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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일생이 무한이라네
춘하추동 사계절에
이슬 밟고 서리 이고
진땀 뚝뚝 땅 뚜지여
한 알 두 알 심은 곡식이라네
농부일생이 무한이라네
썩살 박혀 못이 되고
손등 터져 피 흘리며
염근 곡식 가을이 되면
지주 배 딩딩 농민 배 홀쪽하네
농부일생이 무한이라네
올해에나 새 희망에
주린 배에 이 물고
또 한 해 버둥댔어도
농부팔자 다람쥐 바퀴라네
사람들은 자기 신세를 한탄하며 후- 후- 한숨을 토했다. 경준이는 또 한 번 꿀꺽 한 모금 마시고는 이번엔 가락을 바꾸었다. 애절하던 가락이 비분이 넘치는 가락으로 바뀌었다. 그는 좌중의 맘을 들었다 놓았다 했다.
농부일생이 무한이라네
백의겨레 농민팔자
더더욱 그렇다오
나라 빼앗기고 고향 떠나
수천리 타국 땅에
허둥지둥 쪽박신세여도
식칼 쥐고 내달린 동생
총창 메고 뛰쳐나간 남편
동에 번쩍 골짝을 뛰고
서에 번쩍 험산을 넘으며
왜놈 목을 잘라댔는데
원통하다 애통하다
눈먼 총알에 쓰러졌다네
뼈아픈 소식 가슴 깊이 묻고
아득바득 가꾼 곡식이건만
하늘이 무정코나
벼락은 어쨌다고
황금나락 빼앗아 가느냐
사람들의 얼굴마다엔 비장한 기색이 넘쳤었다. 혁진이는 몸을 흠칫했다가 다시 멍해졌다. 동생 혁달이의 얼굴이 눈앞에 떠올랐던 것이다. 죽선이는 가만히 부엌에서 치마폭으로 눈물을 훔쳤다. “총창 메고 뛰쳐나간 남편…… 눈먼 총알에 쓰러졌다네”란 대목이 그녀의 가슴을 왈칵 움켜쥐었던 것이다. 경준이는 또 한 번 목구멍을 적셨다. 그리고 계속 불러댔다.
농부일생이 무한이라네
올해 지나면 내년이 오고
내년이 가면 후년이 되고
해해 연년 뱅뱅 돌지만
……
여기서 목청을 뚝 끊은 경준이는 크게 날숨을 몰아쉬고는 덥석 손목에 힘주어 술사발을 짚었다. 그리고 불시로 드센 물결처럼 우렁찬 목소리를 뽑아댔다.
여보소 농부들
한탄을랑 마소서
오르막 있으면 내리막 있고
내리막 있으면 오르막 있거늘
캄캄한 밤이 지나면
광명한 새날이라오
여보소 농부들
한탄을랑 마소서
겨레 핏줄 뜨겁게 이어졌으니
지성이면 감천이라오
손에 손잡고 맘에 맘 주며
새 앞날 가슴 뿌듯이
힘차게 살아가세나
온 좌중이 얼 잃은 듯 입들을 하- 벌리고 경준의 얼굴만 쳐다보았는데 재건 노인이 “허 참, 그 사람 슬픔 주고 비통 주고 새 힘주는 멋진 목청일세!” 하고 수염을 쓱 내리쓸더니 엉뚱한 질문을 던졌다.
“이 사람, 경준이 자넨 정말 장갈 안들 참인가?”
“예!? 아바이두…… 나같은 사내한테 어떤 여자가……”
경준이는 말끝을 흐리며 한 손으로 머리를 썩썩 긁었다.
제5장 삽자루연분
1
대서를 넘긴 여름은 성숙될 대로 성숙되어 검푸르고도 풍만한 몸체를 버둥거리고 있었다. 천만년 묵은 잡목들로 꽉 찬 온 산골 안은 이제 오래지 않아 울긋불긋 아름답게 단장될 단풍천지를 꿈꾸고 있는 듯싶었다.
허길섭이와 오경준은 일터로 향했다. 그들은 강기슭 오솔길로 저쪽 구릉지 밑 달구지 길도 버리고 강과 구릉지 사이에 널찍이 펼쳐져 있는 들판. 그 들판에서 키 넘는 풀숲을 이리저리 헤가르면서 강 위쪽 켠 큰 보를 막기 시작한 곳으로 걷고 있었다. 아직은 무더운 여름 기운이 지긋지긋하지만 가끔 슬렁대는 바람 속에는 초가을의 서늘한 숨결이 숨어있음이 완연히 느껴진다.
“경준이, 생각 나?”
“뭐 말이오?”
“바로 작년 이때쯤일 것이야. 길현이랑 우리 셋이 이 강변 양쪽 버덕 돌아보았던 것 말이야.”
그때 셋이 고기잡이로 나왔던 김에 강 양쪽 넓은 버덕을 돌아보았었다. 그들은 키 넘는 풀숲을 헤쳐대며 이처럼 기름진 땅이 묵어 자빠져 있으니 아깝단 말을 주고받으며 걸었는데 길현이가 주춤 걸음을 멈추고 뭔가 생각에 잠기더니 이런 말을 했다.
“길섭 형, 우리 겨레가 이곳에서 한 해 두 해 살다말 거 아닐 것 같은데…… 아무 때건 이 기름진 풀밭을 논벌로 만들 잡도리가 있어야 할 것 같수다 그려.”
