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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의 경비행기
몽골 고원지대로 가기 위해 아침 8시에 비행장으로 나갔다. 고원지대는 길이 없어 차편이 없고 비행기편뿐이었다. 비행기편도 정기적인 것이 아니고 필요할 때 임시로 운행되는 것이다. 손님이 많지 않아서 관광 경비행기는 대절을 한 것과 같았다. 비행기의 승무원들은 관광지를 돌고 돌아올 때까지 우리와 숙소를 같이 정하고 행동을 함께 했다.
가이드는 울란바토르 대학 한국어과 2학년생이었다. 한국인을 안내한 경험은 금년 들어 5번째라고 했다. 19세의 어린 나이의 선량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학생이었다. 이름이 ‘아질’인데 몽골 발음으로 ‘아지트’로 들렸다. 그의 부모도 우리와 일행이 되었다. 그의 어머니는 식물학자로 연구소에 근무하는데 몽골의 이끼류를 전문적으로 연구한다고 한다. 그의 아버지는 울란바토르 열화력 발전소의 소장이라고 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한국전력 사장쯤 되는 셈이다. 50세의 중후한 신사였다.
비행기는 9시 30분에 떴다. 활주로가 공사 중이어서(세계은행 자금으로 확장 중임) 평범한 풀밭의 자갈밭에서 떠올랐다. 15명 정원에 푸로펠러 경비행기다. 좌석이 비좁고 가죽시트에서 양고기 노린 냄새가 지독했다. 비행기가 출발하자 요란스런 푸로펠러 소음 때문에 귀가 먹먹했다. 비행기는 금방이라도 땅에 주저앉을 듯 얕게 날고 심하게 흔들려서 가슴이 조마조마 했다. 그런 공포 때문에 가죽시트에서 풍기는 양고기 노린 냄새 같은 것은 가마득히 잊고 말았다.
곧바로 울란바토르의 수도를 가로지르는 툴강이 한 눈에 들어왔다. 나무가 없는 초원이라 시야에 막힘이 없었다. 툴강의 남쪽 산을 복트(Bogd)산이라 하는데 이는 신성하다는 의미를 지닌다고 한다. 우리의 검산(劍山)이란 의미가 되는 것이다. 산에는 소나무, 자작나무, 향나무 그리고 약간의 활엽수들이 남쪽 비탈에 구름짱처럼 눈에 들어왔다. 그리 규모가 크지 않은 숲이지만 주위가 온통 풀밭 구릉인지라 이 숲이 그만큼 신성시되고 있는 것이다.
비행기가 남쪽으로 이동할수록 지상에는 온통 평평한 암반지대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이들 암반의 균열진 틈으로 푸른빛이 감돌았다. 그 푸른빛이 풀이 자라는 목초지가 된다. 태초 지구가 생성 될 때의 모습 같은 느낌이다. 암반의 찢겨진 틈서리만큼 풍화를 겪으며 조금씩 변형되고 있는 것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연두빛 암반들은 그 색깔이 더욱 묽어지고 마침내는 그저 검붉은 색의 암반 덩어리가 전부였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간간이 양떼들이 보이고 어쩌다 둥근 모양의 천막집 겔이 보였다. 그리고 일정한 크기의 파인 자리가 발견되는데 이는 유목민들의 겨울 집이다. 한 여름 돌아다니다가 겨울이 되면 바람막이가 잘 된 골짜기에 집을 짓고 겨울을 나는 것이다. 또 하나의 인상깊은 것은 길의 흔적이다. 고비는 굳은 땅 풀밭이기 때문에 길이 따로 없었다. 차를 모는 운전자가 길을 만들며 달리는 것이다. 그런데 남이 만든 길을 자주 따라가면 흙이 패이게 되고 먼지가 나게됨으로 제각기 다른 길을 만들며 운전한다. 그러다 보니 10여 개의 길이 나란히 이어지기도 하고 겹치기도 하면서 풀밭 끝없이 펼쳐지는 것이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면 검푸른 호수가 끝없이 이어지는 듯한 느낌인데, 일행은 ‘호수’라거니 ‘검은 흙’ 이라거니 또는 ‘숲’ , ‘구름의 그림자’ 이거니 하고 논란을 벌였다. 그러나 막상 그곳에 이르고 보면 메마르고 거대한 암반만 나타났다. 나는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는 느낌이었는데 어쩌면 환상적 존재인 신기루였는지도 모르겠다.
