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미 작가의 책가방
이야기의 힘!
『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윌리엄 스타이그 글․그림, 이상경 옮김, 다산기획, 1994)
어린 시절 나는 유난히 이야기를 좋아했다. 그런데 불행히도 말담 있는 어머니를 만나지 못했다. 나는 가까운 데 사시는 외할머니를 찾아가 이야기를 졸랐다. 하지만 모전여전의 출발은 거기였다. 할머니의 이야기도 빈한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포기할 수는 없었다. 나는 말라붙은 젖꼭지를 빨 듯 억지로 할머니의 이야기를 짜내었다. 할머니는 할 수 없이 한 이야기를 하고, 또 하는 일상을 반복했다. 이야기가 고픈 나는 그것이라도 감지덕지해서 열심히 들었다. 힘이 든 할머니는 어느 날, 은근히 나를 협박했다.
“야기 좋아하믄 가난하게 산다든디?”
하지만 이런 협박은 내게 위협이 되지 못했다. 단지 너무도 단조로운 할머니의 이야기를 듣다 지친 내가 할머니의 이야기를 떠났다. 어려서 나의 성격은 꽤 당돌한 데가 있었다. 이야기를 찾기 시작하니 주변이 온통 이야기 천지였다. 바로 옆집의 애기보기 맹순이 언니가 그 첫째였다. 언니는 나보다 단 두 살 더 많음에도 불구하고 벌써 남의집살이를 왔다. 입 주위에 커다란 화상이 있어 언니는 입이 약간 틀어졌었다. 하지만 말은 청산유수여서 입만 열었다 하면 이야기가 줄줄 실 풀리듯 나왔다. 나는 단번에 언니한테 빠져들었다. 밥숟가락 빼기가 바쁘게 언니 집으로 출근했다. 다행히 언니는 남에게 이야기 들려주는 것을 아주 즐거워했다. 나와 꼭 맞는 환상의 2인조를 만난 셈이었다. 언니는 타고난 입담이 있었다. 나는 언니의 부속품마냥?잔심부름을 해 주면서 졸졸 따라다녔다. 언니의 입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누에가 실을 감듯 졸졸졸, 이야기가 흘러나왔다. 하긴 실수(?)도 있었다.
“언니, 나 그것 쩌참에 들었는디?”
“아녀! 이것은 또 딴 것이랑께!”
내가 쬐끔이라도 들은 것 같다고 안 척을 할라치면 언니의 이야기는 바로 획을 틀었다. 주인공의 이름 바꾸기는 기본이고 내용도 곧바로 또 다른 삼천포로 흘렀다. 그러면 이야기를 너무나 즐겼던 나는 다시 홈빡, 처음 들은 이야기처럼 재가공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 뒤로도 내게 스토리텔러의 역할을 해 준 사람은 많았다. 복순이 언니, 나주네 이모, 행수 삼촌 등 몇 명이 더 있었다. 하지만 돌아보건대, 이 맹순이 언니만큼 어린 나에게 압도적으로 영향을 끼쳐 나를 행복하게 해 줬던 사람은 없었던 것 같다.
참으로 서두가 길었다. 하지만 제목을 보고 이미 눈치 챈 사람은 챘겠지만 오늘 내가 바로 말하고자 하는 건, 바로 ‘이야기의 힘’이다.
한국동란 직후, 주변에는 피난민들과 고아들이 수두룩했다. 그 시절 어렵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는가 만은?지역이 목포였고 가난한 동네였던 우리 집은 그게 더했던 것 같다. 그런데 그 시절을 기억하는 내게 어려움은 떠오르지 않는다. 그냥 이야기로 온통 행복했던 기억이 넘친다. 회갑이 넘은 나에게 사람들이 묻는다.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 언제였나요?”
두 번도 망설임이 없다. 이야기를 따라다니던 유년 시절이었다고.
