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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본격 장마가 시작되는가 봅니다. 우리 도반 더욱 건강하시기를 빕니다.
이 졸문은 2006년 이른 봄 막 지금의 서울숲이 개장하고 일년도 안된 지경에
서울시에서 시민에게 알리는 작업의 과정에 저가 그 프로그램을 몇번 진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시청홈피에 올린 글입니다. 이번 한강공부하면서 그 때 생각이 절로나서 뒤저본 것을 여기
다시 올려봅니다. 미흡한점 많으나. 이 장마통에 행여 소일거리라도 될가하여 다시 올리오니
해량하시기 바랍니다.
* 봄날을 걷다.
--서울숲에서 청계천까지--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지는 않지만 미니 스카트가 온 거리를 휘젓는 철이다.
지난 늦가을 이후 소지도감을 들고 이따금 들과 산을 드나들며 벗은 나무들을 만났지만
실로 오래간 만에 숲이야기을 하게 되어서 마음이 들뜬다,
그도 “서울숲에서 청계천까지”란 현판을 달고--
뚝섬 서울숲에는 약속된 시각보다 30분이 이른 시간이지만 예약한 도반들이 모여든다.
노량진에서 오신 교감을 정년하고 오신 내외분. 상계동에서 동무하고 맘먹고 봄나드리 왔다는 웃음 예뿐 부인들,
잠실에서 오신 젊은 주부. 칠순을 넘기셨다는 62.5 참전용사 어르신 두 분.
그리고 도남동 산다는 미스 모모. 그리고 또 누구시더라.
자기가 진짜 서울 토박이라고 강조하던 장년 남자 분 등등,
이렇게 열다섯 명이 한 무더기가 되어서 산보. 행보. 탐사 어느 이름이라도 좋을 봄날을 걷는다.
그도 금상첨화로 주변 생태를 보고 느끼면서 걷는다.
1) 뚝섬갈비를 아시나요?
출발은 서울숲, 35만평 넓은 땅에 4가지 구역으로 나누어 무려 42만 여 그루의 나무을 심고
연못과 습지를 만들어 지난해 6월에 개장한 서울의 자존심이 밴 숲이다.
“왕의 남자”라는 영화는 1천만명이상이 봐서 알지만 “왕의 숲”은 아는 이가 많지 않으리라.
서울숲은 원래 “왕의 숲”이었다.
조선 초부터 말기 까지 임금님들의 중요한 레포츠인 사냥터 이였다.
그 때 임금님이 계신 곳임을 알리는 “둑기”라는 용이나 귀신이 그러진 깃발을 꽂아둔 곳이다.
그러나 땅의 한 부분이 낮아 비가 적은 가물 때는 그냥 드나들 수 있었으나
홍수가 저서 강물이 불으면 섬이 되었던 곳이다. 그래서 독기를 꽂아둔 섬, 둑섬 이라 했다.
그러다가 일본 강점기에 이곳에 진짜 둑을 쌓아서 물을 돌리고 땅을 넓힌 섬, 뚝섬이 그 어원이 되었다한다
. 이 자리는 이어서 공용 목장으로, 경마장으로 쓰이고 주위의 넓은 강변의 비옥한 땅은 농토로 변하게 된다.
당시 한양안의 고급관리나 부자양반은 자주 소갈비나 돼지 갈비를 먹었으나
서민은 꿈에도 먹어 볼 수 없는 “남의 살” 즉 육류 이었다.
그저 보통 잘사는 중인들은 무 배추로 담근 김치를 먹었고 하층민이야 그마저도 언감생심 이였다.
무 배추로 담근 김치를 먹고 체면상 이빨을 쑤셨던 것이다.
그 때 한양성내 거의 모든 채소 공급은 이곳 뚝섬에서 생산 공급되었기
때문에 김치의 품위 높은 다른 표현이 곧 “뚝섬갈비”이다.
나는 70년대까지 서울 시중 밥집에서 들은 적이 분명 있다.
일전 신문에 김치가 세계 5대 건강식품에 든다고 기사가 나왔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풍요를 누리는 것이 모두 이 뚝섬갈비 건강식품을
먹고 자라고 일한 덕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6.70년대 군대생활을 한 분들은 김치 한 조각이 어떤 맛이란 것을 말하지 않아도 알리라.
당시 소위 “푸세식” 화장실의 인분은 거름으로 거의 다 이곳 뚝섬 채소밭으로 모여서
무 배추를 생산 했으니 생태적으로 보면 확실한 리싸이크링 한 샘이다.
