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설발보리심파제마경 상권
[해탈의 모양, 3승의 비유]
그때 바라문이 부처님께 아뢰었다.
“세존이시여,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해탈(解脫)은 몇 가지의 모양이 있습니까?”
부처님께서 말씀하셨다.
“바라문이여, 성문이나 연각이나 여래의 해탈법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없느니라.
바라문이여,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세 종류의 짐승을 타고 보배가 있는 곳에 가고자 하는데, 비록 가는 방법에 있어서는 차별이 있으나, 그 향하는 목적지는 차이가 없는 것과 같다.
그 세 종류의 짐승이란 당나귀ㆍ말ㆍ코끼리이다.
저 당나귀가 끄는 수레는 그 힘이 약하다. 이런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 수레에 탄 사람은 비록 보배가 있는 곳에 이르기는 하나, 그 보배를 가지고 널리 중생들에게 베풀지 못하고, 다만 자기만이 이로운 열반을 증득하여 지니고 즐거워할 뿐이다.
저 말이 끄는 수레는 가볍고 민첩하다. 그러하기 때문에 이 수레에 탄 사람은 비록 보배 있는 곳에 이르기는 하나, 또한 그 보배를 가지고 널리 중생들에게 베풀지 못하고, 다만 중생들과 함께 청정한 복전[淨福田]만을 지을 뿐이다.
저 코끼리가 끄는 수레는 그 움직임이 바르면서도 날래고 강건하며 힘이 넘친다. 그 힘으로 말미암아 이 사람은 일체의 보배덩이로 된 광대한 성 가운데 들어간다.
그 성에 이르러서는 곧 이런 생각을 한다.
‘세 수레[三乘]의 보배가 다 여기에서 나오는구나. 내가 마땅히 이 한량없이 많은 보배를 가지고 끝없는 일체 중생들에게 널리 베풀어 모든 중생들을 위하여 큰 이익과 안락을 지으리라.’
바라문이여, 3승(乘)을 수행하는 사람이 3승의 법을 수행하는 것도 또한 이와 같다.
저 당나귀를 타는 사람은 곧 성문승(聲聞乘)이고,
저 말을 타는 사람은 곧 연각승(緣覺乘)이며,
저 코끼리를 타는 사람은 바로 대승(大乘)이니라.
비록 저 3승의 길[道]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으나, 증득할 열반과 얻을 해탈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없고 또한 차별도 없다는 것을, 그대는 이제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니라.
바라문이여, 또 세간에 세 남자가 같이 하나의 깊고 큰 강을 건너려고 하는데,
저 첫 번째 사람은 하나의 작은 나뭇잎을 물에 띄우고 거기에 의지하여 건너가고,
저 두 번째 사람은 앞 사람보다 좀 나아서 판목(板木)을 물에 띄우고 거기에 의지하여 건너가려 하며,
저 세 번째 사람은 또 앞사람보다 좀 더 좋은 큰 배를 띄우고 많은 사람들과 함께 편안히 강을 건너서 저 언덕에 이르려고 하는 것과 같으니,
이것을 다시 비유하면 마치 세간의 장자(長子)가 그 부모들이 보호하여 주는 일체의 처소에서 모든 근심과 고뇌를 여의는 것과 같으니라.
저 첫 번째 나뭇잎에 의지하여 건너가려는 사람은 바로 성문승의 수행인임을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요,
저 두 번째 판목에 의지하여 건너가려는 사람은 바로 연각승의 수행인임을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며,
그 세 번째 배를 타고 건너가려는 사람은 바로 보살승의 수행인으로서, 자기도 건너고 다른 사람도 또한 건네준다는 사실을 당연히 알아야 할 것이니라.
바라문이여, 이런 까닭에 저 3승의 수행법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있으나, 성문이나 연각이나 저 여래께서 증득한 열반에는 여러 가지 모양이 없다는 것을 마땅히 알아야만 할 것이니라.”
그때 세존께서 이 뜻을 거듭 펴시고자 게송으로 말씀하셨다.
3승(乘)이 증득하는 열반은
동일한 열반법이니
도를 증득하는 방법엔 차별이 있으나
열반 자체엔 두 가지 모양이 없느니라[無二相].
3세(世)의 모든 부처님은
최상의 해탈을 얻으셨으니
이와 같은 법안(法眼)을 지니신
정각 세존께서 말씀하신 것이니라.
이러한 최상법의 지혜로
모든 방편을 내시나니
모든 수행하는 사람들은
마땅히 이와 같이 배워야 하느니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