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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념과 개념의 운동 (concept et mouvement du concept): 철학 일반. .
M. Le Dantec, Les Notions philosophique, Dictionnaire, PUF, 1992, pp.397-398(P.3299)
- 르 당텍(Michel Le Dantec, ?-?) 프랑스 철학자, 헤겔 전공.
자의식의 자기 전개란 일반적으로 신성(완성체, 인격체)에 이르는 길로 여긴다. 사람들은 그 마지막에는 아직 이루지 못한 채 끝난다. 설령 누가 완성이라고 한들, 그 다음을 살아가는 자들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지라도 – 또한 그 사람의 자기완성이라고 하더라도 – 신성(인격성)의 진솔한 완성은 아직도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 세계사이다. 그럼에도 누군가가 그 노력을 했거나 그 길을 제시한 사람에게, 사람들은 신격화하거나 영웅시하기를 좋아한다. 아니 그런 노력을 한 사람에게라도 신처럼 영웅처럼 대우해 주기를 좋아한다.
코로나19 방역의 영웅이라는 칭호도 그러하다. 영웅이라고 치켜 올리는 거기에, 상층의 허위의식이 들어 있다. 영웅이란 이름을 불러주면서, 재벌과 권력들이 뒷짐지고 있었던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사회에서 비정규직으로 또는 시간제 알바 등등으로 살아가면서 함께 살아야 한다고 말하는데, 그들은 인색하다. 병원균은 부자를 멀리하고 가난한 자에게 다가가는 것도 아니다. 9시전 건물을 청소하는 자들이 아프면, 9시 이후 출근하는 자들도 아프다는 것이 코로나의 일상이다. 온인민은 건전하고 건강함은 함께 어울려 사는 공감과 공명에 있다.
르 당텍(Michel Le Dantec)의 설명을 읽어보면, 헤겔이 ‘온개념’의 사용과 적용을 한 인격의 영혼(pschche)에 적용한 것 같아 보인다. 처음에는 그 인격이 인식의 도구로서 살아온 과정에서 개념들을 활용하고, 그리고 자기 개념을 만들면서 그 개념들로 온개념으로 구성할 수 있다고 상정하고, 그리고 삶의 두께 또는 강도를 더해감에 따라, 상정했던 온개념을 확장하면서 위로 더 상향해 나가는데, 단순히 추상하여 상향하기보다 자기 삶의 배려와 헌신을 모아서 현실태를 중첩하며, 이런 과정들을 거치면서, 마치 활성화와 생동감을 보존하면서 완성의 길로 나아가는 총체적 과정의 총합으로서 ‘온개념’을 사용하려고도 한다. 여기에 영혼은 생명이 사그러들 때까지 완전 또는 절대가라는 경우가 있을 수 없지만, 헤겔은 그래도 그 노력의 결과(역사)를 완성으로 여기고자 한 것으로 보이다. 신의 모습이 아직 만들어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제까지 형성하고 완성하고자 한 노력만큼은 그와 같은 모습을 만들었다고 말하고 싶을 것이다. 이 완성태가, 신의 모습이나 부처의 모습이 아니라 국가라고 보고, 그 국가에서 권리를 행사하는 인격을 지닌 인간이라 간주하게 되면, 인격성의 개념이 성립하는 것이리라.
인격은 어릴 때부터 청소년까지 가정과 동네라라는 곳에서 자라면서 배우며 틀을 잡는다. 배운 틀을 익히고, 사회나 공국 공동체로 나가면서, 자기 의식이 자아로서 테두리를 갖는다. 이런 자아가 국가 공동체에서 노력하고 활동하면서, 자연권의 권능을 느끼면서 두께와 강도를 쌓아갈 것이다. 그리스에서 자기조절(엔크라테이아 Enkrateia / ἐγκρατεία)의 과정도 이와 같이 공적인 사실에도 적용하였으리라. 플라톤이 말하듯이 전사의 계급을 넘어서, 관료로서 훈련을 거친 후에 철인 통치자 그룹에 이르는 경우, 이 통치자 그룹은 인격의 자아를 넘어서 인륜의 의식을 지니게 될 것이다. 그래서 사적 소유가 없다고 한다. 이런 삶의 과정 또는 제도의 과정의 흔적을 따라가 보면, 자아가 자기에 의한 자기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은 자기 생성과 스스로 되기일 것인데, 그리스에서 마치 헌신(오이케이오시스, Oïkéiosis / οἰκείωσις: 자기를 자기로 파악하는 것)과 같은 것이리라. 삶에는 권능이 내재하고 그리고, 인격은 그 권능을 실현하려는 노력의 과정에서 성립한다.
