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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5 장
<미카엘 그린>
친교의 모임회
만일 어떠하든지 말씀이 평가절하 되어 졌다면, 이것은 바로 ‘예배를 마친 후 친교의 시간에 회중의 대부분이 기술적으로 자리를 빠져나가서 물 탄 커피의 십분의 일 가치가 된 것으로 판명된다. 친교의 장소를 어디에서 행하는가? 는 찬양대의 찬양과 설교를 듣기 위하여 가끔 특별한 시간을 위하여 어디로 가는가를 의미한다. 그것은 가상적인 경향을 지니고 있다. 서방에서 깊고 가치 있는 친교를 나누는 우리의 삶에 대하여 거의 모르고 있다. 소비주의 조차 우리들의 종교를 오염시켰다. 우리들은 예배의 장소를 지정하거나 선택한다. 곧, 가끔 그것에 빠져드는 일에는 중단이 없다. 우리들은 다른 사람들과 우리의 심령이 깊게 연계되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것은 바로 우리들의 쾌락주의뿐만 아니라 우리들의 독립성 때문이다. 우리 자신들이 카누(보트)의 노 젖는 것 같은 이러한 결정은 우리들이 사업에서 기업 경영의 자세와 교회에서 취할 것인가? 버릴 것인가? 의 태도에 달려 있다. 만일 우리가 리더십에 심각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면 영국에서 물러나와 북미에서 자신의 교회를 세워야 할 것이다. 결국 기쁨과 슬픔, 우리 동료 그리스도인들의 고통과 승리를 나누는 것을 거의 알지 못한다. 우리들은 우리들의 작은 집에서 살고 우리 자신을 지키고 핵가족의 개발에 대하여 제임스 돕슨(James Dobson)의 테이프를 보며 하나님의 가족 안에서 세워 질 수 있는 생명의 품질에 거의 고려를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교회 안에서는 이와 같은 것아 언제나 있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2/3 세계의 모든 부분에서 특히 옛 사람의 집에서 그들의 옛날 풍습을 그리는 꿈을 결코 꾸지 못하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또는 어린이 집에서 고아나 적출이 아닌 어린아이들에게 있어서도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인 운동의 바로 출발점에서 장면을 상상하여 보자. 다락방에 12 명의 사람들이 있어 가장 낯선 유월절 식사를 축하하는데 어린 양이 접시에 있지 않고 식탁에 머리가 놓여 있는 모양을 상상해 보자. 이상하게 보일지라도 그 식사는 슬프고 매우 특별한 것으로 시골이나 배에서 지내며 길에서 삼년의 세월을 나눈 생활의 절정을 이루었다. 그들이 웃으며, 울었으며 함께 기도하고 힘써 수고했던 세월들이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친교이었다. 깊고 헌신적인 그들 중의 한 사람이 떠났을 때, 유다의 이 불명예스러운 이름을 그들은 언제나 기억했었다. 혹은 주후 33년 예루살렘에 있는 한 집에 한번 가보자. 그것은 온상과 희생이었으며 나눔과 사려 깊음이었다. 저자가 보아 온 것 중 가르치며 친교를 가지는 가장 가까운 것으로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보여준 떡을 나눔과 기도이다. 토론토에서 60 세대가 반-문화(counter culture) 그리스도인 셀(cell)이 있다. 그곳에는 누구도 개인적인 소유가 없고 오직 넘치는 사랑만 있다.