이 유년 시절의 회귀본능이 나로 하여금 그림책 작가가 되게 하였나 보다. 나는 지금도 그림책을 읽고 쓰는 일이 가장 즐겁다. 그리고 그중 가장 좋아하는 작가가 윌리엄 스타이그다. 그의 그림책에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그림책을 보면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돈다. 그가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이처럼 시치미를 떼고 능청을 떨라치면 나는 이미 자연스럽게 그의 이야기에 빠져있다. 이미 동심을 떠난 어른이 이처럼 감쪽같이 어린이의 마음을 읽고, 오히려 어린이보다 더 어린아이처럼 어린이의 세계에 빠져 떠들어 대는 걸 보면 유쾌하기 그지없다. 더구나 그가 회갑을 넘겨 그림책을 시작한 작가인 걸 깨달을 때면 속으로 혀를 내두른다.
나는 어릴 때 나를 키웠던 이야기의 힘을 요즘 스타이그에게서 받는다. 그는 구차스럽지 않다. 이야기 속에서 하고 싶은 말들을 모두 적당히 녹여 버린다. 아이들은 재미있는 이야기에 빠져 한 치의 의심도 없이 그의 진정성을 받아들인다. 참으로 능력 있는 작가다.
『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은 아이들이 좋아할 재미있는 이야기에 스타이그의 유쾌한 그림이 어우러진 작품이다. 솔직히 그의 그림이 미학적이라고는 할 수 없다. 요즘 다양하고 아름다운 그림책이 많아 그 속에서 심미감을 키운다는 교육학적 측면을 이야기한다면 그의 그림은 좀 벗어난 듯도 하다. 하지만 카툰 작가였던 그가 만화적 터치로 친근감 있게 그려 내는 그림들은 어린아이들을 매료시키기에 충분하다. 그의 유명한 그림책 주인공 『슈렉』만 보아도 이를 알 수 있다.
당나귀 실베스터는, 조약돌 모으기 취미가 있다. 그런 어느 날, 시냇가에서 놀다가 불타는 듯이 빨간 색깔의 조약돌을 줍는다. 얼마나 신 났던지 다음 글을 보면 알 수 있다.
조약돌을 손에 쥐고 살펴보던 실베스터는 가슴이 마구 설레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흥분한 탓인지 몸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새삼스레 차갑게 느껴졌습니다. 그래서 실베스터는 “비가 그쳤으면 좋겠네.”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갑자기 비가 그치는 것이 아니겠어요. 보통 때처럼 빗발이 가늘어지다 그친 것이 아니라, 뚝 그친 것입니다. 빗방울과 검은 구름은 온데간데없고, 해가 밝게 빛나고 있었어요. 언제 비가 왔냐는 듯이, 주변이 조금도 젖어 있지 않았습니다. - 중략 - 실베스터는 다시 날씨가 맑아지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왼쪽 다리에 난 사마귀가 없어지라고 말했습니다.
『당나귀 실베스터와 요술 조약돌』(다산기획, 1994) 7~12쪽
이야기에 빠지는 도입부와 소원을 실천해 보는 단계가 이어지고 있는 부분이다. 두근두근하는 아이의 가슴이 느껴진다. 조약돌 수집가 아이가 빨갛고 예쁜 돌을 주은 것만도 신 나는데 거기에 요술 조약돌이라니! 실베스터는 날씨도 실험해 보고, 평소에 꼴 보기 싫던 왼쪽 다리의 사마귀도 처리한다. 이렇게 신날수가! 빨리 엄마, 아빠에게 알리고 싶은 조급함까지 이야기는 그림으로도 한몫을 한다. 스타이그는 가장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이야기를 엮어간다. 어른이라면 당연히 돈이나 보석을 원했을지 모르지만 귀찮은 사마귀를 떼어 주라는 아이다운 발상, 그래서 그의 글에서는 진정성이 느껴지고 아이들로 하여금 읽는 재미에 빠져들게 한다.