이 어린 시절의 철없는 과정에서 무엇인가 한 부분이 완성된 듯이 여기는 사고의 틀이 생긴 청소년을 지나, 사회와 국가라는 넓은 생태계에서 사람들과 만남에서 자기를 단련하고 공고히 하며 살아가는 과정에서, 학술어가 먼저 있는 것이 아니라 삶에 연관된 말투와 말씀을 개념화하기가 먼저 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자아의 자기 정립에서 ‘온자아’라는 개념이 성립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프랑스 철학이 일상어에서부터 그 말을 사용하여 철학을 하는 것과 같다. 그 철학에는 과정을 포함하고 또한 느끼고 알고 있는 연속성이 있을 것이다. 해설자는 헤겔도 “철학은 어떤 특별한 전문용어(terminologie)도 필요하지 않다”는 말을 인용하면서, 인간은 삶의 토양 위에서 철학을 하게 되어 있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삶의 토양이란, 즉 지리적 풍경은 그 시대와 그 터전에서 사는 이들의 얼굴이며, 양식이다. 우리는 전쟁의 폐해를 딛고 일어나, 아름다운 강산의 생태와 닮은 인격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근대 시작에서 60여년 동안 섬나라의 얼굴을, 그리고 또다시 섬나라를 본뜬 인디언을 학살한 미국 제국의 얼굴을, 내내 본뜨려고 한 것은 아니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얼굴과 우리의 말투를 찾는 것도 개념 운동이며, 그리고 우리는 이제 이 과정을 통해서 실재적이고 현실적인 개념을 창안해 나가야 할 것이다. 자치, 자주, 자유는 자연의 자발성으로부터 시작하였을 것이다. 자연(la nature), 즉 인성(la nature humaine)은 스스로의 권능과 스스로의 노력으로 일어나는 자발성의 과정 또는 진행일 것이다.
우리의 노력으로, 평화통일 영세중립 코리아
이 과정에서 근본적 터전을 만들고 삶의 양식을 창안해 나가야 할 것이다.
우리 자연 우리 언어 속에서, 헤겔식으로 국가로 수렴을 넘어서 인민의 창달과 확장으로. (53RKI)
# 개념과 개념의 운동 (concept et mouvement du concept) 397-398.
[입문]
개념의 논리학[헤겔의 대논리학]의 첫 문장에서부터, 헤겔은 “개념”이란 단어를 “두 가지 다른 의미”로 사용한다. “개념의 본성(la mature)의 직접적 정의를 부여하는 것은 어떤 한 대상의 개념을 직접적으로 확립하는 것만큼 이나 거의 가능하지 않다.”(주관적 논리학의 과학(La Science de la logique subjective), 프랑스 번역, 사무엘 장켈레비치, p. 243) 따라서 개념은 이중 능력(double faculté) 가지고 있는 데, 왜냐하면 그것은 정의(定義)로 말해지는 것이 불가능하기 때문이고, 또한 의미가 적어도 이중적이기 때문이다. 프랑스어로 대문자 “C”로 사용은 순수하게 협약적[약속]이다. 따라서 단지 대개념(Conception)을 개념들(les concepts)의 질서와 구별하는 것이다. 이 단어의 둘째 기회의 경우는 아주 빈번하게 그 단어의 뜻[본래의 의미]에 관계한다. 여기에서는 언어의 기호들(des signes)이 소중하다: [그런데] 기호들의 정의에 따라서, 이 기호들은 비동일자(le non-identique)를 동일하게 해준다. 이처럼 개념 전체는 일상적으로 보편적이고, 그리고 여기-지금(le ici-et-maintenant)의 “살해(le meurtre)”에 의해서 유일한 사물로부터 분리된다. 단어[말]와 사물, 추상과 구체, 지성과 감성 [등]은 그 만큼 많은 구별들인데, 이 구별들은 개념의 추상작업에 참여하고, 사물과 분리작업에 참여한다.
