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날입니다. 안중근의사는 「安應七歷史」를 이어 「東洋平和論」을 옥중에서 집필하였으나 일제의 위약으로 「序」와 본문중 「前鑑一」만 쓰고 「現狀二」 「伏線三」 「問答四」는 목차만 제시하고 미완인채 사형이 집행되어 순국하였다. 이 동양평화론은 1979년 9월 1일 일본국회도서관 헌정자료실 ‘七條淸美文書’중 「安重根傳記及論說」에 합철된 필사본이다.
국역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서문 대저 합하면 성공하고 흩어지면 패망한다는 것은 만고에 분명히 정해져 있는 이치이다. 지금 세계는 동서(東西)로 나뉘어져 있고 인종도 각각 달라 서로 경쟁하고 있다. 일상생활에서의 이기(利器)연구 같은 것을 보더라도 농업이나 상업보다 대단하며 새 발명인 전기(電氣)포(砲), 비행선(飛行船), 침수(浸水)정(艇)은 모두 사람을 상하게 하고 물(物)을 해치는 기계이다. 청년들을 훈련하여 전쟁터로 몰아넣어 수많은 귀중한 생명들을 희생(犧牲)처럼 버리고 피가 냇물을 이루고 고기가 질펀히 널려짐이 날마다 그치질 않는다. 삶을 좋아하고 죽음을 싫어하는 것은 모든 사람의 상정이거늘 밝은 세계에 이 무슨 광경이란 말인가. 말과 생각이 이에 미치면 뼈가 시리고 마음이 서늘해진다. 그 근본을 따져보면 예로부터 동양민족은 다만 문학(文學)에만 힘쓰고 제 나라만 조심해 지켰을 뿐이지 도무지 구주(歐洲)의 한치 땅이라도 침입해 뺏지 않았다. 이는 5대주(大洲) 위의 사람이나 짐승 초목까지 다 알고 있는 바이다. 그런데 구주의 여러 나라들은 가까이 수 백년 이래로 도덕(道德)을 까맣게 잊고 날로 무력을 일삼으며 경쟁하는 마음을 양성해서 조금도 기탄하는 바가 없다. 그 중「러시아」가 더욱 심하다. 그 폭행과 잔해(殘害)함이 서구(西歐)나 동(東)아(亞)에 어느 곳이고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악이 차고 죄가 넘쳐 신(神)과 사람이 다같이 성낸 까닭에 하늘이 한 매듭(一期)을 내려 동해 가운데 조그만 섬나라인 일본으로 하여금 이와 같은 강대국인「러시아」를 만주대륙에서 한 주먹으로 때려눕히게 하였다. 누가 능히 이런일을 헤아렸겠는가. 이것은 하늘에 순하고 땅의 배려를 얻은 것이며 사람의 정에 응하는 이치이다. 당시 만일 한(韓).청(淸) 양국인민이 상하가 일치해서 전날의 원수를 갚고자 해서 일본을 배척하고「러시아」를 도왔다면 큰 승리를 거둘 수 없었을 것이어늘 어찌 예상을 했겠는가. 그러나 한.청 양국인민은 이와 같은 행동이 없었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일본군대를 환영하고 운수, 치도(治道), 정탐 등 일에 수고로움을 잊고 힘을 기울였다. 이것은 무슨 이유인가. 두 가지 큰 사유가 있었다. 일본과「러시아」가 개전할 때, 일본천황의 선전포고하는 글에 “동양평화를 유지하고 대한독립을 공고히 한다.”라고 했다. 이와 같은 대의(大義)가 청천백일(靑天白日)의 빛보다 더 밝았기 때문에 한.청 인사는 지혜로운 이나 어리석은 이를 막론하고 일치동심해서 복종했음이 그 하나이고, 일본과「러시아」의 다툼이 황색인종(黃色人種)의 경쟁이라 할 수 있으므로 지난날의 원수진 심정이 하루아침에 사라져 버리고 도리어 하나의 큰 인종 사랑하는 무리(一大愛種黨)를 이루었으니 이도 또한 이정의 순서라 가히 합리적인 이유의 다른 하나이다. 쾌하도다 장하도다. 