길섭이는 맘속으로 길현의 말을 되새겨보는 듯 잠시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그 사람 생각이 옳은 것 같아. 이 산골 안에 우리 겨레가 점점 늘어날 것 같구…… 우린 이곳에서 어쩌면 대를 이어 살아갈 각오가 있어야 한다구 그 사람이 말했지?…… 전번 날 범식이 아버지가 하는 말이 지금 유하에 있는 친척과 고향사람 몇 집이 올해 아니면 내년엔 이리로 이사 올 게라나. 그러니 검은 골짝 들판만 가지고는 어림도 없지.”
“그러니 우리가 시작하려는 일이 길현 형 생각과 같다는 거군요.”
“그 사람이 우리보단 훨씬 멀리 내다보는 건 사실이야…… 경준이, 강 양켠 버덕판을 모두 논판으로 일군다면 60상 문제없지?”
“60상이라니요? 이쪽 켠 버덕만 해도 60상 넘을 겝니다. 먼저 이쪽 켠만 일구지요. 저쪽 켠은 후에 보구요.”
“그래 그것도 비슷해, 60상이라, 검은 골짝 들판이 20상, 합치면 80상, 두 마을 합해서 30호, 한 호에 평균 두 상 반이 넘는군. 게다가 밭도 있지, 내년부턴 대농사군…… 새로 일구는 60상은 신풀이니깐 첫 한두 해는 종자만 뿌려 넣으면 되는 판이지……”
길섭이는 너부죽한 얼굴에 웃음을 담으면서 경준이를 건너다보았다.
“왜 웃어요? 벌써부터 맘이 아주 흐뭇해져서요?”
“왜 흐뭇하지 않겠나? 자네 일만 생각해도 기쁜데.”
“내 일이라니요?”
“그래 자넨 한생 곁방살이 홀애비로 살겠나? 내년 대농사가 잘된 후엔……”
“난 또 뭐라구요. 형, 걱정 마오. 홀몸이니 홀가분한 게 좋기만 하다오. 난 여자 생각 털끝 만도 없소.”
맺고 끊듯 하는 경준의 말투다.
“뭐? 뭐라카나?”
길섭이는 걸음을 뚝 멈췄다. 안색이 어지간히 성난 기색이었다. 목소리도 무뚝뚝하고 따지고 들듯 했다.
“정말 살림생각이 없단 말이나? 갓 40고개 넘겼는데? 똑똑히 말해봐. 정말루 영 단념했단 말인가? 남이 걱정해주는 인정도 개뿔 같단 말인가?”
“하, 이 형님, 노염 타기는요? 글쎄 영 단념이라구야 할 수 없지만…… 이 산골에 어디 마땅한 여자 있수?”
할 수 없다는 듯 경준이는 배짱을 누그러뜨리는 어투였다. 그제야 길섭이의 음성도 부드러워졌다.
“그 범식이 누이 어때? 새파란 노처녀나 다름없는데.”
“형은 또 그 말상판대기 과부말이군요. 뭐 내가 술 좋아한다구 싫다 했다면서유?”
범식이 누이 순화는 유하에 오기 전 시집갔었는데 그 남편이란 건달뱅이는 왜놈 앞잡이 순사 나부랑이질로 들어간 후 원래 눈독들이던 잘 사는 집의 생김새 반반한 처녀와 죽자 살자 하더니 그만 순화를 차버렸다. 그래서 순화는 친정집에 붙어살고 있었다. 순화는 얼굴이 말상처럼 길쭉한데 곱지 못했다. 또 듣는 말에 의하면 그 여자 할아버진 술 귀신이란 별명을 달고 있었는데 한 번은 앉은 자리에서 술을 네 사발이나 마시고 뜨끈뜨끈한 구들에 자빠져 잤단다. 그러다 밤중에 입에 거품을 게질게질 물더니 가슴이 터졌는지 막혔는지 그 길로 죽었단다. 그래서 순화는 술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질색이었다.
“싫소. 나 한 번 싫다 한 과부한테 또 말 걸어요? 그만 둬요.”
“그럼 어쩐다?”
“어쩔 거 있수. 말 내지 않으면 그만이지유. 싫다 했던 말상판대기 여자와 살게 된다 해도 그렇지요. 껄꺼름한 게 목구멍이 비틀어 지겠수다.”
실은 경준이는 자기만의 이성관이 있었다. 여자란 우선 곱다든가, 귀엽다든가, 복스럽게 생겼다든가 하는 말을 듣게 생겨 먹어야 하구, 그 다음 여자답게 부드럽고 노곤노곤한 맛이 있어야지. 그렇지 않고 그저 밑구멍만 생각하고 덮쳐든다면 돼지나 개와 다른 게 없지, 어디 사람답게 사는 재미와 멋이 있겠는가?
“이 산골 안에선 더 찾기 어려운데, 어떡한다?……”
길섭이가 말끝을 흐리면서 둘의 대화는 끊어지고 말았다. 둘은 그저 묵묵히 풀숲을 헤치면서 걸을 뿐이었다.
헌데 불시로 경준이가 말을 꺼냈다.
“그 여잔 그냥 그 속셈인지……”
“어느 여자?”
“죽선이란 여자 말이우, 남편이 희생된 지 몇 년 잘 된다지유? 만약 길현 형을 기다리는 앞길이 막혀 버리면은요? 열사미망인 절개를 끝까지 지킨다는 봉건통여자야 아니겠지유?”