[본문]
헤겔(Hegel, 1770-1831)은, 마치 전적으로 사유자(penseur)인 것처럼, 단어들-개념들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그러나 변증법에 의해 그것들의 사용을 전향시켰다. 그의 변증법은 개념들과 생각된 것(le conçu, 구상, 착상) 사이의 부적합성에 대한 의식이다. 전향은 우선 비판적이고, 그리고 언어(le language)의 무매개적 이용 작업으로부터 이루어진다. 말씀(une langue)의 효과적 실천은 절단(un découpage, 마름질), 사전, 문법, 또 더하여 말씀이 자기 기억 속에 남긴 백과전서적 분류작업에 따라서 이루어진다; 이러한 것은 모두 상속된 지식의 재현이다. 그럼에도 불국하고 말씀은, 다시 말하면 사유는 – 헤겔에 있어서 이 둘은 하나일 뿐인데 – 사유 자체에 의해 스스로 반사[반성]되는 성질을 지닌다. 그럼에도 말씀[사유]자체로부터 벗어남이 없다. 말씀자체와 동일하게 남아있다고 하더라도 말씀 자체로에서 빠져나온다. 이런 점에서 말씀은 “온개념(Concept)”이며, 그것의 초기 추상작업을 넘어선다.
또한 온개념은 개념들과 낯설지 않다. 온개념은. [정체성의] 속박을 해체하기 위하여, 개념들의 정체성을 갖는 속박[강요]을 고발[규탄]한다. [따라서] 온개념은 기호들과 정의들에 의해 모든 동일화작용을 넘어서는 무엇이다. 왜냐하면 온개념은 하나의 사유에 의해 – 그 사유는, 그 자체들로 나타나는 유한하게 주어진 개념들에 의해, 유한하게 주어진 사물들을 재현하는데 사용된다[능숙하다] - 생산된 유한성들과 고정성들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정의될 수 없을 지라도 – 온개념의 정의는 극복할 수 없는 모순일 것인데 – 그래도 온개념은 현존에 이른다: “그것이[온개념이] 그 자체적으로 자유로운 현존에 도달했다고 해서, 온개념은 자아(le moi) 또는 순수 자기의식과 다른 것이 아니다. 나는 개념들(des concepts)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한정되고 정확한 개념들을 말하고자 한다. 그러나 자아는 [자아]그 자신에 의한 온개념인데, 이 온개념는 현존에 즉 개념인 한에서 여기-존재(l’être-là)[Dasein]에 이른다.” (Logique du Concept, loc. cit., p. 251). 단어-개념의, 그것(단어개념)의 정의의, 그것(단어개념)의 대상의, 판명한 기능이[함수가] 온개념의 계기이라고 말해도 마찬가지 의미이다. 떠오른 사유가[생각이] 개념이 된 생산물들 속에서 붙잡혀지 않듯이, 음악의 소절의 생기있는 해석이 그 부분의 악보[쓰여진 것]에 환원되지 않는다. 이 비교는, 대논리학인 한에서 온개념은 추론적 이성의 극단적 한계에서 작업한다고 단순하게 강조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 (53RKF)
그럼에도 불구하고 법철학강요(1821) 안에서 그의 다루는 방식(un maniement)은 매우 효과적인 것으로 나타나며, 적어도 그의 예고[알림] 속에서도 그러하다. “사변적 논리학에 따르면, 사물 또는 내용이 그것의 개념에 따라 또는 즉자적으로(en soi) 있는 그대로 제기될 뿐인데, 그 사물 또는 내용은 존재의 무매개적 형식을 갖는다고 우리는 말할 수 있다. 다른 사항으로 개념이 있는데, 그 개념은 온개념의 형식 자체 안에서 대자적(pour soi)이다. 그것[개념]은 더 이상 무매개적인 어떤 것이 아니다.” (번역, Robert Derathé, § 33, rem., p. 93.) § 33절의 추가에서, 견해는 또한 조금 더 밝혀진다. “우리가 여기서 권리[법]에 대하여 말할 때, 우리는 시민권[민법]을 – 사람들이 민법을 일상적으로 이해하듯이, 이해할 뿐만 아니라 또한 도덕성, 윤리적 삶, 보편사도 – 이 세 가지는 또한 그 영역에 되돌아가는데 – 이해한다. 왜냐하면 온개념이 진리에 따라서 사유들을 통합하기 때문이다.”(p, 92)
따라서 사람들은 온개념이 무매개적 실증법과 윤리-정치적 전체성과 조화를 이루는 작업을 한다고 본다. 그런 이유로 법철학강요(1821)는 권리에 관한 – 분리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권리 그리고 국가의 삶에 독립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대상으로서 권리에 관한 - 반성이 아니다. 이런 새로운 전망에서 온개념으로서 권리[법]은 권리라는 개념을 넘어선다. 이 권리라는 개념은 추상된 것처럼(모든 시대와 모든 장소에서 유효한) 또는 역사적인 것처럼(그것의 존재이유는 그 때에 그것을 생겨나게 했던 필요들에 동일시된다) 대안으로서 주어지기 때문이다.
