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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루하시더라도 여기까지는 읽어주세요.
미술반 수업 기대 하셔도 됩니다.
입학식날 봅시다.
몽피 올림
사부님의 취중조서(醉中調書)-2
좋은 그림 - 나쁜 그림
夢皮(화가))
1
어스름하게 어둠이 덮치기 시작한 이른 저녁. 광주광역시 쌍촌동 서대횟집이다. 말이 횟집이지 사실 막걸리 초무침에 적당히 야채 넣어 버무린 그런 곳. 항상 술집의 척척한 맛을 쫓아가는 것은 그의 몫이었지만 이 집만은 사부님이 알고 있는 비장의 카드이다. 무엇보다도 ‘맛을 알아야 멋을 알고’ 그래야만 그림을 그릴 수 있다는 궤변과 함께 먹는 것만큼은 본인 입맛에 맞추어 살아가는 그 역시 이 집을 무척 마음에 들어 했다. 술 한 잔을 따르기도 전에 안주가 나오는……. 주문도 필요 없고 손님 수만큼 알아서 속도감 있게 나오는 술상이 펼쳐지는 곳. 그런 술집 나는 그게 마음에 들었다.
사부님이 서둘러서 일갈 한다.
‘고대 로마의 학자 플리니우스의 <박물지>에는 그림의 기록에 대한 아름다운 이야기가 실려 있습니다. 코린트의 한 처녀가 연인과 막 작별을 고하려던 순간. 촛불에 의해 벽에 드리워진 연인의 그림자를 보고 숯으로 그 윤곽선을 따라 그렸다고 합니다. 여기에서 그림이 유래 했다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드러나고 있듯이, 본래 그림은 대상을 대신하는 무엇이요. 대상의 부재를 채우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과 관련된 그 무엇이지 않겠습니까?’
‘우리말 어원을 따져보아도 ’그림‘이란 단어는 그리워하다’ ‘그립다’와 연관된다고 나는 당신께 들었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니. 요 앞 전 당신과의 이야기는 좀 다른 내용인 듯싶었습니다. 당신은 알타미라 동굴벽화의 이야기를 하면서 “아무“라는 슬픈 예술가의 탄생을 이야기 하였는데 앞의 말처럼 연민에서는 같은 내용일지 모르지만 내용은 크게 벗어나는 다른 이야기 같아 보입니다.
‘
사부가 공부를 하고 왔다는 느낌이 들었다. 분명 그는 일전의 취중조서에서는 선사시대‘아무’라는 예술가를 빌어 자신의 처지를 적당히 변명하는 선에서 마무리 되었었다. 지금 사부는 그 말들의 이율배반에 대한 지적을 한 것이다. 질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 역시 일갈했다.
좀 더 정제된 모습이었다. 이전처럼 감상적이거나 야사 론을 들고 나오지 않았다. 다만 이제 이런 문답에 자신이 답변해야 할 어떤 의무감이 수반되는 그런 자리임을 그는 알고 있었다. 한 순배 돌기도 전에 그는 말했다.
‘사부님 20세기 초 추상미술의 시조인 칸딘스키나 클레에게는 보이지 않는 정신세계를 표현하는 것이 그림이었고, 피카소 역시 조금은 다른 시각이지만 눈에 보이는 것 보다는 알고 있는 사실(진실)을 표현해야 한다 하였습니다. 하지만 미술에 있어 화가들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습니다. 개념미술의 선구자 마르셀뒤샹은 그림(평면회화)을 부정하며 전시장에 변기를 설치하여 <마르지 않은 샘>이라는 부제를 붙여 놓았습니다.
마르셀 뒤샹 1917년 <샘>
개념미술이 미술가의 사고를 강조함으로써 어떤 활동이나 아이디어가 회화나 조각 형태로 구체화되어 나타날 필요 없이 그 자체를 잠재적인 미술작품으로 보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미술작품이란 작가가 직접 손으로 제작해야만 하는 것이 아니며, 중요한 것은 작가의 '선택'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즉 예술은 나타난 결과물에 있지 않고 작가의 정신 속에 있는 것이다. 라고…….
