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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졸업60주년 기념문집 원문보기 글쓴이: 문곰
아픈 歷史 遺跡이 많은 나라 필리핀(Philippines)
고광창
o 植民地의 아픈 歷史 遺跡이 많은 나라
o 7,000여 개의 크고 작은 섬으로 이루어진 섬나라
o 6·25戰爭때 兵力을 支援해준 16개국 중 하나
o 15餘 年間의 1인 獨裁와 不正腐敗로 經濟가 몰락하고 있는 나라
o 우리나라 농구 선수 ‘신동파 신드룸’이 있는 나라
면적 ; 30만 ㎢(남한의 3배)
인구 ; 약 1억 99만명
민족 ; 말레이족 95.5%, 중국인 1.5%, 기타 3%
종교 ; 가톨릭 83%, 개신교 9%, 이스람 5%, 기타 3%
언어 ; 필리핀 어,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
역사 : 약 330년 간 스페인 식민지, 48년 간 미국 통치
※植民地는 主權을 빼앗긴 상태, 統治는 주권은 빼앗기지 않고 다스림만 당함
同窓 친구 몇 명이 夫婦同伴으로 旅行社 페키지를 이용하여 4박 5일 日程으로 ‘필리핀’ 旅行을 다녀왔다. 여행은 가슴이 떨릴 때 해야지 다리가 떨릴 때 하면 안 된다고 하니 하루 빨리 다녀오자고 한 것이다. 나 같은 경우는 結婚한지 10餘年이 되었지만 아직까지 新婚旅行다운 여행이 없었으니까 이번 旅行이 新婚旅行이나 다름없어서 다소 설레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우리는 평소 ‘섬’하면 하얀 파도가 밀려오는 해변과 푸른 바다를 상상하고 있었고 또 필리핀이 ‘섬’ 나라인 까닭에 큰 기대를 가졌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우리의 기대와는 거리가 멀어서 실망했다. 패키지내용을 하나하나 꼼꼼히 따져보지도 않고 여행사와 불쑥 계약해 버린 우리의 잘못이긴 하지만 ‘섬’나라에 와서 바닷구경도 못하고 갈 거라고 누가 생각이나 했겠는가?
필리핀은 7,000여 개의 섬으로만 구성된 섬나라인데 제일 큰 ‘루손(Luzon)’ 섬에 首都인 ‘마닐라(Manila)’가 있고 休養地는 모두 조그만 섬에 있다는데 旅行日程이 짧은 관계로 首都인 ‘마닐라(Manila)‘ 주변과 ‘루손(Luzon)’ 북쪽 지방인 ‘바기오(Baguio)’와 ‘바나우에(Banaue)‘를 다녀오는 것으로 滿足해야 했다.
<마닐라(Manila)>
330餘年 동안 스페인 植民統治의 中心이었던 마닐라는 스페인 植民時代의 苦痛스럽고 아픈 歷史 遺跡들이 많이 모여 있고, 유럽 樣式의 建築物, 바로크 양식의 로마 카톨릭 교회 건물들이 필리핀 傳統文化와 調和를 이루고 있어 異國的인 雰圍氣를 자아내고 있다.
우리는 필리핀의 아픈 歷史 遺跡을 보러 여기까지 온 것이 아니고 夫婦 旅行地를 고르다가 가까운 해외 여행지로 필리핀을 정한 것뿐이기 때문에 Guide의 설명은 귀담아 듣지 않고 夫婦간 對話에 정신이 팔려 있었으니 이를 보다 못한 旅行社 職員이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나 많이 하십니까?’ 하면서 우리들 손을 잡아끌고 등을 밀면서 갈 길을 재촉하기도 했다.
o 인트라무로스(Intramuros)
16世紀 스페인이 필리핀 統治를 위해 중국인과 필리핀인을 동원하여 건축한 도성(都城)으로 총 길이 4㎞에 달하고 성벽 안쪽으로 반듯하게 뻗은 길과 廣場이 있으며 博物館을 비롯한 유적이 많았다. 필리핀의 입장에서는 苦痛스럽고 아픈 歷史 遺物이다. 이 苦痛스럽고 아픈 遺物들을 後孫들의 歷史敎育에 어떻게 活用할지는 현재 살아있는 필리핀 국민들의 몫인 것 같다.