“엉?!”
길섭이는 흠칫 놀랐다. 그리고 한식경이나 얼떠름해져 경준일 쳐다보았다.
“아니, 자네도 그 여잘 생각하고 있나? 응? 그건 안 돼!”
“하, 왜 이러시유? 나도 혁진 형 일이 답답해서 하는 말입니다.”
“글쎄, 그렇겠지, 아무렴 자네가 혁진이 맘에 두고 있는 여잘…… 자네도 알고 있을 거야. 혁진은 이곳으로 오기 전부터 그 여잘 맘에 두고 극진히 보살펴주고 있다는 거야.”
“그 사정도 알고 있수다. 그렇지만 이런 일이사 막 헝클어진 실 뭉치 같아서 언제 술술 풀리겠는지 누가 알겠소…… 이런 말은 그만둡시다.”
둘은 사람들의 일터 근처에 이르렀다. 일을 시작한 지 사흘 되는데 벌써 큼직큼직한 나뭇단 무지가 자그마한 산같이 무져 있었고 그 옆에는 생나무 통을 밑둥 채 잘라 끌어다 무져 놓은 것도 나뭇단 무지만큼 수북했다. 하긴 천만년 묵은 수림 골안이라 근처에서도 얼마든지 찍을 수 있는 나무천지였다.
재건 노인네 집 술좌석 뒤에 길섭이, 경준이, 혁진이, 재건 노인…… 그 외 몇몇 노농들이 상의한 끝에 얼미허강에 큰 보를 막기로 했었다. 보 막기가 성사되면 넓은 풀판이 옥토로 변하는 것이다.
우선 나무와 돌을 준비하는 것인데 잠시는 움막집 마을에서 나무를 찍어 모으는 것과 보뚝 위로부터 들판으로 물을 잡아가는 큰 물도랑을 파는 일을 맡았고 얼미허 마을에서는 마을 동북쪽 돌산의 돌을 까고 모으는 것과 겨울에 소발구, 손발구로 그 돌을 실어오는 것을 갈라 맡았었다. 지금 진척을 봐서는 볏가을 시작 전에 필요한 나무를 찍는 것이나 돌을 모으는 것은 문제될 것이 없었다.
길섭이와 경준이는 나무무지 옆에 서서 사방을 휘 둘러보았다.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저쪽 수림 속에서 나무를 찍는 도끼질 소리만 들려왔다. 둘은 도끼소리 나는 곳으로 걸음을 뗐다. 몇 걸음 떼지 않았을 때 수림 속에서 방금 찍어 넘긴 통나무를 끌고 나오느라 바둥대는 사람들이 보였다. 셋이였다. 그 중 하나는 아이 같았다. 재건 노인, 죽선이, 성필이었다. 길섭이와 경준이는 급급히 달려갔다. 둘은 아무 말 없이 달라붙어 함께 통나무를 끌었다. 듬직하게 큰 통나무는 무성한 아지 그대로기 때문에 끌기가 여간만 힘겹지 않았다.
“아바이, 이렇게 큰 생나무를 아지도 치지 않고 어떻게 셋이서 끌어온다고 달려드는 거요?”
통나무를 강 옆에 끌어 내왔을 때 길섭이가 재건 노인에게 나무람조로 하는 말이었다.
“글쎄 말이네, 이따가 일꾼들이 오면 끌어내게 할 테니 일단 찍어만 놓으면 된다고 했지만 이 사람이 아이와 같이 끈다고 빠득대는 통에……”
재건 노인은 민망스런 안색이었다.
“수고하셨어요. 우리끼린 끌어오지 못 할 뻔 했어요.”
죽선이가 머리에 썼던 수건을 풀어 얼굴의 땀방울을 훔치며 인사했다. 경준이는 죽선이를 일별했다. 순간적이지만 재빠르게 민감한 눈길로 빗질했다. 더운 날에 힘겨운 노동 때문인지 동실하고 곱살한 얼굴이 발깃해져 이젠 30대 중반을 썩 넘은 여자지만 한창 때처럼 싱싱한 기운을 내뿜고 있었다. 감장 치마꼬리를 휘둘러 허리에 질끈 동여맨 새끼 끈에 꼭 끼고 헝겊으로 발목으로부터 무릎께까지 각반처럼 꽁꽁 감았다. 그 얼굴이나 몸가짐 전체가 왜인지 경준의 눈에는 더없이 참스럽고 단단하고 아담하게 보였다.
죽선이도 살짝 곁눈질로 경준이를 건너다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머릿속에서는 이처럼 텁텁하고 소탈스레 생긴 남자가 술좌석에선 그렇게도 좌중의 맘을 휘여 잡는 목소리로 사람을 울게까지 하는 재주를 갖고 있었던가 하는 생각을 굴렸다. 두 사람의 순간적인 눈길에 깃든 눈치를 재건 노인이나 길섭이가 알 턱이 없었다.
“오늘 다른 일꾼들은 쉬는가요? 나무 찍는 게 몇 안 되는 것 같군요.”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살피던 길섭이가 던진 말이었다.
“다 나왔네. 성필이까지 나왔는데. 이 주위 수림은 버드나무, 느릅나무, 백양나무뿐이네. 보 막는 데는 참나무가 좋지. 그래 끌끌한 일꾼들은 저 구릉지 뒤의 참나무를 찍어온다고 그리로 갔네. 끌어오긴 좀 힘들겠지만.”
