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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생활의 부족한 2%
지금까지 중년기(40-60세) 위기 극복이라는 주제로 5회에 걸쳐 말씀드렸습니다. 이번이 여섯 번째입니다. 지난번에는 중년기의 성생활에 대해서 말씀했습니다. 이번에는 중년기 시절의 신앙생활, 즉 영성(靈性)생활로 붙여보았습니다.
고래사냥이라는 대중가요가 있는데 제가 대학을 다녔던 1970년대에 유행했던 노래입니다. 가사의 일부분을 소개합니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춤을 춰보아도 마음에는 하나 가득 슬픔뿐이야.....>. 이러한 생활을 세속(世俗)생활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영성생활은 영적(靈的)생활이나 신앙(信仰)생활과 구분하지 않고 동의어로 사용합니다. 영성생활은 세속에서 신령함을 추구합니다.
중년기 사람들의 일반적인 소망은 안정된 직장이나 자영업에서 얻은 수입으로 남에게 손 내밀지 않고 자녀교육, 가정생활, 부모봉양, 여가활동, 봉사활동, 노후준비 등을 하면서 여유있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부러움의 대상입니다.
그러나 물질의 넉넉함 속에 청년기나 중년기를 보내더라도 채워지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이 분야가 영성생활입니다. 사람들은 영혼육(靈魂肉)의 전인적(全人的)인 존재이기에 삶을 단순히 즐기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또한 인생 자체에 부침(浮沈)이 있기에 인생의 침륜(沈淪)기에는 영성생활이 소중합니다.
저 같은 목회자들은 삶 자체가 영성생활이어서 늘 말씀과 기도와 찬송과 함께 하는 삶입니다. 그런데 나의 중년기 영성생활을 돌아보면 그 생활은 순수한 영성생활보다 목회자로서의 직업적인 역할을 감당하기 위한 영성생활이 주류였습니다. 물론 말씀자체에 침잠하고 주님 앞에 홀로 있는 기쁨의 시간을 가졌지만 말씀을 읽고 묵상하면서 얻은 깨달음을 설교와 교인돌봄과 성경공부에 활용해야 되겠구나 하면서 말씀을 접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존재 지향적으로 살지를 못했지요.
새벽기도를 드리고 나서 1시간 정도 말씀을 보면서 묵상했고 받은 은혜를 묵상노트에 기록했습니다. 지금도 그 때 기록했던 글들을 보면서 주님의 특별한 은혜에 잠기게 됩니다. 업적 지향적으로 살았지만 종종 존재 지향적으로 살기도 했습니다.
중년기 삶속에서 아쉬움은 충분히 기도생활을 하지 못했던 점입니다. 지난 세월 열흘 금식기도를 3번 정도 했는데 두 번은 30대에 했고 한 번은 40대에 했습니다. 3일 정도 금식기도는 여러 번 했지만 충분히 무릎 꿇는 생활은 못되었습니다.
영성생활은 신실함(faithful)을 지향합니다. 다수의 사람들의 삶은 다분히 성공함(successful)을 지향합니다. 한 때 조용기목사는 네 시간 기도하는 분으로 알려졌습니다. 많은 사람들은 이 분의 하루 네 시간 기도생활이 여의도순복음교회 대부흥의 원동력이라고 믿습니다. 하루 네 시간 기도실천운동 목회자들은 기도를 통해서 능력과 은사를 받아 성공적인 교회성장을 이루겠다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상당수의 영성생활 지향자들은 성공적인 인생을 위한 목적지향적 영성생활입니다.
세계적인 치유상담가인 부르스 탐슨 박사의 간증입니다. 이 분의 책, <내 마음의 벽(The Wall of My Heart)>은 한국에서도 베스트 셀러가 되었는데 뉴질랜드 출신의 의사인 이 분은 신실한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이 분이 말레이시아 페낭에서 치유집회를 인도하는 중에 참석자들이 큰 은혜를 받았답니다. 그런데 정작 자신에게는 기쁨도 평안도 없고 마음은 공허감으로 가득 채워졌답니다. 너무나 실망하고 탈진상태에서 숙소 에 돌아와 침대 옆에 앉아 있었는데 주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부르스야, 네가 너무 바빴구나. 내가 너를 만나볼 시간도 없구나!” 이러한 주님의 음성을 들으면서 부르스 탐슨은 깊은 회개를 했다고 합니다. 그는 유명하게 된 이후에 지나간 삶을 돌아보면 세미나, 강연, 여행 등으로 분주한 시간들을 보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소개했지만 정작 자신은 주님과 교제할 시간이 부족했다고 합니다. 이 후에 탐슨박사는 주님과의 긴밀한 교제에 더욱 침잠하게 됩니다.
