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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각(篆刻)세계의 역사와 이해
김양동*1)
Ⅰ. 각(刻)이란 무엇인가?
Ⅱ. 한국에서 각(刻)의 시원은 무엇인가?
Ⅲ. 인(印)의 기원과 변천
Ⅳ. 전각의 역사와 예술적 성장
Ⅴ. 한국 근․현대 전각의 맥
Ⅵ. 맺는 말
Ⅰ. 각(刻)이란 무엇인가?
인류역사의 흔적으로서 가장 오래된 새김(刻) 이라는 행위는 인간의 원초적 사고의 표현이었다. 어떤 색료를 사용해 그리거나 쓰기 이전에 이미 존재했던 새김은 의사표현의 첫째 수단이었던 것이다. 중국 서예의 출발을 5천년 전 앙소(仰韶)문화의 도기부호(陶器符號)1)에서 잡고 그림은 신석기 시대의 암각화(岩刻畵)에서 그 시초를 재고 있듯이 새김의 역사는 길고 오래되었다. 새김을 남기는 재료는 돌, 금속, 나무, 도자기, 옥, 상아나 짐승의 뼈와 같은 골각류 등 매우 다양하며, 비교적 단단한 것을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썩지 않고 지금까지 남을 수 있었다.
이아(爾雅)의 「석훈」에선 쇠붙이에 새기는 것은 루(鏤), 나무에 새기는 것은 각(刻), 뼈에 새기는 것은 절(切), 상아에 새기는 것은 차(磋), 옥에 새기는 것을 탁(琢), 돌에 새기는 것은 마(磨)로 부른다고 하였다.2) 우리가 말하는 절차탁마(切磋琢磨)는 여기서 연유된 말로 절차는 상호간 연구와 토의에 비유되며, 탁마는 품행의 수양과 시문의 수식에 비유되기도 한다. 또 보통 새김을 통칭하는 것은 루각(鏤刻)이라 한다. 각(刻)이란 말이 널리 쓰이는 글자지만 갑골문에선 아직 보이지 않고 있다. 필봉(筆鋒)의 봉(鋒)자에 쇠금(金)자가 붙은 모필 이전에 칼끝으로 새김의 행위가 선행하였음을 증명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새김은 행위의 에네르기가 직접 투입된다는 점에서 일차적이며 원시적인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예술 양식 중 가장 감동적이며 방법상 역사적 변천을 거듭해왔기 때문에 그 종류 또한 무한하다고 할 수 있다.
Ⅱ. 한국에서 각(刻)의 시원은 무엇인가?
요동반도와 한반도 그리고 일본에서 출토되는 신석기 시대 유물로서 가장 뚜렷한 것은 빗살무늬를 새겨 놓은 토기이다. 동이족(東夷族)문화의 특질로 제일 먼저 꼽는 것이 이 무늬인데, 이것은 한국문화의 원형이라고 부를 수 있는 고대 조형세계의 시초가 아닐까 한다. 울주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암각화, 그리고 고령 양전동 알터 암각화 등이 대표적인 신석기 시대 말 청동기 시대의 오래된 새김유적이다. 그런데 이들 유적과 빗살무늬에 나타난 중심사상은 고동이족(古東夷族)들의 태양숭배사상이 집중적으로 투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먼저 빗살무늬부터 살펴보면, 토기에 새겨진 이 무늬를 고고학계에선 무늬의 모양이 머리빗의 살과 같고 새김의 도구로써 빗을 사용했을 것이라고 판단하여 빗살무늬 또는 즐문(櫛紋)이라고 부르고 있다.3) 그러나 이것은 과학적인 고증이라기보다 즉흥적 발상에서 비롯된 이름이라고 보는 것이 옳다. 왜냐하면 둥근 토기에 빗을 갖다 대어 새긴다면(그 때 빗이 있을 리도 만무하지만) 닿는 부분이 볼록한 면만 닿게 되어 똑같이 새겨지지도 않을 뿐더러, 새길 때 흙이 밀려나와 빗으로는 도저히 새길 수 없다는 실험 결과가 밝혀졌기 때문이다. 또 현대인의 시각으로 어떤 대상과 비슷하게 닮았다고 하여 그대로 명칭을 삼을 것이 아니라, 고대의 문화적 상징에 대한 의미를 밝혀내고 고대의 사상적 체계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논리적 해석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고대에는 사람, 새, 물고기, 짐승 등 구체적인 그림을 그리게 마련인데, 빗살무늬 토기에는 왜 짧은 사선만을 반복적으로 새겨 추상적 구성을 이루어 놓았을까 하는 원초적 의문이 생긴다는 점이다. 여기에 대해선 이미 밝혀 놓은 필자의 글4)이 있기 때문에 생략하고, 다만 빗살무늬가 지니고 있는 한국문화의 원형성에 대한 의미 부여를 다음과 같이 하고자 한다.