수백년래 행악하던 백인종의 선봉을 한 북소리로 크게 부수었다. 가히 천고의 희한한 일이며 만방이 기념할 자취이다. 당시 한.청 양국의 뜻있는 이들이 기약치 않고 함께 기뻐해 마지않은 것은 일본의 정략(政略)이나 일해쳐 나감이 동서양 천지가 개벽한 뒤로 가장 괴걸(魁傑)한 대사업이며 시원스런 일로 스스로 헤아렸기 때문이었다. 슬프다. 천천만만 의외로 승리하고 개선한 후로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같은 인종인 한국을 억압하여 조약을 맺고, 만주 장춘(長春) 이남을 조차(租借)를 빙자하여 점거하였다. 세계 일반인의 머릿속에 의심이 홀연히 일어나서 일본의 위대한 성명(聲名)과 정대한 공훈이 하루아침에 바뀌어 만행을 일삼는「러시아」보다 더 심하게 보게 되었다. 슬프다. 용호(龍虎)의 위세로서 어찌 뱀이나 고양이 같은 행동을 한단 말인가. 그와 같이 만나기 어려운 좋은 기회를 다시 찾은들 어떻게 얻을 것인가. 아깝고 통탄할 이이로다. 「동양평화」「한국독립」의 단어에 이르러서는 이미 천하만국의 사람들 이목에 드러나 금석(金石)처럼 믿게 되었고 한.청 양국사람들의 간뇌(肝腦)에 도장 찍혀진 것이다. 이와 같은 문자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서도 마침내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다. 이와 같은 문자 사상은 비록 천신의 능력으로서도 마침내 소멸시키기 어려울 것이거늘 하물며 한두 사람의 지모(智謀)로 어찌 능히 말살할 수 있겠는가. 지금 서양세력이 동양으로 뻗쳐오는 화난을 동양인종이 일치단결해서 극력 방어해야 함이 제일의 상책(上策)임을 비록 어린아이일지라도 익히 아는 일이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로 일본은 이러한 순연(順然)한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인 이웃나라를 깎고 우의(友誼)를 끊어 스스로 방휼(蚌鷸)의 형세를 만들어 어부(漁夫)를 기다리는 듯하는가. 한.청 양국인의 소망이 크게 절단되어 버렸다. 만약 정략을 고치지 않고 핍박이 날로 심해진다면 부득이 차라리 다른 인종에게 망할지언정 차마 같은 인종에게 욕을 당하지 않겠다는 의론이 한.청 양국인의 폐부(肺腑)에서 용솟음쳐서 상하 일체가 되어 스스로 백인(白人)의 앞잡이가 될 것이 명약관화한 형세이다. 그렇게 되면 동양의 몇 억 황인종중의 허다한 유지와 강개 남아가 어찌 수수방관(袖手傍觀)하고 앉아서 동양전체의 까맣게 타죽는 참상을 기다릴 것이며 또한 그것이 옳겠는가. 그래서 동양평화를 위한 의전(義戰)을「하얼빈」에서 개전하고 담판(談判)하는 자리를 여순구(旅順口)에 정했으며 이어 동양평화문제에 관한 의견을 제출하는 바이다. 제공(諸公)은 눈으로 깊이 살필지어다. 1910년 경술 2월 대한국인 안중근 여순옥중에서 쓰다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전감(前鑑) 一 ·현상(現狀) 二 ·복선(伏線) 三 ·문답(問答) 四