영성신학자 보이어(Boyer)는 영성에 대해서 연구하면서 초기기독교수사들이 광야의 척박한 환경 속에 거하며 보여준 헌신, 홀로함, 기도, 묵상의 삶에 도전을 받았습니다. 한편으로 그는 그런 수도원적인 광야의 영성이 어떻게 결혼해서 아내가 있고 아이가 있으며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도 가능할 것인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Boyer는 광야의 수도원적인 삶으로 지칭되는 영성은 <가장자리 영성>이고, <중심의 영성>은 매일의 삶과 가정에서의 삶이라고 지적합니다. 가장자리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하나님 앞에 늘 단독자로 서서 하나님의 임재를 구하고 깊은 영적체험을 합니다. 중심의 영성을 추구하는 사람은 가정과 삶의 분주함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분별하며 평범한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을 경험합니다.
사람들에게는 이 두 가지 영성이 모두 필요합니다. 특히 여러 가지 무거운 짐을 지고 살아가는 중년기의 인생들은 가장자리영성에서 충만한 능력과 은혜를 받고 이 힘으로 중심의 영성에서 기쁨과 감사와 은혜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대중문화와 영성생활
가까운 친구 목회자는 관객이 백만 명 이상이 보는 영화는 꼭 보는 것이 좋다고 권면합니다. 어떤 군선교사역자는 설교를 영화를 활용해서 합니다. 나도 늘 드라마를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유명한 사극정도는 보려고 노력하지만 잘 되지는 않습니다.
경기도 화성시에서 진토리교회를 섬기는 강영기목사님은 깊은 말씀의 은혜를 가진 신실한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이 목사님은 교인들의 가정에 심방을 잘 가지를 않는데 그 원인은 일부 교인들이 가정의 핵심자리에 값비싼 대형 TV세트를 설치한 것 때문이라고 합니다. 이분은 평생을 살면서 텔레비전을 보았던 시간이 몇 시간이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이분은 거의 텔레비전을 보지 않고 살았습니다.
건강한 영성생활에 배우자는 도움이 되기도 방해가 되기도 합니다. 배우자가 대중문화와 어떤 관련성이 있는가 하는 점이 관건입니다. 배우자가 말씀에 침잠하고 늘 찬송하며 기도에 힘쓰면 함께 사는 사람도 그러한 영향력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데 배우자가 텔레비전 드라마와 오락프로에 침잠해있으면 그 영향력 을 받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중매체는 중독성이 있어서 한 번 세계에 들어가면 빠져나오기가 쉽지 않습니다. 배우자가 신령한 은혜를 사모하면 영성생활에 도움이 됩니다.
사람들은 다양한 대중문화적인 관심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여성들은 텔레비전 드라마를 좋아해서 그 내용을 보면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반면에 남성들은 정치 지향적이고 스포츠 지향적입니다. 텔레비전은 정치지향적인 시사물과 스포츠관련 중계방송을 끊임없이 공급해줍니다. 남성들이 여기에 빠지면 30분 정도 진행되는 말씀묵상이나 찬양이나 기도를 지겨워하면서 텔레비전이 제공하는 시사프로그램이나 스포츠 중계에 정신을 집중합니다. 그 결과 영성생활에는 소홀해집니다.
나는 정치 지향적이었고 현재도 정치 지향적입니다. 정치적으로 중도를 지향한다고 스스로 고백하지만 제 아내는 제가 우파적인 정치지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지적합니다. 정치적인 논쟁에 댓글을 단 적은 없지만 과거에는 조토마 토론장(조선일보 토론마당)이나 포털 다음(daum)의 아골라 토론장의 글들을 관심있게 보았습니다. 여기에 들어가서 인터넷 검색공간에서 두 세 시간의 황금같은 시간을 보냅니다. 그리고 나와서는 시간낭비를 후회하지만 다음에 또 들어갑니다.