얼마나 오랫동안 비료로 썼으면 뚝섬 채소밭 염도가 서해안 갯벌과 다르지 않는다는 발표가 나올 정도였으니--
그러나 한때 뚝섬은 낭만의 유원지이기도 했다. 해수욕 못가는 시민은 수영하러,
빨랫감 많은 사람은 세탁하려. 학교에서는 소풍장소로
젊은 남여는 데이트 하려 동대문 앞에서 이곳까지 놓인 소위 기동차라는 열차를 타고 오가기도 했던 곳이다.
그러던 <왕의 숲>이었던 뚝섬갈비의 생산지가 지금은
“시민의 숲”으로 새 단장 하고 서울의 자존심이 되어 시민의 발길을 모으고 있다.
우리는 6.2km 청계천 하류 고산자교를 향하여 출발한다.
이른 봄인지라 조금은 을씨년스럽지만 어느 산골에서 이사 온 새색시인양
산수유가 노란 얼굴을 배시시 내밀고 있으며,
흙으로 된 길을 가르는 계수나무는 부디 올가을 노란단풍이 드는 날,
하트 모양의 잎새에서 나는 솜사탕 냄새를 맡으려 꼭 다시 오라고 눈짓하는 것 같다.
아직은 개장한지 반년도 채 안된 상태이니 몸살이, 그것도 겨울 몸살을 격는 것이 완연하나
앞으로 올 10년 아니 100년 앞을 생각하니 흐뭇하기도 하다.
걸음을 재촉하여 바람의 언덕이 보이는 보행육교에 오라섰다.
강바람이 날카롭게 볼을 스친다. 그러나 싫진 않다.
긴 겨울잠을 깨우는 일침이리라. 언덕 여기저기 꽃사슴이 노닐고
물웅덩이엔 청둥오리 몇 마리가 한가롭게 떠있다.
일주일 전만해도 헤아릴 수 없는 겨울 철새가 보였는데,
중랑천 하구 쪽 건너 보이는 작은 산봉우리는 그 옛날 태조가 매사냥을 하던 곳이라
그 봉오리 이름이 매봉 또는 응봉이라 한다.
전철로 한강을 무수히 넘나들던 나는 그 산의 봄을 인도의 황금궁성 타지마할 같다고 늘 생각해 왔던 적이 있다.
이 산의 봄은 온통 황금으로 덮어씌운 성같이 보인다.
하늘에서 노란 금물을 녹여 왕창 쏟아 부은 것 같은 모습.
황금의 본체는 노란 개나리 이었다.
지금은 이른 때지만 속은 샘치고 한 여흘 후에 꼭 다시 한 번 와보시면 허언이 아니란 것을 확인할 것이다.
어느새 일행은 한강과 중랑천이 만나는 합수지점에 와있다.
이 근처 옛이름이 두무개, 즉 두 물 합수지점. 강 건너 늘어선 건물은 만리장성 성벽 같고
우리를 슬프게 한 성수대교도 그날을 잊지 말라며 입을 앙다물고 있는 듯 서있다,
한나절 봄빛을 받은 강물은 물고기 비늘인 양 은빛을 품으며 빤짝거린다.
강물의 이렇게 아름답다는 것을 예서 처음 느낀다.
저기 강심에 한 무리 새들이 묵도하는 양 조용히 앉아 있다.
마치 그들 앞날 갈 긴 여정의 안녕을 비는 듯 숙연하게 보인다.
아참! 새들을 관찰할 때 손짓을 말랬지. 파수꾼 새가 총 쏘는 줄 알고 경고음을 내면 일제히 비상
, 그 때 많은 에너지가 소모된다고--
2) 살곶이다리(전관교) 그 역사의 다리
한강과 중량천이 만나는 합수부는 물살이 느리고 강폭이 넓어 모래톱도 생겨서 새들이 많이 모여든다.
물가 통나무로 만든 목재방틀에는 이제 날씨가 좋으면 많은 수초를 심어
수질 정화와 물고기들의 산란과 휴식 터가 될 것이지. 용비교 아래 내를 건너는 잠수형 치장된 얕은 다리를 건너간다.
결초보은 고사를 생각하게 하는 수크렁이 익은 보리밭 모양 펼쳐진다.
여기서부터 상류 청계천이 만나는 곳 까지가 철새 보호구역이란다.