o 산티아고(Santiago) 요새
스페인 점령 시에 군사적 要衝地이고 옛날 監獄이 있었던 곳이라고 하니 필리핀의 입장에서는 잊혀 지지 않는 歷史的 遺物이고 아픔이 담긴 곳이다. 스페인으로부터 獨立運動을 하다가 處刑된 ‘호세 리잘’(Rizal)을 기념하는 博物館이 요새 2층에 있었다.
o ‘리잘(Rizal)’ 공원
필리핀 獨立運動의 英雄 ‘호세 리잘’이 총살당한 자리에 그를 기리기 위해 조성해 놓은 公園으로 그의 記念塔 앞에는 항상 武裝한 헌병이 지키고 서 있다고 한다. 나무숲과 풀밭으로 잘 가꾸어진 공원은 野外音樂堂과 롤러스케이트장, 噴水臺, 놀이동산 등이 조성되어 시민들의 休息處로 사랑받고 있었다. 이곳을 시민들의 휴식처로만 이용할 것이 아니라 리잘의 愛國精神을 後孫들이 이어 받는 장소로 자리 매김 했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o 나용 필리피노(Nayong Pilipino)
필리핀의 傳統 生活樣式을 살펴볼 수 있도록 꾸며 놓은 民俗村으로 넓은 부지 안에 필리핀의 대표적인 6개 地域의 住居 樣式과 생활 모습을 再現해 놓았다.
o 말라까냥 궁(Malacanang)
스페인 植民 時代부터 필리핀의 統治者가 살던 곳으로 ‘高貴한 사람이 사는 곳’이란 뜻이란다. 마르코스 대통령도 이곳에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일반인에게 공개되고 있었다.
o 敎育 投資는 낮아도 敎育의 質은 높은 편?
돌아오는 길에 初等學校가 있어서 들어가 보았다. 오늘이 日曜日이라 학생들 공부하는 모습을 볼 수 없었지만 出入門을 잠그지도 않아 敎室 안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敎室은 몇 군데 유리창이 깨져 있을 뿐만 아니라 壁面에 落書도 많았다. 책상과 의자는 4~5명이 함께 앉을 수 있는 긴 의자로 술집에서 술 마실 때 술상과 의자가 붙어있는 모양과 비슷했다. 敎室 管理 측면에서 보았을 때 정부에서 敎育投資에 좀 인색하지 않나하는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러나 Guide말에 의하면 국민의 3/4이 英語로 意思表現이 가능하고 초·중등 교육은 義務 無償敎育이며 文盲율은 10%정도 밖에 안 되고 학부모의 敎育熱은 한국과 비슷할 정도라고 하니 교육의 質的인 면에서는 높은 편이라고 할 수 있겠다. 교육도 投資에 質이 比例하는 것인데 우리가 눈으로 본 敎室 管理實態와 Guide의 말은 뭔가 맞지 않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o ‘신동파’ 신드룸(Syndrome)
學校 運動場 한 켠에 籠球 골대가 있고 거기에서 애들이 농구를 하고 있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이곳 필리핀은 籠球가 國技일 정도로 국민들이 籠球를 좋아 한다고 한다. 이곳 애들은 ‘신동파’ 선수는 알아도 한국이 어디 있는 나라인지는 모르는 애들이 많다고 한다. 9년 전 이곳에서 열린 籠球 아시아선수권대회에서 우리나라가 우승할 때 신동파 선수가 날렵한 몸동작으로 가공할 得點력을 발휘하는 것을 보고 한국 농구의 傳說로 신동파 선수를 기억하게 되었고, 9년 전 ‘신동파 신드룸’의 뜨거운 열기가 아직까지도 식지 않고 이곳 필리핀에서는 有名人士로 記憶되고 있다는 것이다. 國威宣揚을 위해서는 運動 경기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o 韓國戰爭參戰 필리핀軍 勇士會
필리핀 애들은 한국을 모를 수 있지만 우리 한국 애들은 필리핀을 모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6·25전쟁 때 兵力을 支援하여 우리를 도와준 나라 參戰 16개 國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당시 步兵 1개 대대 7,420여명이 戰鬪에 참가하여 사망 112명, 부상 299명, 실종 16, 포로 41명 등 많은 피해를 입었다고 하니 필리핀과 우리나라는 同盟을 넘어 血盟의 관계이다. 지금도 필리핀에는 6·25전쟁 당시 參戰했던 勇士들이 ‘韓國戰爭參戰 필리핀軍勇士會’를 組織하여 運營하고 있다고 하고 우리나라에는 필리핀 參戰 記念碑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세워져 있다고 한다.