*고비사막과 독수리계곡
비행기는 도청소재지인 달랑자드가드 공항에 도착했다. 울란바토르에서 2시간 정도의 거리였다. 공항이라고 하지만 그냥 풀밭이다. 활주로도 없다. 특별히 손을 댄 흔적도 없어 자갈돌이 어지러이 깔려 있다. 달랑자드가드가 이곳 고원지방의 도청소재지다. 그러나 인구가 고작 1만 6천 여명이라고 하니 우리의 시골 읍만도 못하다. 울란바토르를 제외한 대부분의 도시가 이런 정도라고 한다. 도시는 허름한 주택들이 겔과 뒤섞여 있다. 더러 나무가 보였는데 오아시스 도시인 모양이다. 마을을 구경할 시간이 없어 곧바로 차편으로 목적지인 항복드 캠프로 달렸다. 쨍쨍한 햇살을 받으며 차는 목초지를 가로질렀다. 목초지라고 하지만 풀들이 모두 메말라 시들어서 그저 마른 진흙땅을 달리는 기분이었다.
거무스름한 자갈들이 초원 가득 깔려 있는데 이곳을 고비라고 하는 것도 이 검은 자갈 때문이다. 그러나 중국의 고비사막과는 상당히 달랐는데 중국의 경우는 대부분 모래와 자갈이 뒤섞인 양상이어서 풀 한 포기 볼 수 없었지만, 이곳은 진흙땅에 자갈이 깔리어서 목초지를 형성하고 있기 때문이다. 근래에 비가 두 달 동안이나 내리지 않아서 푸른 풀빛을 찾아 볼 수 없었다. 이곳 고비의 강우량은 연 150mm 정도라고 하니 하루에 백여 미리가 내리기도 하는 우리나라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항복드 캠프는 중부 고원지방에 들르는 관광객들을 위해 마련된 숙소였다. 여기에서 간단한 점심을 들고 우리는 독수리 계곡으로 향했다. 중간에 <고비박물관>이란 곳에 잠시 들렀다. 이곳 생태계를 나타내는 동물들의 화석이 전시되어 있었다. 박물관 밖에 거대한 나무의 화석이 버려지듯 놓여 있었다. 그래선지 건축자재로 쓰이는 평범한 돌기둥처럼 보였다. 너무 크기 때문에 박물관 안으로 끌어들일 수가 없는 것이다.
몽골의 고원은 지금은 나무 한 그루 없는 풀밭이지만 예전엔 열대 우림지대였음을 이 돌기둥이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매우 중대한 의미가 된다. 수억 년이란 세월을 통하여 지구의 모습이 엄청나게 변하고 있는 것이다. 열대지방이 한대지방이 되고 바다가 육지가 되고 옥토가 사막으로 바뀌기도 하는 것이다. 이 돌기둥을 보고 있으면 그런 변화의 흔적을 실감할 수가 있다. 누군가가 귤껍질론을 제기한 적이 있다. 어느 순간 지구의 표면만이 빙글 돌아간다는 것이다. 13.5도 기운 지축이 바로잡힐 수도 있고 더 많이 기울 수도 있다. 마치 귤이 그 알맹이는 그대로 두고 껍질만 빙 돌아간 경우와 같다. 그렇게 될 때 바다가 육지로 변할 수 있고 육지가 바다에 잠길 수도 있으며 열대와 한 대가 뒤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오랜 세월을 통해서 이런 변화가 가능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보면 사소한 일로 아웅다웅 다투는 인간사가 너무나 허무해 보이기도 한다.
