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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여명을 맞이하는 공간 원문보기 글쓴이: 이준용
第5章 百 鶴 面
연천군 2읍 8면의 하나이다.
이 면은 본래 적성현(積城縣)의 지역으로, 옛 적성관아에서 북쪽에 위치하므로 북면(北面)이라 하여 학곡(鶴谷)·노곡(蘆谷)·구미연(龜尾淵)· 통구(通口)·전동(箭洞)·장곡(獐谷)·맹동(孟洞)·고촌(高村) 등 8개 동리를 관할하였는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의하여 적성현에서 마전군(麻田郡)으로 편입되면서 북면을 하신면(何新面)이라 개칭하였고, 1914년 4월 1일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장단군 지역에 속해 있던 장신면(長新面, - 옛 長湍都護府의 長東面 지역)의 백령(百嶺)·갈현(葛峴)·두현(頭峴)의 3개 리를 병합하여 백령리의 "百"자와 학곡리의 "鶴"자를 따서 백학면이라 하여 백령(百嶺)·두일(斗日)·노곡(蘆谷)·전동(箭洞)·학곡(鶴谷)·구미(九尾)·갈현(葛峴)·두현(頭峴)· 통구(通口)의 9개 리로 개편하여 관할하여 오다,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에 의해 남과 북이 분리되면서 대부분의 지역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남쪽 지역에 속한 노곡·학곡·구미리 일부 지역은 1945년 11월 3일 "군정법령 제22호"에 의하여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
그 후, 3년 동안의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60년 11월 18일 구역확장 규칙에 따라 노곡·학곡·구미리 일부 지역이 다시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며,
1963년 1월 1일 "수복지구와 동 인접지구의 행정구역에 관한 임시조치법"에 의거, 과거 장단군 지역이었던 장남면(長南面)의 원당(元堂)·자작(自作)·판부(板浮)·고랑포(高浪浦)·반정(伴程) 등 5개 리와 장도면(長道面)의 두매(杜梅)·매현(梅峴)·상(上)·중(中)·하(下)·사시(沙是)·항동(項洞)·오음(梧陰)·고읍(古邑)·석주원(石柱院) 등 10개 리, 대강면(大江面)의 청정(靑廷)·나부(羅浮)·포춘(浦春)·우근(禹勤)·독정(篤正) 등 5개 리를 병합하여 총 29개의 법정리가 되었으며,
1965년 4월 30일 "연천군 조례 제111호"에 의해 장남면 지역이었던 원당리를 관할하는 원당출장소(元堂出張所)를 설치하였고,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77호"에 의해 미산면 석장리(石墻里)를 본면에 편입하여 30개 리가 되었다가, 1989년 4월 1일 "군조례 제206호"로 원당출장소가 장남면으로 승격되면서 원당·자작·판부·고랑포·반정의 5개 리가 장남면에 편입되어 현재 25개 법정리를 관할하여 오늘에 이른다.
면의 동쪽은 미산면, 남쪽은 임진강을 경계로 하여 파주군 적성면, 서쪽은 북한 지역에 속한 장단군, 북쪽은 왕징면과 경계가 되는데, 총 15km의 군사분계선을 끼고 있는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백령리 일부와 두현리는 출입영농만 가능한 지역이고, 그 외 백령리 일부와 두일·노곡·전동·학곡·구미·석장·통구리를 제외한 전지역이 완충지대 및 북한 지역에 속해 있다.
□ 일반현황 면사무소 소재지 : 백학면 두일2리 367 - 5
(1994년도 통계연보 기준)
+--------+-------+-------------------+-----------+----------------------+
| | | 인 구 수 (명) | 인구밀도 | 리 수 |
| 면 적 |가구수 +------+-----+------+ +-----+-----+-----+----+
| | | 계 | 남 | 여 |(인/1km ) |법정 |행정 | 자연| 반 |
| (km ) | | | | | | | | 마을| |
+--------+-------+------+-----+------+-----------+-----+-----+-----+----+
| 65,71 | 1,032 |3,597 |1,865|1,732 | 54,7 | 25 | 11 | 16 | 38 |
| | | | | | | | | | | | | | | | | | | | | |
+--------+-------+------+-----+------+-----------+-----+-----+-----+----+
1. 백령리(百嶺里)
본래 장단도호부의 장동면(長東面) 지역으로, 고려시대부터 백령역(百嶺驛)이 있어 '백령리' 또는 '역말'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 장신면(長新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고,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군사분계선과 인접한 지리적 특성으로 인하여 일부 지역에만 민간인이 입주해 있고 그 외의 대부분 지역은 출입영농만 가능한 상태이다.
현재 2개의 행정리, 8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아랫꽃뫼(下花山洞) : 두일리 열묘각시꽃봉 서쪽에 있는 큰 마을. (두일리 "열묘각시꽃봉" 참고)
2 점터 : 화산동 위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옹기를 구웠던 가마가 있었다 한다.
3 밥재(食峴洞) : 상화산 서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전설에 의하면 예전부터 이 곳은 생계가 어려워 초목근피로 연명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나, 원래 '밖(外)'이라는 뜻이 다른 낱말과 합성되면서 엉뚱한 지명풀이가 된 곳이다.
백령리 전체의 입지조건은 사방이 산으로 둘러 있어 고개를 넘어야만 다른 지역과 통하게 되어 있는데 그 중심 마을인 역말에서 보면 이 곳이 가장 '밖에 위치한 고개'가 되어 처음에는 '밖재(外峴)'로 불리워 왔으나, '밖'의 옛말이나 사투리가 '밧'이었기 때문에 이 말이 땅이름에선 다른 낱말과의 합성과정에서 '밭'이나 '박' 또는 '밥'으로 옮겨가 차츰 '밖'의 뜻과 멀어지면서 '밥'이 되었고, 다시 '밥'을 음차한 한자이름인 '食峴洞'이 된 것이다.
4 배구슬 : 밥재 안에 있는 골짜기. 산(山)의 뜻인 고어의 '받'에 뿌리를 두고 음이 옮겨진 '산골짜기'의 뜻을 가진 곳이다.
5 백명고개(百名峴) : 백령리 역말과 갈현리 사이에 있는 고개. 전설에 의하면 예전 이 고개에 호랑이와 도둑이 항시 들끓어 100명이 모여야만 넘었던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달고 있으나, 이 고개 역시 산(山)의 뜻인 '받'이 '백'으로 음이 변하여 '백고개'로 불리워지면서 백령리의 유래가 되는 한자지명의 '百嶺'으로 표기된 단순히 '산고개(山峴)'라는 본래의 뜻을 가진 곳일 뿐, 사람의 수 '100(百)' 과는 무관한 땅이름이다.
6 큰뒤골 : 백명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역말의 뒤에 있는 큰 골짜기라 하여 붙여 진 이름이다.
7 수리봉(179m) : 백명고개 북쪽에 있는 뾰족한 봉우리. 하늘을 날아다니는 수리와는 무관한 단순히 '높은 봉우리'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신서면 대광리 "수 리봉" 참고)
8 수리너머 : 큰뒤골에서 수리봉 옆을 지나 갈현리의 점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
9 독조골 : 역말에서 쇠파리산까지 있는 긴 골짜기. 갈현리의 점말에 있던 옹기점(=독점)으로 넘어가는 고개(=재)가 있는 골짜기라 하여 '독재골'로 불리웠던 것이 '독조골'로 음이 변한 이름이며, '독주골'이라고도 불리워진다.
10 한섬지기들 : 독조골 중앙에 있는 한섬지기 넓이가 되는 들.
11 논고래 : 독조골에 있는 고래실논. '용우물자리'라고도 불리워지며, 가뭄이 심하게 들면 기우제를 지내던 곳이다.
12 장고개(場峴) : 독조골에서 장단의 구화장(九化場)으로 넘어다니던 고개. 갈현리의 점말과 통한다 하여 '점말고개'로도 불리워진다.
13 쇠파리산 : 수리봉 북쪽에 있는 산. 일제 강점기 때 금이 매장되어 있다 하여 광산을 개발하였으나, 소량의 쇠와 황이 나와 폐광이 되었다 한다.
14 가마골(釜谷) : 쇠파리산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가마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전해 오나, 원래의 뜻은 '큰 골짜기'라는 의미의 고어인 '감'에 뿌리를 두고 있다. (연천읍 부곡리 "가마골" 참고)
15 두루봉(187m) : 가마골 북쪽에 있는 봉우리. 정상에 올라서면 사방이 두루 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이 봉우리 정상에서 북서쪽 500m 지점의 능선 후사면에 북한의 남침용 제 1땅굴이 위치한다.
16 장승고개 : 염수골에서 왕징면 작동리로 넘어다니던 고개. 예전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 요골(要玉洞) : 염수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18 진고개 : 백령리에서 왕징면 작동리의 곰장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비가 오면 땅이 몹시 진 곳이 되어 지어진 이름이다.
19 염수골(廉水洞) : 역말 북쪽에 있던 마을. 염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0 구산터(九山, 李持平谷) : 역말과 염수골 사이에 있는 산. 아홉 구(九)자 형국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지평 벼슬을 한 이모(李某)의 묘가 있다 하여 '이지평골'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21 쉰마지기들 : 역말 위에 있는 50마지기가 되는 들.
22 역말(驛村, 新村) : 백령리 중앙에 있던 마을. 고려 ∼ 조선시대에 장단의 동파역(東坡驛)과 연천의 옥계역(玉溪驛 : 군남면 옥계리 소재)을 연결하였던 백령역(百嶺驛)이 있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옛 역사(驛舍)의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이 일대 모두가 농경지로 변해 있다.
≪여지도서≫ 장단도호부편 역원조에는 이 역의 규모를 아래와 같이 적고 있다.
- 百嶺驛在府東五十里桃源道屬 上等馬二匹 中等馬五匹 下等馬二匹 史十六名 奴十八名 婢十二名 -
또한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고려 말의 명신이었던 안 축(安軸)의 오언율시가 실려 있다.
□ 안 축의 백령역 시
歸路天容慘 귀로에 하늘 모습 찌푸려 있는데
凍雲增暮寒 겨울철 찬 구름은 저녁 추위 더해 주네.
眼明爲傳舍 눈꼽아 고대하던 백령역사(百嶺驛舍)에 찾아 드니
身倦 征鞍 여정(旅程)에 지친 곤한 몸 말안장을 내려오네.
