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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1월 18일 주일 메세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말씀 / 고린도후서 6:11~7:16
요절 / 고린도후서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열대지방에서 원숭이 잡는 법에 대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사실을 확인할 수 없습니다만, 입구가 좁은 항아리나 병에 바나나를 넣어두면 원숭이가 손을 넣어 바나나를 잡고 그것을 놓지 못해서 사람이 다가가도 병에 손을 넣고 바나나를 잡은 채 도망을 가지 못해서 잡힌다는 이야기를 들으셨을 것입니다. 욕심과 집착을 놓지 못해서 근심을 가진 사람들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어떤 돈 많은 분이 이제 연락 좀 하고 살자고 주변 지인을 통해서 연락해 왔는데 응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자기 영혼을 돈에 팔고 사로 잡혀 있기 때문에 이런 분은 죽기 전에는 결코 마음을 돌리지 못합니다.
우리는 청년의 시기를 잘 보내야 합니다. 청년의 시기에 집착과 근심을 버리는 훈련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청년의 시기에 자기 욕심을 합리화 하는 습관, 자기의 집착을 굳게 붙잡는 습관이 든 사람은 나이 들면서 생기는 더 큰 집착과 욕심에서 그 영혼이 벗어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근본적으로 거룩하게 살기 어렵습니다. 우리는 청년의 시기에 어떻게 하면 내가 거룩하게 살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청년의 때에 비록 부족하더라도 회개하는 훈련, 죄와 집착을 떨쳐버리는 연단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자기 영혼을 보전할 수 있습니다.
지난 15일 모 대학에서 가장 먼저 임용된 교수가 사고로 돌아가셨습니다. 이분이 딱 1년 전에 거짓말을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집중적으로 반복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분은 학교를 위한 이익을 거절하고 자기의 안일을 택하느라 근심하였고 거짓말 하였습니다. 그는 학생들을 위한 유익을 거절하고 근심하였으며, 자기의 편안함을 택하느라 또 거짓말 하였습니다. 그가 자신에게 남은 삶이 딱 1년 뿐 인 것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렇게 거짓말하며 살았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우리가 오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배우고자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통하여 의에 이르고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 맺기를 기도합니다.
11~13절을 보십시오. “고린도인들이여 너희를 향하여 우리의 입이 열리고 우리의 마음이 넓어졌으니 너희가 우리 안에서 좁아진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 심정에서 좁아진 것이니라 내가 자녀에게 말하듯 하노니 보답하는 것으로 너희도 마음을 넓히라” 바울은 고린도의 양들을 항하여 입이 열리고 마음이 넓어졌다고 합니다. 바울의 마음이 모든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너그러움과 애정이 있는 마음이 되었다고 합니다. 바울은 이전에 죄문제를 돕고자 고린도 교회를 방문했다가 죄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고 갈등을 증폭만 시키고 떠밀리듯 고린도를 떠나와야 하였습니다. 이 일은 바울의 내면에 큰 고민을 하게 하였습니다. 자기가 거절된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고린도 성도들이 성령의 뜻을 거스리고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길에서 벗어날까 근심 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도 바울은 마음을 넓힙니다. 그는 양들을 향하여 마음을 닫지 않습니다. 그는 고린도의 양들을 위하여 마음을 넓히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러니 고린도 성도들도 바울과 함께 하는 주의 종들에 대하여 마음을 넓히기를 원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그렇게 하여야 하는 근거는 바울이 고린도 성도들을 자녀와 같이 여기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아버지와 같은 사도 바울과 처음부터 껄끄러운 관계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복음을 전해 준 사도 바울과 이런 관계가 된 근본은 절대로 함께 해서는 안될 사람들을 교회 안에 들여 놓은 것입니다.
14~16절 전반절을 보십시오. “믿지 않는 자와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 의와 불법이 어찌 함께 하며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되며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가 어찌 상관하며 하나님의 성전과 우상이 어찌 일치가 되리요” 유다에서 온 거짓교사들이 고린도 교회에 발을 들여 놓았습니다. 그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만으로 구원이 이루어질 수 없다고 하는 자들입니다. 이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에 들어와서는 예루살렘의 사도들의 이름을 팔고 종이 추천서를 팔아서 고린도교회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올라갔습니다.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이 이른 거룩한 성도들이 예수 그리스도 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다는 자들로부터 배운단 말입니까? 할례를 추가로 받아야 거룩한 백성이 될 수 있다. 율법을 철저히 지켜야지 믿음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자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구원에 이른 성도들을 지적하고 뜯어고치게 하였단 말입니까? 목자인 바울을 의심하고 바울의 목자의 심정과 눈물을 차갑게 대하게 된 근본 원인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믿는 것 같지만 믿지 않는 자들입니다. 의를 논하는 자들이나 사실은 불법자들 입니다. 그들은 빛에 속한 자처럼 행세하지만 사실은 어둠에 속한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할례와 율법조문을 자랑하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만을 믿는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것을 부인하였습니다. 그들은 이방인들일지라도 예수 그리스도만을 영접하면 구원에 이른다는 복음을 부인하였습니다. 복음을 부인하여야 하므로 복음을 전한 사도 바울을 깎아 내린 것입니다. 그들을 세우고 그들로부터 배웠으니 고린도의 양들이 목자에 대해서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이며 목자를 이전과 달리 차갑게 대한 것입니다.