중년기의 영성생활에서 가장 후회되는 부분이 이 부분입니다. 뉴스와 토론광장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면서 영성생활을 충실히 못했습니다. 자가당착으로 내가 제일 싫어하는 정죄하는 태도를 본인은 시사논쟁에서 나와 견해가 다른 사람들에게 분노하며 정죄했던 적이 많았습니다. 이런 태도의 결과로 예수님에게 집중하지 못했고 말씀과 강의준비에 충실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이 버릇은 쉽게 고쳐지지가 않습니다. 예수님의 당은 특정한 정당이 아닌 예배당인데 나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로마서 12장1-2절은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저는 이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이 세대 사람들을 본받았습니다. 정치적인 논쟁에 휘말려서 상대방을 쉽게 정죄합니다. <나는 선이고 너는 악이다.> <나는 대한민국 민주 정통이고 너는 친북좌파다.> 이렇다 보니 때로는 나의 생각은 거칠어지고 다른 쪽 사람들을 정죄합니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과 어긋나게 됩니다.
로마서 8장 1-2절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나의 이런 태도로 가까운 사람들과도 갈등을 일으켰습니다. 어떤 때는 길거리에 서 정치적인 논쟁이 머리에 떠오르고 심지어는 잠자리에 들면서도 그런 정치적인 논쟁이 분노하게 만들어서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을 매도하기도 했습니다.
중년기를 보내는 남성들 중에는 나와 같은 정치지향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들의 취향은 우파, 좌파, 중도파 등 다양합니다. 정치적인 관심을 갖는 것은 소중한 민주민의식이기도 하지만 과잉정치적인 관심은 패착을 낳고, 이러한 성향은 공동체의 통합을 저해하고 사회를 만인의 투쟁소로 만듭니다.
목사가 특정한 정치적 성향을 가지고 있으면 다른 생각을 가진 교인들하고는 담을 쌓게 됩니다. 진해에서 목회를 할 때인 2002년 가을에 젊은 세대는 노무현후보지지 세력이 많았는데 나도 노무현 후보를 좋아하지만 아직은 준비가 덜 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스스로는 정치적으로 균형잡힌 시각을 갖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일부 교인들은 생각이 나와는 달랐고 교회내의 분위기가 좋지 않았습니다.
칼 바르트는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려면 한쪽에는 신문을 들고 다른 한쪽에서는 성경을 들고서 보아야 한다고 하면서 현실세계에 적극적인 관심을 갖는 것을 강조했지만 사람들의 특성상 쉽게 어느 한 쪽으로 기울어지게 되어있습니다. 정치적인 입장에서 중간자의 입장을 취한다는 것은 어렵고 오랜 수양이 필요합니다.
중년기의 아쉬움 속에 예수님의 말씀을 다시 주목합니다. <죽은 자는 죽은 자에게 맡기고 나를 따르라.> <쟁기를 가지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아버지의 나라에 합당하지 않다.>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에게!>
새롭게 영성생활을 시작합니다.
1994년 4월 초에 국제 YWAM에서 제자훈련을 받기 위해서 하와이 코냐로 가기 전에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며칠간 여행을 했습니다. 그 때 아내와 자동차 렌트와 짐을 옮기는 문제로 심하게 다투었습니다. 그 때에 아내에게 분노했었고 렌트회사의 직원에게 분노했습니다. 좋은 여행을 하면서 나에게 남아있는 죄책감과 빈약한 영성생활은 종종 나의 심령을 교만과 미움으로 가득 채웠습니다. 지난 20년을 돌아보면 영성생활의 빈약은 늘 나에게 부정적인 정서와 왜곡을 가져왔습니다. 그래서 영성생활의 소중함을 마음속에 새겨봅니다.
최근에 나의 영성생활을 위한 실천목록중의 하나는 찬송을 부르는 일입니다. 하루에 20곡 정도의 찬송가를 부르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습니다. 아침에 열곡, 저녁에 열곡을 부릅니다. 모르는 찬송은 시로 읽습니다. 새찬송가 645곡은 신앙생활의 모든 주제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예수님, 성령님, 주님과의 동행, 기쁨, 감사, 소망, 성령충만, 노인, 청년, 어린이, 탄생, 고난, 부활, 승천, 재림, 성찬 등의 모든 주제가 들어있습니다. 찬송을 부르면서 하루를 시작하면 예수님과 함께 하루를 시작합니다. 최근에는 스마트폰 앱을 활용해서 찬송가를 부릅니다. 여기에는 찬송가 전곡이 찬송가수들의 노래로 수록되어 있어 따라 부르다보면 어느 새 10곡 정도의 찬송가를 모두 부르게 됩니다. 시간은 약 30분 정도 소요됩니다.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시간에도 10곡 정도 찬송가를 부릅니다. 찬송 후에는 잠자리가 참 편안합니다. 이 시간은 주님의 긍휼과 자비와 사랑으로 채워지는 시간입니다. 찬송 후에는 잠자리에서 주변 사람들을 위해서 자연스럽게 중보기도를 드립니다.