喬木藏煙塢 큰 나무는 언덕 마을의 연기를 머금고
靑松立雪巒 푸른 소나무는 눈 쌓인 봉우리에 우뚝 서 있구나.
倚窓瞻 嶺 창문에 기대어 먼 데 산봉우리를 둘러보니
蒼翠出雲端 푸른색 단정한 구름이 뭉게뭉게 피어 오르네......
23 대촌동(大村洞) : 역말 동쪽에 있던 마을로, 소촌동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24 소촌동(少村洞) : 대촌동 옆에 있던 마을.
25 달봉 : 역말 동쪽에 있는 봉우리. 매년 정월대보름이 되면 이 봉우리 정상에서 달맞이를 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담고 있으나, 산(山)을 뜻하는 '달'과 봉우리가 합쳐져 '산 봉우리'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일 뿐 '달(月)'과는 거리가 먼 산이름이다. 또한 이 봉우리 정상에는 산제를 올리던 산제당이 있었다 하여 '산제봉'으로도 불리워진다.
26 배목이(梨木洞) : 달봉 동쪽에 있던 마을. 배나무가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로 전해 오나, 실제로는 '산(山)'의 뜻인 고어의 '받'에 어근을 두고 음이 변한 '배'와 '목(項)'이 합쳐진 것으로, 배나무와는 관련이 없는 '산을 넘어 가는 목에 있는 마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곳이다.
27 원네미(院踰) : 배목이에서 왕징면 작동리의 돌모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8 차일봉(遮日峰. 152m) : 백령리·석장리·작동리 경계에 있는 산. (석장리편 참고)
29 망재 : 차일봉 남쪽, 백령리·두일리·석장리 경계에 있는 산.
30 절골 : 망재 남쪽에 딸린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나, 지금은 그 유지가 멸실되어 흔적이 남아 있지 않고 문헌에도 나타나 있지 않다.
31 석물세기 : 샘골 동쪽에 있는 산 등. 전설에 의하면 큰 석물을 갖춘 김자점의 조상 묘가 있던 곳이었으나, 그가 역모에 의해 처형되자 이 곳에 있던 묘도 파헤쳐 버렸다 한다.
32 떡논 : 샘골에 있는 여섯마지기 크기의 논. 가뭄이 아무리 심하게 들어도 항상 곡식이 잘되어 떡을 해 먹었다 한다.
33 한세울고개 : 샘골에서 두일리의 한세울로 넘어 다니던 고개.
34 삭시골 : 샘골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35 샘골(泉谷) : 달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샘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파평 윤씨와 원주 원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36 강가물자리 : 달봉 남쪽에 있는 논. 조금만 가뭄이 들어도 모를 내지 못하는 한답(旱畓)이 되어 붙여진 이름으로, 논바닥에 자갈이 많아 '작논'이라고도 불리워지던 곳이다.
37 느티쟁이(槐木亭) : 대촌동 남쪽에 있던 느티나무 정자터. 6·25 전까지도 약 400 년 수령의 큰 느티나무와 주막이 있었으나, 지금은 아무 흔적도 없이 농경지로 변해 있다.
38 소도둑골 : 강가물자리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예전에 어떤 사람이 소를 훔쳐다가 이 골짜기 안에서 잡아 먹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골짜기 정상부분에 피부병에 효험이 있는 옻물약수가 있다.
39 큰뒤골(後洞) : 소도둑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윗꽃뫼 마을의 뒤에 있다 하여 붙 여진 이름이다.
40 작은뒤골 : 큰뒤골 아래에 있는 골짜기로, 큰뒤골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41 공조전서 민중훤 묘(工曹典書 閔仲萱 墓. 고려장)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42 윗꽃뫼(上花山洞) : 민중훤 묘 아래에 있는 마을. 6·25 전에는 여흥 민씨 소윤공파 후손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두일리 "열묘각시꽃봉" 참고)
* 제 보 자 : 이 순 성(81) 백학면 백령1리 761
정 해 철(79) 백령2리
2. 두일리(斗日里)
본래 적성현(積城縣) 북면(北面)의 지역으로,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적성현에서 마전군(麻田郡) 하신면(何新面)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에 편입되면서 기존의 장곡리(獐谷里)와 고촌리(高村里)를 병합하여 '두일'이라는 골짜기에서 이름을 따 두일리(斗日里)라 하여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3개의 행정리, 13개 반, 6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며, 백학면의 중심지가 되는 곳이다.
1 국사봉(國師峰) : 백학면의 두일리·전동리·두현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여흥 민씨≪小尹公波世系譜≫를 참고해 보면, 고려말 두일리에서 태어나 개성부소윤(開城府 小尹)을 역임했던 민보문(閔普文)이 고려가 멸망하자 망국의 한을 품고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에 있는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고려 신하로써 충절과 청백한 기개로 순절하였는데,(두문동 72현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아들인 군수 민이안(閔而安)이 선친의 친교에 따라 3대에 걸쳐 살아온 이 곳으로 낙향하여 이 곳의 지명을 두문동의 '杜'자와 일민지의(逸民之意 : 백성을 편안히 한다는 뜻)의 '逸'자를 따서 '두일'이라 명명하고 매일 이 산에 올라 송악(개성)을 향하여 곡하고 재배하며 고려 신하로써 절개를 지키며 생을 마쳤다 하여 '국사봉'이라 이름지었다는 사적과 유래가 기록되어 있으나, 전국적으로 분포되어 있는 '杜'와 '斗'자가 들어가 있는 곳의 지형적인 공통점과 어원의 분석을 통해 보면 아래와 같은 본래의 뜻을 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두'는 경기도와 황해도 일원의 땅이름에 특히 많이 분포되어 있는데, 그 말의 뿌리는 백제어 계통의 '둥글다','둘님'의 뜻으로 쓰인 뿌리말 '둠'에 두고 있으며, 그러한 지명이 쓰이고 있는 곳의 지정학적인 특징 모두가 산으로 둘러 쌓인 골짜기 안에 마을이 위치해 있다는 공통점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곳 두일리(斗日里)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어서 '큰두일','작은두일'이라는 크고 작은 골짜기에 마을이 자리잡아 '둠'이 마을·골짜기라는 뜻으로 쓰이는 말인 '일' 과 합쳐지며 '두일'이 되었으나, 한자로 지명을 부여하면서 아무 연관이 없는 오늘날의 '斗日'이 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민이안에 의해서 '杜逸'로 명명되기 이 전부터 '산 골짜기 마을'의 뜻인 '두일'이라는 우리말의 고유명칭으로 이 곳이 불리워졌던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2 노리울(獐谷洞) : 국사봉 동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박 진 장군의 후손인 밀양 박씨가 집성을 이루었던 곳으로, 골짜기 안이 넓다 하여 '넓은 골' 의 뜻인 '너르골'로 불리워왔으나, 우리 지방의 사투리지명으로 정착되면서 '너르'는 '노루'로, '골'은 '울'로 굳어지면서 아무런 관련이 없는 '노루 장(獐)'자를 취한 지명이 된 곳이다.
3 박 진 장군 묘(朴晋 將軍 墓) : 지정문화재편 참고.
4 발악이(發岳洞) : 노리울 북쪽에 있는 마을. 처음에 이 곳은 두일리 중앙에 펼쳐진 넓은 들판에서 안쪽에 마을이 있다 하여 '벌안'으로 불리워 왔으나, '벌안'이 '발안'으로 음이 옮겨지고 다시 아래와 같은 변화를 거치며 '발악이'로 정착된 땅이름이다.
벌안(野內) > 발안 > 바란 > 바랑 > 바랑이 > 발악이(發岳洞)
5 작은두일(小斗日) : 발악이 서북쪽에 있는 마을로, 큰두일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6 장고개(場峴) : 작은두일과 두현리의 성주 사이에 있는 고개 이름.
7 큰두일(大斗日. 杜逸洞) : 백학면사무소 서쪽에 있는 마을. 고려 말 군수 민이안(閔而安)이 정착한 곳으로 전해 오며, 6·25 전에는 평양 조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국사봉 참고)
8 아랫꽃뫼(下花山洞) : 백학면사무소 서북쪽, 백령리와 이어져 있는 백학면에서 가장 큰 마을로, 6·25 전에는 하동 정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열묘각시 꽃봉 참고)
9 열묘각시꽃봉 : 백학면사무소 북쪽에 있는 작은 산봉우리. 석장리 차일봉에서 남쪽으로 쭉 뻗어 내려와 조그만 동산처럼 생긴 꽃봉에서 멈춘 3km에 이르는 긴 산부리가 마치 새의 주둥이처럼 길게 뻗어 나왔다 하여 그러한 지형을 일컫는 우리 고어인 '곶(串)'과 이 봉우리를 뜻하는 '뫼(山)'가 합쳐 '곶뫼'라 불리웠던 것이 한자로 지명을 표기하는 과정에서 '곶'을 '꽃(花)'으로 대역하여 지금의 '꽃뫼','꽃봉'으 로 불리우게 된 것이며, 주위에 있는 마을도 이 봉우리를 기준으로 하여 윗꽃뫼(上 花山洞), 아랫꽃뫼(下花山洞)로 잘못 표기되어 씌어지고 있는 상태이다. 또한 이 봉 우리에는 아래와 같은 전설이 전해 오고 있다.
고구려 때에 꽃봉 북쪽에 있는 높은골(高村洞)에 고을을 다스리던 관아가 있었는데, 어느날 새로 부임한 원님의 부인이 바람이 나 외간남자와 간통을 하게 되었다. 이 사실을 안 원님은 분개하여 자기 부인을 처형, 꽃봉에 묻고 또 다시 이런 변이 일어나지 말라고 무당을 불러 자리걷이굿을 하는데, 무당의 점괘가 서남쪽 산 위에 있는 꽃모양의 바위를 흙으로 덮어야 후일 우환이 없어진다고 하여 원님은 무당의 말을 믿고 당장 그 바위를 흙으로 덮어 버렸다 한다.
그러나, 어찌된 일인지 그 뒤로부터 이 산 아래에 있던 마을에 갑자기 괴질이 돌고, 가축이 이유없이 죽는 등, 온 마을 전체가 심한 병고에 시달리는 우환이 들끓기 시작했고, 다급해진 마을 사람들은 다른 무당을 찾아가 물어보니 그 이유가 꽃뫼에 꽃바위를 흙으로 덮어 산신이 크게 노한 까닭이라는 점괘가 나왔다. 이 말을 들은 꽃뫼마을 사람들은 이 꽃바위를 원래의 모습대로 파 헤쳐 놓자 그 즉시로 마을에 일던 재앙이 그쳤다 한다.
