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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비달마순정리론 제2권
변본사품 ②
2.2. 수(受)ㆍ상(想)ㆍ행(行)의 3온(蘊)
색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수(受) 등의 온에 대해 논설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수(受)는 촉(觸)에 따른 영납(領納)이고
상(想)은 취상(取像)을 그 본질로 한다.
네 가지 이외의 것을 행온(行蘊)이라 이름하며
이와 같은 ‘수’ 등의 세 가지와
아울러 무표와 무위를
법처(法處)ㆍ법계(法界)라고 이름한다.
1) 수온(受蘊)
논하여 말하겠다.
‘촉’에 따라 생겨난 것으로서 참으로 애호(愛護)할 만한 것과 애호할 만한 것이 아닌 것과 양자 모두에 반대되는 것(애호할 만한 것도 아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아닌 것)의 촉을 영납(領納)하는 것, 이것을 일컬어 수온(受蘊)이라고 한다. 그리고 여기서 ‘영납’이란 바로 능히 수용한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다시 세 가지 종류가 있으니, 이를테면 낙수(樂受)ㆍ고수(苦受)ㆍ불고불락수(不苦不樂受)가 바로 그것이다. 즉 심신을 능히 이익되게 하기 때문에 ‘낙수’라고 하였으며, 심신을 능히 손상시키기 때문에 ‘고수’라고 하였다. 그리고 영납한 바가 즐거운 것도 아니고 괴로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불고불락수’라고 하였으니, 검은 것도 아니고 흰 것도 아니라고 하는 것과 같다.
이러한 3수가 각기 개별적인 존재임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어떤 이가 설하기를, “온갖 근(根)의 대종을 능히 이익되게 하고, 손상되게 하며, 양자 모두에 반대되는 세 작용이 각기 다르기 때문에 세 가지 ‘수’가 있음을 안다”고 하였다. 혹은 어떤 이는 “탐(貪)ㆍ진(瞋)ㆍ치(癡)의 수면(隨眠)을 증장시키는 차별이 있기 때문에 세 가지 ‘수’가 있음을 안다”고 설하였다. 즉 비록 모든 ‘수’에서 일체의 수면이 증장한다고 할지라도 소연(所緣)과 상응(相應)에 따라 증장하기 때문에 각기 개별적인 상으로 설하게 된 것이다. 또는 ‘치’는 비록 3수와 상응하고, ‘탐’과 ‘진’은 각기 두 가지 ‘수’와 상응할지라도 대부분의 ‘수’와 상응하여 현행하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이다.
또 어떤 설자(說者)는 “탐ㆍ진ㆍ치의 행상(行相)과 서로 유사하기 때문에 이같이 [3수를] 설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이같이 설하였다.
“대법(對法) 중에서 ‘낙수에서 탐이 수증(隨增)한다’고 설한 것은 낙수가 오로지 탐만을 일으킨다는 뜻이 아니라 다만 탐이 낙수에 따라 일어난다는 사실을 말한 것일 뿐이다. 그 밖의 두 가지 ‘수’와 진ㆍ치의 경우도 역시 그러함을 마땅히 알아야 한다.”
이제 [3수가 각기 개별적인 존재임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에 대해] 바로 설해 보자면, 교증(敎證)과 이증(理證)에 의해 세 번째 수(불고불락수)가 결정코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여기서 교증이라 함은, 예컨대 [계경에서] “고수가 끊어졌기 때문에, 낙수가 끊어졌기 때문에 여기에 오로지 불고불락수만이 존재한다”고 설한 것과 같다. 이증이란 ‘수’를 떠나 마음은 결코 생겨나지 않지만, 고수와 낙수를 떠나서도 마음은 바로 획득될 수 있기 때문에 [불고불락수가 존재함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수’를 떠나 마음은 결코 생겨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어떻게 안 것인가?
여러 계경에서 공통적으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계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안(眼)과 색(色)이 조건이 되어 안식(眼識)을 낳으니, 이 세 가지의 화합인 촉(觸)은 수(受)ㆍ상(想)ㆍ사(思)를 함께 일으킨다. 나아가 의(意)와 법(法)이 조건이 되어 의식(意識)을 낳으니, 이 세 가지의 화합인 촉은 수ㆍ상ㆍ사를 함께 일으킨다.”
이로 볼 때 ‘수’와 관계없이 일어나는 일곱 번째 마음은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 번째 수가 결정적으로 존재함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또한 모든 ‘수’에는 간략히 두 가지 종류가 있다고 설하고 있으니, 첫째는 집취수(執取受)이며, 둘째는 자성수(自性受)이다. 여기서 집취수란 능히 자신의 소연이 되는 경계 대상을 영납하는 것을 말하며, 자성수란 능히 자신이 따른 ‘촉’을 영납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세존께서도 “순락수촉(順樂受觸)과 순고수촉(順苦受觸), 그리고 순불고불락수촉(順不苦不樂受觸)이 있다”고 말씀하셨으니, 이는 바로 ‘낙수 등에 의해 영납된 촉’이라는 뜻이다.
그런데 소연을 영납하는 ‘수’와 경계(즉 지식의 대상)가 동일한 법(즉 그 밖의 심ㆍ심소법) 사이의 차별상은 참으로 알기 어려우니, 계경에서 “영납과 ‘수’를 함께 갖추었다”고 말한 바와 같다. 여기서 ‘영납과 수’라는 말은 혜(慧)에 근거하여 말한 것과 유사한 것으로, 그래서 그 계경에서는 그 뒤에 다시 “후유(後有)를 받지 않음을 참답게 안다”고 설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수’ 역시 경계 대상을 능히 영납하는 것일지라도 이러한 영납의 자성은 알기 어렵다. 그래서 ‘촉’을 영납하는 것을 ‘자성수’라고 하였으니, 이러한 ‘수’는 그 밖의 다른 법과 [영납이] 공통되지 않아 그 차별을 쉽게 알 수 있는 것이다.62)
이처럼 모든 ‘수’와 심(心) 등의 법은, 소연은 동일하지만 영납을 달리하기 때문에 [‘수’의] 소연(所緣, 대상)과 소령(所領, 영납되는 것, 즉 ‘촉’)은 각기 다르다. 이에 따라 ‘촉’은 ‘수’에 대해 어느 때 소령(所領)이 되면 이 때는 소연(所緣)이 되지 않으며, 또한 어느 때 소연이 되면 이 때는 소령이 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의] 소연과 소령은 다른 것이다.
이러한 사실에 의해 다음의 문구를 잘 회통시킬 수 있다. 즉 “낙수를 향수(享受)할 때 낙수를 향수함을 참답게 알며……(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라는 이 문구는, ‘능히 각혜(覺慧)에 의해 전도됨이 없이 3수의 차별을 헤아려 알아 즐겁지 않은 것을 고수라 하고, 괴롭지 않은 것을 낙수라 하며, 괴롭지도 즐겁지도 않은 것을 양자 모두 아닌 것이라 한다. 그 밖의 경우도 역시 이와 같다’는 의미를 설한 것이다. 즉 여기서 ‘[향]수’는 자성수를 영납하는 ‘수’가 아니라 바로 ‘수용하는 것 그 자체[受性]’이기 때문에 다만 소연으로서의 ‘수’와 그 밖의 다른 법을 영납할 뿐이니, 일체의 존재는 모두 심과 심소에 의해 영납되기 때문이다.