1. 신석기 시대와 초기 농경시대에 진입하면서 나타나고 있는 토기의 이 무늬는 천손(天孫)으로 자처한 우리조상들이 태양을 숭배하고 그것을 신(神)의 고본자(古本字)가 「│」인 것과도 합치되어 주목되는 한국 고대의 문화 원형의 하나라고 생각된다는 점이다.
2. 앞에서 쓴 바와 같이 중국 서예사에서도 상고시대의 도기부호를 문자의 기원으로 잡고 있듯이, 한반도의 선사시대 유물인 토기의 빗살무늬는 한국 새김문화의 시원이며, 그 시대의 주술적 의미를 담은 언어부호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것은 인간이 남긴 최초의 언어일 뿐 아니라, 한국 서예사에서 필획의 출발점이라는 성격규정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3. 빗살무늬와 반구대 및 천전리의 암각화 등은 한국미술 조형세계의 원초로서 그 간결하고 견고한 구성은 원시예술의 압권이라는 점이다.
4. 빗살무늬가 지닌 상징적 의미가 태양을 숭배한 신「|」을 새긴 것으로 해석됨에 따라, 한국 미술의 특질로 인식되는 “선의 예술”이라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빛살, 햇살을 표현한 것의 형태적 확산과 변용이 아닐까 하는 점이다. 이러한 논거의 예증은 청동기시대 거울(銅鏡)의 무늬5)나 고려의 청자와 조선 초기 분청사기의 어깨부위 또는 아래 부분에 나타난 문양이 산 같기도 하지만, 이것은 사실 신석기 시대 빗살무늬와 조형적 원리가 같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6)
이와 같이 각(刻)은 원시예술의 제1단계이다. 동시에 그 시원이라 할 빗살무늬는 한국미술의 조형적 모태일 뿐만 아니라 원형질로서 필획의 시작이라는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밝혀 두는 바이다.
Ⅲ. 인(印)의 기원과 변천
인(印)은 도장, 인장, 도서(圖署), 새(璽), 보(寶) 등 지위와 신분에 따라 다양하게 부른다. 그런데 고대 인(印)은 통치자가 믿음을 증명하는 표시물이었다는 데 그 성격적 기원을 둘 수 있다. 이러한 설명은 ‘印’7)의 문자학적 해석에서 분명한 뜻을 보여주고 있다. 인(印)은 손톱 조(爪)와 병부절(節,卩)을 합친 회의(會意)문자인데, 손톱은 적으로부터 자기를 방어하는 기본적 무기이며 병부절은 절부(符節), 곧 믿음의 표시를 뜻한다. 원초적 무기는 손톱과 어금니, 곧 조아(爪牙)인데 이 말은 임금을 호위하는 사람을 가리키는 말로 전의되었다. 고대에는 전쟁이 아닌 평시에는 집정관인 통치자만이 무기를 지녔기 때문에 인(印)은 계급, 지위, 신분을 나타내는 것을 인문(印文)의 내용으로 삼았으나, 원래는 고대 제후가 정복한 영토의 통치를 위해 분봉(分封)해 나갈 때, 중앙으로부터 새로 지어주는 성(姓)과 씨(氏)8)를 하사받고, 하사받은 새 성씨를 청동인으로 주조하여 반사물(頒賜物)로서 내려준 데서 비롯되었다. 이때부터 하사받은 청동인은 새 종파의 조종(祖宗)이 되기도 하고 새 봉지(封地)의 국명(國名)이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중국 최고의 은허(殷墟) 출토 청동인 삼과(三顆)는 바로 그러한 것의 유존물(遺存物)이다. 그러나 고대의 성씨는 판독할 수 없는 부족집단의 부호 표시인 경우가 많기 때문에 그러한 문자를 ‘족휘(族徽)’라고 부른다. 중국의 고문자학계는 족휘 연구에 매우 열중하고 있는데 그것은 고대 부족국가시대의 역사적 실체를 밝히는 생생한 자료이기 때문이다. 족휘 연구는 한 글자가 한편의 논문을 이루는 경우가 보통이다.
인(印)의 변천은 시대에 따라 복잡하게 전개되었다. 명칭과 재료의 종류, 크기의 대소, 유(鈕, 꼭지손잡이 부분의 조각) 방식 등 형태적 변천은 말할 것도 없고, 문자의 양식, 각법의 차이 등 거듭된 변천으로 매우 번잡한 것이 사실이다. 국내에 번역 소개된 등산목(鄧散木)의 전각학과 전군도(錢君陶)의 전각의 기법과 감상 두 책에 실려 있는 것으로서 이 부분의 서술은 미루어야겠다.