동양평화론(東洋平和論) 안중근 저 전감(前鑑) 예로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동서남북의 어느 주(洲)를 막론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것이 대세(大勢)의 번복(飜覆)이고 알 수 없는 것은 인심의 변천이다. 지난날(甲午年.1894년) 일.청전역(日淸戰役)을 보더라도 그 때 조선국의 서절배(鼠竊輩) 동학당(同學黨)의 소요로 인연해서 청.일 양국이 동병해서 건너왔고 무단히 개전(開戰)해서 서로 충돌하였다. 청국이 패해 일본이 이기고 승승장구, 요동(遼東)의 반을 점령하였다. 요험(要險)인 여순(旅順)을 함락시키고 황해함대(黃海艦隊)를 격파한 후 마관(馬關)에서 담판을 열어 조약을 체결하여 대만(臺灣)을 할양받고 2억원을 배상금으로 받기로 하였다. 이는 일본의 유신(維新)후 하나의 커다란 기념사이다. 청국은 물자가 풍부하고 땅이 넓어 일본에 비하면 수십 배는 족히 되는데 어떻게 해서 이와 같이 패했는가. 예로부터 청국인은 스스로를 중화대국(中華大國)이라 일컫고 다른 나라를 오랑캐라 일러 교만이 극심하였으며 더구나 권신척족(權臣戚族)이 국권을 천농(擅弄)하고 신민(臣民)과 원수를 삼고 상하가 불화했기 때문에 이와 같이 욕을 당한 것이다. 일본은 유신 이래로 민족이 화목하지 못하고 다툼이 끊임이 없었으나 그 외교적 정쟁이 생겨난 후로는 집안싸움(同室操戈之變)이 하루아침에 화해가 되어 연합을 혼성하고 한 덩어리 애국당(愛國黨)을 이루었으므로 이와 같이 개가를 올리게 된 것이다. 이것이 이른바 친절한 외인(外人)이 다투는 형제보다 못하다는 것이다. 이 때의「러시아」의 행동을 기억할지어다. 당일에 동양함대(東洋艦隊)가 조직되고 「프랑스」독일 양국이 연합하여 「요코하마」(橫港)해상에서 크게 항의를 제출하니 요동반도(遼東半島)가 청국에 환부되고 배상금이 감액되었다. 그 외면적인 행동을 보면 가히 천하의 공법(公法)이고 정의리라 할 수 있으나 그러나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호랑(虎狼)이의 심술보다 더 사납다. 불과 수년동안에 민첩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여순구(旅順口)를 조차(租借)한 후에 군항(軍港)을 확장하고 철도를 부설하였다. 이런 일의 근본을 생각해 보면 「러시아」사람이 수십년 이래로 봉천이남(奉天以南) 대련(大連) 여순 우장(牛莊) 등지에 부동항(不凍港) 한 곳을 억지로라도 가지고 싶은 욕심이 불같고 밀물 같았다. 그러나 감히 하수를 못한 것은 청국이 한번 영(英).불(佛) 양국의 천진(天津) 침략을 받은 이후로 관동(關東)의 각진(各鎭)에 신식 병마(兵馬)를 많이 설비했기 때문에 감히 생심을 못하고 단지 끊임없이 침만 흘리면서 오랫동안 때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때에 이르러 셈이 들어맞은 것이다. 이 때를 당해서 일본인 중에도 식견이 있고 뜻이 있는 자는 누구라도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그 이유를 따져보면 이 모두가 일본의 과실이다. 이것이 이른바 구멍이 있으면 바람이 생기는 법이요, 자기가 치니까 남도 친다는 격이다. 만일 일본이 먼저 청국을 침범하지 않았다면 「러시아」가 어찌 감히 이와 같이 행동했겠는가. 가위 제 도끼에 제 발 찍힌 격이다. 이로부터 중국 전체의 모든 사회 언론이 들끓었으므로 무술개변(戊戌改變)이 자연히 양성(釀成)되고 의화단(義和團)이 들고 일어났으며 일본과 서양을 배척하는 화난이 크게 치열해졌다. 그래서 8개국 연합군이 발해(渤海) 해상에 운집하여 천진(天津)이 함락되고 북경(北京)이 침입을 받았다. 