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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문] |
[강의]
이 어서에서는 생사일대사의 법(法)인 묘호렌게쿄를 수지하는 깊은 취지로서 '임종이 지금이라고'하는 궁극적인 신심의 자세를 밝혔습니다.
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으로 묘호렌게쿄를 수지하면, 이 어서에서 '묘호렌게쿄의 생사(生死)'라고 밝히신 생사의 실상을 있는 그대로 내 몸에 나타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결국 '미혹의 생사'를 '불계의 생사'로 전환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임종이 지금'이란 '불계의 생사'에 대한 깊은 신해(信解)에서 일어나는 신심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불계의 생사'에 신해
대성인은 "결국 임종이 지금이라고 알아서 신심을 다하여 남묘호렌게쿄라고 부르는 사람"은 천불(千佛)이 주켜주셔서 안심하고 임종을 맞이할 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천불이 지켜주는 임종은 '임종정념'을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임종이 지금'일는 신심하는 사람이 일생성불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결국'이란 말은 앞단의 글월과 관계가 있습니다. 즉 앞단에서는, '구원실성(久遠實成)의 석존'과 '개성불도(皆成佛道)의 법화경'과 '우리들 중생' 이 셋이 전혀 차별이 없다고 신해하는 것이 묘호렌게쿄를 수지하는 본질이라고 설했습니다.
이 신해하는 근본자세가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이기 때문에 '결국'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셋이 전혀 차별이 없다'라고 신해하는 것은, 자신의 생명이 妙法蓮華經의 당체고 부처와 불이의 생명이며 부처와 똑같은 생사, 즉 '불계의 생사'로 살 수 있다고 믿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인생의 목적을 일생성불에 두고 인생에 근본적인 희망을 지니는 삶입니다. 신심과 함께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은 반드시 '임종이 지금'이라는 자세로 삽니다. 임종은 '인생을 총결산하는' 순간입니다. 그때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는가'라고 엄격히 추궁당합니다. 자신의 인생을 깊이 긍정하고 아무 후회없이 만족할 수 있는 임종을 맞을 수 있을까. 반대로 인생의 종막을 후회와 자책감으로 맞을 것인가. 참으로 그 사람이 살아온 모습이 하나도 속임 없이 임종의 순간에 응축됩니다. 따라서 비록 지금 임종을 맞이할지라도 구름 한 점 없는 푸른 하늘과 같이 아무런 후회나 불만이 없다고 단언할 수 있도록, '지금'을 얼마나 진지하게 힘껏 살고 있는가. 이것이 중요합니다. "지금 임종을 맞이해도 한이 없다"라고 자부할 수 있는 각오로 '현재'를 진지하게 사는 삶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입니다.
다음 삶을 향한 빛나는 출발
또 임종은 '인생 총결산'이면서 동시에 불법의 생사관에서 보면 다음 '생'을 향한 새출발입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마닐라 만(灣)의 석양을 본 적이 있습니다. 수평선에 가라앉는 태양이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바다는 황금빛으로 빛났습니다. 한 폭의 명화를 감상하는 듯 장엄한 광경이었습니다. 멋진 저녁노을은 내일 아침의 빛나는 욱일을 약속합니다. 임종은 삼세에 걸쳐 불계의 생사에 사는 우리에게, 다음 생<삶>을 향한 빛나는 출발입니다. 임종은 모든 것을 응축한 '인생의 정상(頂上)'이고 '다음 생'을 결정하는, 자장 중요하고 엄숙한 인생의 장면입니다. 이 임종의 때에 어떤 일념을 지니는가. 후회없이 승리하는 '생'은 안온한 '사'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만족스런 '사'가 다음 '생'을 향한 명랑한 새 출발을 결단케 합니다.
임종은 맞이할 때 금세(今世)를 총괄하는 일념이 어떠한가, 그 인(因)이 미래의 과보를 초래합니다. 여기에 '임종정념'의 의미가 있습니다. '임종정념'은 죽음에 임해도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지 않고 올바른 생각, 즉 묘법을 믿는 신(信)의 일념을 흔들리지 않게 관철하는 것입니다. 임종 때에 묘법을 신수할 수 있었던 무상(無上)의 기쁨으로 내 인생에 한이 없다고 만족하는 것이 '임종정념'의 구체적인 모습입니다.
이제 '임종이 지금'과 '임종정념'의 차이를 정리하면, 금세에 살아 있을 때 임종이라는 인생 총결산의 의미를 깊이 느끼고, "지금 임종을 맞이해도 한 없다."는 각오로 시시각각 현실 속에서 생명을 연소하는 삶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에는 생명을 위한 '지혜'가 있고 지혜를 근본으로 하는 '결단'이 있으며, 지혜와 결단에 의해 열리는 화려한 '희망과 행동'이 있습니다. 나날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을 쌓아올림으로써 생명을 단련하고 경애를 높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금세에 삶의 자세를 확신하고 이해하며 임종을 맞이해도 후회 없이 묘법을 끝까지 부르며 편안히 웃으면서 영산(靈山)으로 떠날 수 있습니다. 이 장엄한 경지가 '임종정념'입니다.