인장은 그 사용 방법에 따라 봉니(封泥)시기와 주인(朱印)시기로 나뉜다. 봉니시기는 주로 동인(銅印)을 위주로 사용하던 상대(商代) 말부터 위진시기(魏晉時期, B.C. 1400-A.D. 420)까지를 말하며 주인시기는 남북조시대부터 종이 사용이 날마다 확대됨에 따라 종이에 주니(朱泥,붉은 인니)를 사용하던 동진(東晉)이후(A.D. 420-현재)9)를 말한다. 대략 중국 역대 동인(銅印)의 특징을 개괄하면 다음과 같다.
1) 상대(商代) 만기(晩期) 동인(銅印) (B.C. 1400-1200)
하남성 안양현 은허(殷墟) 출토 아자인(亞字印)을 비롯한 동인(銅印) 삼과(三顆)는 원시적 인쇄(印制)로서 인신(印身)은 얇은 방형(方形)이고 뉴(鈕)는 간단한 비뉴(鼻鈕)로서 실용적이다. 이 인(印)은 상대(商代) 청동기명문(銘文)에서 보이는 족휘(族徽)와 비슷한 인문(印文)으로 담고 있는데, 결구의 상형성이 소박하며 진실한 풍격이 있다. 곧 이것은 중국 인(印)의 선하(先河)로서 이것 외에 상대(商代) 인(印)이 발견된 예는 아직 보고 된 바가 없다.
2) 전국(戰國)시대 동인(銅印) (B.C. 481-221)
전국시기는 관인(官印)과 사인(私印), 한인(閑印) 등이 있으나 대다수가 관인(官印)이며 크기가 약 1.2cm정도로 매우 작은 것이 특징이다. 인면은 정방형이 위주이고 더러 장방형, 요형(凸形), 8각형, 원형 등 변형이 보이지만 그 수는 20종을 넘지 못하는 듯하다. 인문(印文)은 백문(自文)과 주문(朱文) 두 종류가 있는데, 양문(陽文)은 필획이 매우 섬세하고 변을 넉넉히 남기는 것이 특징이고, 음문(陰文)은 반드시 백변[白邊-인면(印面) 둘레에 선을 음각하는 것]을 갖추거나 양분(兩分)하는 계선(界線) 또는 전자계선(田字界線)을 병용하는 것이 각국에서 유행되었다. 문자 결구는 솔진(率眞)하고 자연스러우나 각국에서 통일된 사법(寫法)이 없고 본디 모양을 상형할 때는 조자(造字)를 많이 숭상한 것이 이 시기의 특징이다.
3) 진대동인(秦代銅印) (B.C. 246-207)
천하 통일 전(天下統一前)의 진(秦)은 인문(印文)이 전국시기의 풍격을 따랐으나, 통일 후에는 문자를 소전(小篆)으로 반포 시행하고 예서도 병용하였다. 고로 이 시기의 인문(印文)은 주로 소전을 사용하여 필획이 점점 균정해지는 추세였으나 결구는 오히려 거칠고 산란해졌다. 인면(印面)의 공간포국(空間佈局)도 엄격성을 다소 잃고 있다.
진대(秦代)의 인문(印文)은 백문(白文)으로서 격란[格欄-일자격(日字格), 전자격(田字格)으로 인면을 계원(界源)으로 분할하는 것]을 보태는 것이 특징이다. 반통인[半通印, 세로로 직사각형의 길죽한 인(印), 요즘 두인(頭印)의 형태와 같은 것]도 꽤 있으며 한인(閑印)은 수신(修身)에 관한 말을 새긴 것이 많고 간혹 기복(祈福)과 구재(求財)에 관한 속인(俗印)도 나타나고 있다.
4) 한대(漢代)와 위진시대(魏晉時代)
한대(漢代) 역시 소전(小篆)이 위주였으며 필획은 공정(工整)해지고 공간포국의 균등한 배치에 힘을 많이 쏟고 있다. 인면(印面)은 전시대보다 점점 커지고 있다. 서한(西漢)의 인문(印文) 형체는 반듯하고 평정(平正)하며, 동한(東漢)은 각획이 굳세고 예리한 직선으로서 인면을 가득 차게 한다.
동한 중기부터 위진시기까지 인문(印文)은 크게 변화한다. 즉 소전의 전통체에서 문자의 부분 혹은 편방(偏旁)이 간략해지고 변형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전서 사용이 주도적 위치에서 퇴출(退出)되고 예서, 해서 등 일상적 문자가 등장되는 문자 환경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양한(兩漢) 시기의 무전[繆篆-일종의 인전(印篆)으로서 필획을 구부려 트린 자형의 전서]은 위진시기에 와서 선조(線條)가 직선화되며 간솔화(簡率化)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인(漢印)의 법도(法度)는 인(印)의 규범(規範)으로서 자법(字法)․장법(章法)․도법(刀法)면에서 가장 훌륭한 가르침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전각 학습자의 교재로 활용되고 있다.