왕복하는 좁은 통로에 옷과 장비를 가춘 자전거 타는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수시로 오가기 때문에 걷기가 약간 불안하다.
먹을 것이 많은지 아니면 쉬기가 편한지 모래톱에 원앙이 쇠오리가 보이고
둔덕엔 물억새와 갈대가 묵은 이삭을 봄바람에 날리며 오는 봄을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응봉아래 용산과 청량리을 거처 지금은 덕소까지 오가는 국철 객차가 지나간다.
그 철뚝에는 아카시. 버짐나무. 용버들 등 키 큰 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고
그 아래 넙나물이란 별명이 있는 원추리가 정말 넙쩍한 모양으로 새 순을 밀어올리고 있다.
바로 그 옆 응봉역 올라가는 계단 가까이 이름 불러주기가 좀 민망스러운
“개불알풀”이 앙증맞은 보라 빛 꽃잎을 내밀고 있다. 그냥 스쳐가는 이는 모르리라.
이름이 좀 점잖지 못하여 “봄까치꽃”으로 개명 신고 했다지만 나는 그냥 부르는 것을 좋아한다
. 이 풀의 열매를 본이는 이름이 왜 그런지를 분명 알게 되고 감탄하리라.
맨눈으로 봐도 수캐의 그것 같은 두 쪽이 송송 털까지 붙어있으니 우리 조상님들 관찰력은 알아줘야 한다.
드디어 한양대 앞 “살곶이다리”다. 응봉에 사냥 나오신 태조 이성계가 쏜 화살이
멀리 지금 이 자리에 와서 꽂혔기에 얻어진 이름, 아무래도 영웅 만들기 신화인 듯하다.
또 한 가지 설은 함흥에서 겨우 설득되어 한양으로 돌아오시는 태조를
이곳 다리 앞에서 정중히 맞이하는 태종 이방원..
태조는 형제의 란 등으로 괘씸했던 마음이 다시 울분을 참지 못해 그만
건너편 차일 안에 있는 태종을 보자마자 명사수 솜씨를 발휘해서 겨누어 쏘았으나 차일의 기둥에 살이 꽂혔다.
이일을 운명으로 알고 용서 했는데 그곳이 바로 이 다리라는 설 설, 그래서 살곶이다리(箭串橋)라 했다한다.
이 다리는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오랜 다리이고 송파나루를 건너오는 경상 .충청. 경기 강원등지에서
올라오는 사람과 물산이 통과하는 길목의 역할을 한 다리로
지금 것은 세종 때 건설을 시작하여 성종 때 마무리 한 것이라 한다.
관리상 지금은 반 정도만 남았는데 폭 6m 길이 78m으로 1.2m위 다릿발이 4개가
나란히 서있는 모습은 흡사 천하장사 씨름대회의 이만기장사가 샅바싸움 하는 자세를 하고 있어 튼실해 보인다.
살곶이다리를 반쯤만 건너다 말고 다시 돌아와 상류로 향한다.
중량천이 청계천을 품는 지점이다 이곳 역시 새들이 많이 관찰된다.
그 합수점 위의 땅에 서울시민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그렇게 많이 만들어 내는 하수를 정화하는 종말처리장이다
. 물가 둔턱에는 언양 화악산에서 옮겨온 물억새가 불을 그어데면 화약처럼
금세 타오를 듯 붉은 갈색의 잎을 서석거리고 있다.
청계천 물은 맑았다. 이름 그대로다. 저기 물고기가 쉽게 올라올 수 있도록 사다리도 놔놓았고
그 위에 작은 자연섬 소위 하중도에는 청둥오리 한 쌍이 쉬고 있다.
그 앞 얕은 물속에 어른 손가락 크기의 물고기 떼들이 맑은 물속에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무리지어 잠자는 듯 가만히 있는 것이 보인다.
지나가는 사람마다 쉿 주의를 주며 저것 좀 보라고 낮은 음으로 속삭인다.
청계천이 점점 우리 가슴속으로 밀려오고 있는 듯하다.
양안의 풀밭은 필터 역할을 하여 물을 맑게 하고 징검다리 있는 곳 아래는
거의 다 아크형의 여울보가 작은 포말을 만들며 봄노래를 부른다.
복원된 청계천에는 이런 보가 20여개가 있는데
모두가 생태적으로 용존 산소량을 늘이고 물에 든 나쁜 가스를 날려 보내는 역할을 한다.