어떤 『아급마(阿笈摩)』에서는 이 같은 이치를 능히 잘 나타내고 있으니, 계경에서 말한 바와 같다.
“갖가지 계(界)를 조건으로 하여 갖가지의 촉(觸)이 있으며, 갖가지의 촉을 조건으로 하여 갖가지의 수(受)가 있으며, 갖가지의 수를 조건으로 하여 갖가지의 애(愛)가 있다.”63)
여기서 ‘갖가지의 계’란 근(根)ㆍ경(境)ㆍ식(識)을 말하니, 존재 본성과 양상에 차별이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까닭에서 갖가지 ‘계’를 조건으로 하여 갖가지 ‘수’가 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 또한 다시 어떠한 까닭에서 갖가지 ‘계’를 조건으로 하여 갖가지 ‘애’가 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인가?
이것도 역시 동일한 내용의 의문이다. 따라서 마땅히 함께 해석해 보아야 할 것이니, 순서대로 법이(法爾)로써 설명하면 아무런 허물이 없을 것이다. 세간을 살펴보건대, 선행한 종자로부터 이후 결과가 생겨난다고 할 때 꽃이나 젖 등의 차별이 있기 때문에 결과에 차별이 있다. [이렇듯 시간을 달리하여] 순서대로 생겨나는 것에 설정되는 인과가 결정적이듯이 동시생기[俱生]의 인과 역시 마땅히 결정적으로 설정되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수’ 역시 비록 ‘계’를 원인으로 삼을지라도 요컨대 ‘촉’을 근인(近因)으로 삼는다. 또한 두 개의 나무를 서로 문질러 불을 만들 때에도 바람을 근연(近緣)으로 삼는 것처럼, 이와 마찬가지로 세 존재(근ㆍ경ㆍ식)가 화합하여 ‘수’를 낳을 때에도 ‘촉’을 근연으로 삼는다.
그래서 ‘촉’을 영납하는 것을 ‘수’의 자성으로 삼은 것이지, ‘소연’을 영납하는 것[을 ‘수’의 자성으로 삼은 것]이 아니라는 이치가 결정적으로 성립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러한 ‘수’에는 (3)세에 근거하여 전체적으로 세 가지로 설하기도 하지만, 소의인 ‘촉’에 근거하여 여섯 가지 개별적 존재로 나누기도 한다.64)
2) 상온(想蘊)
수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세 번째 상온(想蘊)은 취상(取像)을 본질로 하니,65) 일체 모든 존재에 대해 본법(本法)에 따라 시설[安立, 安置建立의 준말]하는 것을 말한다. 즉 소연이 되는 대상 중에서 푸르거나 긴 형태 등의 색, 거문고나 고둥 등의 소리, 생련(生蓮) 등의 향기, 쓰거나 메운 등의 맛, 매끄럽거나 거친 등의 감촉, 생멸(生滅)하는 등의 법을 [본법의] 형상대로 취하기 때문에 상(想)이라고 이름하였다. 따라서 이러한 ‘상’은 속성[德]에 따라 그 명칭을 설정한 것으로, 능히 [그 같은 속성의] 형상을 취하기 때문에 ‘상’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러한 ‘상’도 전체적으로 세 가지, 개별적으로 여섯 가지로 분류하니, ‘수’의 경우와 같음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3) 행온(行蘊)
상온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네 번째 행온(行蘊)은 네 가지 온 이외의 나머지 온갖 행으로, 앞에서 설한 색ㆍ수ㆍ상의 세 가지 온을 제외하고, 그리고 다음에 설할 식온(識蘊)을 제외한 그 밖의 유위법을 일컬어 ‘행온’이라고 한다. 여기에는 상응행(相應行)과 불상응행(不相應行)이 있는데, 이를테면 순서대로 사(思) 등과 득(得) 등이 바로 그것이다.66) 그럼에도 계경에서 오로지 6사신(思身)이라고만 설하고 있는 것은,67) 그것이 가장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 까닭이 무엇인가?
‘사’는 바로 업으로서,68) 원인이 되어 결과를 초래하는 것 중에서 그 힘이 가장 강력하기 때문이다. 세존께서도 “능히 유루와 유위를 조작하는 것, 그것을 행취온(行取蘊)이라 이름한다”고 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오로지 이것(‘사’)만을 행온이라고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그럴 경우 그 밖의 다른 행은 색 등의 온에 포함되지 않기 때문에 마땅히 온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이와 같다고 한다면, [다시 말해 ‘사’만이 행온이라고 한다면] 여기에는 어떤 허물이 있게 되는 것인가?
[‘사’ 이외의 심소법과 불상응행법은 어떠한 온에도 포섭되지 않기 때문에] 고(苦)ㆍ집(集)이 아니어야 할 것이며, 그럴 경우 마땅히 알아야[應知] 하고 마땅히 끊어야 할 것[應斷]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69)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어떠한 과실이 있게 되는 것인가?
성교(聖敎)에 어긋나게 될 것이니, 세존께서 설하신 바와 같다.
“만약 어떠한 법에 대해서라도 아직 통달하지 못하였고 아직 알지 못한 것이 있다면, 능히 고(苦)의 변제(邊際, 종극, 즉 불생의 열반)를 지을 수 없다고 나는 설한다. 아직 끊지 못하였고 아직 멸하지 못한 법에 대해서도 역시 또한 이와 같이 설하리라.”70)
또한 만약 그 밖의 ‘행’은 마치 허공(虛空)이나 비택멸(非擇滅)과 같은 것이어서 그 같은 허물이 없다고 한다면, 이치상 역시 그렇지 않으니, 그러한 행법들은 바로 아집(我執, 자아관념)을 증장시키는 원인[事]이기 때문이며, 아집은 능히 괴로움이 다한 법(즉 무루법)을 장애하기 때문이다.
(1) 행온은 오직 사(思)일 뿐이라는 상좌설 비판
그런데 저 상좌(上座)는 “행온은 오로지 사(思)일 뿐이며, 그 밖의 작의(作意) 등은 바로 ‘사’의 차별이다”고 주장하고 있다.71) 그는 다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작의 등의 행(行)은 ‘사’를 떠나서는 그 자체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렇지만 ‘사’ 자체는 그 밖의 행을 떠나서도 [행온의] 일부로서 개별적으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인식할 수 있다. 이 같은 사실에 따라 행온은 비록 한 가지 존재가 아니라 할지라도 하나의 ‘사’에 포섭될 수 있으니, 그렇기 때문에 계경에서 ‘사’ 한 가지만을 언급하였을지라도 이치에 어긋나지 않는 것이다.”72)
작의 등 일체의 행(行)은 모두 ‘사’를 본질로 한다는 사실을 어떻게 알게 된 것인가?
박가범(薄伽梵)께서 계경 중에서 “6사신(思身)을 설하여 행온이라 한다”고 하셨기 때문이며, “탐(貪)ㆍ진(瞋) 등을 의업(意業)이라 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이숙(異熟)을 갖지 않는 비흑비백(非黑非白)의 업은 능히 모든 업을 멸진한다”고 설한 것은 ‘사’라는 말로써 성도(聖道)를 설한 것이기 때문이며, “한량없는 무색계의 모든 정려를 백백(白白)의 이숙업이라 한다”고 설하셨기 때문이다. 또한 마땅히 다른 명칭으로 다른 법을 설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며, 한 가지가 아닌 것을 한 가지로 설하는 것은 그릇된 말이기 때문이니, 모든 박가범께서 결코 그릇되게 말씀하신 일이 없는 것이다.