전국시대부터 한말(漢末)까지 700년간은 중국 인학(印學)의 제1차 고조기였다. 당시 문화 중심지였던 황하 유역과 양자강 남쪽인 장사(張沙) 등지에서 고인(古印)이 출토되고 있는데 분방하고 질박하여 장미(壯美)의 풍격이 뛰어나다. 더욱 급취장(急就章)에 이르러서는 기세가 왕성하고 신채(神采)가 호방하며 조솔한 아름다움이 있어 현대적 미감에 크게 어필한다.
고대 인장 연구는 인문(印文) 연구와 인예(印藝) 연구로 크게 두 가지 방면이 있다.
인문(印文) 연구를 통하여 검토할 수 있는 분야는, 문자 결구와 변천, 성씨의 종류, 성씨 명명(命名)의 습관, 역사인물에 대한 조사와 논증, 역대 관제(官制)의 명칭, 지리(地理) 명칭의 변화, 만이(蠻夷) 분포의 상황, 고어표시(古語表示)로 볼 수 있는 처세은상(虛勢恩想), 초형인(肖形印)이 내포한 의미, 인장(印章)의 연혁과 시대적 변천 등이다.
인예(印藝) 연구를 통한 고구(考究) 분야는, 문자위치의 경영, 문자필획의 고른 규율, 음문, 양문의 배분, 도필(刀筆) 풍격(風格)의 특징, 변란(邊欄)을 포설(佈設)하는 기법과 변화, 인뉴(印鈕) 조형의 예술성, 인재(印材)의 종류, 동인(銅印) 합금(合金)의 성분, 동인(銅印) 주조의 기술, 봉니(封泥) 제작의 방법 등이다. 이와 같이 인문(印文)과 인예(印藝)의 연구 분야는 다양하고 풍부한 역사적 인문자료를 제공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
한국 동인(銅印)의 역사는 낙랑 유적지에서 출토된 것과 한(漢)과 진(晋)에서 변방민족에게 내려준 몇 점이 유존되고 있다. 이러한 고대인(古代印)의 인문(印文)은 ‘진고구려솔선백장(晋高句驪率善佰長)’, ‘위솔선한백장(魏率善韓佰長)’등으로 되어 있어 만이인(蠻夷印)의 특징적인 양식을 보여주고 있다. 그 외에 인형(印形), 인뉴(印鈕)문자의 결구 등은 중국의 형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고려 동인(銅印)의 인신(印身)은 고려 청동인은 독특한 형식으로서 중국 인(印)에서 전혀 볼 수 없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고려 동인(銅印)의 인신(印身)은 아주 얇은 반면, 인면(印面)은 넓다. 특히 인뉴(印鈕)는 섬세하며 동물을 형상한 조형미는 아주 뛰어나다. 인문(印文)은 대부분 판독하기 어려울 정도로 불분명하지만 사찰용인(寺刹用印)이 유존된 것은 만자(卍字)를 구첩전(九疊篆)처럼 여러 번 구부린 것이 많다. 고려 동인의 뉴(鈕)는 전통적 한국 공예미의 특징을 잘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현대적 재조명이 이루어져 대형 조형물로 만들어진다면 훌륭한 전통미의 재현이 아닐까 생각한다.
Ⅳ. 전각의 역사와 예술적 성장
전각(篆刻)이란 말은 한대(漢代) 양웅(場雄, B.C. 53-A.D. 18)의 법언(法言)에서 처음 나타나지만, 이것은 오늘날 전각의 의미가 아니고 진대(秦代)의 전서 새김을 뜻한다. 근대적 전각의 성격은 인장이 각공(刻工)의 손에 의하여 제작되는 것이 아니라, 서화가나 문사들이 직접 작성한 인고(印稿)에다 바로 칼을 들고 금석기(金石氣)의 필의(筆意)를 살려 새김으로써 개성이 있는 예술적 인장의 각(刻)이 된 것을 말한다. 이렇게 발전되게 된 서초(瑞初)는 새기기 쉽고 부드러운 미석(美石) 종류의 동석류(凍石類)가 개발되면서 나타난 현상이다. 전각은 명나라 때의 유명한 서화가였던 문징명(文徵明, 1470-1559)과 그의 아들 문팽(文彭, 1498-1573)부자가 고인(古印)을 수집 연구하고 석인재(石印材)를 이용한 각을 하기 시작하면서 종전의 인공(印工)들이 새긴 인(印)이라는 차원을 벗어나 예술적 가치의 대상으로 인식, 발전시켰다. 특히 문팽은 그의 제자 하설어(何雪漁, 1530-1604)와 함께 전각의 유파를 형성, 문인 취향의 금석기를 드러내는 각법과 전각한 작가의 이름을 옆에 새기는 방각을 창안함으로써 전각발전의 새 지평을 열었기 때문에 이 두 사람을 문하(文何)로 병칭하고 전각의 개조(開祖)로 삼는다. 이로써 16세기 발흥되기 시작한 중국의 인단(印壇)은 이후부터 여러 저명한 전각가가 출현되어 새로운 인풍(印風)을 수립, 인파(印派)를 개창(開創)하였다. 그러나 새로운 인풍이라 하더라도 대부분 천고후박(天高厚樸)한 한인(漢印)의 의경(意境)에 신의(新意)를 보태는 방식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그 중에서 절파(浙派)의 개조(開祖)인 정경(丁敬, 1695-1765)이 후배인 파위조(巴慰祖)에게 충고한 인병(印病)과 인(印)의 품등(品等)을 말한 것은 재미있고 교훈적이어서 여기 옮겨 본다.