“그렇군요. 잘 생각했습니다. 근데 아바이, 나무 찍으면서 집재목이 될 만 한 것들은 따로 다듬어 놓겠끔 타일렀겠지요? 아무 때건 그 마을은 이사해야겠으니깐요.”
“타일렀네, 걱정 말게. 그 쪽 돌산일은 어떤가? 순조로운가?”
“이자 그쪽에도 가봤지요. 그 산엔 큼직큼직한 돌 천지입니다. 벌써 산처럼 무져졌더군요.”
“그놈 돌을 다 운반해 오자면 큰 힘 들어야 할 텐데……”
재건 노인이 근심 어린 말을 꺼냈을 때 경준이가 말참견해왔다.
“아바이, 걱정할 것 없어요. 눈이 내리고 땅이 얼기 시작만 하면 소발구, 손발구 있잖습니까, 여기까지 삼, 4리쯤 되니까 하루에 네댓 번씩은 문제없지요. 정 힘들면 중국 사람 말발구나 마차를 삯 내지요. 쌀 몇 섬만 밀어주면 좋다허구 달려들 건데요.”
“이 사람이 벌써 마을에 마차 있는 중국 사람들과 연락했습니다.”
자신만만한 경준의 말을 이어 길섭이가 얼굴에 웃음을 실으며 재건 노인의 근심을 풀어주었다.
“경준인 중국어도 잘 허구 중국 사람과 사귀는 솜씨까지 있으니 이 일에 큰 몫 막는군. 근데 말이네, 이 땅 임자와 연계는 어떻게 된 거나?”
“이 들판도 모두 우리 마을 그 왕지주 땅이지유. 그저께 경준이와 같이 찾아갔지요. 아주 순조롭게 잘 됐습니다. 글쎄 경준이가 타곳 개간정황을 실례로 지주를 설복했답니다. 타곳에선 황무지를 옥토로 신풀이 하는 첫 두세 해는 공짜라고 그럴 듯이 설복했지요. 그래 결국 우리는 공짜고 두 번째 해에는 소출의 10에 1을 주게 하고 세 번째 해에는 10에 2, 네 번째 해부턴 10에 3을 주게 했지요.”
“잘 됐군, 썩 잘 됐네. 경준인 우리 두 마을의 보배네.”
“하, 아바이. 제발 그렇게 허수아비 도깨빌 태우지 마시우. 그러다간 제가 쿵 곤두박질합니다.”
재건 노인의 칭찬에 경준이는 사람 좋은 농담을 해댔다. 옆에서 세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죽선이는 경탄 어린 눈동자로 경준이를 건너다보았다. 마치 ‘그 사람, 정말 얼핏 보기엔 어리숭해보이지만 남다른 재간둥이구나’ 하는 눈길이었다.
그때 수림 속으로부터 나무 찍던 여성일꾼들이 강기슭에 나왔다. 참나무 찍으러 갔던 일꾼들도 구릉지 오솔길로 내려오고 있었다. 련분이 또래 몇도 그 속에 끼어 있었다. 저기 돌산 쪽에서도 얼미허마을 일꾼들이 여럿이 오는 것이 보였다. 점심때가 된 것이다. 일꾼들은 재건 노인, 길섭이, 경준이에게로 슬금슬금 모여왔다. 혁진은 맨 마지막으로 구릉지에서 내려왔다. 얼굴마다 진땀을 문질러댔기에 거밋하고 불깃한 낯색들이었다.
“그 쪽에 참나무 많던가?”
가까이 다가온 혁진한테 재건 노인이 다시 물었다.
“참나문 얼마든지 있어유. 전부 기둥감이지유. 이자 대강 구구해보니깐 오늘 반나절 찍어 무진 게 백오십 대는 넘어유. 사흘이면 천 대는 문제없이 찍겠수다. 끌어오는 일만 아니문 전부 참나무로 하면 좋겠구만……”
“이천 대만 찍으면 넉근해. 막을 곳 넓이 열 발 가량이구 물깊이는 배꼽도 안 치는데. 여기 근처에서 찍은 통나무와 나뭇단들을 섞어 해도 괜찮아.”
길섭의 말이었다. 그들은 나무 찍던 이야기며 통나무를 끌던 이야기며 돌산이야기며를 법석 고아대며 주고받다가 보 막을 말들로 번져갔다. 어떻게 막고 어느 때 막는 게 좋겠는가 하는 의논으로 넘어갔다. 얻어 들은 이야기, 막는 걸 본 이야기들로 고아댔다. 그러는 중 한 가지만 일치했다. 먼저 통나무를 한 벌 깔고 그 위에 큼직한 돌들로 한 번 짓누르고 또 나무를 한 벌 깔고 다시 돌을 한 벌 짓누르고…… 그렇게 거듭거듭 한다는 것이다. 나무아지로 된 나뭇단은 통나무를 깔 때 사이사이에 끼워 넣으면 되고……
떠들어대던 중 언제 하는 것이 가장 좋은가 하는 것이 의논의 중심으로 되었다.
“늦가을, 강물이 젤 적을 때 해야 해!”
“나무는 지금부터 끌어온다 해도 돌 없는데 어떻게 해?”