저 상좌의 종의에서 설하는 바가 이와 같지만, 이치상 그렇지가 않다고 해야 할 것이니, 앞뒤의 주장이 서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즉 그는 앞에서 ‘행온은 오로지 사(思)이다’고 설하였으면서 뒤에서는 ‘행온은 오로지 한 가지 존재가 아니다’고 말하고 있으니, 어찌 하나의 ‘사’가 바로 한 가지 존재가 아니라고 하겠는가?
[계경에서] 오로지 “6사(思)를 설하여 행온이라 한다”고 하였기 때문에 작의 등은 ‘사’를 본질로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고 한다면, 이는 이치상 옳지 않으니, 법을 설하는 방식이 각기 다르기 때문이다. 즉 경전을 살펴보면 세존께서 법을 설하는 방식에 여러 형태의 차이가 있으니, 혹 어떤 것은 처음의 것을 들어 뒤의 것을 포섭하기도 하며, 혹 어떤 것은 뒤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을 포섭하기도 하며, 혹 어떤 것은 처음의 것과 뒤의 것을 들어 중간의 것을 포섭하기도 하며, 혹 어떤 것은 중간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과 뒤의 것을 포섭하기도 하는 것이다.
어떠한 경 중에서 처음의 것을 들어 뒤의 것을 포섭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정려(靜慮)ㆍ식(食)ㆍ구파락가(瞿波洛迦)ㆍ불퇴타법(不退墮法)ㆍ집제(集諦) 등에 관한 경이 바로 그러하다. 즉 정려는 바로 4수등지(修等持)인데,73) 계경에서 설하기를 “만약 초정려를 닦으면 현법락주(現法樂住)를 획득한다”고 하였다. 그 밖의 다른 정려를 닦을 때에도 현법락주를 획득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의 것을 들어 뒤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으로,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여래꼐서 설하신 법에 감소함이 없는 것이다.
식(食)이란 4식을 말하는 것으로,74) 계경 중에서 “첫 번째 단식(段食)에는 거친 것도 있고 미세한 것도 있다”고 하였다. 그 밖의 세 식에도 거칠고 세밀한 것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의 것을 들어 뒤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구파락가(Gopālaka)라고 함은, [고파락가라고 하는] 경(『牧牛經』)에서 “색을 알지 못하였다”고 설한 것을 말하니, 그 밖의 다른 4온에 대해서도 이미 알았던 것은 아니지만 처음의 것을 들어 뒤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불퇴타법이라 함은,75) 경에서 “예류과(預流果)를 획득한 이는 더 이상 악취에 떨어지지 않는다”고 설한 것을 말하니, 그 밖의 다른 성자도 악취에 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의 것을 들어 뒤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집제라고 함은, 계경 중에서 “애(愛)를 집제라고 한다”고 설한 것을 말하니, 그 밖의 염오법도 집제에 포함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처음의 것을 들어 뒤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으로, 이에 대해서는 4제를 논설하면서 마땅히 별도로 밝히게 될 것이다. 이처럼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온갖 계경이 다 같이 최초의 것을 들어 뒤의 것을 포섭하고 있으니,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여래께서 설하신 법에 감소함이 없는 것이다.
어떠한 경 중에서 뒤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을 포섭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득(得) 자체와 식주(識住)와 복전(福田)에 대한 찬송 등에 관한 경이 바로 그러하다. 즉 득 자체란 4득 자체를 말하는 것으로,76) 계경 중에서 “비상비비상천(非想非非想天)에 태어나면 자해(自害)하지도 않지만 남을 해치지도 않는다”고 설하고 있다. 일체의 색계천과 무색계천에 태어날 때에도 자해하지도 않고 남을 해치지도 않지만, 뒤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식주란 7식주를 말하는 것으로,77) 계경 중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유색의 유정으로서 신체는 동일하지만 생각이 다른 극광정천(極光淨天)과 같은 곳이 바로 제3식주이다.”
즉 소광천(少光天)과 무량광천(無量光天) 역시 ‘유색의 유정으로서 신체는 동일하지만 생각이 다른 곳’이라고 말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뒤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복전에 대한 찬송이란, 이를테면 경에서 다음과 같이 설한 것을 말한다.
만약 아라한에 대해
미묘한 보시의 복덕을 닦으면
항상 온갖 천신(天神)들이
이를 찬탄하여 상스러움을 바친다네.
앞의 세 성자(예류과ㆍ일래과ㆍ불환과)에 대해 미묘한 보시의 복덕을 닦더라도 천신 등의 찬탄과 상스러움의 가피를 입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뒤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만약 ‘앞의 세 성자도 마땅히 공양을 받을 만하기 때문에 역시 아라한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였다면, 이러한 경은 불요의(不了義)를 설한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아라한이란 명칭은 무학(無學)을 위주로 하는 말이기 때문이다.
어떠한 경 중에서 다만 처음의 것과 뒤의 것을 들어 중간의 것을 포섭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출가를 찬탄하고 증정(證淨)을 찬탄하는 등에 관한 경이 바로 그러하다. 즉 출가를 찬탄하는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
모든 출가인들은
능히 예류과와
아라한과를 증득하니
이들을 지은 바가 많은 이[多所作]라 이름한다네.
출가인들은 일래과와 불환과도 증득할 뿐더러 [이들 또한] 지은 바가 많은 이가 아닌 것은 아니지만 다만 처음의 것과 뒤의 것을 들어 중간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이다.
증정을 찬탄하는 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하고 있다.78)
모든 유정이 여래에 대해
미묘한 믿음으로 동요됨이 없이 머물며
아울러 시라(尸羅)의 청정함에도 그러하면
항상 상스러움을 얻게 되리라.
법(法)과 승(僧)에 대해서도 미묘한 믿음으로 동요됨이 없이 머물면 상스러움을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처음의 것과 뒤의 것을 들어 중간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이다.
어떠한 경 중에서 다만 중간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과 뒤의 것을 포섭하고 있는 것인가?
이를테면 계경에서는 “만약 어떤 이가 제4정려를 수습(修習)하였다면 번뇌의 멸진[漏盡]을 획득하게 될 것이다”고 설하고 있다. 7의(依, 앞의 세 정려와 뒤의 4무색정)가 모두 능히 번뇌를 멸진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다만 중간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과 뒤의 것을 포섭하였기 때문에 이같이 설한 것이다.
이처럼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여러 계경에서는 모두 중간의 것을 들어 처음의 것과 뒤의 것을 포섭하고 있으니,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여래가 설하신 법에 감소함이 없는 것이다.
온갖 경이 이러하니, 이 경우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79) 즉 비록 행온이 [자상을 달리하는] 다수의 법이 모여 이루어진 것이라 할지라도 다만 처음의 것인 ‘사(思)’만을 언급하여도 아무런 허물이 없는 것이다.
어째서 최초에 작의(作意) 등을 언급하지 않은 것인가?
유위를 조작(造作)함에 있어 ‘사’가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그것만을 설한 것이니],80) 예컨대 [계경에서] ‘마음이 능히 이끈다’, ‘3처(處)에 현전한다’, ‘두 가지 법을 닦는다’ 등으로 설한 것과 같다.