먼저 인병(印病)에 대해서는 “배움에 연원이 없고 변과 방을 구분치 못하고 하나로 합하는 것이 전병(篆病)이요, 집필을 알지 못하고 자획을 묘사하는 것이 필병(筆病)이요, 전절(轉折)이 급히 드러나고 경중(輕重)에 마땅함을 잃은 것이 도병(刀病)이요, 오로지 장인적 기교에만 전념하고 정취가 결핍되었거나 문자 형태가 정해지지 못하고 정처없이 벗어난 것은 장병(章病)이요, 심수(心手)가 서로 어긋나고서도 편리함을 취해 겨우 완전함을 차린다면 의병(意病)이니라”10) 하였고 인(印)의 품등(品等)에 대해서는 “도미(刀味)와 필의(筆意)가 혼융(渾融)하여 자취를 가히 찾을 수 없는 것이 신품(神品)이요. 필의는 있되 도의(刀意)는 없는 것이 묘품(妙品)이요, 도의(刀意)가 없는 것은 능품(能品)이요, 도의(刀意)와 필의(筆意) 외에 별취(別趣)가 있는 것은 일품(逸品)이요, 칼끝(刀鋒)의 자국이 다리의 종기처럼 다닥다닥 생긴 것은 외도(外道)요, 도봉(刀鋒)이 없고 철선처럼 가늘거나 굵기만 하고 힘이 없는 획과 같은 것은 재주 없이 용렬한 장인의 것이라 한다”11)고 하였다. 전각공부에 매우 유익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청대(淸代)에는 고증학과 금석학의 발달로 갑골문(甲骨文)과 금문(金文), 진한(秦漢)의 전예(篆隸)에 대한 연구와 서사적(書寫的) 표현에 주력한 시기였던 고로 전각의 발전과 더불어 많은 인인(印人)들이 인론(印論)을 펴고 있다. 그중에서 인보(印譜)의 서문(序文)이나 발문(拔文) 등에 싣고 있는 논인(論印)들은 다양하며 흥미가 있다. 전각 삼법인 자법(字法), 장법(章法), 도법(刀法)에 관한 것은 물론 여러 가지 치인(治印)하는 방법과 풍격에 대한 논급은 당시의 미적 시각을 읽을 수 있는 기회가 된다.
등석여(鄧石如, 1743-1805) 이후에 나타난 조지겸(趙之謙, 1829-84), 오창석(吳昌碩, 1844-1927), 제백석(齊白石, 1863-1957) 3인의 대가는 詩․書․畵는 물론 전각의 탁월한 작가들로서 중국은 물론 한국, 일본의 서화․전각계에 막강한 영향을 미쳤다. 소위 현대의 작가치고 이들 3인의 작품을 학습의 대상으로 삼지 않은 사람이 거의 없다시피 할 정도이다.
조지겸은 절파(浙派, 開祖 丁敬) 제선사(諸先師)들의 법을 거치고 완파(睕派, 開祖 鄧石妙) 각가(名家)의 법을 취한 뒤, 진한(秦漢)의 금석문자를 비롯하여 전폐(錢弊), 소판(韶版)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흡수함으로써 인문(印文)의 조형성을 풍부하게 하였다. 그는 위비(魏碑)를 깊이 연구하였기 때문에 육조조상기(六朝造像記)에 핍진한 변관을 남겼다. 하여튼 조지겸은 등석여 이후, 독특하고 가늘게 새긴 둥근 맛의 주문(朱文)은 제일이었고, 백문(白文)은 한인(漢印)의 의취(意趣)를 취하여 후박(厚朴)하면서도 영활(靈活)한 인풍(印風)을 수립한 거인(巨人)이었다.