예루살렘에서 두 사람이 부정적인 방법으로 친교를 깨트렸다. 현대의 교회에서는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다. 두 사람을 방문하기 위하여 지나간 일이라 할지라도 질문을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인데, 전세계에 알려진 초대 교회 친교의 품질을 보여준 것과 대조를 이룬다. 혹은 터어키 해변 밀레토우스의 중천에 뜬 해위 나무 아래에서 앉아 쉬고 있는 무리들에게 합세하여 보자. 햇볕에 탄 얼굴에 매부리코에 검은 눈에 경이로운 미소에 많은 일을 한 큰 손을 가진 유대인이 두려움과 깊은 존경심으로 혼합된 자세로서 그를 바라보고 있는 많은 사람들과 깊은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여러분과 3 년 동안 같이 있었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이 손은 나의 필요에 따라 일을 하였고 또 나와 함께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성령께서 그들로 하여금 감독으로 만들었다는 것과 더 나아가 하나님의 양들을 위하여 돌보아야할 사명을 그들에게 주었다. 그것이 그리스도인의 친교이다. 또는 리커스(Lycus) 계곡이 있는 골로새의 커다란 집의 호의에 대하여 나누어 보도록 하자. 귀족부인과 햇볕에 탄 이목이 뚜렷한 그녀의 남편이 믿음의 식구들과 향연을 벌리고 있다. 그들의 대부분은 그들의 토지인 널따란 농장을 떠난 사람들이다. 마당의 샘에서 포도주를 준비하고 바라다 보이는 방들 중의 하나 안에서 저녁 만찬을 들고 있었는데 그 저녁을 위하여 귀한 손님을 환영할 차례가 되었다. 디도(Tychicus)는 그들의 친구이며 감옥에 투옥되었던 친구인 바울로부터 소식과 편지를 가지고 온 사람이다. 그는 오네시모라는 그 당시 커다란 토지를 가졌던 노예 중의 한 사람을 데리고 왔다. 그는 주인을 속이고 달아났다가 사도 바울과 같이 투옥된 사람이었다. 두기고의 편에 빌레몬서를 가지고 바울로부터 그리스도에게 인도된 후 옛 주인에게 돌려보내졌다. 이것을 처리하기에는 대단한 위험이 있었다. 만일 붙잡히면 달아난 노예에게는 고문과 죽음이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네시모는 그의 주인인 빌레몬에 의하여 포옹으로 환영을 받은 귀환이었다. 그는 어둠 속에서 떠났고 도적이었으나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형제로서 돌아왔다. 오직 예수님의 공동체(친교회)만이 그와 같은 가능성을 이루어 낼 수 있다. 오래 지나게 되면 어느 곳에서나 적은 없는 법이다. 물론 고대 세계에서 친교를 나타내는 여러 가지 다른 방법이 있었다. 주전 5세기에 아테네에서는 도시와 민주주의를 고안해 내었다. 그러나 유대인 학교에서 행하였던 그대로의 환상에서는 깨어나야 한다. 보통 사람들은 의미가 있는 관계나 어떠한 실제적 능력(권력)으로부터 제외 되었다. 그러므로 점진적으로 만일 여러분이 고대 세계에서 유대인이었더라면 여러분이 어떤 것을 함께 즐겨야 했던 형제애 ‘하부로드’(haburoth)의 하나를 비축해야 한다. 만일 여러분이 이방인이었다면, 길드(guilds) 중의 하나에 가입해야 됐으며 장례식 비용을 준비하기 위하여 계(협회)에 가입하여야 했으며 이 두 가지가 일반적이었다.
또는 비밀한 죽음의 의식과 새로 태어남의 참가를 통하여 여러분의 현존의 어떤 감각을 느끼도록 하는 신비스러운 종교 중의 하나에 들어야만 했다. 그러므로 어떤 감각에서 보면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놀랄만한 원인이 되지는 못하였다. 그들은 고대 세대에 모험적인 교제를 향하여 자라나는 운동이었다.
가끔 이러한 비공식적인 기구들을 ‘코이노니아(koinoniai) 라고 불렸으며 로마는 그것에 대하여 온건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실제로 그리스도인의 모임에는 정성(定性)적 차별이 있었다. 여기에는 귀족과 노예, 부자와 가난한 자, 로마 시민권자와 비시민권자,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가 구별 없이 그리고 동일한 조건으로 연합되어 있다.
여기에는 그것을 보면 놀랍고도 매력적인 사람들을 돌보고 사랑하는 성품을 지닌 사회였다. 그것은, 다른 이유 가운데, 우리가 신약 성경 저자들뿐만 아니라 이그나시오(Ignatius), 클레멘트(Clement) 그리고 터틀리안(Tertullian)이 2-3 세기에 연합에 의하여 그러한 저장 창고를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그들이 경배하는 하나님의 연합과 다양성의 그 무엇을 시사하는 조회이었다. 그것은 크게 연합된 교회이었으며 그곳에서 각 자들이 성령이 그들(남자 혹은 여자)에게 운행하므로 나누는 자유를 가졌으며 그것은 하나님이 그들 가운데 계시다는 것을 방문한 관찰자들을 확신 시켜주었다. 사실은 이러한 방법에서 많은 사람들이 의심 없이 신뢰를 하였다.
예를 들면, 터틀리안은 이러한 그리스도인 공동체 그룹이 하늘 아버지에게 그들의 보통 관계성의 때문에 형제라고 적절하게 불렀던 점을 지적한 애정과 순수성을 기록하였다. 경배, 친교 그리고 축제(성찬) 모두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시는 아래에서 진행되었다. 천박한 자, 가난한 자, 병든 자들은 특별히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마음과 영혼이 하나이며 우리들은 서로에게 땅의 물건들을 나눔에 주저하지 않았다. 모든 일들은 자신의 아내를 제외하고 우리 가운데서 공용이었다.