“어깨로 하나씩 메오더라도 강물이 젤 적을 때 해야 해!”
“밸 빠진 소리 작작 해. 어깨로 그 많은 돌을 메온다구? 어쨌든 겨울에 발구로 실어와야지.”
“그러다간 내년 농산 보나마나 나무아미타불이야.”
“초봄에 일찍 시작하문 왜 안 돼?”
“초봄에 뼈 빠지는 찬물에서? 그럴 게면 아예 얼음을 까제끼면서 할게지 뭐. 돌을 실어오는 족족 말이다.”
“그것도 되지. 술 한 사발씩만 들이켜 봐. 얼얼한 김에 살이 쭉쭉 째져 시뻘건 피를 봐도 너털거리면서두 할 수 있는 거야.”
가을이니, 겨울이니, 초봄이니 법석 떠들어댔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올라간다는 격으로 의견합치는 묘망하기만 했다.
“야, 인마. 넌 입이 얼어붙었나? 이 더운 여름에. 넌 어느 쪽인가? 똑똑하구 총명하다는 대갈통은 뭐 하는 건가?” 언젠가 “너 련분일 좋아하지” 하고 충림일 놀려주던 창국이가 제 옆에 앉은 충림의 옆구리를 쿡 박아주며 나직이 말했다.
“아새끼, 아프구나. 그렇게 힘줘 박아줄게 뭐야? 넌 그저 똥힘만 쓴다니까. 근데 내 궁릴 말하문 너 찬성하겠나?”
“말해봐야 알지. 비슷하문 찬성하지.”
“걷어치워. 모두 제사 재갈량이라 떠드는 판국인데 좀 더 들어보자구나.”
“이 새끼, 머리 쓰는 게 괜찮다고 생각해준 게 개판이구나. 남들이 다 지어놓은 밥이나 먹자는 수작이구나?”
“개소리 작작 해라!”
두 젊은이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지자 숱한 눈길들이 두 젊은이한테로 쏠렸다. 그러건 말건 충림이는 제 궁리를 꺼냈다.
“난 겨울에 물이 꽝꽝 얼어붙은 후에 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다. 그렇다고 얼음을 까부시며 하는 것이 아니라 얼음 위에다 둑을 쌓는다는 것이다. 발도 적시지 않고 얼마나 좋겠느냐?”
“개소리 말아, 얼음 위에 쌓았다가 봄에 얼음이 녹아버린 다음 떠내려가는 나무무지를 구경하자는 수작이구나!”
“이 새끼야, 넌 호박통 같은 대갈통이냐? 그래 큼직큼직한 돌덩이가 물에 떠내려간단 말인가? 큼직한 돌들은 움쩍도 않는데 나무통만 쑥쑥 빠져 떠내려 갈 수 있겠나? 세찬 물살도 아니고 저렇게 맥없이 흐르는 물인데.”
창국이가 말문이 막혀 아무 응대 못하고 멍한 눈으로 자기 얼굴만 쳐다보고 있자 충림이는 계속 말을 이었다.
“봄에 얼음이 녹아버리는 대로 위에 쌓은 돌과 통나무 무지는 그대로 물밑바닥에 물앉을 게 아닌가? 정 흘러 내려 갈까봐 근심된다면 젤 밑에 깐 통나무 아니면 두 번째로 깐 통나무 머리에 꼿꼿하고 큼직한 나무통을 가로 눕힌단 말이다. 가로 눕힌 나무에다가 통나무 대갈통들을 얽어 매놓거든. 그런 후 가로 눕힌 통나무에 밧줄들을 동여매고 그 밧줄들을 강 양옆의 나무 등걸이에 붙잡아 매놓는 거다. 나무통들과 돌들이 서로 얽혔으니 어디로 떠내려간단 말인가? 어때? 이 새끼야. 안 될 것 같애?”
창국인 얼떠름한 눈빛으로 충림이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때 다른 사람들이 함성을 질렀다.
“야! 충림아 그게 비슷하다!”
“과연 우리 충림이구나!”
“정말 충림아, 넌 물 속에 손발 안 적시구도 척척 해낼 수 있는 꾀를 생각해 냈구나!”
숱한 입들이 충림이를 칭찬하며 떠들어내는 중에 련분이는 엄마 옆에 두 무릎을 세우고 앉아 남몰래 얼굴이 발깃해지며 살그머니 머리를 숙이고 가슴 옆으로 내리 드리워진 치렁한 머리태를 매만져댔다. 그러는 딸의 거동을 유심히 살펴보는 죽선이는 오만가지 생각에 휩싸였다. 웬일인지 딸한테서 지난 시절의 자신의 그림자가 보였고 그 그림자는 아프게 가슴을 후벼대기만 했다.
그날 오후 죽선이는 일은 한다지만 맘은 하냥 안정되지 않았다. 딸애 일을 생각할수록 머릿속엔 자꾸만 처녀 때 시절이 떠오르면서 슬퍼지기도 하고 애달파지기도 하고 불안해지기도 했다.
그래 그런 심정을 짓뭉개버릴 양으로 도끼자루를 거머쥔 손아귀에 더 바싹 힘주어 나무 밑둥을 꽝꽝 내리찍었다. 부르튼 손바닥의 물집이 터져 뭉개져도 쓰리다거나 아픈 줄을 몰랐다. 얼굴의 땀방울이 뚝뚝 떨어져도 등골에 흐르는 땀에 적삼이 후줄근히 젖어 등에 달라붙어도 아랑곳하지 않고 힘껏 도끼로 생나무 밑둥만 꽝꽝 내리찍고 또 찍었다. 헌데 찍은 자리를 거듭 찍어야 할 것인데 어쨌다고 오늘은 도끼날이 엇나가기만 한다.