청국 황제가 서안부(西安府)로 파천하는가 하면 군민(軍民)할 것 없이 상해를 입는 자가 수백만명에 이르고 금은재화의 손해는 그 숫자를 헤아릴 수 없었다. 이와 같은 참화는 세계역사상 드문 일이고 동양의 일대 수치일 뿐만 아니라 장래 황인종과 백인종 사이의 분열경쟁이 그치지 않을 징조를 나타낸 것이다. 어찌 경계하고 탄식하지 않을 것인가. 이 때「러시아」군대 11만이 철도 보호를 칭탁(稱託)하고 만주 경계상에 주둔해있으면서 종내 철수하지 않으므로「러시아」주재 일본공사 율야(栗野)씨가 혀가 닳고 입술이 부르트도록 폐단을 주장하였지만「러시아」정부는 들은 체도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군사를 증원하였다. 슬프다, 일.러 양국간의 대참화를 종내 모면하지 못하였도다. 그 근본을 논하면 필경 어디로 몰아갈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동양의 일대전철(一大前轍)이다. 당시 일.러 양국이 각각 만주에 출병할 때「러시아」는 단지「시베리아」철도로 80만 군비(軍備)를 실어내었으나 일본은 바다를 건너고 남의 나라를 지나 4,5군단과 치중(輜重)군량을 수륙(水陸)병진으로 요하(遼河)일대에 수송했으니 비록 정산(定算)이 있었다고는 하지만 어찌 위험하지 않았겠는가. 결코 만전지책(萬全之策)이 아니요 참으로 낭전(浪戰)이라 할 수밖에 없다. 그 육군이 잡은 길을 보면 한국의 각 해구(海口)와 성경(盛京) 금주만(金州灣) 등지로서 하륙(下陸)할 때는 4,5천리를 지나온 터이니 수륙(水陸)의 괴로움을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가 있다. 이 때 일본군이 다행히 연전연승은 했지만 함경도(咸境道)를 아직 벗어나지 못했고 여순구(旅順口)를 격파하지 못했으며 봉천(奉天)에서 채 이기지 못했을 즈음이다. 만약 한국의 관민(官民)이 일치 동성(同聲)으로 을미년(乙未年,1895년)에 일본인이 한국의 명성황후(明成皇后) 민씨(閔氏)를 무고히 시해한 원수를 이 때 갚아야 한다고 사방에 격문을 띄우고 일어나고 함경.평안 양도 사이에 있는 「러시아」군대가 생각지 못한 곳을 찌르고 나와 전후좌우로 충돌하며, 청국도 또한 상하가 협동해서 지난날 의화단(義和團)때처럼 들고 일어나 갑오년(甲午年,日淸戰役)의 묵은 원수를 갚겠다고 하면서 북청(北淸)일대의 인민이 폭동을 일으키고 허실(虛實)을 살펴 방비 없는 곳을 공격하며 개평(盖平) 요양(遼陽) 방면으로 유격기습을 벌여 나아가 싸우고 물러가 지킨다면 일본군은 남북이 분열되고 복배(腹背)에 적을 맞아 사면으로 포위 당한 비감(悲感)을 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만일 이런 지경에 이르렀다면 여순(旅順) 봉천(奉天) 등지의「러시아」장종들이 예기(銳氣)가 등등하고 기세가 배가(倍加)해서 앞뒤로 가로막고 좌충우돌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군의 세력이 머리와 꼬리가 맞아떨어지지 못하고 치중(輜重)과 군량미를 이어댈 방도가 아득해졌을 것이다. 그러하면 산현유붕(山縣有朋) 내목희전(乃木希典)씨의 경략(經略)이 필히 무산되었을 것이며 또한 마땅히 이 때 청국정부와 주권자의야심이 폭발해서 묵은 원한을 갚게 되었을 것이고 때도 놓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른바 만국공법(萬國公法)이라느니 엄정중립(嚴正中立)이라느니 하는 말들은 모두 근래 외교가(外交家)의 교활한 무술(誣術)이니 족히 말할 바가 못된다. 