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문화 원고
누운 시혼詩魂을 깨우다(6)
구병(九屛)을 둘러친 고봉(孤峯)에 올라 앉아
글 ․ 사진 구능회 최이해
기묘명현(己卯名賢) 구수복(具壽福) 선생의 유택
10월의 햇살이 유달리 따사로운 날, ‘충북 보은군 마로면 관기리’에 소재한 병암(屛菴) 구수복 선생의 묘소와 사당을 찾았다. 보은은 속리산을 북쪽에, 구병산을 동쪽에 두고 있는데, 구병이란 아홉 폭 병풍이라는 뜻으로 자연의 모습을 적확히 집어낸 작명이다. 그 아래에 있으면서 경상북도 상주와 이어지는 관기리는 마로면 소재지이며 능성 구문의 관기문중이 있는 세거동(世居洞)이다. 병암은 생거지명에서 딴 아호임을 금방 알 수 있다. 유택과 사당은 좀 떨어져 있다.
병암 선생께서는 1491년에 태어나, 1535년 구례군수로 재임 중에 향년(享年) 45세로 별세했다. 서울에서 태어나 26세에 문과에 급제하고 조정에 나아가 예문관 검열, 승정원 주서, 홍문관 부수찬, 사간원 정언, 홍문관 수찬과 이조좌랑 등의 청요직(淸要職)들을 차례로 역임하였다.
1519년 11월15일 밤에 벌어진 옥사(獄事)로 인해, 조광조(趙光祖) 선생을 필두로 여러 인물들이 영문도 모르고 소환되어 하옥, 역모의 누명으로 추국(推鞫)을 받고 장형(杖刑)을 당한 뒤에 귀양길에 올랐다가 극형을 받아 대부분 세상을 떠나니, 역사는 이를 일컬어 기묘사화(己卯士禍)라고 한다. 당시 이조좌랑(吏曹佐郎)이라는 직책으로 이조(吏曹)에서 숙직을 하다가, 급히 입궐하게 된 선생은 뒤이어 들어온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선생에게 긴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을 전하며, 선현들의 구명(救命)을 위해 안간힘을 썼지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앞에서 언급한 대로 비참한 결말을 맺고 말았다.
그런데 서울에서 태어나 성장한 선생의 묘소가 선영(先塋)이 있는 서울 근교를 벗어나서 충청도 산골에 자리를 잡은 연유가 무엇일까? 기묘사화 직후에 군직(軍職)으로 잠시 좌천되었던 선생은 이듬해 3월, 그 자리에서도 물러난다. 그 후 선생은 충청도 보은(報恩) 지역에 정착하게 되는데, 그 때가 바로 1526년 겨울의 일이다.
일찍이 조정에 출사하여 신진 사류(士類)의 패기와 열정으로 중종(中宗) 조의 성세(盛世)를 열어가고자 조광조, 김정, 한충, 김구, 기준 등 기묘 제현(諸賢)들과 함께 정성을 기울였지만 하룻밤에 참변을 겪으며 대부분 유배와 극형을 받았고, 겨우 살아남은 이들은 서울을 벗어나 뿔뿔이 흩어지니 선생께서도 낯선 산골로 물러나 겨우 연명해 가던 시절이었다.
저 '팽택령(彭澤令)'이라는 벼슬을 훌훌 벗어 던지고 그 유명한 귀거래사를 읊조리며 고향으로 돌아간 도연명(陶淵明)을 본받아, 선생께서도 ‘차귀거래사(次歸去來辭)’를 읊으며 그렇게 인생의 제2막을 보은땅에서 보냈으니, 그 중에 일부 내용을 소개한다.
歸去來兮 (귀거래혜) 나 돌아가리로다
寓隻影而獨遊 (우척영이독유) 그림자에 기대어 홀로 즐기며
甘蔬糲而松肱豈大牢之 (감소려이송굉기대뢰지) 소나무 베고 누우니 거친 음식도 달고 좋아
苟求紛圖 (구구분도) 어찌 욕심을 내리오
史於左右 (사어좌우) 좌우에는 사서(史書)가 있고
劇嗜炙而寫憂陽春 (극기자이사우양춘) 고기 구워 즐기고 봄날은 근심을 씻어주며
催我以淑景 (최아이숙경) 좋은 경치는 밖으로 나오라고 재촉하네
桑麻翳乎 (상마예호) 뽕나무 삼나무를 일산으로 삼아
田疇足穿繩蹻 (전주족천승갹) 짚신 신고 논밭을 누비고 다니노라
이처럼 한운야학(閑雲野鶴)을 벗 삼아 여생을 한가로이 지내던 선생은, 조정에서 물러난지 13년 후인 1533년에 복권(復權)되어 구례군수로 부름을 받았고 재임중에 별세했으니, 그나마 앞서 가신 기묘명현들보다는 행복하다고 해야 할지…. 무덤의 주인공께선 어찌 생각하실까!
