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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제604주기 태조 고황제 건원릉 기신친향례 때의 황사손님) |
(2013년 종묘대제 당시 십이장복十二章服을 입으신 황사손님과 사동궁寺洞宮 이정(상우) 황손님) |
- 황사손으로 결정되기 이전의 삶-
대한제국의 5대 황실 수장이시자 조선왕조의 역대 임금들의 대수代數로는 30대가 되시는 황사손 이원님은 1962년 9월 23일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종로구 혜화동에서 고종 태황제高宗 太皇帝 폐하陛下의 5남이신 의친왕義親王 이강李堈 전하殿下의 9남, 이갑李鉀 황손님의 장남으로 탄생誕生하셨습니다. 황사손님의 본적本籍은 경복궁景福宮이며, 전주이씨全州李氏의 시조始祖이신 사공司空 이한李翰으로부터는 44세손世孫이 되고 대한제국의 초대 황제이신 고종 태황제께서는 황사손님의 증조부가 되십니다.
황사손님은 이원李源이라는 휘諱(이름)를 가지시기 이전에 상협相協이라는 휘를 쓰시며 여느 평범한 사람들처럼 일생을 살아오셨습니다. 그러시던 중 1981년, 황사손께서 19세가 되시던 해에 서울특별시 서초구에 위치한 사립 고교 상문고등학교尙文高等學校를 졸업하신 뒤 친부이신 이갑 황손을 따라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게 됩니다.
황사손님의 할머니께서는 '네 몸에는 왕가의 피가 흐른다’는 말씀을 하셨지만 당시에는 무슨 뜻인지 모르셨고, 이민을 떠나기 이전 황사손께서는 이갑 황손을 따라 창덕궁 낙선재昌德宮 樂善齋에서 생활하시던 의민황태자비懿愍皇太子妃 이방자李方子 전하殿下를 만나 뵙게 되었는데 당시는 겨울이라 무척 추운 날씨임에도 낙선재에는 이렇다 할 난방 시설이 없어서 '절대 이런 곳에선 못 살겠구나’라는 생각을 하셨다고 합니다. 황태자비 전하는 '이민을 떠나도 뿌리를 잊지 말고 살라'고 하셨고 황사손께서는 이갑 황손님이 자신을 왜 낙선재로 데려가셨는지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대한제국이 몰락한 뒤 황손들은 삼류 잡지에 불쌍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길거리 거지’ 꼴이 되어버렸으니 자식들에게 알려주기 싫으셨던 거죠. 당당히 일어선 뒤 자랑스럽게 뿌리를 알려주려 하셨는데 우리나라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만큼 가정형편이 어려워졌습니다. 결국 이민 가면서 우리나라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는 생각에 황족 신분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신 겁니다.' - 경향신문 “황실문화는 골동품 아닌 자산… 제대로 알리고파”, 2010년 1월 5일 자 기사
뿌리에 대한 자각을 하시기도 전에 미국으로 건너간 황사손께서는 뉴욕대학교New York University 신문방송학과를 전공하신 후 미국 케이블사 홈 박스 오피스Home Box Office의 프로듀서로 직장을 잡으시는 등 미국 생활에 적응하기 위하여 바쁜 나날을 보내십니다. 이로 인하여 자신의 뿌리에 대해서는 생각할 겨를이 없으셨고 미국에서 생활한지 6년 만인 1987년, 황사손께서 25세가 되시던 해에 다시 조국인 대한민국으로 귀국하십니다.
귀국 후 대학에서 배웠던 전공을 살리셔서 광고 회사 금강기획과 케이블채널 현대 방송에서 프로듀서로 일하셨고 결혼 정보 채널 뷰티 TV의 설립에 도움을 주셨으며, 1992년, 故 정주영 前 현대그룹 회장이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을 때는 선거 홍보팀에서 캠페인을 담당하시게 됩니다. 2001년에는 현대 홈쇼핑의 창립 멤버로서 합류한 뒤, 2003년, 현대 홈쇼핑 상품2본부 아동 레포츠 팀장에 부임하시었으며 댄스그룹 HOT가 한창 인기 있을 때는 관련 캐릭터 사업을 벌이는 등 항상 트렌드의 최첨단에서 최고경영자CEO라는 꿈을 목표로 열심히 일하시며 1998년, 1999년 생의 두 아드님과 함께 행복한 가정의 평범한 가장으로 대한제국의 황손이라는 자신의 뿌리와는 거리가 먼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시고 계셨습니다.