터틀리안은 이교도들이 몹시 나누려고 하는 의지가 있음을 불친절하게 지적했다. 이러한 그리스도인 회합 안에는 커다란 사랑이 흐르고 믿음을 양육하고 희망을 공급하며 신뢰를 확신하며 좋은 습관을 들이며 그리고 비난과 책망을 다스린다는 신성한 말씀에 의하여 유지되었다.
무엇이 이처럼 놀랄만한 친교의 비밀이었을까? 그것을 통찰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알려주는 말씀이 신약 성경의 여러 곳에 있다. 특별히 아가페와 필라델피아(사랑과 형제들을 돌봄인데 그러나 아마도 가장 의미심장한 말은 코이노니아(Koinonia)이다.
코이노니아(다른 말로, fellowship) 는 기본적으로 함께 참여하다란 의미이며 종교적인 말로 고정되어있지 않다. 가장 중요한 신약 성경 말씀같이 그것은 수치스럽고 의도적으로 세속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업에서(눅 5:10) 또는 기업의 분배(빌 4:15)에 사용되었으며 그리고 바울이 그의 동역자에게 사용하였다(고후 8:23). 그러나 처음이며 주요 의미인 친교(fellowship)는 신약 성경의 여러 페이지에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친교는 하나님 안에서 나눔
이것은 로마서 15장 27절, 고린도 전서 1장 9절, 고린도 후서 13장 13절, 빌립보서 2장 1절 그리고 요한 1서 1장 3절에서 여러 가지로 표현되었다. 신약 성경 안에서 가장 가슴 조리는 사례는 베드로 후서 1장 4절인데, 수취인이 하나님 자신의 바로 본체 안에서 코이노노이(koinonoi) 참가의 존재(실재)로 된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기뻐하였던 예수님과 하늘 아버지와 함께한 이러한 친교는 두 가지 면으로 볼 수 있다. 말씀이 사용된 방법은 우리의 삶(생활)을 그와 함께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분은 우리의 친구이며 낮이나 밤이나 어떤 시간에도 우리의 감정과 요구(소원)들을 나눌 수 있는 우리의 형제이다. 우리는 하나님 자신과 우리들의 평범한 생활을 나눌 수 있다. 그러나 이 코이노니아가 번역되어 질 수 있다는 점안에서 보다 깊은 사려가 있다. 우리들은 그의 생명을 나눈다. 우리는 그의 고통(고난)(롬 8:7)을 나누며 그의 죽음과 부활(롬 6:8, 빌 3:10)을 나눈다. 우리들은 그와 함께 일으켜 세움(엡 2:5-6)을 받았으며 우리들은 그와 통치할 것이다(딤후 2:12). 우리는 그의 장래의 영광을 나눌 것이다(살후 2:14).
우리의 문제와 어려움만을 나눌 뿐만 아니라 우리들을 그의 자신의 부활한 생명 안에 능력의 만짐과 영광의 자취를 지금도 나눔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생명이신 그리스도가 나타나실 때 너희 또한 영광 가운데서 그와 함께 나타나리라(골 3:4)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말한 필요도 없이 하나님과의 친교는 인간의 악함과 실패에 의하여 손상을 받게 된다. 손상을 받았으나 폐기된 것은 아니었다(요1 1:6). 우리가 생활가운데서 잘못 행하는 것을 의식하고 있을 때 우리들은 그것을 자백하고 용서를 구하여야 한다.(요1 1:9, 2:1).
우리들은 용서 가운데서 신실하신 하나님을 발견할 것이다. 결국 우리들은 가족이다. 우리들은 용서 가운데서 또한 그분을 발견할 것이며 결국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죄의 짐을 지셨다. 우리들은 아버지와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대하여 대변자를 가졌다. 그래서 요한 1서 2장 1절에서 예수님이 요한복음에서 고별 설교 중에 성령에 대하여 사용하신 말씀이 분명하게 ‘파라클레토스’ 이다. 성령은 아버지 보혜사(paraclete))는 우리와 우리의 심령 가운데서 아버지의 소원을 간구한다. 그리고 예수님은 아버지와 더불어 우리의 보혜사이시며 하늘의 심판장에서 우리의 소원을 간구하신다. 왜냐하면 그 분은 속죄자(propitiation) 힐라스모스(hilasmos)로서 우리의 죄를 단번에 그리고 영원히 처리하셨다. 그 분의 임재에 의하여, 그 분은 아버지에게 죄 짐의 완전하신 과업을 나타내신다. 하나님은 왜 이처럼 완전한 정의와 믿어지지 않는 엄청난 사랑을 이기적이고 죽을 수밖에 없는 인생에게 허락하시어 그 분과 친교(felloship)의 헤아릴 수 없는 특권을 가지도록 허락하셨는가!
