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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임관련기사] - 시민의신문 정지환기자 // 2005년 9월9일
허임의 출생의 비밀을 벗겨내다
지난 8월 28일 오전 7시 양화정. 지하철 합정역 8번 출구로 나오면 아담하게 서 있는 이 작은 정자 가 허임이 남긴 흔적을 찾아 떠나는 역사기행의 출발 지점이었다. 충남 공주를 행선지로 정한 답사 팀은 손중양 상임이사, 김숙희 RTV 시민기자, 허장렬 허씨대종회 상임부회장과 기자까지 모두 4명 이었다. 합정동에 거주하는 허 부회장은 1991년 허준 묘지가 발굴되던 당시 현장에 함께 있었던 인 물이다. 역사기행을 떠나기 하루 전날 밤 기자는 허임 관련 자료를 하나씩 정리해 봤다. 우선 네이버 백과사 전에서 검색어로 ‘허임’을 친 다음 엔터 키를 누르자 곧바로 다음과 같은 내용이 모니터에 떴다.
“조선 중기의 의관. 본관 양천(陽川). 침구에 뛰어나 선조 때 임금을 치료한 공으로 동반(東班)의 위 계(位階)를 받았다. 1612년(광해군 4) 허준과 함께 의관록(醫官錄)에 기록되고, 1616년(광해군 8) 영 평현령(永平縣令)에 임명되었으며, 다음해 양주목사(楊州牧使) 부평부사(富平府使)를 거쳐 1622년 (광해군 14) 남양부사(南陽府使)가 되었다. 조선에서 으뜸가는 침의(鍼醫)라는 평을 받았다. 저서로는 <침구경험방(鍼灸經驗方)>(1644), <동의문견방(東醫聞見方)> 등이 있다.”
사실 허임의 생애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는 기록은 매우 제한돼 있다. <조선왕조실록>, <침구경험 방>의 서문(허임)과 발문(이경석)이 전부이다시피 하다. 편의상 1570년에서 태어나 1647년에 사망 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출생년도와 사망년도가 정확한 것은 아니다. 출생지와 사망지 도 미상이다.
무엇보다 먼저 지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네이버 백과사전에 나오는 “본관 양천”이라는 기록부터 가 오류라는 점이다. 이는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근거했기 때문으로 보이는데, 실제로 <한국의학 사>(1966년)를 저술한 김두종은 이 책에서 “허임의 본관은 양천”이라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양천 허씨 족보에는 허임이 없다. 나중에 허임은 하양 허씨로 밝혀졌다.
답사팀이 공주에 도착한 것은 오전 9시 15분. 허임의 12세손인 허은 씨가 약속 장소인 시외버스터미 널로 마중을 나와 있었다. 터미널 옆으로 흐르는 금강 건너편으로 천혜의 요새로 유명한 공산성이 보였다. 한자 ‘공(公)’ 자를닮았다는 공산성을 바라보면서 기자는 답사팀이 허은 씨와 만나게 된 사 연을 떠올려 봤다.
허임의 흔적을 찾기 위해 고심하고 있던 손중양 이사는 며칠 전 경북 하양을 찾았다. 수소문 끝에 하 양 허씨 종친회 관계자를 만나자 “조선의 명의 허임을 아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잘 모른다”는 실 망스런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하양 허씨가 모여 사는 다른 지역의 집성촌이 있으면 소개해 달라 고 부탁했다.
“함양, 괴산, 공주….”
종친회 관계자는 띄엄띄엄 지명을 불러줬다. “그 중에서도 공주는 연락이 끊긴 지 오래 됐다”는 설 명도 덧붙였다. 문득 <하양허씨세보>에 허임의 묘가 공주군 우성면 한천리에 있다는 기록이 생각났 다. 무조건 우성면사무소에 전화를 걸었다. 마침 허씨 성을 가진 공무원이 한 명 있었다. 그러나 그 는 하양 허씨가 아니었다. “하양 허씨라고요? …아, 내산리에 하양 허씨 몇 가구가 모여 사는 것 같던데….” 우성면 내산리에 사는 하양 허씨 허은 씨에게 바로 전화를 걸었다. 당시 허 씨는 떨리는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허임을 아느냐고요? 아, 알고 말고요. 그분이 우리 12대조 아닙니까.” ‘천출’ 기록의 비밀허은 씨는 밝은 얼굴로 공주를 찾아온 답사팀을 맞아 주었다. 허임의 묘지가 있다는 곳을 향해 승용차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고, 안내를 맡은 허 씨 가 오랫동안 궁금했던 것이라며 조심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족보에는 허임은 물론이고, 그 부친과 조부도 높은 벼슬을 한 것으로 돼 있습니다. 그런데 왜 자꾸 천출(賤出)이라는 말이 나오는지 모르겠어요.”