그러나, 다시 재혼한 높은골의 원님 부인 역시 또 바람이 나서 외간 남자와 놀아나기 시작했고, 이 사실을 안 원님은 둘째 부인도 처형하여 매장하려 이 곳에 와보니 꽃바위가 모두 파헤쳐져 있어 무당의 말대로 다시 흙으로 덮어 버렸다. 그러자 꽃뫼 마을에 먼저와 같은 재앙이 계속 일어나 마을 주민들이 꽃바위에 다시와보니 꽃바위가 흙에 덮혀 있으므로, 밤중에 흙을 모두 파 헤쳤다 한다. 그 후 이 바위를 놓고 꽃뫼마을과 원님이 사는 높은골 마을사람들 사이에 묻고, 파헤치고 하기를 10 여 차례 하다보니 원님의 후취, 3취, 내지 10취까지 모두 간음한 죄로 죽어서 이 봉우리 정상부위에 원님의 부인 묘 10기가 즐비하게 늘어서게 되었으며, 그 이후로 후 세 사람들은 이 봉우리를 '열묘(十墓)각시 꽃봉'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지금도 이 곳에는 열묘각시의 묘가 있다 하며, 많은 사연을 간직한 꽃바위는 흙 에 반쯤 덮여 있는 상태이다.
10 만가대(萬家垈) : 높은골 앞에 있는 넓은 들판. 예전에 연천현감을 지낸 홍 모(?) 의 묘를 이 곳에 쓸 적에 풍수에 밝은 어떤 지관이 묘 앞에 있는 넓은 들판이 뒷날 만가구가 들어설 곳이라 하여 이름지었다 하며, 또 다른 이름으로는 '축동(築 : 청산면 백의리편 참고)'이라고도 한다.
11 높은골(高村洞) : 꽃봉 북쪽에 있는 마을. 지대가 높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전 설에 의하면 고구려 때에 고을 원이 있던 곳이라 한다. 6·25 전에는 청주 한씨와 남양 홍씨들이 주성을 이루었던 곳이며, 이 마을 서쪽 산록에는 조선시대 오위부사과(五衛副司果)를 지낸 남 계(南 )의 묘가 있다.
12 뒷골 : 높은골의 뒤에 있는 골짜기.
13 텃골 : 뒷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14 가래녀골 : 한세울 서쪽에 있는 골짜기.
15 망재 : 한세울 북쪽, 백령리·석장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16 한세울(漢寺洞) : 만가대 북쪽, 망재까지 뻗어 있는 큰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던 곳이라 전해 오나, 원래의 뜻은 절(寺)과는 무관한 여러가지 뜻이 합하여 이루어진 골짜기 이름이다.
먼저 앞음절 '한'은 어떤 명사 앞에 붙어서 '크다'는 뜻을 나타내고 있고, '세 (寺)'는 '사이(間)'의 뜻으로 쓰이는 '새'가 한자의 '寺'로 음차하여 '울(谷,洞)' 과 합하면서 마치 예전에 큰 절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게 하고 있으나, 원래는 높은골과 동촌말 '사이에 있는 큰 골짜기'라는 뜻을 가진 땅이름이다.
17 동촌말(東村洞) : 높은골 동쪽에 있는 마을.
18 정문거리(旌門巨里) : 동촌말 동쪽에 있는 골짜기. 일제 강점 말기까지 열녀문이 있던 곳이었으나, 6·25 때 전소되었다 한다. 지금은 이 곳에 군부대가 주둔하고 있다.
19 고래우물 : 정문거리 남쪽에 있던 우물. 지금은 매몰되어 논으로 변해 버렸다.
20 전적골 : 고래우물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21 찬우물골(寒井洞) : 백학저수지 북쪽에 있는 마을. 예전에 찬우물이 있었으나 도 로가 개설되면서 매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찬우물은 미산면 아미1리의 '윗찬우물'과 이 곳의 '아래찬우물'로 나뉘는데, 적 성의 옛지리지를 참고해 보면 조선시대에 급행(急行) 여행자의 숙소(宿所) 및 그 밖의 편의를 위해 역과 역중간에 설치된 건물인 '참(站)'이 있던 곳이라 하여 아래와 같이 기술되어 있다.
-- 下寒井站在縣北二十五里今廢有遺址 --
22 백학저수지(百鶴貯水池) : 찬우물 동쪽, 아미리와 경계에 있는 저수지. 일제 강점기 때인 1942년 처음 축조되었으나 규모가 적어 1963년 현재의 규모로 확장, 축조하였다. 총 저수면적 119,000m 이고 지금은 낚시터로 널리 알려진 명소이다.
23 두일장거리(斗日場巨里) : 백학면 사무소 주위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번성했던 두일장이 섰던 곳으로, 5·10일에 개장되어 오다 지금은 화산동에서 장이 열려 그 전통의 맥이 이어지고 있다.
24 만가대산(萬家垈山. 112m) : 발악이 동쪽에 있는 산. 만가대의 안(案)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5 구장거리(舊場巨里) : 만가대산 서쪽 골짜기에 있는 마을. 조선시대 최초에 두일장이 열렸던 곳이었으나, 여름우기 때 임진강물이 자주 범람해 이 곳까지 역류하여 장이 설 수 없게 되자 자연히 장거리를 지금의 두일장거리로 옮겨와 그 뒤부터 이 곳을 '구장거리'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26 두일천(斗日川) : 왕징면 작동리의 가마골에서 발원하여 두일리를 지나 임진강으로 합류하는 준용하천. ≪적성읍지≫ 산천조에는 작동리와 백령리에서 내려오는 두 개울이 합하여 흐른다 하여 '二川'으로 기재되어 있다.
* 제 보 자 : 이 순 성(81) 백학면 백령1리 761
정 해 철(79) 백령2리
홍 종 덕(55) 두일1리
3. 노곡리(蘆谷里)
본래 적성현(積城縣) 북면(北面)의 지역으로, 임진강변에 갈대가 무성히 우거져 있으므로 '갈울' 또는 '노곡'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麻田郡) 하신면(何新面)에 편입되었다가,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을 경계로 하여 일부 지역이 북한에 놓이게 되었으며 남한 지역은 동년 11월 3일 "군정법령 제22호"에 의하여 파주군 적성면으로 편입되었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60년 11월 18일 구역확장규칙 개정에 따라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노곡리 전지역은 6·25 전까지 문화 류씨의 집성촌이었다)
현재 2개의 행정리, 10개 반, 3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뒷개(後浦) : 노곡리 서쪽, 임진강과 사미천이 합류하는 곳에 있는 들.
2 길허리밭(=기러기밭, 긴사래밭) : 뒷개 북쪽에 있던 약 300m 길이의 긴 밭.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 논으로 변해 있다.
3 어석밭 : 뒷개 동쪽에 있는 밭. 전체 모양이 양 귀퉁이가 둥글지 않고 삼각형으로 되어 있어 '모난 구석'의 방언인 '어석'에서 뜻을 따와 지어진 이름이다.
4 한염들(= 한양벌) : 노곡에서 두일리간 뻗어 있는 349번 지방도 서쪽에 있는 넓은 들. 전설에 의하면 조선이 건국되면서 이 곳에 도읍을 정하려 했으나, 임진강물이 크게 범람하는 것을 보고 논의를 중지했다 하여 이 벌판을 한양이 될 뻔한 곳이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5 참나무쟁이(眞木洞) : 노곡초등학교 서쪽에 있던 마을. 6·25 전까지도 큰 참나무가 많아 마을 정자터가 되었던 곳이며, 굵은 느티나무는 부군나무로 받들었으나, 6·25 때 모두 없어졌다.
6 만두미(萬豆米, 滿豆米) : 노곡리와 통구리 경계에 있던 마을. 조선시대 병사(兵使)를 지낸 허모(許某)의 99칸 규모가 되는 큰 기와집이 있어 늘 많은 곡식이 곳간에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담고 있으나, 원래 만두미의 뜻은 '둥글다(圓)','둘러싸임(四園)'의 의미로 씌었던 우리의 고어인 '둠'에 어근을 두고 있다.
이 곳의 어근인 '둠'은 '둠이'→'두미'로 음이 옮겨갔고, 안(內)의 뜻과 합쳐지며 '안(內)+두미(谷)'가 되었으며, 다시 발음이 변한 '만두미'가 되어 '골짜기 안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씌어오다 한자로 지명이 옮겨지며 그럴 듯한 풀이와 유래가 된 예이다. 6·25 전에는 김해 김씨들이 마을을 이루며 살던 곳이다.
7 바래미모퉁이 : 노곡리 마을 주유소 앞에 있는 산 모퉁이. 산자락 끝이 넓게 벌어져 이 산을 '발리산(勃里山)'이라 이름지었으나, '발리'가 '바래미'로 어휘가 변한 이름이다.
8 진목동 : 바래미모퉁이 부근에 있는 마을. 비가 오면 통행이 어려울 정도로 땅이 몹시 질어 붙여진 이름으로 '큰말'이라고도 한다.
9 지구리(只谷洞) : 진목동 동쪽, 생기리고개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지씨 성을 가진 부자(富者)가 살았다 한다.
10 생기리고개(香吉峴) : 진목동에서 노곡2리의 향길리로 넘어가는 고개. 향(香)이 구개음화로 인하여 '생'으로 음이 변하여 불리워지는 곳이다. 향길리 마을에서는 이 고개에 꽃나무가 많이 자생한다 하여 '꽃나무골고개'라 부른다.
11 가여울(戌灘, 개여울) : 틸교 아래에 있는 임진강 여울. 강물이 이 곳에 이르러 넓게 흐르면서 얕은 여울을 형성하는데 그 깊이가 개도 걸어서 건널 수 있을 정도로 얕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또한 이 여울 위에는 6·25 전까지도 강화, 서해안 등지에서 올라온 새우젓, 소금배들이 정박하며 물물교환을 했던 포구가 형성되었던 곳이다.