그러나 우리들의 친교는 결코 고독하며 외로운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과 연합되어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믿음은 모든 자체의 의식 개발과 믿음이 달라서 자신이 혼자에 대한 완성과 계발을 찾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회피할 수 없는 협동이다. 여러분은 동일한 가족 안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흘러넘치는 친교 없이는 삼위 일체 하나님과 자연스러움이 따르는 친교를 가질 수 없다.
친교는 신자들과의 나눔을 의미 한다
바울의 교제의 악수(갈 2:9)로서 이것을 참조하였다. 그는 악수하는 뒷면의 실체를 언급하고 있다. 오순절 이후 줄 곧 신자들은 자신들이 사도의 친교(행 2:42)에 빠져들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우리들은 그리스도인 친교 모임을 선택하지 않았다. 결국, 우리들이 형제나 자매를 선택할 수 없다. 분명히 아델포이(adelphoi)는 형제라는 의미로 신약 성경에서 그리스도인을 위한 호의적인 조건이다. 성령은 우리에게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기를 가르친다. 그러나 결코 분리되어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분은 우리 아버지이시다! 그래서 신약 성경에서 친교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인 무리들과 같이 함께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이중적인 친교 모임은 완전히 성찬식 안에 표현되었다. 고린도전서 10장 16-17절은 예수 그리스도와 동시에 우리 회합(친교모임)은 그리스도인들과의 우리의 관계성의 표현으로 빵과 포도주를 보여준다. 교회와 거룩한 희생의 빵은 우리 모두가 나누어야 할 몸으로서 기술되어 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는 나눔을 피할 수 없는 공동체이다. 몸이란 말이 초대 그리스도인들의 자립적 입장에서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다.(바울은 로마서 12장, 에베소서 4장과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주장하였다) 그리고 우리들은 개인적으로 그것의 지체이다. 그 몸에는 우월을 위한 곳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의 공동체에 선택이나 매력을 부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하등의 복합체를 위한 곳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보다 덜 중요한 부분에 보다 특별한 보살핌을 취하셨다. 최소한 부재주의 대한 어떠한 양해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들이 다른 이를 대한 지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일 한 지체가 고통을 당하면 모든 지체가 고통을 함께 하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 안에서 변경할 수 없는 나눔은 그의 가족 안에서 다른 이들과 나눔을 의미한다. 그것이 비록 연약하고 죄가 많이 있을 지라도 교회가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인지의 이유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다. 우리들은 그 지체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무리이며 우리들은 양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신부이며 우리들은 구성과 장식하도록 돕는다. 그것이 어떻게 신약 성경 교회가 그 자체를 보는가의 방법이다. 교회는 신약 성경에서 세 가지 주요 개념을 가지고 있다. ‘가정교회’라 의미할 수 있거나 가끔 그런 의미(빌 2장)로 ‘마을 교회’로 여러가정의 연합으로 구성되었으며(살전 1:1) ‘세계 교회’로서 또한 의미를 가진다(행 9:31). 단수 교회와 복수 교회들은 다르게 사용된다. 중요한 질적 내용은 하나님의 교회(tou theou)이다. ‘에클레시아(ekklesia)' 또는 교회라는 말의 근원은 연합(assembly) 한 도시 상태의 헬라어이다. 그러나 그것이 가끔 히브리 말 카할(qahal)에서 구약 성경의 헬라어 번역에 사용되었으며 하나님의 회중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
경배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우연의 조합이 아니라 시대를 거친 하나님의 유산의 부분이다. 아브라함에게까지 소급되어진다. 그 유산 안에서 그러한 연합은 매우 중요하다. 하나님의 백성은 이미 그 백성들이 점점 더 하나님의 백성이 되기를 갈망하게 된다. 성령 안에서 사람들은 그것을 향하여 갈망을 가져야 한다(엡 4:3). 그것은 성경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는 주제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그의 능력에 의하여 그 분에게 우리를 보고 있는 그대로가 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들의 일상적인 교파에서 말하는 강력한 말이다. 신약 성경에서 교파에 대한 흔적은 없다. 그들은 교회의 죄의 한 부분이다. 유대교회, 사마리아 교회, 이방인 교회를 쪼개려고 하는 유혹이며 틀림없이 확실한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그것에 떨어지기를 거절하였다.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연합을 유지하기 위하여 수많은 노력을 지속하였다. 그 안에서 그들의 강력한 부분이 있어 오늘 날까지 그러한 종류들을 보게 된다. 보다 넓고 다른 교파는 그들의 차별화로 가라 않고 선교를 위해서나 도시에서 다른 어떤 기업과 연합(연대)할 때, 커다란 놀라움과 커다란 충격이 전 공동체에 있게 되며 그래서 복음을 위한 기회가 그들의 분리 안에 그들이 어느 누구도 따르지 않으므로 함께 참여함을 권유받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한 친교 공동체는 다른 그리스도인들과의 친교에 의하여 부합되어야만 할 것이다.