우리 政府에서는 매년 6월 25일이 되면 參戰 16개국 大使들이 현재 生存해 있는 參戰勇士들을 大使館으로 초청하여 그 당시의 戰爭 映像을 보여드리고 점심 식사를 제공해 드린다고 한다. 우리 政府의 努力에 박수를 보낸다. 우리는 그 고마움을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기필코 恩惠에 報答할 줄 아는 나라, 그러한 國民이 되어야한다.
o 市內 버스는 ‘지프니’
市內 교통으로는 두 종류의 電鐵이 있고, 버스는 美軍이 철수하면서 남기고 간 트럭을 개조해서 만든 ‘지프니’가 있다. ‘지프니’는 보통 4륜 구동의 小型차로 運轉士가 운전은 물론 料金 受納까지 모두 책임지고 있었고 차 뒤쪽에 오르내릴수 있도록 계단을 만들어 놓고 그곳으로 乘下車를 하고 있었다.
o 道路 鋪裝 工事費와 無人島 섬
市內 道路는 鋪裝되어 있는데 그 중 일부는 파손되기도 했다. 가이드 말에 의하면 市外 道路는 거의 포장이 안 되었고 마닐라 市內 도로는 韓國 企業에서 몇 년 전 鋪裝工事를 해 주었는데 工事費를 지금껏 주지 않고 있으며 현재 돈이 없어서 못 주고 있으니 工事費대신 無人島 섬 몇 개를 가져가라고 우스갯소리를 했다고 한다. 필리핀에는 섬이 무려 7천 여 개나 있다고 하니 그런 말을 할 수도 있겠지만 --
나는 6·25 전쟁 때 우리를 도와준 고마운 나라이니만큼 우리나라에서 그 企業에 어떤 惠澤을 주더라도 鋪裝 工事費를 받지 않도록 했으면 어떨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여기 와 보니까 필리핀이 經濟的으로 너무나 어려운 나라임을 알 수 있었고 이것이 필리핀에 대한 우리의 고마움에 조금이나마 報答하는 길이 아닐까 하는 마음에서다.
o 봄,여름,가을이 모자이크 되어 있는 農村 들녘
우리나라는 4季節이 뚜렷이 區分되지만 필리핀은 년 중 기온이 30°c가 넘는 常夏의 나라이다 보니 벼 栽培가 3모작도 가능하다. 그래서 부지런한 사람은 1년에 3모작을 하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은 2모작에 그친다. 그래서 播種, 移種하는 시기가 서로 달라 어떤 논은 모를 새로 심어 봄처럼 연한 초록색인가하면 어떤 논은 벼가 여름처럼 싱싱한 파란색이고, 어떤 논은 가을처럼 누렇게 된 곳도 있어 논밭 색깔이 제각각이다. 온 들판이 모자이크 된 그림 같고 농촌 들녘에 봄,여름,가을이 모두 함께 있는 느낌이다. 이렇게 모내기와 벼 배기가 서로 다를 경우 좋은 점은 농촌의 바쁜 시기가 分散되어 서로 돕기(품앗이)가 가능해 진다는 점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o 妻和萬事成
섬나라니까 이곳에서 海産物을 많이 먹고 가자고 했더니 女子 회원들이 일제히 반대한다. 어제 필리핀의 代表的인 飮食이라고 해서 海産物에 野菜를 넣어 끓인 ‘아도보’라는 음식을 먹었는데 男子 회원들은 술안주를 겸해서 잘 먹었지만 女子 회원들은 거의가 입도 안 대었다고 한다. 이유인 즉 調味料가 너무 많이 들어 간대다가 東·西洋飮食文化의 영향을 모두 받은 탓인지는 몰라도 맛도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中國음식을 시켜 먹자는 것이다. 女子 회원들은 모두 다 料理專門家이고 家庭에서는 一流 料理師인데 그 분들이 그렇게 말하니 男子會員들은 할 말이 없었다. 또 이번 旅行은 그동안 家庭 살림하느라 고생한 아내들을 慰勞해 주기 위해 마련한 한 旅行이니만큼 아내들의 의견에 따를 수밖에 --
점심 때 ‘妻和萬事成’하고 외치면서 술잔을 부딪쳤다.