고봉 아래 고봉정사와 고봉사 그리고 노거수
관기리 남쪽의 고봉(孤峯)은 평야에 우뚝 솟아 실제 높이에 비해 크게 보인다. 지금 이 봉우리에는 고봉정(孤峰亭)이 세워져 있어 아래를 굽어볼 수 있는데, 세 갈래 물길이 합해져 도도해지는 풍광을 볼 수 있다, 고봉 아래 남쪽으로 비탈을 껴안고 담을 쌓아 두 동의 건물을 들였는데, 동쪽이 고봉정사(孤峰精舍)요 서쪽이 고봉사(孤峰祠)이다.
정사와 사당 그리고 정자 모두 고봉이 들어간 관계로 헷갈리기 쉽다. 정자야 경치를 조망하고, 사당은 제사공간인데, 정사는 뭘까. 후학들을 가르치거나 학문을 논하던 곳이다.
당초에는 정자 자리에 초옥으로 된 정사가 있었거늘 낡고 기울자 지금의 자리로 내려 지었다고 한다. 정사 곁에 사당이 들어섰고, 정작 정자는 아주 나중에 들어섰다. 여기 세 건축물을 통칭할 때는 고봉정사라고 한다. 1984년 12월31일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다.
기록을 보자. 조선 중기 김정이 학문을 연마하고 즐기던 곳에 최수성이 고봉정을 세웠다. 이름은 김정이 삼파연류봉을 고봉이라고 하고 올라가 즐긴데서 비롯되었으며,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 이후에는 구수복이 은거하면서 학문을 연마하였다. 그 뒤 정자가 낡자 구수복의 5세손인 이천이 봉우리 아래로 옮겨 지으면서 지금의 건물로 세웠다 한다.
이곳 고봉사 사당에 모셔진 세 분 모두가 기묘명현이다. 김정국(金正國)이 편찬한 〈기묘당적 己卯黨籍〉에는 기묘명현으로 94명이 수록되어 있다. 또 김정(金淨)의 후손 김육(金堉)이 편찬한 〈기묘제현전 己卯諸賢傳〉에는 218명이 수록되어 있다.
먼저, 병암(1491∼1545) 선생. 김정(金淨) 등과 도의(道義)로써 사귀고, 경학(經學)에 몰두하여 많은 후진을 양성하였다. 성품은 겉으로는 온화한 듯하면서도 안으로는 강의(剛毅: 강건하고 굳셈)하여 모든 의롭지 않은 일에 조금도 굽히지 않았으므로 남의 존경을 받게 되었다.
김정(1486∼1520)은 조선 전기 문신으로 중종 2년(1507)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병조정랑, 이조정랑 등을 거쳐 이조참판, 형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사림의 대표적 인물로서 왕도정치의 실현을 위해 노력하였는데, 이를 위해 미신타파, 향약의 실시 등을 추진하였다.
최수성(1487∼1521)은 조선 전기 선비화가로 김굉필에게 배웠으며 신진 사림파 학자로 조광조, 김정 등과 교유하였다.
고봉정사 현판의 우람한 글씨가 눈에 익었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글씨이다. 고봉사의 현판도 최수성의 후손이며 대한민국 대통령을 지낸 최규하의 글씨이다. 정사 동쪽 담장 곁에는 능성 구문의 족보를 보관했다는 석함이 있다. 전란을 피해 동네를 떠날 적에도 족보만큼은 특별한 보호조치를 했던 것이리라.
마당 널찍하게 그늘을 드리운 노거수(老巨樹)는 홰나무다. 이곳 문화유적의 역사만큼이나 오래 견뎌 푸르름을 자랑하고 있으니 이를 노래하는 시조 한 수를 지어 경의를 표했다.
고봉정사 홰나무
초록이 뭉게뭉게 고봉정 가렸어도
세 청류 모여 나는 너른 들 아우르듯
삼현사 결 고운 자취 마당 그늘 넓구나
구능회 도헌문화콘텐츠 대표
최이해 여행작가, 시조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