12 강승쟁이다리(降仙亭橋, 틸교) : 노곡리와 파준군 적성면의 주월리 사이에 놓여있는 임진강 다리. 여름 우기 때에는 임진강물이 범람하여 잠수교 형태로 가설하였으나, 최근에 이 다리 옆에 교각을 높이 세운 새로운 다리인 비룡교가 놓여져 있다.
13 강승쟁이(降仙亭) : 가여울 동쪽에 있던 정자터. 전설에 의하면 경관이 빼어난 이 곳에 하늘에서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하여 강선정이라 이름지었다 하나,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가여울 북쪽 강 언덕에 강선정 옛터가 있는데, 초석이 밭가운데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고려 때 재상 최모(崔某)의 별장(別業)으로 전해 오나, 지금 정자는 없어 졌다."
- 降仙亭 戌灘北岸有降仙亭舊基石礎散在田間卽麗朝宰臣崔某別業云今無 - 라고 기록 되어 있어 정자는 이미 오래 전부터 폐허로 남아 있었던 것 같다.
6·25 전까지도 강선정터에는 큰 느티나무 고목들이 우거져 있어 임진강을 건너는 여행객들과 마을 주민들의 휴식처로 이용되었던 운치 있는 명소로 손꼽였으나, 지금은 아무런 자취도 남아 있지 않고 농경지로 변해 있다.
14 새터(新垈) : 강승쟁이 동쪽에 있는 마을.
15 산소골 : 새터 동쪽에 있는 골짜기. 문화 류씨들의 묘가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6 생기리(香吉里) : 생기리고개 동쪽에 있는 마을. 주위에 강선정, 들근터 등 신선이 노닐었다는 유서깊은 명소가 있어 마을이 길하고 향기롭다 하여 향길리로 이름지었으나 구개음화에 의하여 생기리로 어휘가 변하여 불리워지고 있다.
17 장고개(長峴) : 생기리고개 북쪽에 있는 고개.
18 불당골 : 생기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암자가 있던 곳이라 하나, 현재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19 미역재 : 생기리 북쪽에서 통구리 쑥골로 넘어다니던 고개.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이 곳까지 바다물이 들어와 미역을 채취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20 조산(造山) : 생기리 북쪽에 있는 산. 조선 중기 곡산현감을 지낸 홍석형(洪碩亨) 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묘자리를 이 곳에 정하게 되었는데, 당시 남양 홍씨 문중에서 많은 인부를 동원하여 인위적으로 큰 산을 만든 다음 그 위에 홍 현감의 묘를 썼다 하여 그 뒤로 이 산을 '조산'이라 이름지었다 한다. 6·25 전에는 이 산 아래에 남양 홍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21 신선봉(神仙峰, 134m) : 노곡리와 통구리 경계에 있는 산.
22 은골(隱谷) : 신선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23 구미리고개 : 조산에서 구미리의 소래울로 넘어 가는 고개.
24 방아다리 : 조산 동쪽에 있던 작은 마을. 예전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방아다리와 작은방아다리로 나뉜다.
25 망재봉 : 미역재 동쪽, 학곡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을 보았다 한다.
26 당성군 홍 징 묘(唐城君 洪徵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27 덕골 : 홍 징 묘 아래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남양 홍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던 곳이다.
28 독고개 : 덕골에서 학곡리의 와간이로 넘어 가는 고개.
29 국사봉(國師峰) : 생기리 동쪽, 학곡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학곡리편 참고)
30 대장골(大將谷) : 국사봉 서쪽에 딸린 골짜기. 대장봉이 있어 지어진 이름으로, '작은대장골', '큰대장골'로 나뉘어진다.
31 들근터(붉은터, 赤臺) : 생기리마을 동쪽에 있는 골짜기. 땅의 색깔이 붉어 '붉은터'라 불리웠던 것이 들근터로 어휘가 변하였다 한다.
일설에는 이 곳의 경치가 매우 아름다워 적선자(謫仙者 : 仙界에서 人間界에 내려온 神仙)가 내려와 노닐었던 곳이라 전해 오며, 6·25 전에는 황새, 백로들의 철새도래지가 있던 곳이다.
32 토우물모퉁이 : 들근터에서 토우물로 가는 곳에 있는 산 모퉁이.
33 토우물(土井) : 들근터 남쪽, 소토시 벌판에 있던 박아지우물. 최근에 경지정리가 되면서 매몰되었다.
34 못개물 : 토우물 서쪽에 있던 우물. 예전에 이 우물 옆에 큰 연못이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었으나, 최근에 이 일대가 경지정리가 되면서 모두 매몰이 되어 지금은 논으로 변해 있다.
* 제 보 자 : 류 병 엽(76) 백학면 노곡1리
류 익 영(72) 노곡2리
류 인 엽(69) 노곡1리
홍 현 숙(62) 노곡1리
4. 전동리(箭洞里)
본래 적성현(積城縣) 북면(北面)의 지역으로, '살울'이라는 골짜기가 있어 전동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麻田郡) 하신면(何新面)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2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장대부리 : 살울 남쪽에 있는 길게 뻗어나온 산부리.
2 사미천개뽕나무밭 : 장대부리 남쪽에 있는 넓은 밭. 일제 강점기 때 잠업 장려로 인하여 이 일대에 뽕나무를 심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넓은 벌판 전체가 잔듸농장으로 변해 있다.
3 나이롱다리(범소다리. 경포교) : 전동리 서쪽, 사미천에 있는 다리. 일제 강점기때 콘크리트로 건설된 다리였으나, 6·25 때 폭격으로 끊어져 인마의 통행이 어렵게 되자 급조형태의 출렁다리를 놓았는데, 다리가 견고하지 못하고 불안하다 하여 나일론에 비유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지금은 콘크리트로 가설되어 있고, 장남면과 개성·장단으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중요한 다리이다.
4 범소 : 나이롱다리 위에 있는 깊은 소(沼). 명주실 한 꾸러미가 다 들어가는 깊이라 전해 온다.
5 큰골 : 나이롱다리 북쪽에 있는 골짜기.
6 절골 : 큰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었다 하나, 현재 흔적이 남아 있지 않다.
7 푸묵골 : 살울 서쪽에 있는 골짜기.
8 살울(箭洞) : 장대부리 북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전설에 의하면 삼국시대 초기 임진강 남쪽 파주군 적성면 주월리에 있는 육계토성에 주둔하던 군사들이 강 건너 대안에 있는 이 곳에 과녁을 설치해 놓고 활을 쏘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설과, 둔전동에 주둔하던 군사들이 이 곳을 향하여 활을 쏘며 무예를 닦던 곳이라는 거리상 전혀 불가능한 두 가지 설이 전해 오지만 실제 이 마을의 유래는 '살(箭)'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엉뚱한 한자 풀이식 지명이다.
이 마을은 예전 장단군과 적성현의 경계에서 가장 가까이 위치한 두 고을의 사이에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사이'의 어근인 '삳(間)'이 골짜기, 마을의 뜻으로 쓰이는 '울'과 합쳐 '삳울'로 되었으나, 차츰 '살울'로 발음이 변하면서 한자의 '箭洞'으로 옮겨져 화살과 관계된 엉뚱한 지명풀이가 되어 '장단과 적성 사이에 위치한 골짜기 마을'이라는 원래의 의미가 잘못 풀이 되었다.
6·25 전에는 문화 류씨와 남양 홍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마을이다.
9 차돌이고개 : 전동리에서 두현리로 넘어가는 고개. 차돌이 많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0 질우지골 : 차돌이고개 동쪽에 있는 골짜기. '기루지골'이라고도 한다.
11 방축골 : 질우지골 동쪽, 국사봉에 딸린 골짜기. 예전에 방죽이 있었다 한다.
12 국사봉(國師峰) : 전동리·두일리·두현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 (두일리편 참고)
13 부처골 : 국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절터가 남아 있다.
14 둔전동(屯田洞) : 살울 동쪽에 있던 마을. 고려 때 지방에 주둔한 군대의 군량을 자급하고 관청의 경비에 충당하도록 미간지를 개척하여 경작하게 하던 전답(田畓)인 둔전이 있던 곳이라 한다. 6·25 전에는 강릉 최씨와 전주 이씨들이 집성촌을 이루며 살았던 곳이다.
15 능골 : 부처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큰 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으나, 현재 이 묘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16 큰골고개 : 능골에서 두일리의 노리울로 넘어 가는 고개.
17 매봉재 : 능골 동쪽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매사냥을 할 때 이 곳에서 매를 날렸다 하여 지어진 이름으로, 6·25 전까지도 둔전동 주민들이 산제를 올렸던 곳이기도 하다.
18 종골 : 매봉재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좁은'의 방언인 '존'과 '골짜기'의 뜻인 '골'이 복합되면서 '존골'이 '종골'로 음이 변한 이름이다. 6·25 이후 살울, 둔전에 살았던 사람들이 새로 정착하여 현재 전동리 마을이 형성되어 있다.
19 숯탄이 : 종골 동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 제 보 자 : 최 기 순(80) 백학면 전동리
허 흡(63) 백학면 전동리 1반
5. 학곡리(鶴谷里)
본래 적성현(積城縣) 북면(北面)의 지역으로, 예전에 학이 많이 날아와 깃들었던 철새도래지가 있었다 하여 '해골' 또는 '학곡'이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麻田郡) 하신면(何新面)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 남쪽이 되어 동년 11월 3일 "군정법령 제22호"에 의하여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60년 11월 18일 구역확장 규칙 개정에 따라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2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조개소 : 신지개나루 동쪽, 임진강에 있는 소(沼). 민물조개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 신지개나루(神智江津) : 학곡리와 노곡리 경계에 있던 임진강 나루터. 파주군 적성면 구읍리의 신지개(神智浦)와 연결되었던 곳이다.
3 학곡리 선사유물 산포지 II(鶴谷里 先史遺物 散布地 II, 장군대)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4 소토시 : 맹강골 앞에 있는 들.
5 들근터고개 : 맹강골에서 노곡리의 들근터로 넘어가는 고개.
6 맹강골(孟江洞) : 국사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문화 류씨들이 살던 마을이 있었다.
7 국사봉(國師峰) : 맹강골 북쪽, 노곡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고려 말 문하시랑동평장사(門下侍郞同平章事)를 지낸 원 훈(元訓)이 꺼져만 가는 고려의 국운과 역성혁명에 비분을 느껴 학곡리로 이주하여 은거하면서 매일 이 산에 올라 개성을 향하여 망배하고 거문고를 타며 고려 신하로써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유서깊은 곳이라 하여 이 봉우리를 '원정승이 개성을 바라본 고개' 또는 '국사봉'이라 이름지어 졌다 한다.