실제로 <조선왕조실록> 중 광해군 9년의 기록을 보면 “허임의 부친은 허억봉(許億逢)이 라는 이름의 악공(樂工)으로 관노(官奴)였고, 그의 모친은 사비(私婢)였다고 전해진다” 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허 씨가 가지고 있는 <허씨대종보(許氏大宗譜)>에는 허임의 조부 허종(許宗)은 통정대부 호 조참의(通政大夫戶曹參議), 부친 허락(許珞)은 한성판윤(漢城判尹)을 지낸 것으로 돼 있다. 참고로 허종과 허락의 부인은 각각 단양 이씨와 평양 박씨로 기록돼 있다. 한편 허임의 벼슬은 <허 씨대종보>에 다음과 같이 기록돼 있었다.
“가선대부행 양주목사 갈충진성 위성공신 하흥군(嘉善大夫行 楊洲牧使 竭忠盡誠 衛星功臣 河興 君).”가선대부는 종2품의 품계라고 한다. 그렇다면 왕조실록의 ‘천출’과 허씨 족보의 ‘벼슬’, 부친의 이름 ‘허억봉’과 ‘허락’의 간극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이 의문은 옆자리에 앉아 있던 허장렬 부회장이 풀어주었다. 허준 묘지 발굴에 동참한 것은 물론이 고 세보학회(世譜學會) 회원이자 조선왕조실록을 통독했다는 그는 이렇게 설명했다.
“<경국대전>의 기초가 된 <국조오례의>에 따르면, 자식이 출세를 하면 부친과 조부에게도 사후에 벼슬을 주게 돼 있습니다. 후손이 조상에게 제사를 지내야 하는 철저한 위계 질서 사회인 조선시대 에는 그런 전통이 있었지요. 허종, 허락의 벼슬도 그런 성격의 것이라고 이해하면 됩니다.”
그런데 또 하나의 의문이 제기됐다. 허임의 부친 허락(혹은 허억봉)이 관노가 된 이유는 무엇일까. 이에 대해서도 허 부회장이 역사적 배경을 설명했다. “세종 때의 허임 조상은 영의정을 지낸 허조(許稠)입니다. 종묘에 모셔진 세종 위패 옆에는 문무(文 武) 대신을 대표해 두 신하의 위패도 배양돼 있는데, 문(文)을 대표한 분이 바로 허조였지요. 그만큼 세종의 절대적 총애를 받았다는 얘깁니다. 그런데 허조의 아들 허후(許?)와 손자 허조(許造) 가 세조의 권력 찬탈에 반대하다 각각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자결을 해야 하는 비극적 운명에 처해 집니다. 그렇게 멸문지화를 당하면서 후손들이 당시 충북 괴산의 관노로 부처됐는데, 얼마 후 사 면은 되지요. 그러나 한번 관노가 되면 쉽게 이전의 신분을 회복할 수 없는 것이 당신의 신분제도입니다. 아마도 허임 부모 대를 전후로 한양으로 올라 와서 지내다 부친이 악공이 되고, 그것을 바탕으로 허 임은 침구의 세계와 만나게 된 것으로 보입니다.”
이빨 깨진 백자 접시허은 씨의 안내를 받아 공주시 장기면 무릉리에 도착한 것은 오전 10시경. 허 씨는 좁다란 계단식 논과 작은 계곡 건너편에 있는 산등성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쪽 잣나무 몇 그루가 있는 언덕 위가 바로 허임 할아버지 묘가 있던 곳입니다. 그때가 신유년이 었으니까 80년대 초로 기억되는데,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조상들의 묘를 현재 후손들이 모여 사는 곳 가까이로 모두 이장했습니다.”