- 갑자기 찾아온 황사손皇嗣孫의 삶 -
2005년 7월 16일, 대한제국이 개국된 지 108주년이 되던 해 대한제국 황실 4대 수장이시자 의민황태자 전하의 마지막 혈육이셨던 회은 황세손懷隱 皇世孫 이구李玖 저하邸下께서 일본 도쿄도東京都 치요다 구千代田? 키요이쵸紀尾井町에 위치한 아카사카赤坂 프린스 호텔에서 승하昇遐하시자, 황세손 저하의 유체는 7월 20일, 인천국제공항에 도착하시어 창덕궁 낙선재에 옮겨지신 후 빈청을 마련하게 되었습니다. 황세손 저하께서 승하하시기 이전에 사단법인 전주이씨대동종약원社團法人 全州李氏大同宗約院에서는 고종 태황제 폐하의 후손들 중 유일하게 남아있던 의친왕 전하의 자손들 중에서 황세손 저하의 양자를 세우기로 하였고, 2002년 한 출판기념회에서 황사손님과 황세손 저하께서는 첫 만남을 가지셨습니다. 황세손께서는 이 때 황사손님께 좋은 인상을 가지시게 되었고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측에서도 황사손님을 양자로 결정하시는 것에 대해 동의를 구하자 이를 승낙하셨다고 합니다.
다시 시간을 되돌려, 7월 22일 황세손장의위원회에서는 긴급 상임 이사회를 개최하여 국상절차의 반차행렬 등을 정하고, 황세손 양자 입적에 관하여 황실 가족들과 협의를 거친 후 의친왕 전하의 9남인 이갑 황손의 장남 이원을 황세손의 양자로 입적하여 황통을 잇게 하였으며, 이날 황세손 저하의 생전에 의친왕 전하의 가족들인 이갑 황손, 이석李錫 황손, 이해경 황손 등을 주축으로 하는 “의친왕가 가족회의”에서 여러 차례 논의를 하여 이갑 황손의 장남 원을 사손嗣孫으로 내정하여 장의위원회에 정식으로 통보하였습니다.
그렇게 해서 2005년 7월 22일, 창덕궁 낙선재에서는 전주이씨대동종약원과 의친왕가 가족회의의 결정에 따라 황사손께서는 상협이라는 휘에서 원이라는 휘로, 평범한 회사원에서 황사손으로 추대되십니다. 이에 일부 종친 분들과 의친왕 전하의 10남이신 이석 황손께서는 항의하셨지만 결국 우여곡절 끝에 황사손 이원님은 이렇게 제2의 생을 맞이하게 되십니다. 황사손 결정 당일부터 상주의 역할을 맡게 된 황사손님은 '그동안 잊고 살던 내가 있었구나'라고 깨달으셨다고 회고하시며 7월 24일, 황세손 저하의 영결식을 치르시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2005년 7월24일 열린 이구 저하 영결식입니다. 수십 년 만에 폭염이 찾아와 기온이 33도였어요. 황실 장례 격식에 맞춰 일곱 겹인가 아홉 겹짜리 삼베옷을 입고 며칠 밤낮 조문객을 맞았는데 비몽사몽, 생사를 넘나드는 심정이었어요. 제대로 앉아있을 수도 없고 화장실조차 마음대로 갈 수 없었어요. 영결식이 끝난 직후 창덕궁에서 돈화문, 종로 3가를 거쳐 노제가 치러진 종묘까지 가는 길이 마치 제가 죽어서 가는 길 같더군요. 귓가에 “왕인가 봐”, “이구 아들이야” 수군거리는 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지만 당시엔 황실이나 조상에 대한 자각보다 육체적 고통에 죽을 지경이었죠. 노제를 끝내고 종묘에 모신 이구 황세손 상청 앞에 엎드리자마자 설움이 복받치더군요. 일본 땅에서 외롭게 살다 가신 저하를 위해 흘린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앞으로의 제 인생에 대한 서러움과 두려움이 물밀듯 밀려와 주체할 수 없는 슬픔으로 누르더군요.'- 경향신문 “황실문화는 골동품 아닌 자산… 제대로 알리고파”, 2010년 1월 5일 자 기사