8 독고개 : 와간이에서 노곡리의 덕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9 뒤골 : 국사봉 동쪽에 딸린 조그만 골짜기. 와간이 마을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일제 강점기 때 금광이 경영되었던 곳이다.
10 와간이(臥看洞) : 국사봉 동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문화 류씨가 집성을 이루고 살았지만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11 돌마들벌 : 학곡리 마을 주위에 있는 벌판.
12 학곡리 지석묘(鶴谷里 支石墓)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 참고.
13 구여울 : 학곡리 마을 동쪽, 동에서 서쪽의 토우물로 흐르는 개울.
아주 옛날 임진강물이 돌마돌에서 두 갈래로 갈라져 이 곳으로도 큰 개울이 흘렀 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지금은 경지정리가 되어 이 개울이 논으로 변해 있고 수로가 지나간다.
14 매미터 : 미역골 입구에 있던 작은 마을.
15 미역골(沐浴洞) : 와간이 동쪽에 있는 긴 골짜기. 조선초 원주 원씨가 정착하여 6·25 전까지 집성촌을 이루었던 마을이다. 학곡리는 원주 원씨가 처음 정착한 이후 와간이에 문화 류씨, 해골에 하동 정씨, 구미리에 동주 최씨의 순으로 차례로 입주·개척하였다 한다.
16 문하시랑동평장사 원 훈 묘(門下侍郞同平章事 元訓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7 망재봉 : 미역골 북쪽, 노곡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망을 보았던 곳이라 한다.
18 홍기터골 : 망재봉 북쪽에 딸린 조그만 골짜기로, 해골의 가장 안쪽이 된다.
옛 적성현의 지리지를 참고해 보면 '이 곳은 조선 인조 때 영의정을 역임했던 학곡 홍서봉(洪瑞鳳 1572 ∼ 1645)이 벼슬에서 물러나 만년을 지냈던 곳으로, 그의 호 학곡(鶴谷)도 이 곳에 연유하여 지어졌다'라고 기록되어 있어 홍서봉이 머물던 곳이었음을 명시하고 있다.
또한 학곡리 대안(對岸)인 임진강 건너의 적성면 율포리에는 홍서봉이 세웠다는 율포정(栗浦亭) 터가 있고 이 곳 임진강을 중심으로 시를 읊고 노닐었던 그의 사적이 남아 있다.
19 대장골고개 : 해골에서 노곡리의 조산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20 해골(鶴谷) : 학곡리 백제적석총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옛날에 학이 날아와 서식했던 도래지가 있던 곳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하동 정씨의 집성 마을이 있었다.
21 매우물 : 해골 중앙에 있는 샘물.
22 살구나무자리논 : 매우물 남쪽에 있는 논. 예전에 살구나무가 있었다 한다.
23 마당앞자리 : 살구나무자리논 아래에 있는 논.
24 자라터 : 공덕봉 서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좁거나 작은 것을 뜻하는 말인 '잘' 이 연철되어 '자라'로 옮겨지며 불리워지고 있는 이름이다.
25 가장터길 : 돌마돌에서 해골로 가는 곳에 있는 길.
26 공덕봉(共德峰) : 학곡리 백제적석총 북쪽에 있는 봉우리. 전설에 의하면 구한말에 봉화를 올렸던 곳이라 한다.
27 진골 : 공덕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응동'이라고도 불리워지는 곳이다.
28 수우리고개 : 학곡리와 구미리 사이에 있는 고개. 임진강 수우리소(沼)의 위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구미리편 참고)
29 잉어소 : 학곡리 백제적석총 북쪽, 임진강에 있는 깊은 소(沼). 큰 잉어가 많이 서식하는 곳이다.
30 미산개나루 : 잉어소 아래에 있던 나루터. 파주군 적성면 율포리의 동나벌로 건너다니던 뱃나루가 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이용되지 않고 있다.
31 학곡리 백제적석총(鶴谷里 百濟積石塚, 활짝각담) : 문화유적·유물편 "고분" 참고.
32 학곡리 선사유물 산포지 I(鶴谷里 先史遺物 散布地 I) : 문화유적·유물편 "선사유적과 유물"참고.
33 윗여울 : 돌마돌 동쪽에 있는 임진강 여울.
34 돌마돌(石戶洞) : 현재 학곡리 마을의 옛 이름. 임진강의 냇돌로 쌓아진 백제초기대형 돌무지무덤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6·25 전부터 지금까지 하동 정씨들이 집성을 이루고 사는 마을이다.
* 제 보 자 : 정 준 모(71) 백학면 학곡리 2반
류 달 영(71) 학곡리 375
정 기 종(65) 학곡리
6. 구미리(九尾里)
본래 적성현(積城縣) 북면(北面)의 지역으로, 임진강에 깊고 큰 구미소가 있으므로 구미연리(龜尾淵里)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麻田郡) 하신면(何新面)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면서 구미연리를 현재의 구미리(九尾里)로 개칭하였다.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3·8선을 경계로 하여 남북이 분리되면서 대부분 지역이 공산 치하에 놓이게 되었고 남한 지역에 속한 일부 지역은 동년 11월 3일 "군정법령 제22호"에 의하여 파주군 적성면에 편입되었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60년 11월 18일 구역확장규칙 개정에 따라 다시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1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다.
1 남바위 : 구미소 북쪽, 임진강에 있는 바위. 가뭄이 들어 임진강 수위가 낮아져야만 수면 위로 이 바위가 남실남실 보인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 구미소(龜尾沼, 龜淵, 잉어소, 수우리소) : 남바위 아래, 임진강에 있는 깊고 큰 소.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구미리의 전체적인 마을 형국이 거북이가 진흙땅에서 꼬리를 끌며 물에 들어가는 모습인 금구예미형(金龜曳尾形)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 소 옆에 임진강 쪽으로 돌출해 있는 큰 바위가 거북의 머리에 해당하며, 자손 번영과 음양의 생기가 화합하는 명당의 혈(穴)에 해당되는 꼬리 부분은 구연동 쪽으로 향하고 있는 형상이 되어 금구예미를 '龜尾' 두 자로 줄여 '구미소'라 하였고, 부근 에 있는 마을 또한 '구연동(龜淵洞)'으로 불리우고 있다.
그러나, 일제가 우리나라를 강점한 후 행정구역을 폐합하면서 우리 고유의 정서와 자연이치가 담겨 있는 '龜尾淵'이라는 지명을 아무 의미가 없는 '九尾'로 개칭한 것이 오늘에도 쓰이는 상태이다.
또한 이 소에는 큰 자라와 잉어가 많이 서식하여 '잉어소'로도 불리워지며, 조선초의 명신이었던 양촌 권 근이 세웠다고 전해 오는 수월정(水月亭)이 부근에 있었다하여 '수월'이 발음이 변한 '수우리소'로도 불리워지고 있다.
3 수우리고개(水月峴) : 구미리에서 학곡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 수우리소의 위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 해남밭 : 구연동 입구에 있는 밭.
5 온수물(溫水 -) : 구연동 서쪽, 골짜기에 있던 우물. 예전에 더운 약물이 나왔던 곳이었으나, 어느날 서울에서 온 거지가 손발을 씻어서 부정(不淨)이 탔다 하여 메워 버렸다 한다.
6 매우물 : 온수물 옆에 있는 매우 찬 우물.
7 구연동(龜淵洞) : 구미리에서 가장 큰 마을. 임진강의 구미소와 가까운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조선 영조 때 편찬된 ≪여지도서≫에는 권 근 옛터(權近 舊基)라 하여 조선초 학자이며 명신인 양촌 권 근(陽村 權近 1352∼1409)과 그의 동생이며 예문관제학을 역임한 매헌 권 우(梅軒 權遇 1363∼1419)의 출생지가 구연동임을 밝히고 있고, ≪신증동국여지승람≫ 적성현편 산천조에는 권 우의 구연동 시문(詩 文) 네 수(四首)가 소개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한 수는 아래와 같다.
현재 이 마을에는 조선 중기에 정착한 동주 최씨가 집성촌을 이루고 있다.
□ 권 우의 구연동 시
前壓淸江後背山 앞에는 맑은 강 뒤에는 산
一區形勝是天 구연동의 형승은 하늘이 숨겨두었던 곳.
紆細路田畦裏 꼬불꼬불 소로 길 밭고랑 사이로 나 있고
隱 虛樓樹木間 보일락말락 빈 누각은 수목 사이에 있네.
栗滿園供異味 동산에 가득 찬 토란과 밤 맛이 별미이고
風烟隋處足奇觀 풍연(風煙)이 닫는 곳마다 경치 또한 별천지일세.
吾生最恨牽塵世 지난날 진세(塵世)에 끌렸던 일 한스러워라
此地何當得自閑 어찌하면 이 고향에서 한가히 놀 수 있을까.
※ 풍연(風煙) :멀리서 보이는 연기 같은 공중의 기운.
8 거물개봉 : 구연동 입구에 있는 봉우리. 산의 형상이 농기구인 거물래와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전설에 의하면 이 봉우리로 인하여 구연동 마을이 항상 재물이 풍족하다 한다.
9 큰우물 : 거물개봉 남쪽, 구연동 입구에 있는 우물.
10 부군나무자리 : 거물개봉 동남쪽, 산부리 끝에 있던 네 아름 굵기의 큰 느티나무.
6·25 전까지도 구연동 마을에서 신성시하여 보호했던 나무였으나, 전란에 베어 없어지고 지금은 민가가 들어서 있다.
11 마지앞논 : 구연동 동쪽, 마지개울 옆에 있는 논.
12 마지개울 : 소래울에서 발원하여 임진강에 합류하는 구미리에서 가장 큰 개울로, 소래울에서는 '뒷개울'이라고 부른다.
13 뒷골 : 구연동 뒤에 있는 작은 골짜기.
14 독지골 : 소래울 서쪽에 있는 골짜기.
15 드낭골(斗蘭谷) : 독지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16 해기고개 : 구미리 소래울에서 미산면 아미1리의 해기골로 넘어 가는 고개.
