 않는다.
원(願)이라 관하지 않고 또한 무원(無願)이라 관하지 않는다.
원리(遠離)라 관하지 않고 불원리(不遠離)라고도 관하지 않는다.
이와 같이 그 수(受)ㆍ상(想)ㆍ행(行)ㆍ식(識)과
일체의 색ㆍ소리ㆍ냄새ㆍ맛ㆍ촉감ㆍ법과 그
것들을 가지는 눈ㆍ귀ㆍ코ㆍ혀ㆍ몸ㆍ생각과
보시바라밀다(布施波羅蜜多)ㆍ지계(持戒)바라밀다ㆍ인욕(忍辱)바라밀다ㆍ정진(精進)바라밀다ㆍ정려(靜慮)바라밀다ㆍ반야(般若)바라밀다와
염주(念住)ㆍ정단(正斷)ㆍ신족(神足)ㆍ근(根)ㆍ역(力)ㆍ각지(覺支)ㆍ도지(道支)와 정려(靜慮)ㆍ
무색(無色)의 등지(等至)ㆍ신통(神通)ㆍ십력(十力)ㆍ무외(無畏),
여러 무애해(無礙解)ㆍ불공불법(不共佛法), 여러 삼마지(三摩地)ㆍ다라니문(陀羅尼門), 일체지(一切智)에 관해 상주(常住)라 관하지 않고 또 무상(無常)이라 관하지 않는다”고 설한 것과 같다.
……(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