이 말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예술가가 무엇인가를 선택했을 때 그것은 기왕의 맥락에서 이탈해 자연스레 예술적 가치를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1917년 당시 이 작품은 주최 측의 강압에 전시되지 못하고 전시장 칸막이 뒤에서 전시기간 내내 숨어 있어야 했지만 현재 이 작품은 프랑스 국립 퐁피뉴미술관에 전시되어 있습니다. 살아생전 뒤샹은 ’미술관은 작가의 무덤‘이라고 했지만 정작 자신의 작품이 미술관으로 들어가면서 그의 저항의지는 실패로 끝나게 됩니다. 그리고 90년이 지난 2006년 1월 파리 퐁피두센터에서 전시 중이던 뒤샹의 <샘>이 행위예술가 페이르 파논첼리라는 72세 노인에게 테러를 당하게 됩니다. 관리 소홀을 틈타 조그만 망치로 뒤샹의<샘>을 공격하여 흠집을 내게 됩니다. 자그마치 37억 원이 호가하는 뒤샹의 작품에 아니 엄밀히 이야기하자면 남성용소변기에다가…….’
‘이 사건으로 체포된 행위예술가 파논첼리는 재판과정에서 <샘>을 공격한 건 행위예술이었고 무덤 속의 뒤샹이 이 사실을 알았다면 자신에게 감사했을 것이라고 호기 있게 말했다고 합니다. 사실 이 행위예술가가 망치로 공격한 <샘>도 뒤샹이 처음 발표한 진품이 아니라 30년이 지나 1950년에 다시 제작된 모조품이라는데…….’
‘이정도 되면 무엇이 예술인지 알쏭달쏭한 이야기가 되어 버립니다. 하지만 "사고하는 인간은 누구나 예술가’ 일수 있음을 설명하는 정신 혁명의 증표임은 분명합니다. 그런 면에서 사부님은 저의 예술적 사부이면서 또한 예술가 입니다. ‘
나는 그의 말을 따라 듣기가 어려웠지만 일견 수긍이 가는 것이 있었고 갑자기 물어볼 말이 많이 생겼다. 몰라서 묻지 못했던 것과 알고 나니 물어야 될 것이 많은 그런 시간. 하지만 아직은 아니었다. 사부님은 그런 말에 수긍을 하면서도 흔들림 없이 준비된 질문을 이어갔다 나는 이 지점에서 무언가 좀 더 보충되어야 할 말이 있다고 생각했는데…….
사부는 달랐다. 그래서 사부인 것이다. 맞다. 원래 그런 분이니까.
사부가 물었다.
‘그대에게서 적대적인 것과 비적대적인 것은 무엇인가?’
오늘 하려고 했던 말의 중심이었다. 예술가에게 있어 특히 당신에게 한정해서 물어보는 것이란 걸 잊지 않고 첨가했다.
‘사부님 제게 있어 적대적인 것은 좋지 않은 그림 즉 나쁜 그림을 그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호 조건에서 결부되어집니다. 1987년 6월 항쟁을 이끌었던 이 한열 열사의 대형 걸게 그림이 있습니다. 당시 민주화를 원했던 사람들은 그 그림이 주는 예술성보다는 당목 천에 그려진 큰 규모의 그림과 학 학생의 돌발적 죽음이 순간 포착된 사진에서 그림으로 완성되었을 때의 충격.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그림이 주었던 대중의 선동성에 환호 했습니다. 혹자는 그 작품에 예술성을 의심했지만. 당시 그 그림은 1987년이 우리에게 요구했던 예술적 가치의 사회적 반영이었습니다.’
이한열 신문사진 이 한열열사 1987 최병수외 집단창작
‘당시의 일반대중들은 그 그림에 대한 거부감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당대 이 사회를 억누르고 있었던 집권 군부의 전두환 일당이나 그에 빌붙어 기생하던 소수는 그 그림에 대한 반감이 컸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상업 화랑이나 예술 지상주의를 꿈꾸고 예술을 화폐가치로 환원 하려는 사람들에게는 그게 예술 작품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위의 그림은 아주 불량하고 예술도 아닌 선전 선동의 도구에 지나지 않는 나쁜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면. 저의 편협한 시각에 냉소를 퍼 부을 수도 있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는 우리에게 지금까지의 심미안에 대한 부정의 시각을 원하고 있었다. 당신들이 알고 있는 기존의 심미적 취향이 얼마나 천박 한 것인지를 말하려는 것이었다. 잘 들으라고. 그래서 눈으로 인식되는 모든 사물을 바르게 보고 각성 하라는 듯이…….
그가 말을 이었다. 구체적으로 말을 끝내야 되겠다는 생각인 듯.