17 점말고개 : 소래울에서 아미1리 점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
18 망재 : 소래울 북쪽, 아미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예전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망을 보았다 한다.
19 풀무골 : 망재 동쪽에 있는 골짜기.
20 윗말 : 소래울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문화 류씨의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목장이 들어서 있다.
21 소래울 : 구연동 북쪽에 있는 골짜기. 우리 고어에 '작은','좁은'의 뜻으로 쓰인'솔'과 골짜기의 뜻을 가진 '울'이 아래와 같이 합쳐져 '소래울'이 된 땅이름으로, '좁은 골짜기'란 뜻을 담고 있다.
솔ㅇ울 > 소ㄹ울 > 소래울
22 안산(案山) : 소래울 입구에 있는 조그만 산. 문화 류씨 묘역의 안(案)이 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3 석논 : 안산 옆에 있는 논. 돌로 논뚝을 쌓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4 소작밭 : 석논 동쪽, 골짜기 안에 있는 밭. 예전에 어떤 사람이 소작으로 밭농사를 지었던 곳이라 한다.
25 아랫말 : 소작밭 아래에 있는 마을. 윗말에 상대되는 이름이다.
26 뒷논 : 아랫말 앞에 있는 논.
27 굉밭 : 토막포와 소래울로 갈라지는 삼거리에 있는 밭. 모양이 소의 먹이통인 구유와 같이 움푹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8 토막포(土幕浦 , 토막개) : 굉밭 동쪽, 임진강변에 있던 마을. 옛날에 흙으로 쌓은 토막이 있었다 한다.
29 드럼소 : 토막포 동쪽, 임진강에 있는 소(沼). 예전에는 이 소로 토막포나루에 있던 배를 이용하여 미산면 삼화리로 왕래하였으나, 6·25 이후 나루가 없어졌다.
30 우암(牛岩) : 굉밭 북쪽에 있는 소 형상의 바위.
31 긴골 : 우암 북쪽에 있는 좁고 긴 골짜기.
32 새둔지들 : 토막포 북쪽에 있는 넓은 들판. 예전에 억새풀이 무성히 자라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었으나, 지금은 황무지였던 이 곳을 개간하여 모두 농경지로 변해 있다.
33 윗터개 : 새둔지들 북쪽, 임진강에 있던 나루. 구미리에서 가장 북쪽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4 약대산고개 : 새둔지들에서 미산면 아미2리의 여씨동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35 약대산(藥大山, 142m) : 새둔지들 북쪽, 미산면 아미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임진강 옆 산비탈에 약수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 제 보 자 : 홍 타 수(65) 백학면 구미리 구연동
최 천 균(56)
7. 석장리(石墻里)
본래 마전군 서면(西面) 지역으로, 돌로 울타리를 쌓은 집이 많았다 하여 '돌담','돌대미' 또는 '석장'이라 하였는데,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인접해 있는 월곶리(月串里)를 병합하여 석장리라해서 연천군 미산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고, 1987년 1월 1일 "대통령령 제12007호"에 의해 미산면에서 백학면에 편입되어 오늘에 이른다.
현재 1개의 행정리, 2개 반, 1개의 자연마을로 이루어져 있으나, 일부 지역은 출입영농만 가능한 민통선 지역에 놓여 있다.
1 큰소목골 : 석장리 입구에 있는 골짜기.
2 작은소목골 : 큰소목골 위에 있는 골짜기.
3 작은버들골(小柳洞) : 차일봉 동남쪽에 있는 골짜기.
4 큰버들골(大柳洞) : 작은버들골 위에 있는 골짜기. 예전 이 골짜기와 작은버들골에 '버들'이 많았다 하여 버들골로 불리우게 되었다 하나, 지형과 지명에 연관된 어원을 분석해 보면 그 뜻은 '벋었다'의 뜻이 '버들'로 옮겨간 것으로, 차일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어 나온 크고 작은 두 골짜기의 모양이 곧게 뻗어 나와 있는 형세이므로, 한자로 지명을 옮기는 과정에서 실제 '벋을 + 골'이 '버들골'로 불리면서 음차되어 뜻을 구분하기 어려운 한자 지명의 '버들(柳)'이 된 것이다.
5 망재 : 큰버들골 서쪽, 석장리·두일리·백령리 경계에 있는 봉우리로, 옛날에 이 봉우리 정상에서 망을 보았다 한다.
6 차일봉(遮日峰. 152m) : 백학면의 석장리와 백령리, 왕징면의 작동리 경계에 있는 산. 봉우리 형태가 차일을 친 것 같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7 옻물약수 : 석장리 마을 서북쪽에 있는 약수 우물. 예전부터 옻 오른데 효험이 있다 한다.
8 결승암(結繩岩) : 벌말 남쪽, 석장천변에 바위와 시내가 어우러진 경승지. 천연암벽에 "結繩岩", "淸風徐來 水波不應"이라 새겨진 암각문이 있었으나, 6·25 때 파괴 되어 없어졌다 한다.
9 배나무골 : 서낭당산 남쪽, 작동리 입구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큰 배나무가 있다 한다.
10 서낭당산 : 배나무골 북쪽, 작동리와 경계에 있는 산. 6·25 전까지도 정상에 있는 큰 소나무숲에서 매년 가을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11 아랫말(下洞) : 서낭당산 동쪽에 있던 마을. 달고지 마을의 아래에 있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2 우의정 임백경 묘(右議政 任百經 墓) : 문화유적·유물편 "명묘" 참고.
13 막은쟁이 : 석장리에서 왕징면 작동리의 새말로 넘어가는 고개. 이 곳은 이 마을에서 가장 북쪽의 막바지에 있는 고개가 되어 '막은'에 '쟁이'가 붙은 것이다. '쟁이'는 땅이름에서 '장소'를 나타낸다.
14 분토골(盆土洞) : 막은쟁이 동쪽에 있는 골짜기. 지형이 항아리처럼 입구가 좁고 안이 넓게 생겼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5 달고지(月串里) : 임정승 묘 동쪽에 있던 마을. 산(山)의 뜻으로 씌었던 우리 고어의 '닫'이 개음절화한 '달'과, 땅의 한 끝부분이 어느 한 편으로 불쑥 뻗어 나간 곳을 뜻하는 '곶(串)'이 합쳐져 '달곶(山串)'이 되었다가 '곶' 뒤에 '이'가 붙어 연철되면서 '고지'가 되어 '달고지'가 된 예이다. 석장리의 달고지는 분토골과 참나무쟁이 두 골짜기 사이로 뻗어 나온 곶형태의 산부리로 인하여 지어진 이름일뿐, 하늘의 '달(月)'과는 무관한 땅이름이다. 6·25 전에는 청주 한씨와 경주 이씨의 집성촌이었다.
16 참나무쟁이 : 달고지 동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예전에 큰 참나무가 있었다 한다.
17 달고지고개(月串峴) : 석장리에서 왕징면 동중리의 세골과 빼우리로 통하는 두 고개의 같은 이름.
18 덜봉(222m) : 달고지 동쪽에 있는 높은 봉우리. 동중리와 경계가 된다. (왕징면 동중리 참고)
19 용호산(龍虎山) : 덜봉 아래에 있는 뾰족한 산. 호랑이가 석장리쪽으로 머리를 두 고 앉은 형국이라 한다.
20 큰삼베이(大三坊) : 덜봉 아래에 있는 골짜기.
21 작은삼베이 : 큰삼베이 아래에 있는 골짜기.
22 벌말(坪村) : 석장리 중앙, 들판에 있던 마을.
23 안골(內洞) : 벌말 동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평산 신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4 윗돌대미(上石墻洞) : 안골 동쪽에 있던 마을. 6·25 전에는 남양 홍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25 머겨울 : 윗돌대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왕징면 동중리로 넘어 가는 버스 노선이 된다.
26 고사리골 : 머겨울 동쪽에 있는 고사리가 많았던 골짜기. 현재 군부대 사격장이 위치한다.
27 다람고개 : 윗돌대미에서 미산면 광동리의 뫼치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8 쟁고개 : 다람고개 남쪽에 있는 고개로, 미산면 광동리의 뫼치골과 통한다.
29 광대울 : 현 석장리마을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30 소작고개 : 광대울 남쪽에 있는 고개로, 광동리와 통한다.
31 도장골(道藏谷) : 산제당산 서쪽에 딸린 골짜기. 땅이름에서 산의 뜻으로도 씌었던 '돋'이 '안(內)'과 합치면서 '산 안의 골짜기'라는 뜻의 '돋안골'로 되었으나, 차츰 도단골 > 도잔골 > 도장골로 음전된 곳이다.
32 산제당산(130m) : 석장리 가장 남쪽, 미산면의 광동리·아미리와 경계에 있는 산. (아미리편 참고)
* 제 보 자 : 한 상 균(82) 백학면 석장리
8. 갈현리(葛峴里)
본래 장단도호부(長端都護府)의 장동면(長東面) 지역으로, '가루개'라는 고개가 있으므로 갈현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麻田郡) 장신면(長新面)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따라 마전군이 연천군에 병합되면서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며,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군사분계선을 끼고 있는 완충지대에 놓여 있어 현재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은 한 개의 법정리 지역이다.
1 은꽃모루나루 : 갈현리 서쪽 끝, 사미천에 있던 나루. 장단군 장도면 오음리(梧陰 里)의 은꽃모루로 건너 다니던 나루터가 있던 곳이었으나, 지금은 휴전선이 이 곳으로 지나가 비무장지대 안에 놓여 있다.
2 넙산(廣山) : 은꽃모루나루터 동북쪽에 있는 둥글고 넙적한 모양의 산. 6·25 전까지도 옹기와 질그릇을 굽던 가마가 있었다 하여 '점둔치'라고도 불리웠던 곳이다.
3 가마모탱이논 : 넙산 북쪽에 있는 논. 점둔치의 가마모퉁이에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4 벌말(坪村) : 넙산 동쪽, 벌판에 있던 마을.
5 벌다락터(-- 樓垈) : 벌말 북쪽, 벌판에 있던 마을. 들(野)을 뜻하는 앞음절의 '벌'과'들','산','돌','흙' 등을 포괄하는 '땅'의 뜻으로 씌었던 고어의 '달'이 연철된 '다라'가 다시 옮겨진 '다락'에, 뒤에 '터'가 합쳐진 복합지명으로, 단순히 '들판 가운데에 위치한 마을'이라는 뜻의 '다락(野) + 터(垈)'가 같은 뜻의 '벌'이 앞음절을 이루면서 '벌다락터'로 불리워지던 것이 한자로 음차되는 과정에서 엉뚱하게도 들의 뜻인 '다락'을 '樓'로 잘못 표기한 땅이름이다.