그것 뿐 아닙니다. 고린도 교회 안으로 스며든 부도덕함을 방치한 것도 고린도 성도들의 마음을 좁게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값없이 구원에 이르렀으니, 그 은혜를 생각하며 앞으로는 거룩함에 힘쓰라는 사도 바울의 권면을 생각하며, 고린도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은혜를 생각하며 감격하였습니다.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거룩함에 나아가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마음이 무거워졌습니다. 그들은 언제부터인가 세상의 쾌락, 죄를 슬그머니 즐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 사람들처럼 놀 것 놀고 즐길 것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친구들과 똑 같이 희희낙락 즐겁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즐겁고 이것이 좋은데, 문득 주와 복음을 위해서 온갖 고생하는 목자 바울을 생각하니 부담스러워졌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우리는 목자처럼 살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은 목자 바울처럼 저렇게 고생하고 헌신하고 희생하고 싶지 않아졌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어둠과 불법과 우상을 왜 단호하게 물리쳐야 하는지 구약성경 말씀을 인용합니다. 먼저 레위기 26:12절 말씀을 줍니다. “나는 너희 중에 행하여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될것이니라” 그리고 이사야 52:11절 말씀을 이어서 줍니다. “너희는 떠날지어다 떠날지어다 거기서 나오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지어다 그 가운데에서 나올지어다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이여 스스로 정결하게 할지어다” 왜 그래야 하는지 사무엘하 7:14절 말씀을 제시합니다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니”
하나님께서 고린도 성도들을 이방의 가증한 죄악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로 그들을 씻으시고 하나님의 자녀 삼으셨습니다. 이제 하나님의 거룩한 자녀가 된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변질시키고 부인하는 자들에게서 떠나야 합니다. 그들을 단호하게 배격하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그들의 아버지가 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인하여 그들은 하나님의 친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그들의 악영향에서 벗어 나와야 합니다.
7:1절을 보십시오. “그런즉 사랑하는 자들아 이 약속을 가진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가운데서 거룩함을 온전히 이루어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하자” 성도는 아무 교훈이나 받아서는 안됩니다. 거룩한 성도는 아무 생각이나 해서도 안됩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었고 그 믿음을 보신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깨끗이 도말하신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님께서 거룩하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주신다는 약속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나라에 살기에 적합하도록 거룩함으로 나아가는 연습을 하며 살아야 합니다.
우리도 생명의 환한 빛으로 가득하고 조금도 어둠이 없는 깨끗하고 거룩한 하나님 나라를 우리가 들어가 살 나라로 약속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 나라에 들어갔을 때, 부끄러움이 없도록 우리의 생각, 우리의 말, 우리의 인격, 우리의 내면, 우리의 행실이 거룩함으로 가득하도록 연습하고 연단하여야 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불신, 교만, 불평과 같은 더러운 것이 나의 인격에 스며들지 않도록 특별히 주의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음란, 부도덕함, 거짓이 우리의 행실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각별히 조심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자랑, 사람 앞에서 위선, 사람들 위에 높아지고자 하는 생각에 빠지지 않도록 늘 경계하여야 합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유대 거짓교사들의 교훈에 흔들려 목자 바울을 의심하고 불신하고 잠시나마 대적하였던 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마음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자녀는 항상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경외심아래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할 때, 거룩함에 도달할 수 있고 육과 영의 온갖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2~5상반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가는 곳마다 양들에게 폐 끼치지 않고자 애썼습니다. 그는 양들에게 짐이 되지 않고자 자기 생활비는 직접 일하여 벌어서 썼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일처리는 공평하게 처리하였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그렇게 하였습니다. 이런 목자 바울에 대하여 고린도 교회는 마음을 넓혀야 합니다. 마음을 넓힌다는 것을 타고난 성격이나 인품이 있어야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마음을 넓히는 것은 내가 깨끗한 생각을 품으면 가능합니다. 내가 집착하는 것이 있을 때, 마음이 좁아지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내가 아끼고 집착하는 것을 빼앗아갈 것이라고 의심이 생기기 때문에 마음이 좁아지는 것입니다. 욕심과 집착이 없어서 마음이 깨끗한 사람은 마음이 넓어질 수 있습니다. 또, 예수님의 사랑을 믿고 신뢰하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아무리 예민한 사람도 예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믿을 때, 너그러워집니다.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나와 함께 하시며 나를 지키신다는 믿음이 있을 때, 마음이 저절로 넓어집니다. 여유가 생기고 마음으로부터 다른 사람, 다른 인생들에 대한 긍휼이 솟아납니다.