계곡을 건넌 뒤 산을 오르며 허은 씨가 설명한 말이다. 며칠 전 비가 와서 계곡에는 물이 제법 불어 있었고, 허 씨는 신발까지 적셔 가며 일행을 모두 등에 업어 건너 주었다. 멀리서 볼 때는 몰랐는데, 직접 오르다 보니 산턱의 경사는 매우 가파랐다.
약 5분 후 일행은 파묘(破墓) 현장에 도착했다. 묘지는 대략 서북향이었는데, 옆에 있던 허장렬 씨 가 “허준 묘지도 서북향이었는데…”라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허은 씨가 흐르는 땀을 닦으며 말 했다. “이전에는 이 묘지 앞에 작은 호수가 있었다고 들었는데, 지금은 이렇게 논으로 바뀌었지요.” 한편 절반이 잘린 봉분은 형태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잡초로 뒤덮여 있었다. “이장을 위해 파묘를 하는 데 땅이 너무 단단해서 봉분 일부만 파냈습니다. 안에 약 5cm 두께의 목관이 있었는데, 매우 견고했고요.” 답사팀이 묘비는 없었냐고 묻자 허은 씨는 “주변은 물론이고 땅속에도 묘비나 석물 같은 것은 전혀 없었다”고 답변했다. 그때 허장렬 씨가 질문을 던졌다. “혹시 파묘할 때 다른 물건은 나오지 않았습니까? 혹시 접시나 사발 같은 것 말이예요. 아니면 기왓장이라도 있었을 텐데….”
허은 씨의 답변이 곧바로 나왔다.
“백자 접시 하나가 나왔어요. 파묘를 하는 데 이상한 느낌이 들더군요. 삽날에 뭔가 부딪치는 느낌 이었어요. 손으로 땅을 헤집어 꺼내 보니 접시 하나가 나왔어요. 이장 중 발굴된 유일한 유품이었지 요.”
그렇다면 이 접시의 용도는 무엇이었을까. 허장렬 씨의 설명이 이어졌다. “살림이 넉넉하지 않으면 석물 같은 표석 대신 접시나 사발, 그것도 없으면 기왓장을 쓰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계란 흰자위 에 먹을 섞어서 보통 이름과 생몰년도를 쓰는데, 이게 오늘날의 페인트처럼 오래 갑니다. 고고학 전문가들이 발굴했더라면 그 기록을 재생시킬 수도 있었을 텐데 매우 아쉽군요.”
묘지에서 내려오며 허은 씨는 답사팀에게 몇 가지 증언을 더 해 주었다. “묘지 밑에 마을이 하나 있는데, 남궁 씨 가문의 사람들이 구한말부터 일제시대까지 약 3대에 걸쳐 서 허임 할아버지의 묘를 관리해 주었다는 말을 집안 어른들로부터 들었습니다. 할아버지가 한양으 로 벼슬을 하러 간다며 가산을 탕진하는 바람에 묘지 관리가 부실했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남궁 씨 가문 사람들은 “허 대감 묘를 묵혀서야 되겠느냐”고 했다는 것이 허 씨의 증언이다. 후세에도 허임의 이름을 기억하고 숭모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셈이다.
산을 내려오자 허은 씨의 아들과 손자가 와 있었다. 아들은 태안 남면초등학교 교사(36)였고, 손자 는 10세였다. 허 씨의 설명에 따르면, 허임의 직계 후손은 전국에 40여 가구가 있고, 그 중에서 6가 구가 우성면 내산리에 모여 산다고 한다.
답사팀 일행은 허 씨가 살고 있는 내산리로 이동했다. 내산리를 지나서 한천리에 도착해 무성산을오 르자 제일 먼저 허임의 아버지 허락과 어머니 평양 박씨의 묘지가 보였다. 허임이 <침구경험방> 서 문에서 “내가 젊었을 때 부모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의원의 집에서 잡일을 해주며 여러 해 동안 힘써 배운 결과 의술에 조금 눈이 뜨였다”(少爲親病 從事醫家 積久用功 粗知門戶)고 했던, 그 부모들이 바로 여기 누워 있는 것이다. 허장렬 부회장이 어머니 묘 앞에서 “위대한 아들을 두신 분”이라는 덕담을 건넸다.