독수리 계곡으로 다가가자 바위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바위산들은 모두 검붉은 색으로 동해안의 해안 절벽에서 볼 수 있는 그런 종류였는데 물기로 번들거렸다. 나무들이 으깨진 바위 틈서리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주로 향나무 종류였다. 키 작은 나무들이 화분의 분재처럼 뒤틀리고 꼬여서 바위에 납작하게 붙어 있다. 이끼류처럼 달라붙은 모습이 처절했다. 수량이 적은 이곳에서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이다. 초원엔 없는 나무가 바위틈에 기생함은 바위가 물을 품고 있어서 가능한 듯이 보였다. 물을 품고 있는 바위, 그 바위에 이끼처럼 기생해서 삶을 영위하는 향나무… 살아남으려는 생명의 몸부림이다.
독수리 계곡 밑에 이르자 아직 녹지 않은 얼음이 빙판이 되어 있었다. 이곳이 관광지로 유명한 것은 바위산의 기묘함보다도 이 만년빙 때문이다. 찬바람이 골짜기로 몰려 왔다. 쨍쨍한 햇살과 사막 특유의 메마르고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 계곡만은 찬바람이 불고 아직 딱딱한 얼음이 그냥 있으니 신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계곡은 38km나 되는데 그 골짜기 전부 이런 빙판으로 이어진다고 한다.
이곳에서 향나무 군락지에 몇 마리의 야생 사슴을 보았다. 산양이나 집 사슴과는 달리 무리를 지어 이동하는 것이 아니라 두세 마리씩 짝을 지어 거닐다가 사람의 기척이 느껴지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이다. 아무도 돌보아 주지 않기 때문에 그런 기민한 동작으로 스스로의 생명을 지켜 나가는 것이다.
독수리계곡을 이루는 이 산을 ‘고르방 사이항’이라 부르는데 남쪽 알타이산맥의 끝 부분이라고 한다. ‘고르방 사이항’은 삼신산(三神山)의 의미가 된다고 한다. 그만큼 몽골에서 신성시되는 산이다. 독수리 계곡은 몽골의 국립공원이다. 자연 풍광의 특이함은 물론 다른 곳에서는 보기 어려운 식물이나 동물이 많아서 많은 연구가들이 방문한다고 한다. 가이드인 아질의 어머니가 우리와 동행하여 이곳을 찾은 것도 이곳 이끼류를 연구하기 위한 것이었다.
계곡 입구에서 양들을 관리하는 목동을 만났다. 염소가 200여 마리 양이 50여 마리, 야크가 30여 마리, 낙타와 소를 합쳐서 모두 300여 마리쯤 관리한다고 한다. 아주 선량해 보이는 전형적인 유목인이었다. 긴 장화와 검은 모자, 갈색 옷, 듬성듬성한 수염, 구리빛 피부…. 그가 우리들에게 말을 태워주었다.
이 목동은 매우 선량하고 여유로웠다. 그가 말하는 하루의 생활 모습을 보자.
그는 아침에 일어나면 제일 먼저 가축 우리의 문을 열어 준다. 문이라야 제주도의 초가집 문간에 걸쳐둔 막대기(정랑)에서 보는 것 같은 모양의 막대기 두어 개를 치워주는 일이다. 그리고 그 자신은 가축들이 나가든 말든 아침 식사를 준비한다. 빵 몇 조각에 치즈 한 덩어리, 양고기 몇 점. 그리고 몽골차를 끓이는 일이다. 이곳의 차는 휴대하기 좋게 찻잎을 압축시켜 마치 돌베개처럼 딴딴히 뭉쳐 있다. 그것을 끓는 물에 부스러기 털 듯 조금 부수어 넣으면 된다. 그렇게 간단한 아침을 들고 약간의 볼 일을 본 후에 말을 타고 집을 나선다. 지금쯤 양떼들이 머물고 있을만한 곳을 짐작하여 그 장소를 찾아가면 양떼들이 풀을 뜯고 있는 현장을 발견하게 된다.