헤겔이 권리에 관하여 “온개념의 발생”이라 부르는 것, 그것은 권리 개념의 반대되고도 대칭적인 두 가지 용도들을 넘어섬(surpassement)이다: 즉 하나는 수학적 유형이고, 다른 하나는 경험적이고 역사적 유형이다. 헤겔은 다음 예를 든다: “경험과학에서 사람들은 통상적으로 표상 속에서 발견된 것을 분석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부분적인 것을 일반적인 것에 연관시킬 때, 일반적인 것을 사람들은 개념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렇게 진행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떻게 온개념이 그 자체로 규정되는지를 (…) 보고자 원한다. 우리가 이런 진행 방식에 따라서 얻는 것, 그것은 사유들의 계열이며, 그리고 현존하는 모습들의 다른 사유들 계열인데, 이 사유들을 주제로 하는 한, 실제적 현상 속에 시간의 질서는 온개념의 질서와는 부분적으로 다르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소유는 가족에 앞서 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이고,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소유는 가족에 앞서서 노동되어 있을 것이다.”(§ 32, 첨가, p. 91) 달리 말하면, 소유의 추상개념은 가정에 의해 실질적이 된다[효과화 된다]. 그리고 온개념은 근본적 실재성(la réalité première)으로 발견되게 될 것이다.
온개념의 논리학은 마치 법철학강요(1821) 속에 그것의 응용이 있는 것처럼, 철학의 언어문제를 제기한다. 이런 이유로 온개념은 다양한 부정으로부터 이해되어야만 할 것 같다: 즉, 온개념은 정의도 아니고 의미도 아니다. 그리고 온개념은 정식도 아니고 추상도 아니다. 그것은 모순적과 동일적, 객관적과 주관적, 의미의 운동이다. 그것은 오성이 단어-개념들에 의해 조작한 구별들과 대립들에 대해 넘어섬과 평정(l‘apaisement, 고르기)이다(사실상, 실재적 효과성의 어느 것도 이런 조작들에 상응하지 않는다) 논리학의 과학(La Science de la logique)의 제2판 서문에서 헤겔 자신의 주장들[긍정문장들]에 따르면, 독일어는 이미 그 자체적으로 사변적이고, 개념적이고, 중첩결정되어(surdéterminé) 있다. 왜냐하면 다른 언어들 보다 더 독일어는 응결된 사상들에 대해 또한 단어-개념들에서 임의적으로 고정된 사상들에 대해, 동원(une mobilisation)의 환경으로 즉 생동감(une animation)의 환경으로 쉽게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독일어의 개념(der Begriff)은 보다 넓은 의미를, 특히 우리의[프랑스어의] “개념”(concept)이란 단어보다 더욱 능동적(활동적)이라는 것은 사실이다.
따라서 헤겔의 온개념은 수학적 유형이 아니다. 왜냐하면, 수학적 유형은 조작적[연산적] 정의와 동일시되기 때문이고, 그리고 그 기능[함수]에서 있어서 유형적인 등장[출현]의 역사적 조건들의 흔적을 간직하지 않아야 하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온개념은 역사적, 발생론적, 시간적 유형이 아니다. 왜냐하면 존재 이유[존재 근거]는, 한 시대를 위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존재이유를 필연적이라고 간주했던 그 무엇 안에 갇혀있게 내버려 두지 않기 때문이다.