잠시 후 일행은 이장한 허임의 묘지에 도착했다. 묘 주변에는 참나무와 고사리가 무성했고, 한쪽에 는 보라색 도라지꽃이 탐스럽게 피어 있었다. 마을 입구 슈퍼에서 사온 막걸리를 따른 뒤 ‘조선 최고 의 침구 명의’에게 예를 갖추었다.
허임 선생 통곡하리
마을로 내려 와서 허임이 남긴 유일한 유물이 된 백자 접시를 봤다. 실제로 이빨이 빠진 듯 접시의 한쪽이 깨져 있었다. 한편 답사팀은 마을에서 새로운 증언을 들었다. 일제시대 때까지만 해도 이 마을에 허임의 위패를 모시던 사당이 있었다는 것이다. 실제로 허은 씨는 어렸을 때부터 불천지위(不遷之位) 할아버지 사 당이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다. “불천지위는 나라에 큰 공훈을 세운 이의 제사를 영구히 지내는 것을 말합니다. 보통 제사는 주자가 례에 따라 고조까지 4대를 봉사(奉祀)하게 되어 있고, 그 위의 조상들은 시제 때 모시는 것이 보통입 니다. 그런데 나라에서 불천지위, 불천위에 봉하면 그 분의 제사는 영구히 지낼 수 있게 되지요. 불천위 제 사는 그 가문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이기도 합니다”
허장렬 씨의 설명이다. 그는 “벼슬아치라 하더라도 불천지위가 있는 마을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 서 내려 예를 갖춰야 했다”는 해설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은 허은 씨가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으며 “마을 입구에 실제로 ‘하마터’라 불리는 지명이 있다”고 증언했다.
한편 허은 씨는 낡을 대로 낡은 <침구경험방> 필사본을 보여주었다. 경남 함양에서 문경공 경암(허 조) 선생의 사당 관리를 담당하던 허 씨 집안의 한 어른에게 1968년 전해 받은 것이라는 설명과 함 께.
“당시 그 어른이 이렇게 말씀하셨어요. ‘이 책은 집안 어른들에게 넘겨받은 것인데, 이제 주인에게 돌려줘야겠다. 허임의 후손인 당신들이 이 책의 주인이다’라고 말입니다. 그후로 이 책을 소중하게 간직해 왔지요. 언젠가 허임 할아버지가 재평가될 날이 반드시 올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말입니 다.” 허임은 파묘된 무덤, 이빨 빠진 백자 접시, 외양간으로 변한 불천지위 사당터, <침구경험방> 필사 본 등으로 여전히 우리 곁에 있었다. 허임의 후예들 허임의 직계 후손은 현재 전국에 40여 가구만이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6가구가 공 주시 우성면 내산리에 모여 산다. 묘지 이장과 족보 발간을 주도했던 허은 씨가 아들 갑진 씨, 손자 재욱과 자리를 함께 했다. 허은 씨는 “언젠가 사람들이 허임을 찾아 올 것이라 믿고서 기다렸다”고 했다. 그로부터 일주일이 흐렀다.
지난 8월 29일 국회에서는 특별한 국제 학술 심포지엄이 열렸다. 이날 심포지엄의 주제는 ‘세계 침 구제도의 현황과 한국의 미래’. 눈부시게 발전해온 미국, 일본, 중국의 침구 현황이 각국 대표에 의 해 상세히 소개됐고, 이어서 한국의 침구제도 현황과 과제에 대한 토론이 진행됐다. 그런데 이날 6명의 한국인 토론자 중에서 3명이 허임의 이름을 거론했다(심포지엄 내용은 다음 호 에서 소개할 예정이다). 다음은 당시 나왔던 발언 중의 한 대목이다.
“우리의 침구술은 한중일 3국 중 최고였다. 중국의 의학서에조차 ‘침술은 동방에서 왔다’는 기록이 있다. 한국은 침구의 종주국이었고, 그 정점에 서 있던 분이 바로 허임 선생이다. 그런데 현행 의료 법은 우리가 제일 잘하는 것을 못하게 하고 있다. 부끄럽게도 우리가 방치하고 있는 동안 침구는 다 른 나라에서 발전했고, 이제 우리가 그것을 거꾸로 수입해야 할 처지가 됐다. 동방 최고의 신술로 불 렸던 허임 선생이 무덤에서 통곡할 일이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