‘마음이 능히 이끈다’고 함은, 이를테면 계경에서 “마음은 세간을 이끈다”고 말한 것을 말하니, 여기에 수(受)ㆍ상(想) 등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마음이 뛰어나기 때문에 그같이 설한 것이다.
‘3처(불ㆍ법ㆍ승)에 현전한다’고 함은, 이를테면 계경에서 “신(信)은 3처에서 현전하기 때문에 능히 많은 복덕을 낳는다”고 설한 것을 말하니, 여기에 무탐(無貪)ㆍ무진(無瞋)ㆍ정견(正見) 등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신’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그같이 설한 것이다.
‘두 가지 법을 닦는다’고 함이란, 계경에서 “마땅히 두 가지 법을 닦아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사마타(奢摩他)와 비발사나(毘鉢舍那)가 바로 그것이다”고 설한 것을 말하니, 일체의 선한 유위법을 마땅히 닦아야 하지만 [그 중에서도 사마타와 비발사나가] 지(止)와 관(觀)이 가장 뛰어나기 때문에 그같이 설한 것이다.81)
이상과 같은 등등의 경에서는 모두 뛰어난 법을 첫머리로 언급하였으니,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또한 불세존께서 [직접 설하지 않으신] 또 다른 설을 경전 곳곳에서도 찾아 볼 수 있으니, 예컨대 솔도파(窣堵波, stūpa, 탑)와 온갖 선사취(善士趣) 그리고 심해탈(心解脫)과 결(結, 번뇌의 異名)을 끊는 것 등에 관한 경이 바로 그러한 것이다.
‘솔도파’라고 함은, 이를테면 계경에서 “3인을 위해 마땅히 솔도파를 조성해야 할 것이다”고 설한 바와 같으니, 이러한 이치로 볼 때 이생(異生)은 진리를 본 자[見諦者]가 아니기 때문에 그들을 위해 솔도파를 조성해서는 안 된다. 따라서 이 경에는 그 밖의 또 다른 설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선사취’라고 함은,82) 이를테면 계경에서 “7선사취란 열반으로 나아가는 아라한과를 말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곧 그 밖의 성자(즉 불환과)도 비(非) 선사취로 태어나는 것은 아니니, 이 경에는 그 밖의 또 다른 설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심해탈’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계경에서 “아라한과를 획득하면 그의 마음은 욕루(欲漏)와 유루(有漏)와 무명루(無明漏)로부터 해탈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83) 그렇지만 [아라한과를 획득하면] 실로 일체의 모든 번뇌와 수번뇌로부터 해탈하니, 이 경에는 그 밖의 또 다른 설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결을 끊는 것’이라고 함은, 이를테면 계경 중에서 “3결(結)을 영원히 끊어 예류과를 증득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 곧 [예류과가] 견제소단(見諦所斷)의 일체의 번뇌를 영원히 끊지 못하였다는 것은 아니니,84) 이 경에는 그 밖의 또 다른 설이 있음을 마땅히 알아야 하는 것이다.
즉 이와 같은 경에서는 모두 뛰어난 것만을 설하고 있으니, 이것(‘사’)도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유위를 조작하는 공능이 뛰어나기 때문에 [경에서 행온을 6사신(思身)이라고 설하게 되었던 것이다].
어떠한 의미에서 “이것이 능히 유위를 조작한다”고 설한 것인가?
[이것에] 뛰어난 공능이 있어 결과를 이끌어내어 낳기[引生] 때문이다. 결과는 비록 본래부터 실재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 일부가 이[思]를 낳고 능히 이에 따라 인기(引起)되기 때문에 ‘조작한다’고 설하게 된 것이다.85)
그런데 저 상좌(上座)는 이같이 말하고 있다.
“‘유위를 조작한다’고 함은 ‘사’가 능히 조작한다는 말로서, 유위는 본래부터 존재하였던 것이 아니다. 마치 직공(織工)이 ‘나는 이러한 실로써 옷감을 짠다’고 말하는 것처럼 이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86)
그러나 이러한 주장은 필시 이치에 맞지 않으니, 근거를 갖는 것[有依, 옷감, 즉 유위]과 근거를 갖지 않는 것[無依, 직공, 즉 ‘사’]은 동일한 법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사’를 직공과 같다고 말하고, 일찍이 존재하지 않았던 유위를 옷감과 같다고 말하고 있는데, 옷감의 근거가 되는 실은 비유되는 바가 없다. 그러나 만약 미래의 유위법의 체(體)는 존재하지만 어떠한 작용[用]도 갖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조작’의 뜻은 이루어질 수 있으니, 상좌가 말한 실의 비유는 바로 미래법의 실재성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혹 [그렇지 않다고 한다면] 그가 설한 비유는 다만 말일 뿐 아무런 뜻도 없어야 하는 것이다.87)
즉 대법(對法)의 모든 논사들은 말하고 있다. 가유(假有)의 법(제법의 인연 화합에 의해 나타난 현재법, 즉 옷감)은 일찍이 존재하지 않다가 지금 존재하는 것이므로 이같이 비유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실체(현재법의 인연이 되는 법 자체, 즉 실) 역시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그는 결정코 이 같은 비유를 들어서는 안 된다. 또한 그는 마땅히 가유(옷감)와 실유(실)의 차이점을 말해야 하였던 것으로, 만약 양자가 다르다고 한다면 그러한 비유는 소용이 없을 것이며, 만약 다른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바로 공화(空花)와 같은 것(즉 헛된 것)이 되고 만다.
[또한 상좌는 ‘계경에서] “탐(貪)ㆍ진(瞋) 등을 의업(意業)이라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작의(作意) 등은 사(思)를 본질로 함을 안다’고 하였지만, 이치상 이 역시 옳지 않다.88) 탐ㆍ진ㆍ사견은 비록 그 자체 업은 아닐지라도 업의 자량(資糧)이 되기 때문에 역시 ‘업’이라 설한 것으로, 그 밖의 자량이 되는 것도 역시 그러한 각각의 명칭으로 불리는 것과 같다.89)
예컨대 계경에서 “여러 성자들을 친견하는 즐거움, [손쉽게 내려가고 올라갈 수 있는] 강물이나 계단ㆍ사다리의 즐거움”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 즉 그것 자체는 [즐거움이 아니지만] 즐거움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즐거움’이라 이름한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만약 혹 어떤 때 안근이 제어되지 않고 통제되지 않으면 이 법은 능히 좋지 못한 이숙(異熟)을 초래한다”고 설한 바와 같으니, 안근은 비록 이숙법이 아닐지라도 좋지 못한 이숙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능히 좋지 못한 이숙을 초래한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 “담론을 즐기는 것 등은 다섯 종류의 물러남의 원인[退具]이다”고 설한 바와 같다. 즉 진실로 물러남의 원인이 되는 것은 이를테면 온갖 번뇌이니, 물러남이라는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담론 등을 즐기는 것 따위도 바로 그 같은 물러남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물러남의 원인’이라고 일컬은 것이다. 또한 경에서 이같이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어리석은 이는 욕망에 집착하여 쟁론을 일으키나
모든 선인(仙人)은 욕망을 떠났기에 쟁론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마땅히 일체의 욕망을 버려야 할 것이니
마치 인각유독각(麟角喩獨覺)이 홀로 유행하듯이.
곧 경계 대상에 탐착하여 온갖 투쟁을 일으키는 것으로, 경계 자체는 실로 욕망이 아니지만 바로 욕망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욕망하는 것’이라 이름하는 것이다. 그래서 계경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미묘한 경계는 진실로 욕망하는 것이 아니다.