오창석은 일찍이 오대징(吳大徵, 1835-1902)의 집에 출입하면서 허다한 명작과 고대 청동기물을 볼 기회를 얻어 그의 안목을 높일 수 있었다. 그의 작품은 석고문에서 득력한 독특한 장법에 진한인과 봉니의 결체를 도입하여 혼목, 창욱할 뿐 아니라, 사의적(寫意的)이어서 조형적 형식미와 내용적 의경(意境)이 뛰어났다. 특히 옛것을 변화시켜 신의(新意)를 표현한(化古出新) 오풍(吳風)은 한국의 근․현대 전각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제백석은 목공 출신의 대화가 겸 전각가이다. 그는 평생 오창석의 인(印)을 패복(佩服)하고 다녔다는데 각풍(刻風)은 전혀 딴판이다. 전서의 둥근 필세를 모난 필세로 변화시키고 정제미(整齊美)를 깨뜨려 참차(參差)한 야취(野趣)를 강조하였다. 목공출신다운 절륜의 팔뚝 힘으로 두 번 칼질하지 않는 단입도법(單入刀法)으로써 사납게 새겨대는 바람에 특유의 현대미가 넘친다. 그렇기 때문에 제풍(齊風)을 배우는 자가 매우 많지만 그 신운(神韻)과 힘은 능히 얻을 수 없으며 그 기교는 따라가되 그 졸(拙)한 맛은 나타내질 못하고 있다.
조(趙), 오(吳), 제풍(齊風)으로부터 절대적 영향을 받은 동양 삼국의 전각 창작세계는 어떠한가? 그 위치와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기는 매우 힘들지만, 대체로 중국은 전각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팽창하고 있는데, 역사 속의 전통적인 문자 결체보다 삐딱하게 기울고 쏠린다든지 느슨하고 흐리멍덩한 듯한 표정의 천진한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것을 좋아하고 있다.
이러한 작품의 선도자는 북경의 왕용(王鏞, 중앙미술학원 교수), 상해의 한천형(韓天衡) 외에 몇 사람에 의해서 유행되고 있는 듯하다.
일본은 전각인구가 매우 많은데, 일찍부터 유명 공모전에 전각분야를 두었기 때문일 것이다. 일본의 전각풍은 대체로 장법이 긴밀하고 엄정하며 구축적이지만 도필(刀筆)의 조작성이 있어 천연스런 맛이 부족한 감이 있다.
이에 비하여 한국은 80년대에 들어서 공모전에 전각부문이 신설되었지만 아직 응모작품수가 100점을 넘지 못하는 빈약한 저변인구를 가지고 있다. 따라서 그 수준도 미미하고 특색있는 작품을 수집한 인파(印派) 등장은 어림없는 형편이다. 예술의 전당이 기획한 특별전 <전각․초서의 오늘전>은 바로 이러한 전각계의 현실을 진단하고 새로운 진작의 기풍을 일으켜보자는 의도가 있음을 읽어야겠다.
Ⅴ. 한국 근․현대 전각의 맥
한국 전각사에 있어 전각이 전각다운 면모를 띠게 된 시기는, 추사의 예단활동 이후부터라고 봄이 타당한 듯하다.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는 금석학과 서법에 대한 새로운 연구를 하여 한국 예단사에 신풍을 일으킨 인물답게 전각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중국의 인학(印學)을 도입하여 당시 유행했던 허미수(許眉叟) 풍의 자법(字法)과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 1705-77) 류의 전법(篆法)을 배척하는 데 앞장섰다고 보여진다. 추사는 제자이자 역관인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 1804-65)의 빈번한 중국행에 힘입어 그때 구하기 힘든 중국의 고대인과 청대 전각 명가들의 작품을 구입하기도 했던 것이 찍어 놓은 인영(印影)에 의해 밝혀진 바 있다.12) 추사의 전각에 대한 이러한 태도는 그 당시 문인계급 속에 하나의 고급취미로서 유행하기 시작하였는데 헌종(재위 1835-49)은 자하(紫霞) 신위(申緯, 1769-1845)와 심암(心庵) 조두순(趙斗淳, 1796-1870)으로 하여금 태조 이래 열성 어용 인장 790방을 모은 보소당인존(寶蘇堂印存)을 간행케 했다. 추사 자신도 황산(黃山) 김형근(金逈根, 1785-1840)과 같이 고연재인보(古硯齊印譜)를 공동 출간하였다.(이 인보는 소실되었고 근역인수에 75방이 수록되어 있다.)