6 방골 : 벌다락터 서쪽에 있는 골짜기. 6·25 전에는 오리나무가 군락을 이루었던 곳이다.
7 새덤불 : 벌다락터 동쪽에 있던 마을. 가루개 마을과 벌다락터 '사이에 덤불이 우거진 곳'이라는 뜻을 가진 곳이며, 6·25 전에는 학교와 주막이 있던 곳이다.
8 사당골 : 산제봉 남쪽에 있는 골짜기. 예전에 사당이 있었다 하나 자세하지 않다.
9 가루개(葛峴) : 산제봉 남쪽, 두현리로 넘어 다니는 큰 고개. 예전 이 고개에 칡넝쿨이 많이 우거져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 하나, 원래의 뜻은 '가른다', '나눈다'의 뜻인 '갈'이 연철된 '가루'가 음이 같은 한자의 칡(葛)으로 옮겨 쓰이면서 엉뚱한 지명풀이가 나왔으며, 이 고개 정상에서 두일리·두현리·오곡 등으로 길이 갈라진다.
또한 이 고개는 '갈운이고개·장고개·서낭당고개'로도 불리워지고 있으며, 갈현 리의 유래가 되는 고개이다.
10 산제봉(山祭峰, 127m) : 새덤불 동쪽에 있는 봉우리. 6·25 전까지 매년 8월 초정에 주변마을 주민들이 이 봉우리 정상에서 산제를 올렸다.
11 샘논 : 산제봉 북쪽에 있는 논으로 샘이 있다 한다.
12 오곡 : 산제봉 동쪽에 있는 골짜기. 오리나무가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3 백명고개(百名峴) :갈현리에서 백령리의 역말로 넘어 다니던 고개.(백령리편 참고)
14 수리너머 : 백명고개 북쪽에 있는 고개. 백령리에 소재하는 수리봉 옆으로 지나가는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5 쪽박골(瓢洞) : 수리너머 북쪽에 있는 골짜기. '작다'는 뜻의 옛말에 더러 나타나는 '쪽'과 산(山)의 고어 '받'이 음이 변한 '박'에 '골'이 합하여 이루어진 땅이름으로, '쪽박'과는 무관한 '작은 산골짜기'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곳이다.
16 장고개(場峴) : 점말에서 백령리 독주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장단의 구화장(九 化場)으로 가는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7 쇠파리산 : 장고개 북쪽, 백령리와 경계에 있는 산.(백령리편 참고)
18 가마골고개 : 갈현리 윗점에서 백령리의 가마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19 물한이고개(勿閑峴) : 윗점에서 포춘리의 윗물한(上勿閑)으로 넘어 다니던 고개.
20 윗점 : 물한이고개 아래에 있던 마을. 예전에 옹기를 굽던 옹기점이 있었다 한다. 6·25 전에는 풍산 홍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1 돌산재(159m) : 장고개 서쪽, 포춘리와 경계에 있는 산. 정상에 삼형제바위를 비롯하여 많은 돌들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2 등정산 : 돌산재 동쪽에 딸린 산.
23 아랫점말 : 윗점 아래에 있던 마을로, 예전에 옹기점이 있던 곳이다. 6·25 전에는 경주 이씨가 집성촌을 이루었다.
24 승성골 : 아랫점말 서쪽, 돌산재에 딸린 골짜기.
25 바람재 : 아랫점말과 은골 사이에 있는 고개. 이 고갯마루에 올라서면 장단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항상 거세게 많이 분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달고 있으 나, 실제 담겨져 있는 뜻은 산의 뜻을 가진 고어의 '받(山)'이 개음절화한 '발'과 '안(內)' 그리고, 뒤에 '재(峴)'가 합쳐져 돌산재 남쪽의 점말과 은골 사이를 넘어다니는 '산 안쪽에 있는 고개'라는 뜻의 '발안재'가 되었으나, 다시 지금의 '바람재'로 음이 변하여 굳어지면서 '바람(風)'과 관련된 이름처럼 되었다.
26 감차라지봉 : 돌산재 남쪽에 딸린 봉우리.
27 오그미(梧琴) : 점말 남쪽에 있던 마을. 오동나무와는 무관한 '외지고 궁벽한 곳'이라는 뜻의 '외진구미'가 줄어든 말인 '오금'이 '오그미'로 연철되어 쓰여지고 있는 이름이다.(군남면 진상리 참고)
28 밧오그미 : 오그미 바깥 쪽에 있는 마을이라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29 상아재 : 산제봉 북쪽에 있던 마을.
30 보모루(洑隅) : 새덤불 북쪽에 있는 모퉁이. 점말에서 내려오는 개울에 보를 막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31 타리내 : 보모루 위에 있던 마을 이름. 들(野)의 뜻인 고어의 '달'이 연철된 '다리'와 점말에서 발원하여 이 마을 앞을 지나 사미천에 합류하는 긴 '내(川)'가 합하여 '들판을 흘러가는 개울 옆에 있는 마을'이라는 뜻의 '다리내'로 불리워 오다 '다리'가 '타리'로 음이 변하여 씌어지고 있는 땅이름이다.
32 안다락터(內樓垈洞) : 타리내 동북쪽에 있던 마을. 벌다락터 마을의 안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안동권씨들이 큰 집성마을을 이루었던 곳이다.
33 은골 : 방내동에서 돌산재까지 나 있는 큰 골짜기.
34 방내동(防內洞) : 안다락터 북쪽에 있던 마을. 우리 고어에 '산(山)'을 뜻하는 말인 '받'과 은골에서 내려오는 잉어개울의 뜻인 '내'가 합하여 '개울이 흘러가는 산골 마을'의 뜻인 '받내동'이 아래와 같이 음이 변하면서 엉뚱한 한자이름을 낳게 된 곳이다.
받(山) + 내(川) = 받내 > 밧내 > 반내 > 밤내 > 방내 + 동(防內洞) 6·25 전까지 윗방내동에는 죽산 박씨, 아랫방내동에는 문화 류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한다.
35 섬논 : 방내동에 있는 섬처럼 생긴 논.
36 방죽자리논 : 방내동 입구에 있는 방죽이 있는 논. 열한마지기 넓이에 갈현리에서는 좋은 논이었다 한다.
37 잉어개울 : 은골에서 발원하여 사미천에 합류하는 개울. 잉어가 많이 서식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 개울을 경계로 하여 갈현리와 청정리가 나누어진다.
38 헌다리개울 : 잉어개울에 있던 낡은 다리 때문에 지어진 개울 이름이다.
* 제 보 자 : 이 순 성(81) 백학면 백령1리 761
9. 두현리(頭峴里)
본래 장단도호부(長端都護府)의 장동면(長東面)지역으로,'머릿재'라는 큰 고개가 있어 두현리라 하였는데,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麻田郡) 장신면(長新面)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현재 군사분계선에 인접한 민통선 지역에 놓여 있어 출입영농만 가능한 한 개의 법정리 지역이다.
1 차돌이고개 : 두현리 남쪽, 전동리와 경계에 있는 고개. 차돌이 많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 할미바위 : 차돌이고개 아래에 있는 바위.
3 국사봉(國師峰) : 두현리·전동리·두일리 경계에 있는 산.(두일리편 참고)
4 용의머리(龍頭洞) : 국사봉 서쪽에 있던 마을. 뒷산이 용의 머리처럼 생겼다 한다.
5 성주골(聖主洞) : 용의머리 북쪽에 있던 마을. '성주물'이라는 우물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 왜골 : 성주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7 딴봉모탱이 : 성주골에서 장고개로 가는 중간에 있는 모퉁이.
8 장고개(場峴) : 두현리에서 두일리로 넘어가는 고개. 두일장거리로 넘어 다니던 고개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9 뙤재고개(胡踰峴) : 장고개 북쪽에 있는 고개. 고개가 가팔라서 '되재'라 하던 것 이 '뙤재'로 변한 이름으로 보인다.
10 모개골(木洞, 木果) :뙤재고개 북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모과나무가 많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한자식 풀이를 달고 있으나, 큰두일 골짜기에서 백령리의 밥재 마을로 넘어 다니던 고개의 뜻인 '목(項)'과 뒤에 또 다시 고개의 뜻인 '개(峴)'가 합하여 단순히 '고개'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땅이름으로 보인다.
11 옥고개(玉口峴) : 두현리와 갈현리 사이에 있는 고개. '옷고개(衣峴)'라고도 불리워지나, '뙤재고개' 또는 '샛말'의 위에 있다 하여 '윗고개'로 불리워지던 것이 '옥' 또는 '옷'으로 발음이 변한 것으로 보인다. 6·25 전에는 이 고개 밑에 파평윤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12 소의봉(131m) : 옥고개 북쪽에 있는 봉우리. '꼭데기','마루','으뜸'의 뜻인 '술'에 뿌리를 둔 '높은 봉우리'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13 장고개(場峴, 葛峴) : 두현리와 갈현리 사이에 있는 고개. 두일장거리로 통한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이 고갯마루에 서낭당이 있어 '서낭당고개' 라고도 불리워졌다.
14 안골(內洞) : 소의봉 서쪽, 골짜기 안에 있던 마을.
15 새골 : 안골 밑에 있는 좁은 골짜기.
16 연못골(淵洞) : 안골 남쪽에 있던 마을. 연못이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7 샛골(間洞) : 성주와 연못골 사이에 있던 마을.
18 연안이모탱이 : 샛골 남쪽, 산정마을로 가는 산부리에 있는 모퉁이. 주변에 연안들이라는 벌판이 있어 지어진 이름이다.
19 산정(山井. 매우물) : 성주골 서쪽, 국사봉 아래에 있던 마을. 뒤편 산록에 우물이 있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한양 조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0 당뒤모탱이 : 산정 서쪽에 뻗어 내려온 산부리 끝에 있는 모퉁이. 뒤편 산등성이에 파평 윤씨의 묘가 있다.
21 배반소 : 당뒤모탱이 서쪽, 사미천에 있는 소(沼).