2
‘사부님. 우리가 흔히 아는 그림으로 이야길 하겠습니다. 아무래도 그림에 대한 이해는 서양적 사고방식이 더 유용할 것 같으니 서구 미술에 대한 이야기 입니다.’
그가 일설 하였다. 대담이 아니라 강의였다. 어차피 토론도 아니었다. 이런 말에 있어서는 그가 전공이었다. 까불대지 않는 모습도 처음엔 낯설었지만 나는 이제 이런 그의 모습에서 오히려 그를 보고 있었다. 사부님도 묻지 않았다. 두고 보자는 심산 이었는지? 사부님은 준비된 질문을 비켜서고 있는 그를 보며 들은 척 마는 척 술잔을 재촉했다.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들라크르와, 1830년, 캔버스에 유채, 260 x 325 cm)
“사부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들라크르와, 1830년, 캔버스에 유채, 260 x 325 cm)이라는 그림이 있습니다. 이 그림이 완성되었던 1830년, 이 해 7월 28일에는 프랑스에서 7월 혁명이 일어났습니다. 7월 혁명은 3일 동안 계속 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자유에 대한 프랑스 시민들의 열망은 증폭되었으며, 들라크루아는 이러한 열망을 화폭에 그려내려는 강렬한 열정을 품게 되면서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이라는 작품을 완성합니다.
이 그림의 주제는 제목이 말해주는 그대로 ‘민중을 이끌어 가는 자유의 여신’을 말하고 있습니다. 혁명에 관한 정치적 관심에서가 아니라, 해방되어 가는 ‘자유’에 대한 공감이 이 그림에서는 사실적이며, 역동적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어린 소년이 권총을 들고 환희의 소리를 지르는 표정에서는 혁명이 가져다주는 흥분과 희망 등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이는 혁명의 숭고함과 신성함을 더욱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그림 역시 시민군에 의해 단두대로 사라진 루이16세나 마리 앙트와네트에게는 불순하고 나쁜 그림이었으며 파리 시민들에겐 좋은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
쉬웠다. 알아들을 수 있었다.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을…….
‘사부님 한 가지만 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이 세상 어느 그림보다도 비교할 수 없다는. 물론 상대적이지만 이 작품의 그림 값은 이 세상 어떤 화폐단위로도 환산 할 수 없다는 작품입니다.
게르니카. 피카소
7.8×3.5미터의 거대한 그림. <게르니카>. 피카소의 대표작 중 하나입니다. 더구나 우리가 흔히 아는 피카소의 다른 작품과 달리 역사적인 사건을 바탕으로 메시지를 담은 정치적인 그림입니다. 게르니카는 스페인의 작은 마을입니다. 평화로운 이 마을이 나치군 독일 전투기의 폭격 세례를 받은 것이 1937년 4월 26일. 사람들이 가장 많이 거리로 나서는 전통 장날을 선택해 수 시간 동안 23t 가량의 무기를 무차별 투하했습니다. 그 상황은 짐작하실 거라 믿습니다.
1차 세계 대전도 겪은 피카소는 사실 그다지 전쟁에 관심이 있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프랑스에 있던 그가 자신의 조국 스페인의 게르니카 전쟁 소식에는 격분을 참지 못합니다. 때마침 프랑스 정부로부터 파리국제박람회 스페인관 벽면을 채울 그림 제작을 의뢰 받은 상태였고 그는 그 사건을 그림으로 담아 만방에 진상을 폭로하기로 결심합니다. 약 한 달 여 기간 만에 완성된 그림 '게르니카'는 45점의 드로잉들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습니다. 주 소재는 소, 말, 죽은 아이를 안은 엄마, 전사, 울고 있는 여인입니다.
이 그림 역시 게르니카를 폭격했던 독일군의 입장에서는 기록되지 않아야 될 나쁜 그림이었고 게르니카시민들에겐 좋은 그림이었을 것입니다. 더군다나 당시 피카소는 공산주의 자였고 그는 92세로 1973년 사망할 때까지 살아 있는 동안 미국 땅을 한 번도 밟지 못하였습니다. 미국정부가 그의 입국을 허용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미국의 자본은 그의 작품을 가장 많이 수집한 국가입니다.
야사인지. 정사인지 구분이 가지 않았지만 내가 하는 말이 아닌 분명 그가 한 말이었다. 그가 사부님께 거짓을 말했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한다. 나는 그가 사부를 얼마나 존경하는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다.