친교는 각 다른 사람들의 체험을 나눈다
기쁨과 슬픔
그것은 각각 다른 사람들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고린도전서 12장 26절은 그리스도의 몸 안에서 우리들이 친밀한 독립성을 보여 준다. 그래서 가족처럼 한 지체와 성공 했을 때 기뻐하며 다른 지체가 실패 했을 때 슬퍼하며 그런 것이 교회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다.
재정적 필요
그것은 각자의 재정적 필요를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초대 교회에서 예루살렘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들의 전부(행 4:34-35)를 나눈 것과 같은 것이다. 안디옥(Antioch)에서 그들의 형제자매를 위한 그리스도인들의 절박한 필요를 들었을 때와 같은 것이다(행 11:27-30). 그것은 이방 교회가 로마에 복음이 전달되어 유대 그리스도인을 위하여 모금을 하였을 때와 같은 것이다(롬 15:26). 사용된 말이 코이노니아(Konionia)이다. 그 의미가 동정(긍휼)에까지 확장 사용되었다. 그것은 희생적 베품을 의미했다. 빌립보서 4장 15절은 동일한 사실에 대한 좋은 사례이다. 주고받는 과업들을 코이노니아 라고 불렸으며 그리고 동일한 내용이 갈라디아서 6장 6절과 로마서 12장 13절에 있는 좋은 본 본기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것을 어떤 원치 않는 세금처럼 간주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들은 주는 것을 사모하며 그리고 이와 같은 종류의 친교를 나누기를 갈망한다. 비록 그것이 그들의 의미(고후 8:4)를 넘어서 보여 진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바울은 그것을 고린도 후서 9장 13절에서 보다 확장하여 설명하였다(8장과 9장은 주는 권리에 대한 전적인 가르침이다). 그리스도인들은 복음서에 따라 벗어난 형제에게도 주어야 한다. 수령자들은 그들을 사모하며 그들을 위하여 기도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풍성하신 관용을 그들을 통하여 받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쁨과 파트너십이 풍성하여서 그들 모두에게 하나님의 말로 다할 수 없는 관용으로부터 그 모든 것들이 샘솟아 오르는 것이다(고후 9:15). 다른 사례는 어떻게 주는 것(베품)을 통하여 부유한 자로부터 가난한 자에게 흐르지 않는지를 보여 준다. 다른 방법(방향, 길)으로 갈 수도 있다. 한 가난한 파키스탄 과부가 여러 주간 동안, 반 서방 폭도들 때문에 외출할 수 없다는 선교사 가족의 이야기를 들었다. 그녀는 아마도 그들에게 약간의 식량이 필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장에서 채소를 사서 버스로 몇 마일을 달려가서 이 선물을 선교사 가정에 가져다주었다. 그것의 채소의 값보다 더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만일 이와 같은 종류의 일이 우리 교회 안에서 보편화된다면 우리들에 관하여 사회 주변이 깜작 놀라 것이며 주목하게 될 것이다. 필요를 공급하여 줄뿐만 아니라 교회 지체와의 사이 감사와 친교가 대단히 크게 강화되어질 것이며 그래서 아직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충분하리만큼 매력적인 일이 될 것이다.