3) 고산자교를 향하여
고산자 하면 우리가 역사시간에 배운 저 유명한 대동여지도를 팔도강산 발품을 팔며
뛰어다니며 만든 바로 김정호 선생이 아닌가.
그 분이 정녕 그 다리를 직접 건넜는지는 모르나 우리의 일차 목표점은 그 고산자 교이다.
물살이 휘감기는 바깥쪽 하안에는 돌무덤이 마치 옛성의 치처럼 드믄드문 늘어서있는데
이것 또한 수리 역학적 중요한 시설이다.
물이 강안 흙을 유실시키는 힘을 줄이고 때로는 유속을 줄여서 물고기들의 쉼터나
그 아래편에는 산란장으로 쓰거나 혹은 새들이 한숨 돌리는 쉼터가 되는 곳이다.
물 가운데 커다란 바위돌이 듬성듬성 놓인 것도 같은 이치이다.
사근동과 신답역을 이은 개천 하안에는 여러 가지 생태 조경물이 있다.
콘크리트 벽을 커버하려는 등나무 줄사철 또는 산머루 덩굴을 올렸고
상류로 올라가면 경남 하동에서 보내온 그곳의 명물 매화나무가
이 봄에 한양나들이를 와서 줄지어 남도의 봄소식을 전해주고 있다.
갓 시집온 어린 가지이나 가지마다 꽃망울을 준비 해와서 더욱 고맙고 반가웁다.
연이어서 대나무 고장 담양에서 보내온 큰 키의 대나무가 벽과 키 재기를 하지만
혹독한 한양 바람을 견디느라 누런 잎이 많다.
사과나무, 감나무 등등 청계천변에는 팔도강산을 대표하는 수목이 심겨져서
고향을 떠나 고달픈 서울사리 하는 사람들의 향수도 달래고
서울을 또 하나의 고향으로 만들어 가고 있는 성싶다.
물위를 덮은 나무로 만든 데크 위를 걸으며 물속의 작은 생명도 보고
자연스럽게 생긴 모래톱도 보고 정릉천이 청계로 합하는 정릉천 합수부의 어도를 만나게 된다.
갈수기라서 흰색의 호박돌이 조금은 어수선 하나 물이 제대로 흐르면
저것이 바르게 된 우리의 물고기 사다리라고 한다.
드디어 저기 청계천 24 개의 다리 중에 내가 보기에 가장 예술성이 높은 고산자교 아래 도착했다.
뚝섬 서울숲을 떠나온 지 두 시간이 어느 사이 훌쩍 넘었다.
사람 다리는 조금 무거웠지만 가슴속은 한없이 가벼웠다.
우리 일행은 이렇게 “서울숲에서 청계천까지” 서울의 봄을 가슴속에 담았다.
연전만 해도 그 누가 이렇게 서울을 가슴깊이 걸으며 맞을 줄 알았으랴.
서울 사는 보람을 다시 한 번 느낀다. 고산자 다리 건너 있는 “청계천 문화관” 깨끗한 건물 속에는
더 많은 청계천 이야기가 기다리고 있으나 오늘은 이만 녹음 우거진 여름철을 예약한다. <<끝>>
TIP) 채소 ‘무“의 어원-소설 삼국지에 나오는 제갈량諸葛亮, 또는 제갈공명諸葛孔明, 와룡선생은 전쟁의 귀재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의 여러 가지 전법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전법은 모택동의 공산당들이 답습해 근세까지 활용되어 효과를 본 ”군수물자 현지조달법“이다. 지휘관으로서 제갈량은 어느 지역이나 자기 군대가 주둔하는 곳에서는 주부식(主副食)을 현지조달. 현지 경작해서 군사들을 배부르게 먹였다. 그래서 연전연승, 그 중에 가장 많이 조달한 군부식이 ”무“라 한다. 빨리 자라고 소화흡수력 좋고 비타민 같은 영양가 많고, 특히 비게 등 동물성 지방 많은 중국음식을 생각할 때 더 없이 좋은 부식이다.
그래서 후세 사람들은 제갈공명을 시호로 부르며 좋아 했다. 諸葛武侯(제갈무후)라고
하여 이 채소는 제갈무후가 좋아하던 채소라 하여 나중 제갈은 탈락하고 “무후” 라고 하다가 “무우”- 그냥 “무”로 줄여들었다는 설.-- 禮畢老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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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재미있습니다. 엊그제 강의에서 들었던 이야기들을 이미 오래전에 알고 계셨군요. 대단하십니다.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