??영결식 이후 황세손 저하의 유체를 경기도 남양주시 홍유릉 내 영원英園에 새롭게 조성한 회인원懷仁園에 안장한 후, 황사손께서는 창덕궁 낙선재에서 3년 상喪을 치르시게 됩니다. 이에 대해 황사손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영결식 이후 27개월 동안 이구 황세손의 상청이 있는 창덕궁 낙선재에 가서 3년 상을 치렀습니다.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상주로서 아내를 대동하고 직접 제례를 올렸어요.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는 3년 상을 치러내면서 ‘도대체 이 의식이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낙선재는 대한제국 시절 가장 불행했던 조선 황족들이 기거했던 곳이죠. 영친왕과 이방자 여사, 순종의 계비 순정효황후, 일본에 볼모로 갔다 정신질환을 얻어 돌아온 조선의 마지막 황녀 덕혜옹주가 그곳을 거쳐 갔습니다. 전 학교에서 배운 역사책 외에는 (황실 역사를) 공부한 적이 없었어요. 황사손으로 3년 상을 치르고서야 제가 무엇인가 해내야 한다는 소명의식 같은 것이 생겼습니다. 정체성을 받아들인 거죠. 지난해까지 조선 왕릉 40기를 비롯해 전국의 능을 살피는 일을 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을 읽었지만 너무 방대해 학자들을 사사하고 공부를 했어요.' - 경향신문 “황실문화는 골동품 아닌 자산… 제대로 알리고파”, 2010년 1월 5일 자 기사
이렇게 3년 상을 끝마치신 황사손께서는 2008년 1월부터 황세손 저하께서 맡으셨던 전주이씨대동종약원 총재의 직함을 계승하고 역대 왕세자王世子들이 행하였던 봉심奉審이라는 예禮를 행하고 계셨는데, 이것은 각지의 왕릉을 방문하여 보존 상태를 살피고 왕세자가 되었음을 알리는 것입니다. 그러던 중 2009년 6월 27일, 제601주기 태조 고황제 건원릉 기신친향례 때 에스파냐 세비야Espana Sevilla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총회에서 조선왕릉 40기를 모두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기쁜 소식이 날아오게 되었습니다. 황사손께서는 이날의 기쁨을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너무나 감읍해 태조 고황제 제향을 지내면서 조상님께 ‘감사하다’는 말씀을 거듭 올렸다. 이구 황세손의 상주로서 3년 상을 치르고 지난해 10월 건원릉을 시작으로 지난달 25일 강원도 영월의 장릉(단종의 릉)까지 8개월간 봉심을 끝마쳤다. 그 이틀 뒤 낭보가 날아든 것이다. 정말 신비한 일 아닌가. 후손의 간절한 기도를 조상신들이 들어준 것 같다.' - 중앙일보 <조선시대 왕이 주관한 제례는 정파를 초월한 통합의 도구>, 2009년 7월 5일 자 기사
이후 2009년 9월에는 세계델픽위원회International Delphic Council 고문을 역임하시고 2010년 1월 10일 사단법인 왕실문화원社團法人 王室文化院, Royal of Korea를 설립하시고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십니다. 그 뒤 2012년, 조선왕실과 대한제국 황실문화를 다양한 연구와 교육 등 전문적 활동을 전개하여 전통문화의 현대화 및 콘텐츠 개발 등을 통해 문화 경쟁력을 확보함으로써 우리나라의 민족문화와 미래 국가 발전에 기여함을 목적으로 왕실문화원을 사단법인 대한황실문화원社團法人 大韓皇室文化院으로 다시 설립하시고 또 한번 초대 이사장에 취임하십니다.
