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유식론 제1권
1.3. 일체법은 없다(1)
[식에 독립된 일체법은 실유가 이니다]
[문] 어째서 식의 외부91)에 (식과는 독립적으로) 실재하는 일체법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인가?92)
[답] 외도와 다른 교법[乘]에서 집착하는 실법(實法)이라는 것에는 바른 논리[正理]가 없기 때문이다.
외도가 집착한 것이 어째서 존재하지 않는가?93)
[수론에 대한 논박]
우선 수론자(數論者)는 다음과 같이 집착한다.94)
뿌루사[神我]95)는 순수정신이며, 사뜨와[薩埵]와 라자스[刺闍]와 따마스[答摩]96)로 성립된 지성(知性:覺ㆍ大)97) 등 스물세 가지 법을 수용한다.
그리고 지성 등의 법은 세 가지 속성[三德]의 요소(사뜨와 등)가 합해서 이루어지는데, 이것은 실체이지 허망한 존재가 아니며 현량(現量)98)으로 인식할 수 있다고 한다.
그들이 집착하는 것에는 바른 논리가 없다.
무슨 까닭인가? 지성 등 여러 법은 여러 속성의 요소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99) 군대나 숲 등과 같이 허망한 존재이지 실체가 아니어야 한다.
어떻게 현량으로 인식할 수 있다는 말인가?
또한 지성 등의 법은 실체라고 말하기 때문에, 근본속성과 같이 세 가지가 합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어야 한다.
사뜨와 등 세 가지는 곧 지성 등이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성 등과 같이 역시 세 가지가 화합해서 이루어진 것이어야 한다.100)
전변해서 상주하는 것이 아니라고 예(例)로 드는 것도 역시 그러하다.101)
또한 세 가지 근본속성은 각기 공능(功能)이 많다고 말하기 때문에, 본체도 역시 많아야 한다. 공능과 본체는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 가지의 본체가 이미 두루하다고 말하기 때문에, 한 장소가 변화할 때에는 다른 곳도 역시 그러해야 한다. 본체는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 세 가지 근본속성이 본체와 양상이 각기 다르다고 인정한다면, 어떻게 화합해서 함께 하나의 양상이 되겠는가?
화합할 때에도 변화해서 하나의 양상이 되지 않아야 한다. 화합하지 않을 때와 본체가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만약 세 가지 근본 속성이 본체는 달라도 양상은 같다고 말하면, 문득 자기 학파에서 근본진리로 하는, 본체와 양상이 하나라고 말하는 것에 위배된다.
본체도 양상처럼 고요해서 하나이어야 한다. 양상도 본체처럼 현현해서 셋이 있어야 한다.
따라서 셋이 화합해서 하나가 된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또한 셋은 개별적인 것[別]이고, 지성(知性:覺ㆍ大) 등은 총체적인 것[總]이다.
총체와 개별은 하나이기 때문에, 하나도 아니고 셋도 아니어야 한다.
이 셋이 전변할 때, 만약 화합해서 하나의 모습이 되지 않는다고 말하면, 전변하지 않았을 때와 같아야 하는데, 어떻게 현재 하나의 색법 등으로 보이는가?
만약 셋이 화합해서 하나의 모습이 된다고 말하면, 본래의 개별적인 모습을 잃어야 하고 본체도 역시 따라서 잃어야 한다.
셋에 각기 두 가지 양상이 있어서, 하나는 총체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개별적인 것이라고 말할 수 없다. 총체가 곧 개별이기 때문이다. 총체적인 것에도 역시 셋이 있어야 하는데, 어떻게 하나로 본다는 것인가?
만약 셋의 본체에 각기 세 가지 모습이 있어서 뒤섞여서 알기 어렵고 따라서 하나로 본다고 말하면, 이미 세 가지 모습이 있는데, 어떻게 보아서 하나가 된다는 것인가?
또한 어떻게 세 가지 속성의 요소가 차이가 있다고 아는가?
만약 그 하나하나가 모두 세 가지 양상을 갖춘다고 말하면, 속성의 요소 하나하나가 능히 색법 등이 되어야 한다.
무엇이 부족해서 셋의 화합을 필요로 하는가?
본체도 역시 각기 셋이어야 한다. 본체가 곧 양상이기 때문이다.
또한 지성 등의 법은 모두 세 가지 속성의 요소가 합해서 이루어진다고 말하면, 전변해서 서로 관련될 때에 차별이 없어야 한다.
원인[大]ㆍ결과[我慢]ㆍ5유(唯)ㆍ모든 요소[五大]ㆍ모든 인식기관[十一根]이 차별이 있다고 말한다면, 모두 성립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하나의 인식기관이 모든 대상을 인식해야 하고, 혹은 하나의 대상이 모든 인식기관의 인식하는 바가 되어야 한다.
세간에서 현재 보는 유정과 무생물, 청정과 더러움 등의 사물, 현량과 비량(比量)102) 등이 모두 차이가 없어야 하고,
그러면 문득 큰 오류가 된다.