간단히 말하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을 쌓아올림으로써 인생을 총결산하는 '임종정념'을 완성합니다. 그리고 '임종정념'이 다음 '생'을 위해 여유 있게 출발할 수 있도록 합니다.
'임종이 지금'을 기본으로 끝까지 살아온 좋은 '생'이 '임종정념'이라는 좋은 '사'를 약속합니다. 그리고 '임종정념'이라는 좋은 인생의 총결산이 다음의 좋은 '생'을 향한 출발이 됩니다.
'임종이 지금'인 사람은 '생도 환희, 사도 환희'
또 대성인은 '임종이 지금'의 신심을 관철해서 '임종정념'을 결정한 사람이 죽은 후 어떻게 되는가를 언급하셨습니다.
"'시인명종(是人命終) 위천불수수(爲千佛授手) 영불공포(令不恐怖) 불타악취(不墮惡趣)'라고 설하셨느니라. 기쁘도다 일불 이불도 아니고 백불 이백불도 아닌 천불까지도 마중을 나오시어 손을 잡으실 것이니 환희의 감루를 금할 길이 없도다."
묘법을 끝까지 수지하고 죽은 사람은 천 불이 마중 나와 손을 잡고 지켜 주신다는 말씀입니다. 당시 미타(彌陀)의 명호(名號)를 부르면, 죽었을 때 서방 극락정토에서 아미타불과 관음, 세지(勢至)의 두 보살이 마중 나온다는 염불 신앙이 왕성했습니다. 이에 대해 대성인은 일불, 이불은 고사하고 백불, 이백불도 아니며 천불이 마중 나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천불이 손을 내미는 모습은 오이나 박 넝굴이 가득히 뻗어 나온 모습을 방불케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야말로 "환희 감루를 금할 길이 없도다"입니다. '생도 환희, 사도 환희'입니다. '생에서 사로' '사에서 생으로', 언제나 환희의 끊일 때가 없습니다. 이 불계의 환희와 대극을 이루는 것이 방법불신(謗法不信)의 생명경애입니다. "법화불신(法華不信)의 자는 '기인명종(其人命終) 입아비옥(入阿鼻獄)'이라고 설해져 있으니 필정은 옥졸이 와서 손을 잡으리라" 경문에서 "불신방법의 자는 아비지옥에 들어간다"라고 설했습니다. 대성인은 "십왕(十王)의 재단(裁斷)을 받고 구생신(俱生神)의 가책을 받는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십왕(十王)과 구생인은 인과(因果)의 이법(理法)이 엄연히 존재함을 나타냅니다. 어느 누구나 선악의 구별을 피할 수 없습니다. 그것이 인생의 총결산이며 인생에 쌓은 업(業)의 과보입니다. '십계(十界)의 생사(生死)'에서 말하면 '불계의 생사'도 '지옥계의 생사'도 있습니다. 물론 생명은 십계호구입니다. 살아 있는 동안에 변혁할 수도 있으나 최종적으로 총결산을 하는 십계의 경애는 그대로 미래세로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금세에 경애혁명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생사관을 깊게 하는 것은 인생을 깊게하는 것입니다. 도다 선생님은 "사실은 죽을 때를 위해 신심해야 한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종교의 핵심은 생사관에 있습니다.
'마음의 재보'를' 쌓는 중요성
여기서 지금까지 말한 내용에 오해가 없도록 보충하는 뜻에서 다시 확인해 두겠습니다.
첫째, '임종이 지금'이란, 당연한 일이지만 '사(死)'를 찬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임종이 지금'이라는 참뜻은 살고 살아 끝까지 살라는 가르침입니다. 불법은 생명을 소홀히 하는 순교주의(殉敎主義)가 결코 아닙니다. 생사는 연속하므로 '현실의 고투(苦鬪)'에서 도피하여 단순하게 '사'를 택하면 절대로 안 됩니다. 금세에서 숙명전환을 경시하는 마음은 인간의 가능성에 대한 불신(不信)입니다.