병불염사(兵不厭詐) 출기불의(出其不意) 병가묘산(兵家妙算) 운운하면서 관민(官民)이 일체가 되어 명분 없는 군사를 출동시키고 일본을 배척하는 상대가 극렬 참독(慘毒)해 졌다면 동양 전체가 휩쓸 백년풍운(百年風雲)을 어떻게 할 것인가. 만약 이와 같은 지경이 되었다면 구주(歐洲)열강이 다행히 좋은 기회를 얻었다 해서 각기 앞을 다투어 군사를 출동시켰을 것이다. 그 때 영국은 인도「홍콩」등지에 주둔하고 있는 수륙(水陸)군대를 병진시켜 위해위(威海衛) 방면에 집결시켜 놓고는 필시 강경수단으로 청국정부와 교섭하고 캐어물을 것이다. 또 「프랑스」는 「사이공」 가달마도(加達馬島)에 있는 육군과 군함을 일시에 지휘해서 「아모이 」등지로 모여들게 했을 것이고, 미국, 독일, 「벨기에」 「오스트리아」 「포르투칼」, 희랍 등의 동양 순양함대는 발해 해상에서 연합하여 합동조약을 예비하고 이익을 균점할 것을 희망했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일본은 부득불 밤새워 전국의 군사비(軍事費)와 국가 재정(財政)을 통틀어 짠 뒤에 만주 한국 등지로 곧바로 수송했을 것이고 청국은 격문을 사방으로 띄우고 만주 산동 하남(河南) 형량(荊襄) 등지의 군대와 의용병을 급급 소집해서 용전호투(龍戰虎鬪)하는 형세로 일대풍운(一大風雲)을 자아냈을 것이다. 만약 이러한 형세가 벌어졌다면 동양의 참상은 말하지 않아도 상상하고도 남음이 있다. 이 때 한.청 양국은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약장(約章)을 준수하고 털끝만큼도 움직이지 않아 일본으로 하여금 위대한 공훈을 만주땅 위에서 세우게 했다. 이로 보면 한.청 양국 인사의 개명(開明) 정도와 동양평화를 희망하는 정신을 족히 알 수가 있다. 그러하니 동양의 일반 유지들의 일대(一大) 사량(思量)은 가히 뒷날의 경계가 될 것이다. 그런데 그 때 일로전역(日露戰役)이 끝날 무렵 강화조약(講和條約) 성립을 전후해서 한.청 양국 유지인사(有志人士)의 허다한 소망이 다 절단되어 버렸다. 당시 일.러 양국의 전세를 논한다면 한번 개전한 이후로 크고 작은 교전(交戰)이 수백 차였으나 「러시아」 군대는 연전연패(連戰連敗)해서 상심낙담이 되어 멀리서 모습만 바라보고서 달아났다. 일본군대는 백전백승하고 승승장구하여 동으로는 「블라디보스톡」 가까이 까지 이르고 북으로는 「하얼빈」에 육박하였다. 사세가 여기까지 이른 바에야 기회를 놓쳐서는 안될 일이었다. 이왕 벌인 춤이니 비록 전 국력을 기울여서라도 한 두달동안 사력을 사해 진취(進取)하면 동으로 「블라디보스톡」을 뽑고 북으로 「하얼빈」을 격파할 수 있었음은 명약관화한 형세였다. 만약 그렇게 되었다면 「러시아」의 백년대계는 하루아침에 필시 토붕와해(土崩瓦解)의 형세가 되었을 것이다. 무슨 이유로 그렇게 하지를 않고 도리어 은밀히 구구하게 먼저 강화를 청해 (화를)뿌리째 뽑아버리는 방도를 달성하지 않았는지 가위 애석한 일이다. 황차 일.러 담판을 보더라도 이왕이면 강화 담판할 곳을 의정(議定)하면서 천하에 어떻게 「워싱턴」이 옳단 말인가. 당일 형세로 말한다면 미국이 비록 중립(中立)으로 편벽된 마음이 없다고는 하지만 짐승들이 다투어도 오히려 주객이 형세가 있는 법인데 하물며 인종의 다툼에 있어서랴. 일본은 전승국이고 「러시아」는 패전국인데 일본이 어찌 제 본뜻대로 정하지 못했는가. 동양에는 족히 합당할만한 곳이 없어서 그랬단 말인가. 