양떼들을 주력부대로 하고 야크나 소, 말들이 적당한 간격으로 무리지어 있다. 그리고 이들을 호위하는 것은 대여섯 마리의 몽골 개들이다. 거대한 체구의 이 개들은 주인을 대신해서 양들을 돌본다. 검정 색깔의 늘름한 모습이다. 눈썹 부위에 흰색의 둥근 털이 있어서 마치 눈이 4개인 것처럼 느껴진다.
양들은 매우 양순하고 둔해서 한 자리에서 좀체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렇게 풀을 뜯다 보면 풀뿌리까지 캐먹게 되어 다음 해의 목초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야생 양을 잡아다 길을 들여 무리에 섞어둔다. 야생 양은 성미가 급해서 한 자리에만 있지 못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렇게 하여 다른 양들도 그 뒤를 따르는 것이다. 그렇다고 양들이 제멋대로 앞으로 나가는 것은 아니다. 우두머리 양이 있는데 이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움직인다. 우두머리가 멈추면 다른 양도 멈추고 우두머리가 걸으면 다른 양도 뒤를 따른다. 어쩌다 무리에서 처지는 양들이 있으면 호위선 개들이 뒤를 쫓아서 무리 안으로 몰아 넣는다.
동물들이 이처럼 스스로 알아서 행하니 정작 목동은 할 일이 없다. 그는 양들이 풀을 뜯고 있는 모양을 한번 둘러보고는 적당한 풀밭에 말을 세워두고 그 말의 그림자 그늘에 길게 누워서 낮잠을 즐긴다. 따로 할 일이 없는 것이다. 그렇게 늘어지게 자고 나면 양들은 다른 곳으로 이동하고 혼자만이다. 그러나 그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 하늘의 해를 쳐다보면 지금의 시각을 대충 짐작할 수 있다. 양들은 일정한 방향으로 일정한 속도로 매일 같은 길을 돌고 있기 때문에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알게 된다. 목동은 말을 타고 천천히 달려 먼저 간 양들의 뒤를 좇아간다. 거기서 양들을 발견하면 역시 풀밭에 말을 세우고 그 그늘에 누워 두 번 째 낮잠을 즐긴다. 그렇게 세 번쯤 잠자고 나면 해가 서녘으로 기울기 시작한다. 목동은 말을 몰고 천천히 자신의 숙소인 겔로 돌아온다.
겔로 먼저 돌아온 목동은 저녁밥을 먹게된다. 저녁메뉴는 아침과 별 다를 게 없다. 약간의 양고기와 빵과 치즈 그리고 몽골차다. 어둠이 완전히 깃들면 목동은 가축 우리로 다가가서 대충 점검한다. 그때쯤엔 양들은 모두 우리 안으로 들어와 있다. 그리고 집 둘레로 개들이 빙빙 돌며 망을 본다. 목동의 생활은 이런 일상의 되풀이다. 그처럼 한가할 수 없다. 걱정거리가 없다. 목동 자신도 한 마리의 양처럼 이런 자연의 질서에 순응해서 그저 같은 모습으로 살아간다. 얼마나 행복한가.
이들이 한국인의 삶을 안다면, 살아가기 위해 학교를 다녀야 하고, 과외비를 내야하고, 직장을 구해야 하고, 돈을 벌어야 하고, 이런 치열한 생존경쟁의 현상을 안다면 한국이야말로 지옥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우리가 문명이라고 생각하는 것들을 그들은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삶의 방법이란 이처럼 판이하다. 삶의 가치나 삶의 진실이 무엇인지 안다는 것도 참으로 쉽지 않다. 아무튼 이들 유목민들은 자신들의 평화롭고 한가한 삶의 방식을 가장 소중히 여길 것임은 당연하다.
갑자기 우박이 쏟겼다. 워낙 갑작스런 일이라 관광객들은 당황해서 허둥대는데, 대부분의 현지인들은 매우 좋아했다. 이곳에서 우박이 쏟기는 일은 극히 드문 일이라고 했다. 아질의 부친이 박수를 치며 좋아했다.