바로 스타이그의 매력은 여기에 있다. 그는 조금도 티 내지 않고 능청스럽기까지 한 완숙함으로 어린 독자들을 꼬여(?) 낸다. 시치미 뚝, 떼고 할 말 다하는 이 할아버지의 이야기에 아이들은 심취한다. 그리고 마치 자신의 가려운 부분을 긁어 주는 듯한 그의 재치에 가슴 후련한 카타르시스의 즐거움까지 느낀다.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그의 태도에 강요는 없다. 오직 조근조근 들려줄 뿐이다. 대개의 그림책은 그림이 설명해 주는 부분이 많아 글이 짧다. 물론 짧아서 시적이고 운율이 있어 읽기에 좋은 장점도 있다. 하지만 뭔가 이야기의 재미에 빠져들게 하는, 속된 아이들의 말로 뿅, 가는 시점이 부족하기도 하다. 그런데 스타이그의 그림책은 드물게 이야기로 이끌기에 아이들은 이 이야기의 힘에 심취한다.
“이런 좋은 날, 실베스터가 지금 여기에 우리와 함께 있으면 얼마나 좋겠어요.”라고 엄마가 말하자 아빠는 슬픈 얼굴을 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땅만 내려다보았습니다. “여보, 당신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그러자 아빠는 고개를 들고 엄마를 바라보았습니다. 아빠의 얼굴은 마치 “나도 당신만큼이나 실베스터가 보고 싶소.”라고 말하는 듯한 표정이었습니다. 엄마와 아빠는 슬픈 얼굴로 서로를 바라보았습니다. 바로 그때 실베스터는 ‘나는 정말정말 다시 당나귀가 되고 싶어, 원래대로 내가 되고 싶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그 순간 바위가 실베스터로 변하는 것이 아니겠어요! (51쪽)
세월은 흘렀지만 부모들의 마음은 변하지 않는다. 마치 어제 일처럼 실베스터를 잃었던 슬픔을 기억하는 부모님은 실베스터가 바위가 돼 버린 그곳, 딸기언덕에 소풍을 온다. 이것은 이심전심이라고 할 수 있다! 마음이 가는 곳에 몸도 간다. 바위 위에 음식을 올려놓고 그 옆에 떨어진 빨간 조약돌도 올려놓는다. 그리고 실베스터를 생각한다! 아, 그 순간 실베스터는 속으로 소리친다.
‘나는 정말정말 다시 당나귀가 되고 싶어, 원래대로 내가 되고 싶어!’
사랑은 기적을 낳는다. 우리가 열렬히 원하면 이루어진다. 실베스터는 다시 당나귀가 되어 소중한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요즘 영상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아이들에겐 이야기를 들려줄 어른이 많지 않다. 그럼 어떡할까? 방법이 있다. 그림책을 읽어 저축하는 방법이다! 그림책을 읽어 ‘이야기의 힘’을 저축한 유년 시대는 반드시 우리 어린이들에게 또 다른 힘이 되리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김영미
전남 목포에서 태어났다. 광주대학교 문예창작과 대학원을 졸업했다. 1994년 <광주매일신문> 신춘문예에 소설이 입선되었다. 2006년 황금펜 아동문학상을 수상했으며 2008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동시가 당선되었다. 그림책으로 『다른 건 안 먹어』, 『내가 안 그랬어』, 『아빠 만날 준비 됐니?』, 『빨간 목도리』, 『국숫발, 쪽 후루륵』, 『내 똥에 가시가 있나 봐!』, 『신기한 바다치과』 와 동시집 『재개발 아파트』가 있다.
첫댓글 선생님 이야기 너무 재미있어 귀기울여 들었습니다. 당나귀 너무 귀여워요... 찾아서 읽어 봐야 겠어요. 그리고 잘 저축해 두었다가 아이들에게 내 이야기인것 처럼 해 줄까 합니다. ㅎㅎ 좋은 글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