진실로 욕망하는 것이란 바로 사람이 분별하는 탐욕이라네.
또한 경에서 “증성(增盛)한 색은 수면(隨眠)이다”고 설한 바와 같으니, 색은 수면이 아니지만 바로 그것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그것과 같다고 설한 것이다. 또한 경에서는 이와 같이 설하고 있다.
여인은 범행(梵行)을 더럽히니
여인은 중생을 어지럽혀 해친다네.
즉 여인 자체는 진실로 더러움이 아니다. 더러움이란 탐 등을 말하는 것으로, 여인은 바로 더러움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더러움’이라 일컬은 것이다. 또한 계경에서는 7루(漏)를 널리 설하고 있다.90) 그러나 진실의 ‘누’는 오로지 두 가지(見漏ㆍ修漏)뿐이며, 나머지는 ‘누’가 아니지만 이는 바로 ‘누’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역시 ‘누’라고 이름한 것이다.
이상과 같은 경설에 따라 탐ㆍ진 등은 의업의 자량이 되기 때문에 ‘의업’이라 일컬은 것으로, 그 자체는 업이 아님을 논증하였으니, 이렇게 되어야 도리가 성취되는 것이다.
[또한 상좌는 ‘계경에서] “이숙을 갖지 않는 비흑비백(非黑非白)의 업은 능히 모든 업을 멸진한다”고 설하였으니,91) 이는 바로 사(思)라는 말로써 성도(聖道)를 설한 것이기 때문에 작의(作意) 등은 ’사‘를 본질로 함을 안다’고 하지만, 이치상 이 역시 옳지 않다. 즉 상(想) 따위와 같은 말로써 [성도(聖道)를 설하여도] 여기에는 어떠한 과실도 없으니, 계경에서 “무상(無常)의 상(想)을 닦아 능히 욕애(欲愛)와 색애(色愛)와 무색애(無色愛)를 제거한다”고 설한 바와 같다. 즉 거기서는 ‘상’이라는 말로써 성도를 나타내었지만 성도가 바로 ‘상’의 차별이 아님은 이미 인정된 바이다. 따라서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한 경우라 하여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
또한 ‘수(受)와 마음[意]이 능히 번뇌를 끊는다’고도 설하였다. 즉 계경에서는 “희각지(喜覺支)를 닦고, 이탐(離貪)의 마음에 의해 능히 [번뇌의] 소굴을 파괴한다”고 설하고 있지만, 성도가 바로 ‘수’나 마음의 차별은 아니다. 따라서 이 역시 마땅히 그러한 경우라 하여도 아무런 과실이 없는 것이다.
그리고 어떤 이는 “업은 중생을 속박한다”는 경설을 듣고서 ‘일체의 업은 능히 [중생을] 계박(繫縛)한다’고 말하기에 이와 같은 그릇되고 편벽(偏僻)된 집착을 제거하기 위해 ‘이러한 사업(思業, 즉 비흑비백업)은 능히 모든 업을 멸진한다’고 설한 것이다. 또는 [사]업의 뛰어남을 나타내기 위해 이같이 설하게 된 것이다.
[또한 상좌는 ‘계경에서] “한량없는 무색계의 모든 정려를 백백(白白)의 이숙업이라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에 작의 등은 사(思)를 본질로 함을 안다’고 하였지만, 이는 자세히 고찰한 바가 아니다. 왜냐하면 모든 정려 등은 5온과 4온을 자성으로 삼기 때문이니,92) 계경에서 “이러한 상태에 존재하는 모든 색, 혹은 수……(이하 자세한 내용은 생략함)……를 정려 등이라 이름한다”고 말한 바와 같다. 그러나 비유사(譬喩師)가 주장하는 업은 색의 존재[色性]가 아니다. 모든 업은 이숙을 초래하는 힘 가운데 가장 강력하다는 사실을 나타내기 위해 여기서 일체의 선한 5온의 법을 모두 ‘업’이라고 설한 것일 뿐이다. 또한 여기서 ‘수’, ‘상’ 그리고 ‘식’을 비록 업이라고 설하였을지라도 그 본질은 ‘사’가 아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 작의 등의 법도 역시 마땅히 ‘업’이라고 설해야 하겠지만, 그 본질은 ‘사’가 아니다.
만약 ‘수’ 등은 별도의 온에 포섭되기 때문에 그와 같은 허물이 없다고 말한다면, 이는 바로 ‘다른 명칭으로 다른 법을 설한다’는 사실이 성립될 수 있다는 말이다. 이러한 사실이 성립될 수 있음은 이미 앞에서 말한 바와 같으니, “탐ㆍ진 등을 의업이라 한다”고 설하였기 때문이다.93) 곧 [상좌가 주장하는] ‘사’의 이치가 성립하지 않음은 세간에서 바로 확인할 수 있는 지극히 상식적인 것[極成]으로, 자성을 달리하는 ‘수’ 등을 업이라는 말로 설할 수 있다면 그 밖의 법도 역시 마땅히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이로써 ‘마땅히 다른 명칭으로 다른 법을 설해서는 안 되기 때문에’라는 이 다음에 설한 [다섯 번째] 논거를 논파하였다. 다른 명칭으로도 역시 다른 법을 설한 경우를 볼 수 있으니, 예컨대 ‘능히 향기로운 보시[具香施]를 행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즉 보시의 본질은 사(思)이지 향기 등이 아니다. 그렇지만 향기로움을 생각함으로써 ‘사’를 낳기 때문에 다른 명칭으로 다른 법을 설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다.
[또한 상좌는] ‘한가지 존재[一法]가 아닌 것을 한가지 존재로 설하는 것은 그릇된 말로서, 모든 박가범께서 결코 그릇되게 말한 일이 없으므로 작의(作意) 등은 사(思)를 본질로 함을 안다’고 하였다.94) 그러나 이치상 이 역시 옳지 않으니, [한 가지 존재만을 설한 것은] 뛰어난 것에 대해 설하였기 때문이며, 명의(名義)의 상호 포섭 관계는 결정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95) 교화될 유정의 의요(意樂, 뭔가를 추구하는 목적 의식)가 다르기 때문이며, [그 같은] 불요의경(不了義經)은 지금 바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으로, 박가범께서는 이 말을 그릇되게 설한 것이 아니다.
만약 행온의 본질이 다만 ‘사’일 뿐이라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바로 세존의 말씀에 오류의 과실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세존께서는 한 가지의 법을 한 가지가 아니라고 설하였고, 다시 한 가지가 아닌 법을 한 가지로 설하였던 사실이 인정되기 때문이다. 만약 행온이 한 가지의 법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는 세존의 말씀에 오류의 과실이 없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논거는 다만 말일 뿐 어떠한 이치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가 주장한 바는 비량(比量, 추리)에도 어긋난다. 즉 ‘행온의 본질은 오로지 사(思)만이 아니다. 왜냐하면 보편적 개념[總想]으로 설정한 것이기 때문으로, 마치 법처(法處)ㆍ법계(法界)의 경우와 같다’고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만약 그렇지 않고 [상좌의 주장대로]라면 마땅히 ‘[행온을] 다만 사온(思蘊)이라고 말해야 한다. 왜냐하면 한 가지 법으로 이루어진 것이기 때문으로, 마치 수온이나 상온의 경우와 같다’고 말해야 할 것이다.