이곳은 대단히 더운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한 밤엔 몹시 추웠다. 특별히 준비한 쉐타를 입고 있는데도 몸이 덜덜 떨렸다. 겔 안엔 난로가 있어서 그들이 공급해 준 약간의 장작과 말린 말똥으로 불을 지폈다. 그러나 워낙 소량이어서 난방효과는 그리 크지 않았다. 그래서 새벽녘엔 추위를 견디기가 어려웠다.
겔 안엔 화장실이 없다. 볼일을 보려면 겔에서 적당히 떨어진 풀밭에서 용변을 볼 수밖에 없었다. 잠결에 한 사람씩 겔을 나가면 다시 들어오는 기척이 없었다. 그래서 나도 용변을 볼겸 슬그머니 밖으로 나갔더니 아 이게 뭔가? 하늘의 별들이 총총한데 너무나 황홀해서 발길을 돌릴 수 없었다. 같은 몽골이라 해도 울란바토르 같은 도시에선 볼 수 없었던 별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내렸다. 이곳 고원은 하늘과 가깝고 대기가 오염되지 않아서 하늘의 별들이 모두 주먹만큼이나 컸다. 특히 우리가 은하수라고 부르던 뿌연 구름 같은 흔적이 사실은 모두 별들의 떨기라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포도밭의 포도송이처럼 송이송이 뚜렷한 별들의 강물이 바로 머리 위까지 내려와 반짝이는데 그 황홀경에 도취해서 추위를 무릅쓰고 모두 하늘만 쳐다보고 있는 것이다. 북두칠성이 바로 머리 위에서 반짝였다. 우리 부모들이 북두칠성을 향해서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것도 우리의 오랜 조상들이 몽골에서 이주해 왔음을 증명하는 것이란 학설도 있다. 조상이 살았던 그곳을 그리워하고 그런 유전적 정신이 대대로 이어져서 정화수 떠놓고 북두칠성을 향해 소원을 비는 것이다.
*터브신 캠프 그리고 모래언덕
항복드 캠프에 도착해서 간단히 점심을 들고 다시 터부신 캠프로 향했다. 항복드는 ‘고르받 사이항’산 중턱에 있는 고원이었지만 터브신은 같은 고원지방이라도 평원지대여서 한결 따뜻한 기온이라고 했다. 터브신으로 오는 도중에 낙타를 키우는 겔에 들렀다. 3채의 겔이 평원지방의 한 곳에 세워져 있었다. 선량한 주부가 손님을 접대했다. 낙타유로 만들었다는 요구르트, 그리고 빵과 치즈였다. 그곳에서 낙타를 탔다. 겔에는 신을 모신 신단격의 탁자와 그 위에 가족사진이 걸려 있었다. 침대는 두 개였다.
터브신의 캠프에 도착했다. 이곳은 개인이 경영하는 캠프여서 항복드의 국영 캠프보다 서비스도 낫고 시설도 좋았다. 이곳에서 점심을 먹고 모래언덕(sand tune)을 구경했다. 1시간쯤 초원을 달려가니 풀밭 고비에 뜻밖의 고운 모래언덕이 나왔다. 규모도 크지 않고 몇 무더기의 모래뿐이어서 실망할 정도였다. 그러나 풀밭뿐인 고비에 이 모래의 출처를 알 수 없어 신기한 관광지가 되는 것이다.
모래는 밀가루같이 곱고 부드러웠다. 몽골고원 어디에도 이런 종류의 모래가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진흙과 검은 자갈, 그리고 메마른 풀, 이런 것이 몽골 고비의 전부다. 그런데 출처를 알지 못하는 몇 무더기의 모래들이 이곳에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다. 그런 희귀성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방문하고 연구가들이 연구를 하게 된다고 한다. 일행중의 한 사람이 그런 희귀성을 염두에 두고 모래 한 줌을 종이봉투에 간직했다. 오래도록 기념하기 위해서였다.(이것 때문에 공항의 출국장에서 문제가 되어 출국이 저지될 입장이 되었다. 이곳의 자연물은 돌이든, 흙이든 허가 없이 가져갈 수 없다는 것이다. 다행히 대사관에 연락되어 무혐의로 출국할 수 있었다.)