온개념을 이해한다는 것, 그것은 무엇이 정의될 수 없는지, 또 왜 그러한 것이 정의될 수 없는지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런 무매개적 불가능성을 밝히는 것, 그것은 이미 온개념 속에 있는 것이다. 사실상 그것은 현실태로서 사유(la pensée en acte)이며, 그 사유가 살아있는 한데서 그리고 독단이 아닌 한에서, 사유는 진솔하게 개념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강의는, 즉 그의 생생한 말투는 온개의 최상의 모델이다. 왜냐하면 이런 계기에서 언어는 사유의 대상과 동일한 존재 양태를 갖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탐구하고 반성하는 말투에서, 사람들은 개념적 말씀의 정태적 대립들을 넘어서고 또한 마치 개념적 사유에 의해서 대립들을 가라앉히게 하는 것과 같다. 자, 이러한 이유로 헤겔은 자기 생애에 마지막에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철학은 어떤 특별한 전문용어(terminologie)도 필요하지 않다.” (논리학의 과학(La Science de la logique)의 제2판 서문, 프랑스어 번역본, p.13.) (M. Le Dantec)
(6:01, 53RKI) (6:14, 53SKF)
# 인명 ****
1770 게오르크 헤겔(Georg Wilhelm Friedrich Hegel, 1770-1831), 독일 철학자. 칸트의 이념과 현실의 이원론을 극복하여 일원화하고, 변증법적 과정을 설명한 철학자.
- La Science de la logique, 3 vol., Bamberg, 1812-1816. T. I : Doctrine de l'Être (1812) ; t. II : Doctrine de l'Essence (1813) ; t. III : Doctrine du Concept (1816)
- Encyclopédie des sciences philosophiques (1re éd. 1817 ; 2e éd. refaite et augmentée 1827 ; 3e éd. revue et corrigée 1830). T. I : Logique (résume Science de la logique) ; t. II : Philosophie de la nature ; t. III : Philosophie de l'esprit
- Principes de la philosophie du droit, Berlin (1821)
1869 사무엘 쟝켈레비치(Samuel Jankélévitch, 1869-1951), 오데사 태생으로 러시아 제국의 유대인 차별법 때문에 프랑스로 이민. 의사, 러시아 국적의 번역가이다. 프로이트, 헤겔, 셸링 등의 번역이 있다. 철학자 블라디미르 장켈레비치(1903-1985)의 아버지이다. G. W. F. Hegel, Esthétique, 8 volumes, Paris, Aubier, 1944. (Champs-Flammarion, 4 volumes.). G. W. F. Hegel, La Science de la logique, 4 volumes, Paris, Aubier, 1947.
1905 드라떼(Robert Derathé, 1905-1992) 프랑스 철학자, 대학교수, 루소 전문가, 정치철학 전공. 베를린 프랑스 연구소(De 1935 à 1938) 비엔나 프랑스 연구소((1938-1939) 이때 헤겔을 번역하고 주를 달았다. Principes de la philosophie du droit, trad. André Kaan, Gallimard, 1940, / Principes de la philosophie du droit, trad. Robert Derathé et Jean-Paul Frick, Vrin, 1975 / Principes de la philosophie du droit, Vrin, 1989.
?-? 르당택(Michel Le Dantec, ?-?) 이 철학자에 관해서 이 논문만 찾을 수 있음 “La conscience malheureuse dans la société civile,” in Hegels Philosophie des Rechts. Die Theorie der Rechtsformen une ihrer Logik, Doeter Henrich and Rolf-Peter Horstmann, Stuttgart: Ernst Klett. (1982) pp. 139-150. 다른 정보는 없는 것 같다.
[동명이인? - 참조: 르당택(Michel Le Dantec, 1948k-2019) conseiller municipal de Guy Lengagne de 1983 à 1988, a présidé pendant cinq ans la mission du Centre national de la mer, un groupe restreint chargé de chapeauter le projet Nausicaá.]
* Logique du Concept, loco citato, p. 251. <- 이 인용이란 Samuel Jankélévitch, Science de la logique subjective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 ‘Logique du Concept’은 이탈릭체로 쓰지 않았는가? 아마도 이 책(장켈레비치 번역)의 한 장으로 들어있을지 모르겠다. / 개념의 논리학(Logique du Concept)이란 제목으로 된 헤겔 저작도 없고, 프랑스어 번역본도 없는 것 같다. 위키와 구굴을 죽 찾아보았는데 나오지 않는다.
(6:34, 53RKI) (7:06, 53SKF)
첫댓글 여기서 “온개념”은 독일어 der Begriff 이다. 이는 들뢰즈가 말한 철학은 개념의 생성이라고 할 때, 온생명(une Vie, 온삶)과 같은 함의를 가진 개념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헤겔의 개념이란 관념(l’idée)도 아니고, 또한 용어(la notion)나 단어(le mot)도 아니며, 추론의 한 논리적 항목(le terme)도 아닐 것이다. (53SK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