여기서 외적인 제6 법처ㆍ법계라는 말은 보편적 개념으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그 밖의] 11처와 17계에 포함되지 않는 다수의 법을 모두 포섭한다는 사실을 나타내듯이,96) 이와 마찬가지로 ‘행’이라는 말도 보편적 개념으로 설정된 것이기 때문에 4온에 포함되지 않는 다수의 행을 모두 포섭한다. 그러므로 행온의 본질은 오로지 ‘사’만이 아님을 알아야 하는 것이다.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러한 법처ㆍ법계와 마찬가지로 마땅히 ‘사(즉 행)’를 [5온 중] 맨 끝에 설했어야 할 것이다.
[논설하는] 순서에 따라 마땅히 이에 대해 설할 것이지만, 여기서 [설하는 것은] 유익하지 않기 때문에 그만두기로 한다.97)
또한 파초(芭蕉)를 행온에 비유하기도 하기 때문에 행온의 본질은 오로지 ‘사’만이 아님을 아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행온은 비유하자면 파초와 같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이는 곧 다수의 법이 행온의 본질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다. 또한 경에서는 상응(相應)이라는 말을 설하고 있기 때문에 행온의 본질은 오로지 ‘사’만이 아님을 아니, 이를테면 계경에서 “견(見)을 근거로 하여 신증(信證)과 지(智)가 상응한다”고 말하고 있는 바와 같다. 만약 ‘신’과 ‘지’가 모두 ‘사’[의 차별]이라고 한다면 이는 바로 ‘사’ 자체와 ‘사’가 상응하는 것이 되고 만다. 그러나 그 자체와 상응한다는 것은 이치상 마땅히 인정될 수 없는 것이다.98)
또한 작의(作意) 등은 마땅히 ‘사’의 차별이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이니, 계경 중에서 작의 등과는 관계없이 ‘사’를 별도로 설하고 있기 때문이다. 즉 계경에서 설하기를, “그들의 이와 같은 견(見)은 바로 이와 같은 ‘사’이다”고 하였다. 만약 그들의 사견이 바로 ‘사’[의 차별]이라고 한다면, 마땅히 ‘그들의 이와 같은 사는 바로 이와 같은 사이다’라거나 혹은 ‘이와 같은 견은 바로 이와 같은 견이다’는 뜻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이같이 말한다면 그 뜻이 어떻게 변별될 수 있을 것인가?
또한 경에서 “그들은 이와 같은 신(信)ㆍ욕(欲)ㆍ근(勤)ㆍ경안(輕安)ㆍ념(念)ㆍ지(智)ㆍ사(思)ㆍ사(捨)를 지니고 있으니, 이를 승행(勝行), 즉 뛰어난 행이라고 이름한다”고 설하고 있는 바와 같다. 만약 ‘신’ 등의 행이 바로 사(思)라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신’ 등을 설하고 나서 다시 ‘사’를 설하였을 것인가? 또한 이러한 모든 존재는 동시에 작용하는 것인데, 어떻게 하나의 ‘사’가 다수의 실체(즉 ‘사’ 이외의 제법)를 함께 일으킬 수 있을 것인가?
상좌(上座)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석하고 있다.
“이때 일어난 그 밖의 행을 포섭하기 위해 다시 사(思)를 언급하였다. 다시 말해 앞에서 ‘신’ 등을 설한 것은 이때 일어난 뛰어난 행(즉 사)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니, 예컨대 5탁법(濁法)이나 4수행(修行)의 경우와 같다.99) 즉 5탁 중의 견(見)은 비록 번뇌에 속하는 것일지라도 가장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다시 별도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그리고 4수행이란, 이를테면 계경에서 ‘신(身)ㆍ어(語)ㆍ의(意)의 묘행(妙行)과 정견(正見)을 닦고, 신ㆍ어ㆍ의의 악행과 사견을 끊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데, 정견과 사견은 의묘행과 의악행에 포함되지 않는 것이 아니지만 두드러진 것이기 때문에 별도로 설하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思)의 경우도 역시 마땅히 그러하다고 해야 한다.”
그러나 이치상 마땅히 그렇지 않으니, ‘신’ 등 역시 ‘사’에 포섭되기 때문에 마땅히 별도로 설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앞에서 이미 ‘이때 일어난 뛰어난 행을 나타내기 위해 신(信) 등을 설한 것이다’고 설하지 않았던가?
이미 그렇게 설한 것을 알고 있을지라도 이치상으로는 맞지 않으니, 하나의 법이 일시에 수(受)ㆍ상(想) 등과 같은 다수의 실체를 함께 일으킨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즉 ‘수’, ‘상’ 등은 하나의 존재상에서 즐거움이나 ‘작다’는 등의 차별로서 동시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다.100) 그렇기 때문에 저 상좌의 주장은 불법(佛法)의 종취가 아니다.
또한 만약 [계경] 곳곳에서 ‘사’를 언급하지 않았을 경우, 그러한 계경에서 설한 바에 마땅히 결여됨이 있어야 할 것이니, 이를테면 세존께서 “유학(有學)과 무학(無學)의 계(戒)ㆍ정(定)ㆍ혜(慧)ㆍ해탈(解脫)”이라고 말한 바와 같다.101) 즉 이 계경에서는 이미 ‘사’를 언급하지 않았으므로 마땅히 그 밖의 작의 등의 법도 부재한다고 해야 하는 것이다. 만약 [‘사’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듣는 자는 그것에 대해 이미 알고 있다고 한다면, ‘혜’ 등을 언급하는 것 역시 무용한 일이라고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해석상의 논거[因]는 결정코 옳지 못하며, 비유[喩]도 이치에 맞지 않는다. [의악행과는 별도로 사견을 설한 것은] 온갖 견(見)을 지니고서는 해탈하기 어렵기 때문으로, 온갖 ‘견’은 속박의 뜻이 견고하고 강성함을 나타내기 위해 번뇌와 전체적으로 구별하여 그 허물을 나타낸 것이다. 즉 의악행 중 사견은 [그 허물이] 가장 무겁다. 따라서 사견은 탐ㆍ진보다 두드러진 허물임을 나타내기 위해 이치상 반드시 끊고 대치해야 할 법[斷對治]을 전체적으로 구별하여 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의 경우 신(信) 등에 비해 두드러진 작용을 가졌다는 말은 일찍이 들은 적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이 같은 ‘사’를 전체적으로 구별하여 설하였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그의 비유는 법에 부합하지 않으니, 앞에서 이에 대해서는 논란한 바와 같다.