따라서 그들이 집착한 실법(實法)은 성립되지 않는다. 다만 허망한 생각으로 계탁하여 실재한다고 말한 것이다.
91)
위에서 말한 자아는 식의 내부에도 외부에도 모두 그 자체가 없다. 법은 식 내부의 것은 유(有)이고(似法이므로), 식 외부의 것은 무(無)이다. 따라서 다른 사람들이 식 외부에도 식과 독립적으로 존재한다고 말하므로, 여기서 그것을 논파하고자 먼저 묻는다.
92)
다음에 실법(實法)이 존재한다는 주장을 논파한다. 먼저 총체적으로 말한다.
93)
이하 별도로 외도의 법집(法執) 중에서 13외도를 논파한다.
먼저 수론(數論)의 주장을 열거하고, 그 모순점을 비판한다.
94)
상캬 철학은 세계를 25원리에 의해 설명하므로, 수(數)를 중시한다 해서 수론(數論)으로 불린다. 그 원리는 대략 다음과 같다.
뿌루사(puruṣa, 神我)가 쁘라끄리띠(prakṛti, 原質)를 관조함으로써 쁘라끄리띠로부터 지성[覺, buddhi]이 생기고, 지성으로부터 아만(我慢, ahaṁkāra)이 생겨난다.
아만으로부터 5유(唯)와 11근(根)이 생기고, 5유(唯)로부터 5대(大)가 생긴다고 한다.
5유는 음(音)ㆍ촉(觸)ㆍ색(色)ㆍ미(味)ㆍ향(香)의 본질을 이루는 미세한 물질이다.
11근(根)은 의근(意根), 5지근(知根:眼ㆍ耳ㆍ鼻ㆍ舌ㆍ身根), 5작근(作根:언어ㆍ손ㆍ발ㆍ배설ㆍ생식근)을 말한다.
5대(大)는 공대(空大)ㆍ풍대(風大)ㆍ화대(火大)ㆍ수대(水大)ㆍ지대(地大)이다.
95)
뿌루사는 순수정신으로서 신아(神我)로 한역된다. 이것은 쁘라끄리띠의 활동을 보는 자이고, 아는 자이며, 스스로 활동하지 않는다[非作者]. 그 자체는 무인(無因), 상주, 편재, 유일(唯一), 무활동, 다른 것에 의존하지 않고, 아무 것에도 몰입하지 않으며, 분석되지 않고, 독립된 아홉 가지 성격을 지닌다고 한다. 참고로 쁘라끄리띠는 근본원질ㆍ근본자성ㆍ제1원인[勝因] 등의 의미로서, 지성[覺] 등을 낳는 활동을 지닌 작자(作者)이다.
96)
쁘라끄리띠는 이 세 종류의 속성[德]으로 이루어져 있다.
사뜨와(sattva, 純質)는 지성(知性)ㆍ빛남ㆍ가벼움ㆍ즐거움ㆍ흰 색깔의 성질을 갖고 있다.
라자스(rajas, 動質)는 힘ㆍ끊임없는 운동ㆍ고통ㆍ빨간색의 속성을 지닌다.
따마스(tamas, 暗質)는 질량ㆍ무거움ㆍ저지(沮止)ㆍ무감각ㆍ검은색의 성질을 갖는다.
상캬 철학에 의하면 세계 만물의 차이는 쁘라끄리띠의 이 세 가지 요소가 어떤 비율로 결합되고 그 중의 어떤 요소가 지배적인가에 따라서 결정된다고 한다.
97)
뿌루사와 쁘라끄리띠의 접촉에 의해 후자의 내적인 평형상태가 깨어져서 23원리가 전개된다.
제일 먼저 나타나는 것은 사뜨와를 지배적인 성품으로 하는 붓디(buddhi)이다.
붓다는 우주론적으로는 그로부터 다른 모든 물질적 세계가 전개되므로 위대한 것[大]이라고도 하고, 개인적으로는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는 기관으로서 각(覺), 즉 지성(至性)이라고 한다.
98)
현량(現量, pratyakṣa)은 감각기관과 대상의 접촉을 통해 아는 것, 즉 감관적 직접 자각이다.
99)
지성(知性:大) 등 23원리는 하나하나 모두 세 가지 근본속성[三德]으로 이루어진다고 한다.
100)
사뜨와 등 셋은 본법(本法)이기 때문에 다른 것으로써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런데 지금 사뜨와 등이 곧 지성(知性:大) 등이라고 말하면, 사뜨와 등도 역시 각각 세 가지로 이루어지는 것이어야 한다는 비판이다.
101)
쁘라끄리띠[自性]를 논파한다. 사뜨와 등 3법(法)은 곧 지성(知性:大) 등이며, 지성 등은 변천[變異]한다고 인정하기 때문에, 사뜨와 등도 역시 전변 무상한 것이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