소촌(小村壽太郞) 외상(外相)이 구차스레 수만리 밖 「워싱턴」까지 가서 강화조약을 체결할 때에 화태도(樺太島) 반부(半部)를 벌칙조항(罰則條項)에 넣은 일은 혹 그걸 수도 있어 이상하지 않지만 한국을 그 가룬데 첨가해 넣어 우월권(優越權)을 갖겠다고 이름한 것은 근거도 없는 일이고 합당함을 잃은 처사이다. 지난날 마관(馬關) 조약 때는 본시 한국은 청국의 속방(屬邦)이므로 그 조약 중에 간섭이 반드시 있게 마련이지만 한.러 양국간에는 처음부터 관계가 없는 터인데 무슨 이유로 그 조약 가운데 들어가야 한단 말인가. 일본이 한국에 대해서 이미 큰 욕심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자기 수단으로 자유로이 행동하지 못하고 이와 같이 구라파(歐羅巴) 백인종과의 조약 중에 첨입해서 영세(永世)의 문제로 만들었단 말인가. 도시 방책이 없는 처사이다. 또한 미국대통령이 이왕 중재하는 주인으로 되었는지라 곧 한국이 구미 사이에 끼어있는 것처럼 되었으니 중재주(仲裁主)가 필시 크게 놀라서 조금은 괴상하게 여겼을 것이다. 같은 인종을 사랑하는 의리로서는 만에 하나라도 승복할 수 없는 이치이다. 또한 (미국대통령이) 노련하고 교활한 수단으로 소촌(小村) 외상(外相)을 농락하여 약간의 해도(海島) 조각 땅과 파선(破船) 철도 등 잔물(殘物)을 배상으로 나열하고서 거액의 벌금은 전폐(全廢)시켜 버렸었다. 만일 이 때 일본이 패하고 「러시아」가 승리해서 담판하는 자리를 워싱턴에서 개최했다면 일본에 대한 배상요구가 어찌 이처럼 약소했겠는가. 그러하니 세상일의 공평되고 공평되지 않음을 이를 미루어 가히 알 수 있을 뿐이고 다른 이유는 없다. 지난날 「러시아」가 동으로 침략하고 서쪽으로 정벌을 감행해 행위가 심히 가중하므로 구미열강이 각자 엄정중립을 지켜 서로 구조(救助)하지 않았지만 이미 이처럼 황인종에게 패전을 당한 뒤이고 사태가 결판이 난 마당에서야 어찌 같은 인종으로서의 우의가 없었겠는가. 이것은 인정세계의 자연스런 형세이다. 슬프다. 그러므로 자연의 형세를 돌아보지 않고 같은 인종 이웃나라를 해치는 자는 마침내 독부(獨夫)의 판단을 기필코 면하지 못할 것이다. (국가보훈처. 「안중근전기전집」, 윤병석, 사인코리아, 1999.12.20,에서 발췌)
안중근의사 마지막 유언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삔 공원 뒤에 묻어두었다가 우리 국권이 회복되거든 고국으로 반장해다오. 나는 천국에 가서도 또한 마땅히 우리나라의 회복을 위해 힘쓸 것이다. 너희들은 돌아가서 동포들에게 모두 각각 나라의 책임을 지고 국민 된 의무를 다하며 마음을 같이하고 힘을 합하여 공로를 세우고 업을 이루도록 일러다오. 대한 독립의 소리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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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국선열들의 제주길따라 역사탐방 원문보기 글쓴이: 똘이
첫댓글 장하다 그대여 힘이 없는 나라에 태어났으나 그 기개는 세계인의 감동을 하리라 그러나 아직도 이 나라에는 그대의 뜻을 져 버린 간악한 역적년놈들이 이 나라의 기득권 잡고 세뇌딘 국민들은 친일 역적년놈들이 좋다고 지지 하고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