3
사부님이 물었다.
‘사회과학적 입장에서 보자면 적대적인 것은 모순의 해결을 위해서는 어느 한쪽을 택할 수밖에 없는 것이며. 비적대적이라 함은. 모순의 관계가 분열과 저항을 통해 민주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모순을 말하는데. 백범김구 선생을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4.19의거를 데모로 폄하시키며 말하는 이들의 눈에는 좋은 그림이 보일 수 없게 된다는 것이고…….’ ‘앎을 삶의 고통’으로 아는 민중의 눈엔 당연히 좋은 그림만이 보인 다는 것인데 당신의 말은 그림공부를 하지 앓아도 된다는 것이 아닌가? ‘
사부님은 원칙적인 것을 묻고 있었다. ‘너 정말 그렇게 생각 하느냐고?’ 언젠가 그는 우리에게 말했다. “미술. 시 지각은 공부를 해야 됩니다. 공부를 하지 않으면 볼 수가 없습니다.” 했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을 그가 모를 리 없었다. 한 순배 하였고 그가 말을 이었다.
‘사부님,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은 분명 있습니다. 지금까지 제가 드렸던 말씀은 개개인이 처한 입장에서 바라본 좋은 그림과 나쁜 그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기실 우리가 진실로 알고자 하는 좋은 그림이란? 우리가 흔히 그림을 보면서 말하는 인상적 비평 가운데 하나가 <잘 그렸다> <못 그렸다> < 내 마음에 든다> 라는 용어입니다. 그럼 잘 그린 그림이 좋은 그림이고 못 그린 그림은 나쁜 그림일까요? 그건 아닙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밀레의 <만종>이나 <이삭줍기>그림은 잘 그린 그림이면서도 아주 훌륭한 그림입니다.
밀레, 만종
( 〈만종〉은 하루 일과를 마친 뒤, 아무리 고된 삶이라도 그저 신에게 묵도하는 겸손한 농부의 모습으로 읽을 수 있다. 그러나 훗날 그림을 감식한 결과 밀레가 부부 발치에 죽은 아이, 예컨대 열악한 환경 때문에 굶주려서 생을 마감한 아이의 시신을 담은 바구니를 그렸다가 지운 사실이 밝혀진 것으로 보아 본인의 주장이 어떠하든 그에게 분명 현실 고발적 의지가 있었다고도 볼 수 있다. 2007년 x선 검사를 하여 밝혀진 내용인데 감자바구니에 어린아이 사채가 있었답니다. 하루 일과를 끝내고 삼종기도를 하는 목가적 농부의 모습이 아니지요. 당시 프랑스 사회상이 반영된것이지요. 굶어서 죽은 아이의 장례식 풍경일것입니다. 하지만 밀레의 친구가 공모전 출품용으로는 맞지 않다 하여 감자 바구니로 바꾸었다네요)
그리고 빈센트 반 고흐의 <감자 먹는 사람들>이란 그림은. 표현의 서투른 형식에 색채의 치졸한 현란함. 소소 밀밀한 조형과 어찌 보면 기초적인 데생조차 틀린 못 그린 그림이지만 그 역시 모든 작품이 훌륭한 그림으로 평가 받고 있으며 근. 현대 들어와서 그의 그림 값은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많은 가치로 사람들에게 회자 되고 있습니다.
빈센트반고흐 <감자먹는사람들>
하지만 사부님 우리는 그림을 볼 때 현재를 보는 것이 아니라 당대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당대 누구도 그를 인정 하지 않았고 집배원 룰랭이 모델료가 없는 고흐에게 모델이 되어줍니다. 고흐는 인체를 통해 사람의 영혼을 그리려 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저는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 우체부에게 고흐가 모델을 부탁 했을 때 그는
‘아이고…….
제가 감히 …….
어떻게 너무 송구스럽고 황송하고 영광입니다.
히히…….
히죽. 히죽.
낄낄……. “
하고는 마지못해 모델이 되어 주었을 것입니다…….
불쌍하고 가난한 고흐의 처지나 입장을 알아주는 것이었지 지금처럼 명망 있는 고흐를 알아주는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작가를 이해하는데 이건 중요한 문제 입니다. 하여간 우체부 룰랭은 아무 그림이나 좋아하는 사람이었는지. 아님. 고흐의 삶이 불쌍했던지 간에 그저 예술에 자신이 복무할 수 있다는 영광된 모습이 제겐 보입니다. 저 역시 그런 일을 수없이 경험 합니다.