둘째, '임종정념'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고나 병으로 죽었을 경우, 고인이 성불할 수 있을지 불안해 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임종정념'은 어디까지나 '신심'으로 결정됩니다. 후회없는 분투하여 끝까지 신심을 관철한 사람은 반드시 '불계의 생사'의 궤도에 오릅니다. 죽음을 맞이하는 형태는 여러 가지이지만 '임종정념'은 틀림없습니다. 분투한 복덕의 힘으로 틀림없이 대승리의 임종을 맞이할 수 있습니다. 열반경에 "보살이 우려해야 할 것은 몸의 파괴가 아니라 마음의 파괴다. 마음이 파괴되면 삼악도에 떨어지므로 신심을 파괴하는 악지식을 우려하라"(통해)고 있습니다. 광선유포를 위해 싸우면서 단련된 생명은 절대로 파괴되는 일이 없습니다. '마음의 재보'를 쌓은 사람은 생사불이라는 성불의 생명이 이미 배양되어 있습니다. 그 사람은 위대한 사명을 관철한 복덕으로 생과 사를 장식해서 영원히 '불계의 생사'가 이어지는 궤도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불법의 생사관은 모든 사람이 상락아정에 둘러싸이는 희망에 찬 생사관이며, 삼세 영원히 전진 승리하기 위한 생사관임을 굳게 확신하기 바랍니다.
'알아서'는 '생명 오저의 자각'
본문 첫머리에 "임종이 지금이라고 알아서"라고 했습니다. '알아서'는 '신해'이고 '결정한 신심'을 말합니다. 자신의 생사는 본래 '불계의 생사'임을 생명의 오저에서 자각하는 것입니다.
창가학회에서 광선유포를 위해 끊임없이 분투하는 사람은 이미 생명 차원에서 이 자각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생명은 영원하기 때문에 '바로 지금 진지하게 싸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자각하여 행동하는 것이 "임종이 지금이라고 알아서"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障魔(장마)를 타파하다
'임종이 지금' '임종정념'을 생각할 때 간과하면 안 될 중요한 신심의 자세가 있습니다. 그것은 '장마(障魔)'와 싸우는 일입니다. '임종정념'은 '사마(死魔)'를 극복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평소에 삼장사마와 대결하기를 피하는 사람은 사마라는 극복하기 어려운 장마를 도저히 이겨 낼 수 없습니다.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의 본질은 마에 지지 않고 마를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신심을 일으키고 지혜와 용기와 생명력을 분기하여 마와 싸워야 합니다. 마성(魔性)과 싸워 완전히 승리한 사람이 '부처'입니다. 다시 말하면 부처는 최악의 장마인 천자마(天子魔)와 사마를 극복한 존재이고 불사(不死)를 득한 존재입니다.
시조깅고는 다쓰노구치법난에서 목숨을 걸고 대성인을 지켰습니다. 그러나 최후의 순간에 "대성인님, 임종의 때가 왔습니다"하고 외치며 울었습니다. 스승을 생각하는 마음 때문이었겠지만, 스승을 덮치는 사마, 천자마 때문에 오히려 시조깅고가 공포에 떨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때 대성인은 힘차게 사자후하셨습니다. "지각(知覺)없는 분이로군, 이처럼 기쁜 일이니 웃으시오."(어서 914쪽) 다가오는 죽음을 맞이하여 부처의 생사의 극치를 한마디로 표현한 '임종정념'의 말씀입니다. 대성인은 권력의 마성과 싸워 사마를 물리치고 천자마에 승리하셨습니다. 그 분투의 마음에 불계가 확립됩니다. 대성인은 대난 중에 문하에게 "월월 일일 강성해지시라. 조금이라도 해이한 마음이 있다면 마가 틈탈 것이니라"(어서 1190쪽)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월월 일일 강성해지는 신심'은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에 통합니다. 다시 말하면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이 마를 막고 타파하는 신심입니다. 이 '임종이 지금'과 반대되는 것이 '해이한 마음' '마를 두려워하는 겁'입니다. '천불수수(千佛授手)'라고 있듯이 임종할 때 정념(正念)을 관철하는 사람에게는 모든 부처와 보살, 제천선신이 순식간에 달려옵니다. 그러나 그 근본은 자신의 신심으로 악과 싸워 선을 여는 분투임을 잊으면 안 됩니다. 그 분투하는 마음이 불계의 생명력을 용현합니다.
나도 '임종이 지금'이라는 각오로 60년간 싸웠습니다. 특히 젊었을 때는 몸이 약해 언제 죽는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임종이 지금'이라고 결심을 더욱 굳게 하여 도다 선생님을 지켰습니다. 홀로 일어서서, 스승을 엄습하는 장마와 싸웠습니다.
그리고 세계평화를 확립하려면 불법의 영원한 생명관을 넓히는 수밖에 없다고 확신하고, 지혜와 용기를 짜내어 평화운동에 자진해서 나섰습니다.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을 관철했기 때문에 원초(元初)의 생명력이 용현했고, 다 함께 이체동심으로 전진했기에 창가학회와 SGI를 전 세계에 넓힐 수 있었습니다.
'임종이 지금'이라는 신심을 관철하며 힘차게 인생을 등반하고 빛나는 '임종정념'의 정상을 정복한 분이 창가학회에는 많이 있습니다.
이 위대한 인간혁명으로 무한히 승리하는 모습이야말로 우리 창가학회에 생사일대사의 혈맥이 흐르고 있다는 실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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