그러므로 고린도 성도들이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를 더욱 깊이 생각한다면 마음이 넓어집니다. 예수님께서 주신 은혜를 생각하며 목자 바울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고난과 더불어 목자 바울이 얼마나 복음을 위하여 수고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목자 바울이 얼마나 양들의 내면에 틈타는 죄와 싸우기 위해서 노심초사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느라 많은 고난을 받았고 환난도 많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럴수록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주시는 위로와 은혜도 많았습니다. 양들이 예수님 안에서 거듭나고 믿음이 성장할 때 기쁨도 많았습니다. 그는 함께 하시는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 힘을 얻었으며, 변화하고 성장하는 양들로 인하여 위로가 있었습니다. 이것이 양들 앞에 내놓고 이야기할 만한 사도 바울의 자랑이었습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편지를 쓰는 지금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고린도 교회 양들을 생각하면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서 절대로 떠나지 말아야 하는데, 이를 위하여 사도바울은 간절히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드로아에 있다가 도저히 고린도 교회에 대한 걱정 때문에 거기 있을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마케도니아로 건너왔습니다. 마케도니아에서도 사도 바울은 사방에 밀려오는 환난을 당하였습니다. 밖으로는 다툼이 있었으며 안으로는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6, 7절을 보십시오. “그러나 낙심한 자들을 위로하시는 하나님이 디도가 옴으로 우리를 위로하셨으니 그가 온 것뿐 아니요 오직 그가 너희에게서 받은 그 위로로 위로하고 너희의 사모함과 애통함과 나를 위하여 열심 있는 것을 우리에게 보고함으로 나를 더욱 기쁘게 하였느니라” 이 때, 디도가 고린도로부터 돌아왔습니다. 디도는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자신들의 죄를 회개하였다는 것과 사도 바울을 사모하며 거짓교사들의 비난을 대적하여 사도 바울을 변호하는데 열심을 가지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주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양들의 회개 소식으로 인하여 큰 위로를 받았습니다. 그에게는 이 소식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위로였습니다.
8~10절을 함께 읽어 보겠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사도 바울은 앞선 편지에서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무엇을 회개하여야 하는지 분명하게 지적하였습니다. 그 편지를 보내놓고 사도 바울은 걱정하였습니다. 양들에게 너무 강한 말로 지적하였는지 걱정스러웠습니다. 양들이 목자의 강한 지적과 책망 때문에 절망하고 주저앉을까봐 걱정되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걱정이 변하여 기쁨이 되었습니다. 바울의 기쁨은 목자를 걱정하게 했던 양들이 고생의 쓴맛을 봤다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바울은 고린도의 양들이 목자의 편지를 받고 고민하고 아파하였지만 결국 회개하였기 때문에 안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오늘날 양들은 태평성대입니다. 양들은 겉으로 보기에 착합니다. 별로 큰 문제가 없어 보입니다. 이런 양들에게 문제를 지적하는 것은 말하는 사람으로서도 부담이 큽니다. 오늘날 초등학교 선생님, 중학교 선생님, 고등학교 선생님, 대학교 교수님 아무도 학생들에게 간섭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세계최강 대한민국 중2 교실에서는 학생들이 책상에 푹 퍼져서 엎드려 자주는 것이 차라리 고맙다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자라난 청년들에게 싫은 소리를 해야 합니다. ‘죄를 회개하시오!’ ‘당신은 모두 심각한 죄인입니다!’