아를르에서 고흐가 정신 발작을 일으켰을 때 마을 사람들 모두는 그를 정신병원으로 추방하려 했지만 룰랭의 가족만이 그를 끝까지 지켜 줍니다. 당시에 룰랭 외의 사람들에게 고흐의 그림은 그림이 아니었으나. 110년이 지난 지금 룰랭의 초상화는 소더비 경매에서 360억 원이라는 거금에 낙찰 됩니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닙니다.”
우체부 룰랭 빈센트 반 고흐 1989년
맞는 말이다 참으로 맞는 말이다. 근데 이 자식은 왜 나를 그려주지 않지? 나는 언제든지 준비가 되어있는데. 이참에 자진해서 부탁할까? 혹 100년 후…….흐흐흐…….근데 룰랭은 고흐가 부탁을 했잖은가…….
아직 때가 아닌가?
어느 사이 손님은 우리뿐이었고 사부님이 다시 물었다.
.
4‘
‘그것은 이미 전설이 아닌가요?”
‘역사는 다 신화이고 전설입니다.’
그가 말했다.
-지금부터 제 말은 신화일까요? 전설일까요? 아님 역사인지도 모릅니다. 장승요(중국 남조(南朝) 양(梁:502~557) 이라는 화가가 있습니다. 장승요는 금릉(金陵)의 안락사(安樂寺)에 용 4마리를 그려놓고 눈동자를 찍지 않은 채 매번 이렇게 말했습니다.
‘눈동자를 찍으면 즉시 살아서 날아가 버릴 것이다.’
사람들은 그의 말을 터무니없다고 생각하여 급기야는 재촉하고 그에게 용 그림에 눈동자를 찍으라고 청했습니다. 어느 전설이나 마찬가지로 장승요는 버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를 의심까지 하였을 것입니다.
장승요가 용의 눈깔에 눈동자를 찍었습니다. 잠시 후 벼락이 내리쳐 벽이 깨지면서 눈동자를 찍은 용 2마리는 구름을 타고 하늘로 솟구쳐 올라갔고, 미처 눈동자를 찍지 않은 나머지용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이는 우리가 흔히 아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이라는 말로도 회자되는 유명한 그림입니다.(전설이 아님. 이 정도면 분명 신화(神話)임) 도한 장승요는 주나라 무왕의 황후를 그리라는 명을 받고 황후를 모델로 하여 그림을 그렸는데 그림이 다 되었을 쯤. 붉은 색감이 배꼽 아래에 떨어졌습니다. 그때 마침 무왕이 그림 그리는 대로 왔고. 무왕은 황후의 배꼽아래에 있는 붉은 사마귀는 자신만이 아는 것인데……. 그는 이를 보고 시쳇말로 요즘처럼 서로 통 하였다 생각합니다. 그를 죽이려 했으나 어느 전설이나 신화가 그렇듯이. 극적인 반전이 일어납니다.
곁에 있던 신하가 말합니다.
‘그는 화성(畵聖)입니다 보지 않고도 그릴 수 있는 자이옵니다.’
무왕은 그에게 과제를 내어줍니다 목숨을 담보로 하는…….내가 어제 꿈을 꾸었는데 그걸 그림으로 옮기라는……. 그래서 나타난 게 부처의 머리에 부처의 머리가 10개 그려진 11면 관음보살도가 탄생합니다. 그는 살아서 화성(畵聖)이라는 영광된 칭호를 얻게 됩니다.
야사인지 정사인지 그의 말발이 또 섰다. 그의 감언이설에 속고 있다는 느낌이 일순간 들었다.
사부님이 물었다 준비된 질문은 아니었고 그냥 물었다.
‘우리나라에는 그런 일이 없는지요?’