말씀은 찬송을 부른 후에 5장-10장 정도 읽습니다. 늘 그렇게 실천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하도록 노력을 합니다. 이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해서 게으름을 탓하기도 합니다. 말씀을 읽으면서 깊은 은혜가 있는 말씀은 깊이있게 묵상합니다.
이제 만 60세의 인생을 시작하면서 영성생활에 집중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쉽지만은 않습니다. 아직도 해야 할 일들이 많고 만아야 할 사람들이 많습니다. 이 글을 정리하는 중에 암투병하고 있던 고등학교 친구가 소천했다는 소식이 들려옵니다. 생존해 있을 때에 방문하려고 했는데 기회를 놓쳐버렸습니다.
시간이 얼마나 빨리 지나가는 지요. 60대의 시간은 더 빨리 지나가겠지요. 중년기 20년의 세월이 금방 지난 간 것처럼 느껴집니다.
돌아보면 아쉬움이 남습니다. 제가 결혼할 때 결혼식을 주례했던 손훈 목사님(영화교회 원로목사)은 저에게 <성령충만>이라고 적힌 액자를 주시면서 이제는 결혼도 하고 곧 신대원 졸업도 하게 되니까 <성령충만> 하기만 하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살지를 못했습니다. 성령님의 온전한 지배를 받기보다는 교회성장, 정치적인 관심, 나의 비전의 성취를 통하여 successful(성공)>faithful(신실)을 추구했던 것 같습니다.
다시 한 번 예수님의 말씀을 새겨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한14:27)
영성생활은 주님의 평안을 줍니다. 영성생활을 놓쳐버리면 세상이 주는 평안을 추구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이 평안은 거짓 평안입니다. 거짓 평안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밤새도록 술을 마십니다. 아침에 일어나서 아직 술이 덜 깬 상태에서 또 술을 마십니다. 불행한 인생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기독교인들도 무늬만이 기독교인 경우에는 여전히 세상의 거짓 평안만을 쫓게 됩니다. 비록 성공한 신앙인일지라도 조그만 빈들판에서 예수님과 만나는 일을 소홀히 할 때는 누구나 쉽게 거짓 평안을 찾게 됩니다. 그 결과로 예수님은 그들의 인생과 삶에서 중심의 자리가 아닌 가장 자리에서 손님으로 머물게 됩니다.
지난 중년기를 돌아보면 적지 않은 위기들이 있었습니다. 가족 내에서도 있었고 가족 밖에서도 있었습니다. 돌아보면 모든 위기의 해결책은 영성이었습니다. 주님과의 동행하는 삶에서 결정되었습니다. 영성으로 뒷받침이 되지 않았던 많은 결정들은 건강한 결정은 아니었습니다. 어떤 잘못된 결정들은 충분히 무릎을 꿇었다면 주님이 원하시는 방향으로 결정을 할 수 있을 텐데 하면서 아쉬워합니다.
군인교회를 민간인 군목으로 섬기면서 주일 오후에는 한 시간 정도 군종병들과 모임을 갖습니다. 20분 찬양하고, 20분 말씀보고, 20분 은혜를 나누면서 기도합니다. 이들에게 일주일에 성경 한 구절을 암송하고 병영생활관에서 2명 정도 병사들을 개인적으로 섬길 것을 권면합니다. 젊은 기독병사들에게 영성의 삶을 지향하도록 권면을 합니다. 나의 소망은 이들에게는 좀 더 순수한 영성생활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에릭 에릭슨은 인생을 8단계로 나누면서 마지막 8단계인 노년기의 삶의 목표는 자아통합이라고 말합니다. 자아통합은 영성적인 삶의 실천으로 가능하며 영적인 관심을 갖고 자신을 돌아보면 모든 삶을 긍정적으로 통합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영성으로 풍성해지면 성공도 실패도 그렇게 중요한 것은 못됩니다. 성경의 위대한 인물들의 삶의 핵심은 주님을 바라보았고 주님과 동행했습니다. 그들은 주님과 동행하면서 본향을 향한 순례자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이제 조용히 주님께 기도합니다. <오늘 하루 동안도 주님과 동행하면서 빈들판의 기쁨을 누리게 하소서! 나의 꿇은 무릎에 힘을 더하여 주옵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