22 방아울( 洞) : 매우물 북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방앗간이 있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며, 6·25 전에는 한양 조씨들이 마을을 이루고 살았다.
23 국사봉(國師峰) : 방아울 동쪽에 있는 두현리에서 가장 뾰족한 봉우리. 현재 국사봉에 대한 자세한 유래는 전해 오지 않고 있으나, 6·25 전까지도 매년 이 산 정상에서 산제를 올렸던 곳으로, 제물로 지정된 돼지는 사람이 몰고 가지 않아도 스스로 정상까지 올라간다는 신비한 사실이 전해 오는 곳이다. 예전에는 이 산 정상에 우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휴전선과 인접한 출입금지구역이 되어 확인할 길이 없다.
24 이렁굴 : 국사봉 북쪽에 딸린 골짜기.
25 머릿재(頭峴) : 국사봉 북쪽, 요골과 안골 사이에 있는 고개. 머리처럼 높은 지형에 고개가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꼭대기','으뜸','높음'의 뜻인 고어의'말'이 '마리 > 머리'로 발음이 변하여 굳어진 이름이며, 두현리의 유래가 되는 곳이다.
26 요골 : 국사봉 북쪽에 있는 큰 골짜기.
27 산제봉(山祭峰) : 국사봉 북쪽에 있는 봉우리. 6·25 전까지 방축골 주민들이 정상에서 산제를 올렸던 곳이다.
28 선승골 : 산제봉 서북쪽에 있는 골짜기.
29 방골고개 : 선승골에서 갈현리의 방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30 방축골(防築洞) : 산제봉 서쪽에 있던 마을로, 예전에 방죽이 있었다 한다.
31 대장굴산 : 방축골 서쪽에 있는 산. 유래는 자세하지 않다.
* 제 보 자 : 이 순 성(81) 백학면 백령1리 761
10. 통구리(通口里)
본래 적성현 북면(北面)의 지역으로, 이 마을 입구를 나서야만 임진강변에 펼쳐져 있는 넓은 들과 통한다 하여 '통구리'(≪적성읍지≫에는 '通溝'로도 기록되어 있다) 또는 '통기'라 하였는데, 조선 고종 32년(1895) 지방관제 개정에 따라 마전군(麻田郡) 하신면(何新面)에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폐합에 의해 인접해 있던 맹동리(孟洞里)를 병합하여 연천군 백학면에 편입되었으나,
1945년 8·15 광복 이후에 3·8선 북쪽에 위치하여 공산 치하에 놓였다가 6·25가 끝난 후인 1954년 11월 17일 "수복지구 임시 행정조치법"에 의거 행정권이 수복되었으나, 지금까지도 민간인이 살고 있지 않은 하나의 법정리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가마작골 : 숯가마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 노곡리 덕골에서 통구리의 숯가마골로 넘어가는 고개가 있어 '가마재골'로 불리웠던 것이 '가마작골'로 음이 변한 이름이다.
2 독고개(道峴) : 가마작골에서 노곡리의 덕골(=독골)로 넘어가는 고개.
3 배나무골 : 가마작골 북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예전에 배나무가 있었다 한다.
4 닥다리 : 배나무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산(山)의 뜻인 고어의 '닫'과 같은 뜻의 '닫'이 개음절로 변한 '달(山)'이 연철된 '다리'가 덧 붙어 '닫(山)' + '다리(山)' = '닫다리'가 되었으나, '닫'이 연결음절과의 관계로 '닥'으로 음이 변한 단순히 '산골짜기'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곳이다.
5 조산고개(造山峴) : 원봉에서 노곡리의 조산으로 넘어가는 고개.
6 절터골 : 신선봉 남쪽에 딸린 골짜기. 예전에 절이 있던 곳이라 전해 오나, 현재 이 곳에는 약물터만 남아 있다.
7 신선봉(神仙峰. 元峰 134m) : 통기 동쪽, 노곡리와 경계에 있는 봉우리. 전설에 의하면 예전에 신선이 내려와 놀던 곳이라 한다.
8 할미골 : 신선봉 남쪽에 딸린 골짜기. 이 곳은 옛날에 할미꽃이 많이 자생하여 지어진 이름이라는 유래를 가지고 있으나, 본래의 뜻은 '큰','넓은' 의미의 말인 '한' 과 산(山)의 뜻인 '뫼'에 '골(谷)'이 합하여 '한(大) + 뫼(山) + 골(谷) = 한뫼골' 이었던 것이 발음습관에 따라 아래와 같이 음이 변하여 신선봉에 딸린 '큰 산골짜기'라는 본래의 뜻이 '할미꽃'에 관련시켜 잘못 풀이되고 있는 곳이다.
한뫼골 > 한미골 > 할미골
9 원봉동(元峰洞) : 신선봉 남쪽에 있던 마을. 신선봉의 다른 이름인 원봉의 밑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0 작지골 : 닥다리 서쪽에 있는 골짜기. 산을 뜻하는 옛말 '자'가 소리 옮김을 한 '작'과 삼국시대 땅이름에서 '재(山, 峴)'가 끝소리로 들어갈 때 '재'보다는 '지'로 많이 쓰이는 현상에 의해 두 말이 합쳐지며 뒤에 '골'을 합하여 '작(山) + 지(峴 + 골(谷) = 작지골'이 된 땅이름으로, '통기 마을로 넘어 가는 산 고개가 있는 골짜기'라는 뜻이다.
11 쑥골(蓬洞) : 배나무골 서쪽에 있던 마을. 예전에 쑥이 많이 자라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6·25 전에는 김해 김씨들이 마을을 이루었다.
12 숯가마골 : 쑥골 남쪽에 있던 마을. 옛날에 숯을 굽던 가마가 있던 곳이라 하며, 6·25 전에는 남양 홍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다.
13 장승백이 : 숯가마골 서쪽, 349번 지방도 옆에 있는 모퉁이. 예전에 장승이 서 있었다 한다.
14 요골모탱이 : 장승백이 북쪽, 요옥골 입구에 있는 길 모퉁이.
15 요옥골(要玉洞) : 장승백이 북쪽에 있던 마을.
16 쑥골고개(蓬峴) : 앞세울에서 쑥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17 앞세울 : 요옥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통기 마을의 '앞에 있는 사이(間)의 골짜 기'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18 황세논 : 통기 마을 입구에 있는 약 1,000평 넓이의 논. 예전에 황새가 많이 내려 놀던 곳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19 샛골(間谷) : 황새논 남쪽에 있는 좁은 골짜기.
20 당골(堂谷) : 샛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로, 옛날에 신당이 있었다 한다.
21 통기(通口, 通溝) : 신선봉 서쪽에 있었던 마을. 6·25 전에는 여양 진씨들이 집성촌을 이루었던 곳이다.
22 우묵골 : 통기에 있던 마을. 지형이 우묵하다 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23 가는골 : 우묵골 동쪽에 있는 가는 골짜기.
24 원봉이고개(元峰峴) : 통기의 가는골에서 원봉마을로 넘어다니던 고개.
25 왕박골 : 통기 동쪽, 신선봉에 딸린 골짜기. 안쪽에 있는 산골짜기라는 뜻의 '안받골'이 '왕박골'로 음이 변한 땅이름으로 보인다.
26 까치골 : 가는골 북쪽에 있는 골짜기.
27 맹골고개(孟洞峴 = 화투골고개) : 통기에서 맹골로 넘어 다니던 고개.
28 효자문자리(孝子門 -) : 통기마을 중앙에 있던 진구주(陳九疇)의 효자문. 진구주의 자는 윤서(倫敍), 본관은 여양(驪陽)으로, 통구리에서 태어 났다. 조선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가족을 데리고 피난가던 그는 강원도 금성에서 갑자기 호군을 만나 아버지와 처자식은 가시덤불 속에 숨기고 자기도 피하려는 순간, 안타깝게도 적에게 발각되어 처참하게 목숨을 잃었는데, 조정에서는 전란이 끝나고 진구주의 효성과 희생에 감동하여 그의 가족이 사는 이 곳에 효자 정려를 내렸다 한다.
그러나, 이 효자문은 6·25 당시 전소되어 지금은 아무런 흔적도 남아 있지 않다.
29 장푸물 : 통기에 있는 냇물. 물이 항상 많이 흘러 겨울에도 이 곳에서 빨래를 했다 한다.
30 일대울(一垈谷) : 황새논 북쪽에 있는 골짜기.
31 뒤골 : 일대울 동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통기 마을의 뒤에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32 터골 : 일대울 서쪽에 있는 골짜기.
33 장고개(場峴) : 일대울에서 두일장거리로 넘어가는 고개.
34 만가대산(萬家垈山, 112m) : 통구리와 두일리 경계에 있는 산.(두일리편 참고)
35 무령터고개 : 일대울에서 무령터로 넘어 다니던 고개.
36 무령터 : 만가대산 북쪽에 있는 골짜기로, '무정터'라고도 불리워진다.
37 소루터 : 맹골과 무령터 사이에 있는 골짜기. '작다','좁다'의 뜻으로 쓰이는 '솔'이 '소루'로 연철된 지명으로, '작은터'라는 뜻을 가진 곳이다.
38 맹골(孟洞) : 만가대산 동쪽, 골짜기 안에 있었던 마을. 옛 적성현 북면 맹동리의 중심 마을이다.
39 까치골 : 맹골 남쪽에 있는 작은 골짜기.
* 제 보 자 : 성 오(83) 백학면 두일2리
홍 현 숙(62) 백학면 노곡1리
첫댓글 백학은 아는곳이라 특히 관심도 많은곳이긴한데너무 길어서 다 읽지도 못하겠어요.백령리,두일리,모두 기억나는데나중 우리 고향 미산면이나 꼼꼼히 읽어볼게요.수고 많이했어요.고마워요.
뭘 요렇게나 자세히
그곳에서 자랐으면서도 잘모르고잇었는데 ~~~선배님덕분에 많이알게되네요^^
아니? 어떻게 이 선배님은 모르는 게 없으신가요? 어렵고 상세한 역사와 유래를 이렇게 상세하게 올려 놓으시다니요? 저도 공부 좀 해야겠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항상, 늘 고마울 뿐입니다.
ㅎㅎ 분량이 너무 많아 작업하는데 애를 먹었지요. 페이지도 늦게 넘어가고 한번 놓치면 다시 끌어오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요. 모르고 있던 고향의 지명을 새로 아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