오는 길에 ‘오보’로 보이는 돌무더기를 발견했다. 몽골의 오보는 대부분 돌무더기인데 여기에 콘크리트 치장까지 되어 있었다. 오보를 신성시하던 예전 풍습이 사라지고 그저 형식만 남아있는 셈이다. ‘오보’는 우리의 서낭당 개념이지만 이곳에서는 이정표의 역할도 했다. 광막한 초원에서 길을 잃었을 때 ‘오보’는 훌륭한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이곳에 자라고 있는 식물은 가시가 많은 낙타초가 주종이었다. 낙타초를 이곳에서는 ‘하르가느’라고 부른다. 중국 고비에서는 겨울철이라 낙타초가 딱딱한 가시뿐이어서 동물의 먹이가 되기 어렵겠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서 보니 봄부터 새로 솟은 연한 줄기와 부드러운 잎이 제법 무성해서 낙타가 먹을만했다. 들판 가득 낙타초가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밤에는 바에 들러 맥주를 마셨다. 웨이터의 노래 솜씨가 일품이었다. 그는 영어, 일본어, 몽골어의 세 나라 말로 노래를 썩 잘 불렀다. 타고난 목소리에 연습도 많이 한 듯했다. 특히 몽골 노래는 장중하고 유연한 느낌이었다. 이곳은 그리 춥지 않았다. 지대가 낮은 평원이어서 고산지대와는 기온 차가 컸다. 모든 구릉은 단층을 이루어 단계적으로 높아지거나 낮아졌다. 터브신 캠프의 바로 앞도 단층으로 꺼진 양상이어서 낮은 지대의 겔들은 숨겨진 듯이 눈에 잘 띄지 않았다.
석양이 아름다웠다. 마침 300여 마리 양들이 자신들의 우리로 걸어가고 있었다. 떼를 지어 서서히 걷는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그들의 뒤를 바짝 따라붙었다. 그러자 신호를 받았던지 우두머리 양이 그 자리에 멈추어 서더니 나를 돌아보았다. 우두머리 양이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움직이지 않으니 다른 양들도 걸음을 멈추고 하나, 둘 머리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300여 마리의 양이 걸음을 멈추고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것이다. 낯선 이방인에 대한 경계의 표현이었다. 석양에 물든 하늘을 뒤로하고 모든 양이 나를 바라보는 그 똑 같은 동작이 너무나 기이했다. 나는 차마 그들 곁을 더 다가 설 수 없었다. 그들의 경계를 더 지속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슬그머니 발길을 돌려야 했다. 내가 발길을 돌리자 우두머리 양이 돌아보던 머리를 거두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양들도 우두머리가 하듯 천천히 머리를 돌리고 대장을 따라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것이다.
어둠이 몰려오자 그 양들에 대한 인상을 떨쳐 버릴 수 없어 양들이 머물고 있는 겔 쪽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겔의 주위를 경비하던 몽골 개들이 컹컹 짖으며 나의 접근을 막았다. 경고성의 짖음과 더불어 반들대는 눈길이 여간 사납지 않았다. 몽골의 개들은 한낮에는 더 없이 다정했다. 나그네를 가리지 않았다. 심지어 어떤 개들은 사람의 어깨에 발을 걸치고 함께 놀아달라고 떼를 쓰기도 했다. 그러나 밤이 되기 무섭게 그들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된다. 주인 외의 어떤 누구의 접근도 용납하지 않는 것이다. 황막한 초원에서 살아가기 위한 관습과 지혜인지 모른다. 이 광막한 고원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처럼 철저하게 경계하고 주의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유전적 핏줄로 굳어진 모양이다.(*)
첫댓글 글 올려주어서 고맙다. 계속 부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