저녁 밥상 앞에서 숟가락을 움직이다 말고 죽선이는 입맛 좋게 먹어대는 딸의 얼굴을 멍하니 건너다보았다.
“엄마, 왜 안 먹어?”“숨 좀 돌렸다 먹을란다.”
“난 먹을래, 배고파 죽겠어.”
게걸스레 먹어대는 딸의 모양새를 건너다보며 죽선이는 며칠 전 일을 떠올렸다. 그날 점심 결에 뜻밖에도 옥녀 엄마가 찾아왔었다. 사연인즉 왈가닥 노친네가 죽선이를 몇 번 본 일이 있는 옥녀 엄마더러 련분이를 며느리로 중매 서달라는 부탁이 있어서 련분이가 입에 오르게 됐고 왈가댁은 영감한테서 련분이가 여차여차한 처녀란 것을 알게 되었다.
죽선이는 길섭이네 사정을 들은 적이 있어 그만하면 괜찮은 집안이라 생각되었고 또 아무 때건 길현이가 불쑥 나타나 자기가 문득 떠나게 될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있어 하루 바삐 딸의 혼사를 정하고 싶은 조급한 맘도 있었다. 그래서 저녁에 딸애에게 길섭이네 가정 상황과 옥녀 엄마가 왔다 간 사연을 넌지시 비추어 보았다. 그랬더니 련분인 엄마 말 몇 마디 듣기도 전에 발딱 앵돌아져 버렸다.
“나 시집 안 가!”
“왜 시집 안 가? 딸애 크면 시집가는 건 하늘이 정한 거야! 다 큰 계집애가 시집 안 간다구 입질하는 거야? 그 따위 소리 작작 해!”
“내 시집 가문 엄마 혼자 살아? 난 그냥 엄마와 같이 살아.”
“난 아무 때건 떠나갈 몸이야. 네 갈 곳을 정해놓지 않구 어떻게 떠나가나? 내가 훌쩍 떠나가면 넌 어떡해? 정 선생님이 다시 왔다 갈 때면 난 따라간다. 너 아버지 싸우던 곳으로 말이다.”
“엄만 내 걱정 마, 엄마가 싸움터로 가든 딴 델 살림 가든 내 걱정 마.”
“딴 델 살림 가든”하는 딸의 말투에 죽선이는 기가 딱 찼다. 요 딸년이 이렇게까지 엄마 맘을 꼬집어주는 건가 하는 괘씸한 생각이 불쑥 일었다.
가까스로 맘을 죽인 죽선이는 얼떠름한 눈길로 오목오목 밥 먹어대는 딸의 양볼만 쳐다보았다. 슬그머니 충림일 말해볼까 하는 맘이 움직였다. 그런 말을 꺼내기만 하면 요놈 계집애가 어김없이 “엄마가 정해놓은 자린데 별 수 있나? 고스란히 말 들어 줘야지 뭐.” 하고 더없는 효녀다운 입낼 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있을 라니 시집가기 전의 자신의 행실이 떠올랐다.
죽선이는 열일곱 살에 시집왔다. 시집오기 전에 중매쟁이가 부지런히 죽선이네 집에 드나들었었다. 그런 눈치를 알고 죽선이는 중매쟁이가 가버린 뒤면 엄마에게 시집 안 간다고 톡톡 내뱉었고 가끔은 울며불며 발버둥 치며 기를 썼다. 그래 딸이 병날까봐 엄마는 중매쟁이더러 당분간 혼사 말을 꺼내지 않게 하였다. 실은 그때 죽선이는 시집가는 게 싫거나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었다. 짜개바지 때부터 한 마을에서 깨진 사발조각으로 신랑각시 놀음을 하고 커가면서 똑똑하다고 소문난 학균이가 맘에 자리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자기네 집에 중매쟁이 드나들 무렵 길가에서 마주치게 되면 학균이가 먼 산을 보며 지나가는 것 같았지만 얼핏 느껴지는 그 눈길은 “죽선아, 너 딴 델 시집가면 안 돼! 네가 딴 데로 시집가는 날엔 난 그날부터 말라죽는 신세다!”라고 다짐받는 것 같았다. 죽선이도 “너도 다른 처녀한테 장가가면 난 우물에 빠져 죽을 테다!”라고 애타는 맘을 귀띔해주고 싶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어 그저 살그머니 머리 숙이고 머리태를 만지작거리며 학균이의 옆을 지나칠 뿐이었다.
그러던 중 하늘이 살펴봤는지 이 외에도 하루는 옆집 할머니가 죽선이 엄마에게 학균이의 부모가 죽선이를 며느리 감으로 욕심낸다는 말을 전해왔었다. 다 큰 계집애를 하루 빨리 시집보내야만 발편잠을 잘 수 있다는 한결같은 부모의 맘이었다. 지나가는 말처럼 죽선이 엄마는 딸애한테 옆집 할머니 말을 비쳤었다. 그 말에 죽선이는 좋다 굳다 말 없이 “엄마, 아버지 정해주면 별 수 있나 뭐.”라고 대꾸했던 것이다. 그 말본새는 아주 순순했었다. 그 통에 죽선이 엄마는 호- 하고 한시름 놓은 듯 숨을 활 내쉬었다……
그랬던 남편이었는데 지금 딸애 련분이가 또 제 애비처럼 훌쩍 집을 떠나 총창 메고 험산준령을 뛰어 다니는 그 길로 가겠다는 충림이 때문에 머리태를 매만지고 있으니 이 일을 어쩌면 좋은가?!