그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이었다
‘우리나라에도 통일신라의 화가 솔거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출생·활동시기·가계(家系) 등은 모르지만 그가 뛰어난 화가였음을 전하는 기록과 일화들은 남아 있습니다. 작자 미상의 〈동사유고 東事類考〉에 의하면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그림에 열중했으나 스승이 없어서 천신(天神)에게 가르침을 청했더니 꿈에 단군(檀君)이 나타나 신필(神筆)을 주어 그것으로 꿈에 본 단군의 화상을 1,000여 폭 그렸다고 합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황룡사 벽에 그린 〈노송도 老松圖〉에는 새들이 앉으려다가 부딪혀 떨어졌는데 세월이 흘러 단청(丹靑)을 했더니 새가 날아들지 않았다고까지 합니다.(전설이 아님. 이 정도면 분명. 신화(神話)임) 여기서도 상상은 가능합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그림을 많이 그렸을 것입니다. 새로 바른 벽에다 방바닥에다. 자기 집만이 아닌 다른 집의 담벼락에도……. 심지어 애비의 중요한 서류에도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어떤 애비도 참을 수 없었을 거고 결국 회초리를 들어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못하게 확답을 받았을 것입니다. 무릎을 꿇게 하고 왜 애비가 회초리로서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을 징치 했는가에 대한 훈화의 시간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때 우리의 주인공 솔거는 회초리의 고통에 몸을 움츠리면서. 어찌 할 수 없이 흘러내린 눈물이 방바닥에 떨어지고 그 눈물을 손으로 찍어 또 그림을 그렸을 것입니다. 이정도 되면 막가지는 것이고 솔거 또한 신화로 남게 되는 것입니다. 고통 속에서 핍박 속에서 예술은 탄생합니다. ‘
5
밤이 깊었다. 어차피 오늘 술자리에 더 이상 술과 안주는 없다. 사부님이 계산 할 거니까. 항상 그렇지만 사부님 술자리는 오늘도 기본이다. 주인 역시 피곤한 눈치다. 사부님도 질문을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의 말들을 생각해보았다.
그림이 투자의 대상이며. 그림도 돈이 된다는 생각이 일반화 되고 있고. 팔리는 그림들이 생겨나면서 화가로서 성공과 명성을 꿈꾸는 영민한 미술 학교 학생들은 더 이상 궁핍한 낭만주의적 예술가 상과 자신을 연결시키지 않아 보였다.
그들에게 고흐나. 고갱이나. 세잔. 등후기 인상주의의 치열한 삶이나. 자신의 자존감을 지키기 위해 붓으로 눈을 찔러야 했던 <달마도>의 김명국이나. 기생의 치마폭에 12폭 매화를 그리는 것이 궁중화원보다 더 자유롭다던 장승업. 쌀 한 되에 그림 한 점과 맞바꾸어야 했던 박수근. 종이 살돈이 없어 담배 은박지를 모아 그림을 그렸던 이중섭. 독재의 암울한 시기 붓 보다는 칼 맛으로 1970~80년 민중의 의지와 염원을 담아 목판으로 승부하였던 오윤. 변두리 판잣집에서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공작도시를 그리다 요절한 꼽추화가 손상기 등은 이제 역사를 넘어 전설로 신화로 기억될 것이다.
김명국( 1600(선조 33)~? ) 달마도
이중섭(1916년 4월 10일 ~ 1956년 9월 6일) 아이들(담뱃갑 은박지에 그린 그림)
박수근 (1914년 2월 21일 ~ 1965년 5월 6일) 나목
손상기 (1949년 ~ 1988년 2월 11일) 영원한 퇴원
오윤 (1946년 4월 13일1986년 7월 5일)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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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2017년 미술반 정기수업은 사부님의 취중조서와는상관없으며
실기중심으로수업은 진행되며 변화.통일.균형을 중심으로 한 아주 초보적인 정물화와 풍경화입니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미술사를 맛보아 아주 뿌듯합니다 아직 뵙지는 못했지만 몽피샘의 가치관 예술인생을 알듯 합니다 감사합니다^^
맛을 알아야 멋을 알고
그림은 그리워하다에서 나온 말...흐음..증말...
사랑은 생명과 그리움의 대상~이란 백팔배송귀가 떠오릅니다
그림이 그리움의 대상을 그리워하며 남긴 흔적이라면...
"사고하는 인간은 누구나 예술가’
삶의 인생의 예술가가 각자 소리로 색채와 형태로 언어로~~
고흐는 인체를 통해 사람의 영혼을 그리려 하였습니다...
예술은 잠시잠간 찰나의 삶을 넘어서~~~~~&
시 공간에 따라 사람의 삶은 변한다.
그래서 변하지 않는 가치를 내건 예술은 위대하다
- 몽피 수업 받고 내가 이렇게 구라를 칠 수 있다니,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시간 나는대로, 허락해 주신대로,
제 스타일로 재구성하여 구라 한 번 쳐 보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