고난
친교는 또한 고난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하나님이 주시는 위안을 의미한다. 고난은 인간 본연의 피할 수 없는 부분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나 고난을 포함하고 있는 값있는 나눔을 위하여 의도적으로 초대되었다. 고린도후서 1장 7절은 지적할만한 사례의 경우이다. 바울은 대단히 큰 고난을 당하였다. 그는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고난을 당할 것을 기대했다. 그러나 마치 그가 예수님의 위로를 알고 있었으므로 그들의 기도를 도왔다(고후 5. 11). 그는 그들을 위하여 동일한 위안을 기대했다. 성 베드로는 역시 우리에게 지금의 고난을 나중에는 영광을 동일한 병렬로 놓았다. 그의 편지 서두 부분(벧전 1:5)에 기록하였다. 그것은 인내에 대한 도전이다. 우리들은 공공연히 모욕적인 말과 고난에 노출되어지며 때로는 그렇게 취급하는 사람들과 코이노니아를 하게 될 것이다(히 10:33).
그러나 저자는 그들의 신념을 버리지 말 것을 강조하였으며 커다란 보상을 기다리라고 했다. 결국, 십자가를 따르며 다시 사신 주님을 따라야 한다. 그들의 목적은 두 가지 면에서 그의 안에서 나누게 될 것이다.
헌신
친교는 배타적인 위임을 나누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행복-행운이 있는 서방 세계에서의 병폐이다. 그래서 너무나 납작 엎드려 우리들의 케이크를 가지고 먹기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의 회색 그림자가 감소되어 질수 없는 그리스도교 안에서 흑 백이 있다. 고린도후서 6장 14절의 많은 부분의 잘못된 적용은 이 요구에서 엄격하다. 믿지 않은 자와 만나지 말며 - - - 어두움과 빛이 어떻게 어울리겠는가?- - - 일반적으로 믿지 않는 자 와 더불어 믿는 자는 무엇을 가지고 있는가? 정말로 답답한 소리이지만 바울은 그리스도인의 순수성과 구분에 필요한 점에 있어 완고하였다. 그렇게 그는 확고부동한 점이 있었다. 그는 자신을 열어서 마치 그의 추종자들을 모두 세상 밖으로 나오도록 몰아 세웠던 것처럼 잘못 해석하게 되었다. 그는 이러한 생각을 수정하여야만 했다(고전 5:9-11). 형제의 이름을 지닌 어떤 사람과 교제하지 않는 자들에게 쓰기보다 만일 그가 부도덕한, 탐욕자, 우상숭배, 모욕적이거나, 술 취하거나, 강도라면 그러한 사람과 먹지도 않겠다는 것이다. 바울은 모든 종류와 방법 안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의 신선함과 순수성을 유지하는데 염려를 하였다. 그리스도인은 죄스러운 것은 어떤 이익이 있더라도 나누어서는 안 되며(엡 5;11, 딤전 5: 22, 요2, 11, 계 18:4) 그러나 특별히 성찬식에서 신령한 빵과 포도주를 받은 자들이 사탄의 능력으로 코이노니아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경계했다(고전 10:18,20). 고대세계에서 희생을 요구하는 우상은 비실재적이었다. 그러나 상상으로부터 먼 어두음의 세력이 우상적으로 기회를 타서 그리스도인의 심령에 침투하여 들어와 그곳에서 전쟁을 벌인다. 얼마나 이러한 관계는 능력이 있으며 그곳에서 프리메이슨(freemasons: 공제 우애를 추구하는 단체)처럼 신비하며 비밀한 사회에 적용하였는가?
또한 바울은 성적부도덕성, 곧 매춘 같은 것으로 그리스도의 지체를 비틀어서 매춘의 지체를 만들어 버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전 6:15). 그리스도에로의 위탁은 다른 모든 위탁의 배타성이다. 주님은 그의 신부인 교회를 염려하시며 각 지체 모두에게 대하여도 그러하시다.
보살핌
친교는 교회 안에서 형제와 자매를 위한 깊은사랑의 보살핌을 의미한다. 형제의 사랑인 필라델피아는 대 신약 성경의 말씀(단어)이다. 베드로후서 1장 7절의 미덕의 사다리에서 자체가 아가페적인 사랑은 하나님이 주신 모든 것과 여러 가지 것들에 대하여 차이를 두지 않음이며 둘 사이의 차이는 단순히 이를테면 필라델피아는 가족의 다른 지체를 위한 가족 사랑이고 아가페는 사랑하지 않는 것들에 대하여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외적 역사이다. 이와 같은 사랑은 어떤 교회의 생활(생명)을 그려낼 때 아름다운 것이다. 그것이 없으면 썰렁하다.