금석고증학과 전각학에 대한 추사의 계몽은 전각이 회화 상의 구성 성분으로 마침내 등장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추사의 걸작 「불이선란(不二禪蘭)」은 전각이 서화에 동참하여 그 구성의 중요 부분으로 기능하고 있음을 잘 보여주고 있는 예라 하겠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일제시대까지 한국 전각계의 중요인물은 해관(海觀) 유한익(兪漢翼, 1844-1923), 몽인(夢人) 정학교(丁學敎, 1832-1914), 청운(菁雲) 강진희(姜璡熙, 1851-1919), 위창(葦滄) 오세창(吳世昌, 1864-1953), 성재(惺齊) 김태석(金台錫, 1875-1952) 등인데 이분들의 전각은 중국의 인풍을 흡수하여 개성과 의취를 나타낸 특출성이 있다. 특히 위창과 성재는 쌍벽을 이룬 근대 전각의 양대가였는데 한국의 현대 전각은 이분들의 맥을 계승한 작가들에 의해서 형성․전개되었다고 할 것이다.
3.1독립운동 33인의 한사람인 위창은 김정희와 이상적의 제자인 역매(亦梅) 오경석(吳慶錫, 1831-79)의 아들로 태어나 일제시대 언론활동을 병행하면서 조선금석고증학의 학문적 체계를 정리 시도하였던 부업을 계승 발전시켰다. 위창이 전각의 실제에 손을 대기 시작한 것은 기미독립운동 후 국내를 떠나 얼마동안 일본에서 생활했던 시절부터라고 알려져 있다. 그의 각풍은 편도각에서 오는 예리함과 깔끔한 처리, 그리고 완벽을 기하려는 장법의 긴밀성에 그 특질을 볼 수 있으나 중후한 맛은 풍기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다. 그는 또 방각을 남기지 않는 인벽(印癖)을 지녔는데 그 까닭은 좋은 인재를 방각으로 인해 흠집이 생기는 것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13)
위창에게 사사받거나 영향 받은 작가로는 석불(石佛) 정기호(鄭基浩), 철롱(鐵農) 이기우(李基雨), 정사(睛斯) 안광석(安光碩) 등이다. 마산과 부산지역에서 활동했던 석불 정기호(1899-1984)는 동장(銅章)과 서각(書刻)으로 유명하였다. 철농 이기우(1921-93)는 위창의 지도 외에 동경미술학교를 졸업했고 위창과는 다른 측면에서 당시의 최고 안목으로 일컬어지는 무호(無號) 이한복(李漢福, 1897-1940)의 지도로 오창석의 각풍을 중심으로한 현대적 감각의 장법과 포치를 통해 문자의 조형성을 익히기 시작했던 전각가이다. 1955년 한국에서 최초로 서예 전각전을 개최한 바 있는 철농의 전각은, 한인(漢印)을 비롯하여 와전(瓦磚), 고동기(古銅器)의 명문(銘文)이 지닌 원시적 소박한 고졸미를 숭상하여 그것을 다시 현대적 미감으로 처리한, 폭넓은 인풍(印風)을 수립했다. 그의 제자로는 김순욱, 윤양희, 권창륜, 김양동, 황창배, 선주선, 박남철, 이종목 등이 있다.
안광석(1917- )은 갑골문자를 연구한 자법과 고인(古印)의 인풍을 취합한 인풍으로서 불교와 연관된 작업을 많이 하고 있으며 소장품을 연세대 박물관에 대량 기증한 원로작가이다.
오랫동안 중국에서 활약하며 원세개의 인장을 새겨 유명한 성재 김태석은 글씨와 전각 모두 전통적인 소전풍(小篆風)을 이루고 있는데 그의 제자로는 현재 전각계의 원로인 심당(心堂) 김재인(金齊仁, 1912- )이 있다.
일본에서 오랫동안 작가생활을 하다가 귀국한 석봉(石峯) 고봉주(高鳳柱, 1906-94)는 일본 전각의 선구자인 차전정천래(比田井天來) 문하에서 배우고 다시 일본 전각의 지평을 개척한 작가로 칭송되는 하정전로(河井筌蘆)의 문하에 입문, 수업을 받았다. 그의 인풍(印風)은 섬려하면서도 고아(古雅)하여 일본에서 호평을 크게 받았다. 제자로는 전도진, 임재우, 이대성 등이 있다.
사승(師承) 관계 없이 오창석과 제백석을 사숙한 전각가들로서 이한복, 이태익(李泰益, 1903-73), 유희강(柳熙綱, 1911-76), 김응현(金膺顯)은 오풍(吳風)을 통해 자득한 작가들이고, 정문경(鄭文卿)은 제백석 각풍의 철저한 추종자로 알려진 작가이다. 그의 제자로는 조수현, 유재학을 비롯한 한국전각학 연구회 회원 다수가 있다. 이태익은 한국의 오창석이라 불릴 정도로 오창석의 서와 각에 한평생 매달린 분이다. 겸여 유희강의 전각은 숫자가 많은 것은 아니지만 고졸하며 중후한 각풍이다. 여초 김응현은 한인(漢印)의 의경(意境)에 오창석의 도법(刀法)을 가미한 듯한 박졸미(樸拙美)가 있으며 장법의 묘취가 뛰어나다. 현재 한국 전각학회 회장이며 그의 제자로는 여원구가 있고 여원구의 제자로는 전정우, 조성주가 있다.