만약 신(信) 등은 사(思)를 자성으로 삼지만, ‘사’는 ‘신’ 등과 전체적으로 구별하여 설해야 한다고 주장한다면, 그 같은 이치도 성립하지 않으며, 그가 내세운 견(見)의 비유와도 매우 유사하지 않다.102) 즉 온갖 번뇌와 온갖 의악행은 모두 다 ‘견’을 본질로 삼는 것이 아닌데, 어찌 ‘견(見)을 전체적으로 구별하여 설하였기 때문에 그러한 예증에 따라 사(思)의 경우도 그것과 마찬가지로 마땅히 전체적으로 구별하여 설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설혹 그러한 작의 등의 법은 모두 ‘사’를 본질로 하는 것이라고 인정할지라도 여기서 설해진 ‘사’는 사견과 동일하지 않다. [사견의 경우] 색계ㆍ색처의 증상연(增上緣), 혹은 능작인(能作因), 혹은 분별혜(分別慧)와 수삼마지(修三摩地), 법계와 법처로서 행온으로 시설되지만, [만약 작의 등의 법이 모두 ‘사’를 본질로 하는 것이라면] 작의 등을 배제할 경우 대다수 ‘사’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또한 이 경 중에서 [이러한 ‘사’등의 법을] 별도로 설하고 있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즉 계경에서는 “만약 소수(所受, 지각되는 바)가 있으면 소사(所思, 뜻을 세우는 바)가 있고, 만약 소사가 있으면 소상(所想, 표상되어지는 바)이 있으며, 만약 소상이 있으면 소심(所尋, 추구하는 바)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103) 그런데 그(상좌)의 종의에서는 이미 ‘심’은 바로 ‘사’의 차별이라고 인정하였으므로 ‘심’을 언급하는 것은 거듭하여 말한 것이 된다.
이에 대해 저 상좌(上座)는 말하기를, “이 경에서는 거듭하여 말한 것이 아니니, 만약 ‘심’을 언급하지 않았다면 ‘사’가 바로 작의나 욕(欲) 등이라고 의심하게 되리라”고 하였다. 그러나 마땅히 의심하지 않을 것이니, [각기] 자상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한 법 자체가 바로 ‘사’라고 한다면 자상이 어떻게 다르다고 하겠는가?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심’을 언급하는 것도 마땅히 쓸데없는 일이라고 해야 할 것이니, 그(상좌)는 ‘심’과 ‘사’의 자상이 동일하다고 주장하였기 때문이다. 또한 작의 등이 바로 ‘사’라고 이미 인정하였으면서 ‘사’가 바로 그것이라고 의심한들 여기에 더 이상 무슨 허물이 있을 것인가? 그렇기 때문에 그의 말에는 도무지 어떠한 뜻도 없는 것이다. 또한 그가 말한 바는, 작의 등의 행은 ‘사’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지만 별도로 존재함을 안다는 것으로, 그럴 경우 ‘별도로 존재한다’는 지혜[別有智]를 올바로 부지런히 추구해야 함에도 어찌 무지하게도 작의 등은 모두 ‘사’ 자체를 떠나서는 별도의 존재성을 갖지 않는다고 하는 것인가?
또한 그대들이, ‘상(想)과 식(識)은 서로 유사한 시간에, 유사한 소의(所依)와 행상(行相)과 소연(所緣)에 근거하여 일어나기 때문에 비록 두 법의 차별을 나타낼 수 없다고 할지라도 그대들의 종의에서는 그 자체의 차이는 인정한다’고 빈번히 말하듯이 ‘사’와 작의 등의 관계도 역시 이와 같다고 해야 할 것이다. 비록 그대가 법 자체의 차이는 알지 못할지라도 어찌 차이마저 부정하는 것인가?
만약 작의 등의 본질이 ‘사’와 다르다고 한다면 어떠한 까닭에서 경에서 [그것을] 행온이라고 설한 일이 없는 것인가?
역시 또한 ‘행’이라고 설하였기 때문에 의미상으로는 이미 [행]온으로 설한 것이나 다름없다. 이를테면 심(尋)ㆍ사(伺)를 설하여 설행(說行)이라 하였고,104) 신(信)ㆍ욕(欲) 등을 설하여 승행(勝行, 뛰어난 행)이라 하였으며, 온갖 명근(命根, 목숨)을 설하여 수명행(壽命行)이라 이름하였으니, 이러한 법 자체는 [행]온에 포섭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바로 유위(행)이기 때문에 경에서는 그러한 법을 색(色)ㆍ수(受) 따위처럼 그 밖의 다른 온에 포섭시켜 설한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어떤 경 중에서는 [이처럼] 그러한 법을 ‘행’이라고 설하고 있으니, 예리한 근기를 지닌 자라면 어찌 행온이 아니라고 말할 것인가?
또한 예컨대 애(愛)를 제외한 그 밖의 후유(後有)의 원인이 되는 법을 설하여 비록 ‘집(集)’이라 하고 집제(集諦)라고는 말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대는 마땅히 제(諦)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니, 모든 인과법은 다 ‘제’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작의 등의 행 역시 마땅히 이와 같다고 해야 한다. 비록 ‘행’이라고만 설하고 행온이라고는 말하지 않았을지라도 그대는 마땅히 온에 포섭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해서는 안 될 것이니, 일체의 유위법은 모두 ‘온’에 포섭되기 때문이다. 곧 세존께서 [행온으로] ‘사’만을 설하신 것은 다만 그것이 수승한 법이기 때문으로, 작의 등도 행온에 포섭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또한 그(상좌)는 마땅히 “세존의 은밀한 말씀은 [그같이 ‘수승한 법이기 때문에’라는] 조건 없이[無緣] 설해졌다”고 말해서도 안 된다. ‘사’를 제외한 그 밖의 법이 행온에 포섭된다는 것은 앞에서 이미 논설한 것처럼 이치상 지극히 잘 성립하는데, 어찌 이것이 부처님께서 은밀한 말씀을 설하시게 된 인연이 아니었겠는가?105) 또한 행온이 ‘사’ 이외 다른 법도 포섭한다고 함은 이치상으로도 실로 그러해야 하는 것이다.
단지 ‘사’만을 설한 이러한 경설에 어찌 은밀한 뜻[密意]이 있다고 하겠는가?
만약 은밀한 뜻이 없다고 한다면, 이는 바로 ‘[부처님의] 말씀은 지혜에 따르지 않았다’고 세존을 비방하는 것이 된다. 그러나 만약 은밀한 뜻이 있다고 한다면, 부처님의 은밀한 말씀에는 [그 같은 말씀을 설하게 된] 인연이 있다는 사실이 저절로 성립한다.
따라서 ‘네 가지 온 이외의 나머지 행을 일컬어 행온이라 한다’는 사실은 이증과 교증에 부합하여 그 뜻이 매우 잘 성립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행온은 유의(有依)를 멸진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오로지 [3]세(世)에 근거하여 전체적으로 세 가지 종류로 설하고 있다.
4) 법처와 법계의 건립
앞에서 색온의 본질에 대해 분별하고 나서 다시 처(處)와 계(界)에 근거하여 두 갈래로 설정하였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여기서도 수ㆍ상ㆍ행의 세 가지 온의 본질에 대해 이미 분별하였으니, 역시 마땅히 처와 계로 설정해 보아야 할 것이다.
즉 이러한 세 가지 온과 무표색, 그리고 세 가지의 무위, 이와 같은 일곱 가지 법을 ‘처’의 갈래로 설정할 경우 법처(法處)라 하고, ‘계’의 갈래로 설정할 경우 법계(法界)라고 한다.
아비달마순정리론 제3권
변본사품 ③
2.3. 식온(識蘊)과 의처(意處)와 7심계(心界)
4온의 자성과 그것의 처(處)와 계(界)의 갈래에 대해 이미 논설하였다.
이제 마땅히 다섯 번째 식온(識蘊)의 자성과 그것의 ‘처’, ‘계’의 갈래에 대해 나타내 보아야 할 것이다.
게송으로 말하겠다.
식(識)이란 말하자면 각기 요별(了別)하는 것으로
이것은 바로 의처(意處)로 일컬어지고
아울러 7계(界)로 이름되니,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6식(識)이 [과거로] 전이한 것을 의계(意界)라고 함을.