심령으로부터 분출하는 이 매력적인 다중 사랑은 하늘의 사랑과 더불어 화해의 열매이다(롬 12:10, 벧전 1:22). 신약 성경 저자들은 그것을 거의 은혜로 받았다. 결국, 하나님 자신에 의하여 가르치시며 영감 되어진다(살전 4:9). 그들은 지속적인 그리스도인의 자세 안에서 끊임없이 살아가는 것이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자(히 13:1).
친교는 하나님 사역의 나눔을 위미한다.
코이노니아(Koinonia)는 주님의 사역의 교제의 연결의 의미와 더불어 신약 성경에서 무겁게 변색되었다(예, 고후 8:23, 빌 1:5, 히 10:33)
바울의 가장 가까운 친구들은 그와 함께 친교 사역을 나누었던 사람들이다. 디도와 같은 사람은 나의 동료 그리고 동역자이다(고후 8:23).
깊은 친교는 거의 부수적인 봉사가 있다는 충분한 영적 진리가 있다. 그것은 그것을 연구하거나 의논에 의하여 다져지고 묻혀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을 위하여 봉사하는 가운데 함께 참여로 인한 것이다. 저자는 세계선교복음운동을 위하여 연가가 가득 찬 방에서 나의 인생의 얼마 동안을 보내며 그리스도인의연합을 의논 했으며 그것은 전적으로 감탄할 만한 주제들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말에 의하여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세계교회선교회(WCC) 자체로 발견한 상태에서 분명한 것이다. 저자는 복음주의 기업과 대강보기 및 뒷 배경이 넓으면서도 다른 교파로부터 그리스도인 형제자매와 그리스도의 사회적 관계 안에서 생활을 하였다. 저자는 여기에서 깊은 친교를 발견했다. 그것은 봉사로부터 왔던 것이다.
많은 교회들은 취약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자체가 봉사의 땀을 흘리지 않고 친교의 기쁨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런 것은 가져야 할 것이 아니다. 친교란 하나님의 사역에서 나눔을 의미하며 특히 복음주의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바울은 이것을 고린도전서 9장 22-23절에서 대단히 분명하게 말했다. 그는 예수님의 복음을 유대인과 이방인에게도 전파하면서 고전 9장에서 유연성을 나타냈으며 용기와 상상, 동기와 인내를 보였다. ‘나는 모든 것이 어떤 것을 구한다는 의미에 의하여 내가 해야만 하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모든 것을 하게 되었다. 나는 모든 것을 복음을 위하여 하였으며 축복 가운데 나누기를 원한다.’ 코이노니아, 곧, 나눔이란 단어가 다시 사용됨을 주목하자. 여러분은 실제로 여러분이 그것을 포기하며 버리기로 결정하였을 때 복음의 축복의 맛을 보기 시작하게 된다. 교회는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신학교도 그것을 배울 필요가 있다. 개인 그리스도인들은 그것을 배워야 한다. 여러분도 그러하다.
빌레몬이 그 진리를 알았다는 것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바울은 빌레몬서 6장에서 불분명한 암시 가운데서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들의 믿음의 나눔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것인 모두 선한 지식을 진보하게 할 것이니라’ 그러나 그것이 빌립보서 1장 7절에서 현저한 투명성으로 구현되었다. ‘너희가 내 마음에 있음이며 나의 매임과 복음을 변명과 확정함에 너희가 나와 함께 은혜에 참예한 자가 됨이라.’ 빌립보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은 돈과 그들이 그를 감옥에 보낸 식량의 선물의 의미에 의하여 그들의 결집 안에서 바울과 나눔을 가졌다. 그들은 그의 변명과 복음의 실행을 같이 그들도 행함으로 공유했다. 복음은 그것을 설명하기 위하여 냉정한 머리와 그것을 보호하며 일관성과 생활의 모든 면에 대한 타당성을 보일 필요가 있다. 낮은 그리스도인의 사죄가 과거 반세기 동안 가라앉은 것을 보는 일은 슬픈 일이며 이 가장 중요한 복음주의 부분에 새로운 신성한 흥미의 시작을 바로 보며 용기를 북돋게 한다.