한국의 전각이 개인적 활동차원에서 벗어나 작가들의 단체를 결성한 것은 1974년이다. 청강 김영기와 연민 이가원 두 분이 합심 노력하여 ‘한국전각회’를 조직하고 그 해 11월 제1회 전각협회전을 열었다. 당시 창립회원 명단을 참고로 적어둔다.
고봉주, 김광업, 김봉근, 김순욱, 김양동, 김영기(청강), 김응현, 김제인, 김태정, 유희강, 임재우, 백홍기(학정), 박태준, 윤양희, 이기우, 전도진, 정기호, 정문경, 정환섭, 황창배 (명단 이름은 가나다순이며 권창륜은 2회부터, 여원구는 3회부터 참여하였음)
전각가들의 이름이 총망라된 이러한 당시의 협회 명단은 곧 전각의 후진성과 영세성을 반증한다할 것이다. 이 협회전은 1978년까지 5회전을 개최한 뒤 ‘한국전각회’로 발전적인 개편을 하여 공모전도 열고 한중전각전도 개최하는 등 의욕을 보였으나, 이후 10여년간 정체 상태에 있다가 1994년 조직을 확대하여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Ⅵ. 맺는 말
전 각은 방촌(方寸)의 제한된 공간 속에서 종이가 아닌 돌 위에, 붓이 아닌 칼로써 힘을 바로 투입시키는 일차적인 작업 행위이다. 기교적 조정이 가장 원시적인 예술행위이기 때문에 작가의 정신성이나 감정과 의도는 숨김없이 노출된다. 이와 같은 행위의 특질성은 공간적 제약성을 극복하고 문자미의 독특한 아름다움을 압축하여 표현하려는 또 다른 특질과 결부되어 전각의 매력을 배가한다. 그러나 매력은 고도의 난이도를 요구하여 정치함 속에서 벽력 같은 분방함을, 분방함 속에서 치밀하고 단단한 처리를 필요로 한다. 또한 문자학적 지식, 시정과 문학성, 필의(筆意), 도미(刀味)는 물론 미적 조형감각을 가진 구성력(章法)이 있어야 하는 종합적인 예술이다.
전각은 기법과 재료의 전통성을 지키는 것은 그것대로 중요성을 지니고 있지만, 발전을 위해서는 지키는 것 못지않게 실험적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1. 석인재가 도입되면서 전각의 획기적인 발전이 도래했듯 새로운 재료개발을 시도해 볼 것.
2. 방촌의 제한된 공간은 미시적이므로 시각적 효과를 위해 공간적 제한을 염두에 두지 않는 거시적 표현을 연구할 것.
3. 2와 같이 하되 고전의 자료를 부분 확대하거나, 확대 제작한 작품을 파괴하여 전혀 다르게 배치함으로써, 이미지 충돌, 이미지 감추기, 이미지 재생 등 추상적 효과를 얻는 조형미를 획득하는 것도 시도해 볼 것.
4. 섬세한 조직 속에 저항적이며 본능적인 것. 어린아이나 광인적 사고와 같이 이른바 거친 예술(Art Brut)이 한 화면 속에 상생하는 묘리를 체득할 것.
5. 작가의 혼이 담겨 있지 않은 것은 작품이라고 아예 생각하지 말 것.
6. 기존의 전각 문법은 학습자에게 큰 교훈을 가르치고 있지만, 개성 없는 답습은 작가의 무덤이라는 인식을 할 것.
7. 옛것은 작품이 모두 섬세하고 사실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부분을 키우고 부분을 확대하여 써 먹도록 한다.
8. 새김이라는 원시적 방법을 이용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므로 반각(反刻)만을 고집하지 말고(반각한 것을 인주를 묻혀 찍어 내면 평면이 됨) 탁본 방식으로 떠냄의 방법으로 입체적 마티앨을 살릴 것.
9.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작가의 색을 하나쯤 개발할 것.
이상 말이 안 되는 논리를 펴보았다. 이런 실험은 작가의 미적 체험을 확대시켜 줌으로써 비록 실패할지언정 그 나름대로 의미가 있을 뿐 아니라, 새로운 발상을 제공하고 전통적 기존의 전각 문법 해석에도 또 다른 시각이 열리는 등 부가적인 효과가 있음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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