2
이날 일찍 일손을 거두고 집에 들어선 혁진이는 저녁 숟가락을 놓자마자 굳어진 습관처럼 자기 움막집 앞에 가로놓인 뭉툭한 나무토막에 엉덩이를 붙이고 걸터앉았다. 그의 얼굴엔 매양 수심이 흐르고 있었다.
서산마루에 숨어버린 태양은 서편 하늘에 온통 금빛을 뿜고 있었다. 그 금빛을 한껏 머금은 저쪽 구름떼들은 마치 활짝 펼쳐진 함박꽃송이들처럼 아름다웠다. 게다가 산골 안을 병풍처럼 둘러싼 높고 낮은 산들은 울긋불긋 단풍이 물들어 온 산골 안은 그야말로 아름다운 꽃밭 속에 파묻힌 듯싶었다.
하지만 혁진이는 그 아름다운 풍경에는 영 무감각한 듯 종이말이 담배만 뻑뻑 빨아댔다. 후- 뿜겨내는 담배연기는 그의 눈앞에서 가물거리더니 어디론가 가뭇없이 사라져 버렸다.
꼬박 일년이 되어온다. 열한 집 식구의 목숨을 살려야 한다고 산언덕을 파서 움굴을 만들고 생나무를 찍어 움집을 짓고 겨울 먹이를 장만한다고 돌피, 풀씨, 산열매, 개구리, 물고기를 줍고 따고 잡느라 온 마을이 이를 악물고 손발이 닳고 터지면서도 생존욕에 버둥댔었다. 그때 정경을 더듬노라니 자연히 아들을 데리고 죽선이네 집을 짓던 일이 또 떠올랐다. 그때 남의 집을 짓는 것이 아니라 자기 집, 아니 자기 집보다도 갑절 소중한 사람의 집을 짓는 심정이었었다.
그랬는데…… 혁진의 눈길은 자신도 의식할 새 없이 죽선이네 움막집 쪽으로 던져졌다. 그는 또 한 번 깊은 한숨을 몰아쉬었다. 싫은 사람 피하듯 자기를 회피하는 죽선이의 냉정한 모습이 가슴 서늘하게 안겨왔던 것이다. 고마운 사람, 한없이 고맙기만 하던 정길현이었지만 어쩐지 그가 죽선이의 맘을 빼앗아간 것만 같았다. 떠나간 지 반 년도 넘었지만 감감무소식인 정길현, 언제 돌아올 지도 모르는 정길현, 영영 못 돌아올 지도 모르는 그를 학수고대 기다리는 죽선이……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가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 쳐도 지금 같아서는 자기는 죽선이와 인연이 없는 듯한 느낌, 처연하기만 했다. 그저 죽선이가 남편의 마지막 소식을 알기 전처럼 서로 돕고 살펴주는 그런 가까운 이웃이 되어 살아가기만 해도 한결 속이 거뿐하고 맘이 가벼워질 것 같았다. 그렇게 되지 못하니 영영 그렇게 되지 못할까봐 심정이 이처럼 끝없이 서글퍼지고 두려움까지 안겨왔다. 혁진이는 또 한 번 깊은 숨을 몰아쉬었다. 그 숨길을 따라 느닷없이 동생 혁달이의 얼굴이 떠올랐다. 동생은 지금 어디에 있는지? 이 세상에 살아있기나 하는지? 만약 불쌍한 두 자식만 매달려있지 않았다면 나도 그때 혁달이와 함께 집을 뛰쳐나갔으련만……
혁진이는 담배꽁초를 내동댕이치고 붉게붉게 타 번지는 서쪽 켠 하늘을 멍히 쳐다보다가 머리를 푹 떨어트렸다. 그의 입에서는 허파가 그대로 뒤집어지는 듯한 한숨이 몰려 나왔다.
“왜 이러구 앉았노? 쭉지 꺾어진 수탉처럼 말이네.”
“아바이, 식사하셨수?”
혁진이는 움찔 몸을 일으켰다.
“난 먹었네, 자넨 먹었나?”
“금방 먹었어유.”
재건 노인은 혁진이 곁의 나무토막에 걸터앉았다. 담배대통에 부스럼담배를 다져 넣으면서 혁진이를 건너다보았다.
“이 사람, 큰 물도랑을 파는 일 아직두 한달은 더 걸려야겠지?”“글쎄유, 그쯤 걸리겠지유.”
혁진이의 대답은 심드렁했다. 재건 노인은 혁진의 입에서 그렇게 남의 일같이 맥없이 흘러나오는 말은 처음 들었다. 재건 노인은 가슴에 찬 서리가 내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 뒷말을 더 꺼내지 않고 천천히 대통에 불을 달고 뻑뻑 빨아대는데 그의 눈자위에는 깊은 생각을 굴리는 그윽한 빛이 고여 있었다.