나에게 무엇이 문제인가? 나는 왜 죄인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평안이 없는 것인지, 나는 왜 불안한 것인지 양들은 알지 못합니다. 그런 생각을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우리 모든 인생은 이 삶이 반드시 끝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이 육체의 삶을 마친 후에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대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도 피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들이 그 육체에 있을 때 행한 대로 심판하십니다. 누구도 하나님의 공의로운 심판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아무런 심판이 없는 줄 알고 살아갑니다. 사람들은 육체에 있는 동안의 자기 삶을 허비합니다. 자기 인생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하며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삶의 끝을 생각하지 않으며, 자기 삶을 바라보시는 하나님의 무서운 눈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자기가 육체에 있는 동안 자기가 행한 일과 자기의 선택들이 반드시 책임이 따른다는 것을 알지 않습니다.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각 사람의 행한 일들을 모두 보고 계시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모든 인생들이 육체에 있는 동안 행한 대로 판단하신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자기 삶을 죄와 함께 하며 허비한 사람, 자기 육체에서의 삶을 자기 마음대로 한 것을 잘한 것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에게 그것이 반드시 평가받는 날이 온다는 것을 알려 주어야 합니다. 바울은 그런 일을 하였습니다. 바울은 양들에게 그런 말을 글로 적어 편지로 보낸 후 마음이 아팠습니다. 양들에게 아픈 말, 찌르는 말, 강한 말 한 것이 큰 걱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바울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이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룰 것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11,12절을 보십시오.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느나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목자는 때가 되면 양들을 아프게 하여야 합니다. 우리는 그동안 Fishing하고 Growing하게 해왔습니다. 목자가 Fishing과 Growing에만 힘쓰면 양들은 절대로 성장하지 않습니다. 양들은 때가 되면 Training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Disciple이 될 수 있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Fishing이나 Growing이나 Training이나 Disciple이나 모두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우리가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도 일하시지 않습니다. 일을 이루시고 열매를 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믿음으로 움직이는 것을 원하십니다. 우리는 Fishing하고 Growing하도록 양들을 돕습니다. 우리는 Fishing하고 Growing 하도록 양들에게 다가가고 간섭하듯이 Training을 위해서도 양들에게 말해야 합니다. 양들에게 말한다는 것은 비인격적으로 대하거나 말을 돌직구를 날리듯 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죄’에 대하여 이야기 하는 것입니다. ‘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양들은 부담을 느낍니다. ‘죄’에 대하여 이야기할 때 양들이 근심에 빠집니다. 우리는 양들이 ‘죄’를 깨닫고 ‘죄’ 때문에 근심하는 것이 양들을 살아나게 하고 회개하게 하고 성장하게 한다는 사실을 명심하여야 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는 목자 바울에게 큰 위로였습니다. 이 소식을 전하는 디도 역시 그런 역사를 본 기쁨을 전하여주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는 그들의 변화를 본 사람이나 전해들은 사람 모두에게 기쁨을 더해주었습니다. 디도는 고린도 성도들로부터 환대를 받았는데, 고린도 성도들이 이와 같이 목자를 향해서 환대하고 마음이 열린 것이 바로 회개로 인하여 마음이 넓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디도를 고린도에 보낼 때, 디도에게 고린도 성도들이 좋은 양들이라고 얘기했었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하고 디도를 잘 대함으로써 사도 바울의 자랑은 헛된 말이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디도는 자기가 고린도에서 좋은 기억 밖에 없다고 바울에게 보고하였습니다. 디도는 고린도 성도들이 두렵고 떨리는 마음으로 주의 종으로 자신을 대해주었으며 방향에 순종하였다고 회상하며 고린도의 양들에게 각별한 심정을 가진다고 하였습니다.
16절을 보십시오.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가 기쁨입니다. 바울이 이렇게 기뻐하는 것은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진리를 굳게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오직 예수님을 믿어서 구원받는 하나님의 약속을 굳게 붙잡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 안에 고린도 성도들과 함께 하는 기쁨이 충만하여 졌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새번역 성경에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것은, 회개를 하게 하여 구원에 이르게 하므로, 후회할 것이 없습니다.” 라고 기록하였습니다. 근래 어떤 지인의 아버지는 아들 곁에 가서 살려고 서울에 있는 집을 팔고 지방에 있는 아들에게로 내려갔다고 합니다. 서울의 집값이 어마어마하게 올랐습니다. 그러자 그 아버지가 아들에게 온 것을 마음 아프게 생각한다고 합니다.
우리는 오늘 말씀을 통하여 우리가 무엇 때문에 근심하는지 우리가 무엇 때문에 마음 아파하는지 살펴보아야 하겠습니다. 요즘 대통령 지지율이 51%라고 합니다. 지난 대통령 선거때 민주당후보 지지율 41% 정의당후보 지지율 10%였다고 합니다. 51%의 국민들은 대통령이 욕먹는 것이 마음 아플 것입니다. 15일은 수능시험이 있었습니다. 국어가 굉장히 어려웠다고 합니다. 불수능 불국어 때문에 마음 아픈 수험생과 가족들이 많을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이 아파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라서 근심하고 하나님의 뜻에 맞게 마음 아파하는 사람들을 반드시 위로하여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의 양들이 자신의 죄 때문에 마음이 아플 수 있도록 깨우쳐 주어야 합니다. 맛있는 밥을 많이 먹인다고 해서 양들이 죄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성경 말씀을 공부한 사람이 할 수 있는 근심입니다. 성경말씀을 공부하지 않고는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뜻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하나님의 뜻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죄를 발견할 수 없으며 죄로 인하여 근심할 수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는 기도해주어야 합니다. 기도 없이 죄를 깨닫는 역사, 죄로 인하여 마음 아파하는 역사는 일어나기 어렵습니다.
우리가 이 시대에 우리의 양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사람이 되고 그리하여 성령께서 주시는 위로의 역사를 체험하고 우리의 양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받는 역사를 볼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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