황사손님의 최근 동정을 살펴보면, 2009년 5월 24일에 운현궁雲峴宮에서 열린 제29회 차茶의 날 기념 팔도차문화 큰잔치 행사에 참석하시어 박동선 이사장과 함께 사진 촬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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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2월 9일에는 서울특별시 양천구 목동에 위치한 진명여자고등학교 100회 졸업식에 참석하시어 류종림 교장과 함께 교내 기념관을 둘러보는 등, “황실과의 인연으로 졸업식장을 찾았다. 앞으로 학생들이 전통을 가슴에 품을 수 있도록 역사의식을 교육하는 데 노력하겠다”며 졸업식 참석 소감을 밝히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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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3월 9일, 양녕대군의 묘가 있는 지덕사至德祠에서 숭례문 탁본에 대해 설명을 받으셨으며, 7월 18일에는 의민황태자비 전하를 끝까지 모셨던 김수임 여사를 만나셨는데, 김수임 여사께서는 방대한 분량의 자신의 자서전 성향의 글을 모아 전달하면서 세상에 알려지기를 바라는 마음을 전해 오셨습니다. 2013년 2월 5일, 일본 도쿄 국립박물관에서 오구라 컬렉션의 일부로 고종 태황제 폐하의 유품으로 보이는 투구와 갑옷, 익선관을 특별관람하시면서 '한국에는 임금이나 황제가 쓰던 익선관翼善冠이나 투구, 갑옷이 없습니다. 이게 왜 일본에 있는 겁니까'라고 말씀하시며 눈물을 흘리셔서 연합뉴스에 보도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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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4일, 제주도 관광 명예홍보 대사로 위촉되시어 황실 테마파크와 황실 웨딩홀, 황실 테마상가 추진을 지원하고 황실 용품도 제공하실 예정이라고 하셨으며, 제주도 관광공사는 '이번 명예홍보 대사 위촉이 그동안 자연환경과 박물관 위주에 그쳤던 제주관광 홍보 테마를 다양화하고 황실 문화를 간직하고 있는 국가들과의 네트워크 구축에 기여할 것'이라며 황사손님의 앞으로의 행보에 큰 기대를 걸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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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4일에는 경기도 광주시에 위치한 나눔의 집에서 의료봉사활동에 직접 참여하셨으며, 4월 17일에는 국립고궁박물관의 자문 위원으로 위촉되시어 황실문화 사업에 한 걸음 더 가까워지는 일보를 내디디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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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 22일에는 미얀마 국회 하원의장 일행단 30여 명이 창덕궁에 방문하여 황사손께서 직접 안내를 맡으셨고, 5월 7일에는 태국 국회의장단 36여 명이 창덕궁을 방문하여 궁중다례 행사를 강창희 국회의장의 김연광 비서실장과 공동으로 주최하셨고 6월 23일에는 민주당 우상호 의원의 지지연설을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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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2일, 이날은 이 글을 쓰고 있는 필자가 잉여인간(tripletrio97)군, EL(neight_nesia)군과 함께 황사손님을 직접 만나 뵙고 필자에게 '열심히 공부하여 역사의 진실을 밝혀주세요.'라고 격려해주셨으며, 대한황실문화원 기획실 실장으로 계시는 이대효李大孝님께서 조선왕릉 관련 교육을 해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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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23일에는 IBK기업은행 본점 로비에서 전시 중인 천지일보 특별사진전을 관람하시고 황세손 이구 저하의 유아시절 사진 앞에서 기록사진 수집가 정성길 관장과 기념촬영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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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1월 21일에는 남양주 금곡동에 위치한 홍릉(洪陵)에서 고종 태황제 기신친향례 초헌관을 맡으셨는데, 이날 이 글을 쓴 필자와 공손도 승제(junwoo66) 군, 한방인생(dlwpals08) 형, 잉여인간(tripletrio97) 군이 홍릉 제향에 참반하여 황사손님을 만나 뵜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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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13일에는 정재영 새누리당 의원의 '굿모닝 카페'에 방문하셨습니다. 4월 19일에는 강원도 삼척시에 위치한 준경묘, 영경묘 관찰사 봉심의식과 심포지엄에 참석하시어 ‘조선 건국 발상지 삼척의 전통계승’을 주제로 기조특강을 하셨습니다. 현재도 황사손님께서는 조선 왕실과 대한제국 황실문화의 홍보와 발전에 힘쓰고 계시며 바쁜 나날을 보내시고 계시는 중입니다.
첫댓글 복사해 온 자료라서 사진이 없어진 점 양해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