“사람이 한 세상 살아가는 게 고달프지. 마치 급하게 흘러내리는 넓은 강물을 헤엄쳐 건너는 것과 같단 말일세. 곧바루 헤엄쳐 넘어갈라 해두 그 놈 급격히 흐르는 물결 때문에 자꾸만 아래쪽으로 밀려만 간다네…… 한 생에 뜻대로 되는 일이란 없는 것이지.”
여기서 말을 멈춘 노인은 여전히 담배대만 뻑뻑 빨았다. 혁진이도 묵묵히 단풍 든 먼 산만 바라보았다.
“이 사람아, 내 늙어두 자네 맘이 짐작 가네. 전번 날 저녁에도 이 말 저 말 끝에 내 생각을 비춰봤지만 련분이 에미는 삼년이구 십년이구 길현이 그 사람을 기다린다고 딱 잡아떼는 옹한 속심이었네.”
“아바이, 저도 짐작하구 있어유. 인젠 연분 없는 일이라고 단념했수다. 걱정 마시유. 제 신세팔자가 그렇구…… 지금 그저 동생 혁달이가 그리운 생각뿐입니다.” 그때 두 사람이 그들에게 오고 있었다. 다가오는 두 사람의 뒤쪽 켠 하늘에서는 노을이 붉게붉게 타 번지고 있었다.
길섭이와 경준이었다.
“어찌된 일이우? 이렇게 저녁걸음을 다 하는 거우?”
혁진이가 먼저 알아보고 훌쩍 일어났다. 뒤따라 재건 노인도 몸을 일으켰다.
“저녁 드셨어요?”
길섭이와 경준이는 공손히 재건 노인에게 인사했다.
“먹었네. 근데 자네들이 어인 연곤가? 곤하겠는데 일찍 쉬지 않고?”
“앉으시유. 아바이, 급히 상의살 일이 있어 건너왔습니다.”
길섭이는 맞은 켠 통나무 토막에 앉았다. 경준이도 그 곁에 엉덩이를 붙였다.
“급히 상의할 일이라니?”
“아바이, 우리 마을에 대여섯 살부터 열서너 살 되는 아이들이 20명은 넘지유, 또 이 마을에두 거의 열은 된다더군요. 이 아이들을 어떡합니까?”
길섭이는 길현이가 있을 때 여러 번 꺼낸 문제를 이야기했다.
길현이는 몇 번이나 아이들을 눈 뜬 소경으로 내버려둘 수 없는 노릇이라고 타국땅에 와서라도 입에 밥알이 들어가고 몸에 입을 것을 걸치게 되면 아이들한테 글을 배워줘야 한다고, 아이들은 민족의 미래고 무식한 민족은 언제나 남한테 천대 받게 마련이라고. 왜적을 물리친 후 새 나라를 건설할 때 지금 아이들이 기둥이라고, 어떻게 해서든 서당을 꾸려야 한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군 했었다.
한데 마을에는 글을 배워줄 만 한 사람이 없었다. 길현이 자신이 좀 배워줄 수는 있지만 자기는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을 어깨에 걸머지고 있고 또 어느 때건 그것도 오래지 앉아 훌쩍 떠나야 할 몸이라고 하면서 한숨을 쉬었다.
“그래 경준이와 상의한 끝에 아바일 찾아온 겁니다.”
길섭의 말을 듣는 재건 노인의 얼굴에는 엄숙한 빛이 흘렀다.
“매우 기특하구 중대한 문제네, 길현이 그 사람, 참 훌륭하네. 우리 모두가 그 사람같이 먼 앞날을 내다보는 견식이 있으면서…… 그래, 그래 우리 겨레 모두 그런 맘이 있지, 하두 억압에 눌리고 빈궁에 시달려 그렇지. 우리 겨레들이 자식한테 글 배워줘야 한다는 맘이야 오죽 간절한가? 보게, 자네들도 이 일을 잊지 않고 서두르지 않는가! 뭐 나하구 상의할 게 있나? 사람만 있으면 하루 바삐 서당을 꾸려야지, 안 그래? 근데 지금 그 배워줄 사람이 왔는가? 어디서 왔는가?”
재건 노인은 성급히 물어댔다.
“지금 온 게 아이구요. 벌써 왔지요.”
경준이가 대답했다.
“그래? 그럼 얼른 서당을 꾸려야지. 이런 일을 상의한다고 돌아다닐 거 아니네. 근데 그게 누군가?”
재건 노인이 다잡아 묻자 경준이가 씨물 웃었다.
“다른 사람이 아니구요. 그 사람이 바로 아바이입니다!”
“내가?!”
재건 노인은 놀라 몸을 움씰했다.
“왜 놀라십니까? 아바이 학문이면 왜요? 안 됩니까?”
“내가 뭘 배워줄 수 있는가?”
“천자문만 배워줘도 어딥니까? 그리고 또 우리 배달민족 역사도 되지 않습니까?”
경준이가 바투 들이댔다. 엄숙하던 재건 노인의 얼굴엔 깊은 생각의 그림자가 흘렀다. 길섭의 얼굴엔 가벼운 웃음기가 그려졌고 혁진이는 경탄과 기쁨 어린 얼굴로 재건 노인과 경준이를 번갈아 보았다.(콘텐츠 조정 이유로 본 작품에 관한 연재를 2018년 6기를 끝으로 중단할 것을 알려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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