만일 복음이 냉철한 머리를 필요로 한다면 또한 이처럼 놀라운 소식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찾으므로 그리고 하나님 나라 안에서 비가 오나 해가 뜨나 빛이든지 그들을 사랑하는 따뜻한 마음이 필요하다. 그리스도인들이 그것을 함께 할 때, 그들은 성삼위(아버지가 아들을 세상의 구주가 되게 하셨고 그리고 성령이 사명을 위하여 그를 세례 주었던) 의 최고한 관계인 구원 사역 안에 보증되어 지는 것이다. 그리고 신격(지고한)삶이 이 어려운 개념으로 들어 와서 가난하고 필요를 구하는 죄인들을 봉사하고 그들이 친교의 생명적 차원을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타락한 세상을 위하여 그(하나님)의 은혜로운 구원 사역 안에서 하나님과 협력하는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저자보다 깊은 친교를 갈망한다면 아마도 우리가 자신을 목회나 선교에 더 한층 신중하게 포함시켜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교회 안에서 친교란 엄청나게 화려한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생명 안에서 나눔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믿는 사람들과의 나눔을 의미한다. 그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의 체험의 넓은 부분의 체험을 의미한다. 그것은 하나님 사역의 나눔을 의미한다. 아마도 그리스도 친교의 네 가지 개념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가정 그룹 안에서 이다. 거기에는 친교의 수평과 수직 축의 교차점이 있다. 우리들은 주님과 그리고 다른 이들과 친교를 가진다. 그리고 그것은 세 가지 중요 방법에 이르게 된다. 첫째, 그것은 신을 향한 면이 있다. 우리들은 그 분을 우리가 찬양과 기도로서 가정 그룹에서 경배한다. 우리들은 이러한 성경이 우리들이 성경을 반영하는 것 같이 서로의 삶에 충격을 주는 방식으로부터 함께 배운다. 이것은 그것의 두 번째 다른 사람과의 친교인 개념 안으로 자연스럽게 인도한다.
가정그룹은 각각의 다른 사람의 기쁨과 슬픔을 나누는 자연스러운 장소이므로 그래서 다른 사람의 체험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이 같은 방법 안에서 우리들이 주일 날 교회에 참석하여서 할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다른 사람과 가까워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삶 가운데서 하나님을 보고 듣는 긴박감을 가질 수 있다. 이와 같은 수준의 나눔을 다른 사람을 잘 알지 못하는 무리 가운데서는 불가능 하다. 사람들은 그들이 보살핌을 알고 또한 그러한 사람들을 신뢰할 수 있는 것으로 그들의 삶의 친밀한 상세함을 단지 나눌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어떻게 이 같은 수준의 신뢰와 보살핌을 마음에 품을 수 있을까? 이것은 작고 정기적인 가정그룹에서 가능하다.
모든 교회가 그것을 장려해야 한다. 그것들이 거의 생명력과 성장의 필수적인 것이다. 그리고 물론 그러한 그룹이 이웃 간에 목회와 선교에 보장된 시금석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각 사람에게 목회를 시작하며 거기로부터 움직이기 시작한다.
어떤 선교사는 그가 사역했던 무슬렘 땅에서 작은 가정 그룹을 기록하였다. 그룹의 하나인 노인이 중요 심장외과수술에 임하게 되었다. 그와 그의 부인은 알다시피 불안해하였다. 그래서 그룹은 그들과 그리고 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수술 후 그들은 노인을 차래로 방문하고 그를 위하여 식사를 대접하였다. 그러나 이 노인들을 부양할 가족이 없었으나 그들의 가족 그룹의 지체인 그리스도인 가족들에 의하여 사랑스러운 지원을 받았다. 그러나 그 자체를 한 단계 넘은 가정그룹은 곧 멈추게 되고 건전하지 못하게 된다. 목회와 선교는 그룹의 한계를 넘어서야 할 필요가 있다.
따뜻하고 이처럼 견고한 그룹은 다른 친구들을 초대하기 위하여 한 동안 쉽게 갈라질 수 있으며 그래서 성경공부의 서문 시리즈인 요한복음의 구절들을 할 수 있다. 또는 보다 의욕적으로 할 수 있으며 적절한 설교자와 토의를 할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가지고 복음적인 저녁(만찬)파티를 좀 개최할 수도 있는 것이다. 친교란 하나님과 다른 그리스도인들뿐만의 교제가 아니다. 친교의 본질은 향상되며 그의 목적은 우리가 봉사하는 하나님처럼 하나님의 사랑에 익숙하지 않는 자들에게 안위의 구역 너머로 넘쳐 나올 때에만 완성되어진다. 놀랄 것도 없이 가정그룹은 그 가치를 측량할 수 없으며 모든 회합에서 진정한 친교의 모체인 것이다. 우리들은 각자가 가정 그룹에 속하여야 할 필요를 절실하게 느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만일 우리가 친교의 큰 차원을 즐기려면 그러한 그룹의 외적 신뢰를 덜 심각하게 취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