논하여 말하겠다.
[본송에서] ‘식(識)이란 말하자면 요별하는 것’이라고 함은 바로 오로지 경계 대상의 상(相)을 전체적으로 취한다[總取]는 뜻으로, 그러그러한 경계 대상의 상을 각기 전체적으로 취하는 것을 일컬어 ‘각기 요별하는 것’이라고 하였다.1) 이를테면 그러한 안식(眼識)은 비록 색(色) 등 다수의 경계 대상이 현전(現前)하였을지라도 오로지 색만을 취할 뿐 소리는 취하지 않으며, 오로지 푸른 따위만을 취할 뿐 푸른색 따위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며, 또한 역시 마음에 든다[可意]거나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남성이라거나 여성 등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사람이라거나 책상이라고 말하는 것도 아니며, 획득하였다거나 상실하였다는 등으로 말하는 것도 아니다.2) 그러한 안식이 자신의 경계 대상에 대해 오로지 그 상을 전체적으로 취하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그 밖의 다른 식의 경우도 각기 상응하는 바에 따라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유여사(有餘師)는 설하기를, “오로지 법성(法性)에 대해 일시 작자를 가설함은 식을 떠나 ‘요별하는 자’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막기 위함이다”고 하였다.
다시 어떤 경우에 오로지 법성에 대해 일시 작자를 가설하는 것인가?
지금 바로 보건대 그림자를 설하여 ‘움직이는 것’이라고 하기 때문이다. 즉 그림자가 찰나의 간격도 없이[無間] 다른 곳에 생겨날 때 비록 움직임이 없을지라도 ‘움직이는 것’이라고 설하는 것이다. 식의 경우도 역시 또한 이와 같아 다른 경계 대상에 상속하여 생겨날 때 비록 움직임이 없을지라도 ‘요별하는 자’라고 설하니, [식은] 능히 경계 대상을 요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역시 어떠한 허물도 없는 것이다.3)
어떻게 그러함을 아는 것인가?
다른 곳에서도 작자에 대해 비판하고 있는 것을 바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세존께서 파륵구나(頗勒具那)에게 “나는 능히 요별하는 자가 존재한다고 끝내 설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와 같다.4)
또한 어떤 이는 설하여 말하기를, “찰나를 법성(法性)이라 이름하고, 상속을 작자라고 이름한다”고 하였지만, 이는 자의에 따라 설정된 생각일 뿐이다. [이에 대해서는] 「변연기품(辯緣起品)」(본론 제25권 ‘식’) 중에서 마땅히 다시 드러내어 논설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식은 [3]세에 근거하여 전체적으로 세 가지로 설하기도 하지만, 소의(所依)인 근(根)에 따라 개별적으로 분류할 경우 여섯 가지가 된다.5)
그리고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니, 여기서 논설한 식온을 처(處)의 갈래 중에 설정할 경우에는 의처(意處)가 되고, 계(界)의 갈래 중에 설정할 경우에는 7계(界)가 된다. 즉 [본송 중에서] ‘아울러’라고 하는 말은 하나의 법(즉 식온)을 두 갈래로 나누었음을 나타내는 것으로, 각각의 식 자체를 분별하여 ‘처’와 ‘계’로 나누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7계란 무엇인가?
6식계(識界)과 의계(意界)이다. 말하자면 안식계(眼識界) 내지 의식계(意識界)와, 이러한 6식이 [과거로] 전이한 것이 의계(意界)이므로 이것을 별도로 설정하게 된 것이다.
[이상에서 논설한] 온ㆍ처ㆍ계의 갈래는 제법을 모두 다 두루 포섭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1) 특히 의계(意界)에 대하여
여기서 마땅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만약 식온을 일컬어 7심계(心界)라고 한다면, 앞에서 식온은 소의인 근에 따라 개별적으로 분류할 경우 여섯 가지가 된다고 설하였는데, 이러한 6식을 배제하고서 어떠한 법을 다시 의계(意界)라고 이름할 것인가?
[6식을 배제하고서] 더 이상 다른 법은 존재하지 않으니, 이에 대해 게송으로 말하겠다.
바로 6식신(識身)이
무간에 멸함에 따라 의계가 되는 것이다.
논하여 말하겠다.
6식신은 무간(無間)에 멸하고 나서 능히 후찰나의 의식[後識]을 낳기 때문에 ‘의계’라고 이름하였으니,6) [작용하는] 시간이 다르기 때문에 별도로 설정하여도 과실이 없다. 비유하자면 여기서는 아들이고 열매였던 것이 다른 곳에서는 아버지가 되고 씨앗이 되는 것과 같다.
2.4. 18계의 성립 이유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계’ 자체는 마땅히 오로지 열일곱 가지가 되어야 하거나 혹은 오로지 열두 가지뿐이어야 할 것이니, [6식과 의계는] 서로를 포섭하기 때문이다.7) 어떠한 까닭에서 [의계 혹은 6식계를 설하여] 18계를 설정한 것인가?
게송으로 말하겠다.
여섯 번째 소의(所依)를 성취하기 위해서이니
그래서 18계가 된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하리라.
논하여 말하겠다.
이를테면 5식계와 같은 것은 안(眼) 등의 5계가 별도로 존재하여 그것을 소의로 삼지만 제6 의식의 경우에는 별도의 소의가 없다. 소연을 떠나 식이 일어나는 일이 없는 것처럼 소의를 떠나서도 역시 그러하여 식은 생겨날 수 없다. 즉 이것(제6 의식)의 소의를 성취하기 위해 의계를 설한 것으로, 이렇게 하여 소의(所依, 즉 根)와 능의(能依, 즉 識)와 경계에 각기 여섯 가지가 있어 계(界)는 열여덟 가지가 되는 것임을 마땅히 알아야 할 것이다.
어떻게 이미 소멸해 버린 법을 현행하는 식의 소의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바로 현행의 식을 낳는 직접적인 조건[隣近緣]이 되기 때문이다. 비록 색이 존재할지라도 요컨대 안근에 의지해야만 안식이 생겨날 수 있듯이, 이와 마찬가지로 비록 소연의 경계가 존재할지라도 후 찰나의 의식[後識]이 생겨나기 위해서는 요컨대 무간에 멸한 전 찰나의 마음(즉 의근)에 의지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본송에서 ‘무간에 멸함’이라고 말한 것은 소멸하고서 시간적 간격을 갖는[有間] 전 찰나의 마음 (다시 말해 전 찰나 이전에 소멸한 마음)도 [현행하는 식의 소의가 된다는 사실을] 부정하기 위해서였으니, 비록 일찍이 개피(開避)하였을지라도 [그것을 근거로 하여서는] 생겨나지 않기 때문이다.8)
이렇듯 무간에 이미 멸한 6식은 현행하는 식의 근거가 되기 때문에 그것을 설하여 의계(意界)라고 하였다. 혹은 현재의 식은 바로 능의(能依)로서의 작용을 성취하고서 과거로 낙사(落謝)하여 등무간연(等無間緣)이 되는데, 이 역시 현재의 식을 능히 결과로 취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의 식이] 비록 그것(무간에 멸한 전 찰나의 마음)을 근거로 하여 생겨났다 할지라도 그것에 수반되는 것은 아니니, 그래서 마음(전 찰나 마음)에 근거한 마음을 심소(心所)라고 이름하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심소법은 반드시 [현재의] 마음에 수반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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