o 房은 대나무(竹)로 엮어 만든 平床
이곳 가난한 農村은 住宅難이 심각하다는 말을 듣고 어떻게 사는지 궁금해서 알아보려고 房을 보자고 했더니 망설인다. 누구나 남에게 보이고 싶지 않는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가이드가 다시 한 번 부탁을 해서 겨우 承諾을 받고 房을 구경했다. 房을 보니 대나무를 엮어 만든 平床하나만 놓여있을 뿐 壁도 없었다. 감추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이것이 常夏의 나라 필리핀의 가난한 農村의 房 구조다. 住宅難이 심각함을 알 수 있었다.
o ‘아기 만드는 房’ 이야기
房을 보고나니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온 식구가 平床에 함께 자면 젊은이들은 언제 어떻게 아기를 만들까 하는 의문이다. 가이드에게 물어보니 ‘아기 만드는 房’이 따로 있다고 한다. 마을에 원두막처럼 높이 만들어 놓은 곳이 있었는데 거기가 ‘아기 만드는 房’이란다. 젊은 부부가 아기를 만들고 싶으면 그 마을의 ‘아기 만드는 방’ 管理人에게 날짜와 시간을 豫約해 놓고 그날 그 장소에 가서 아기 만드는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럼 나이가 좀 많은 사람들, 아기를 만들지 않을 사람들은 어떻게 하나 물어보니 그 분들도 똑 같이 豫約을 해야 하는데 날짜와 시간이 중복될 경우 젊은 부부에게 優先權이 주어진다고 한다.
그런데 요즘 돈이 좀 있는 사람들은 現在의 방 옆에 새로이 방을 만들거나 새로 집을 짓는 등 分房, 分家해서 나가는 경우가 있다고 하니 그렇게 되면 ‘아기 만드는 방’도 필요 없게 될지도 모른다고 한다. 아쉽다! ‘아기 만드는 房’은 UNESCO 世界文化遺産으로 登載될 만한 가치가 있는데 --
o 무더위를 식혀준 시원한 물줄기 팍상한(Pagsanhan) 폭포
‘팍상한 폭포’는 마닐라 東南쪽, 차로 2시간 반 거리에 있었다. ‘팍상한 강’에서 쪽배를 타고 폭포까지 중간 중간 바위사이로 急流를 타고 넘으면서 1시간쯤 올라가니 커다란 폭포가 있었다. 기다란 쪽배 가운데 여행객 두 사람이 앉고 쪽배 앞뒤에 한 사람씩 사공이 앉아 노 젓기, 배 끌기를 하면서 上流로 올라가는데 올라가다가 바위를 만나면 사공이 배에서 내려 끌고 밀면서 힘겹게 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뱃사공들이 땀을 뻘뻘 흘리면서 고생을 많이 했다. 上流에 도착한 후 뗏목으로 갈아타고 폭포 밑을 들락날락 하면서 무더위에 시원한 폭포수 맞는 재미가 쏠쏠하다. 폭포수 맞는 게 여기 와서 가장 기억에 남는 즐거운 추억거리가 될 것 같다. 뱃사공들에게 팁을 주는데 어떤 기준이 있는 모양이나 뱃사공들이 땀 흘리며 고생하는 것을 직접 보았기 때문에 우리는 기준보다 조금 더 주기로 했다.
Guide 말에 의하면 이곳 뱃사공들은 힘겹게 번 돈을 집에 가지고 가지 않고 술집으로 가서 술을 먹으면서 피로를 푼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많이 쌓이고 疲勞를 매일 그때그때 풀지 않으면 피로가 누적되어 더 큰 병을 얻게 된단다. 술 먹는 이유가 그럴듯하다. 그러니까 결국 뱃사공 일을 하는 것은 술을 먹기 위한 것이리라. 그러면 돈은 언제 어떻게 모을까?
<루손 섬 북부 高原地帶>
아침을 서둘러 먹고 차에 올랐다. Guide가 ‘오늘은 서늘한 곳으로 避暑를 가는 중이니 서늘한 곳에서 푹 쉬었다 오시라’고 한다. 어디로 가느냐고 물으니 이 섬 북쪽 지방이 高山地帶라 시원하니 그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섬에 왔으니까 避暑를 바닷가로 가야지 왠 산속 避暑야? 하지만 섬 속 高山地帶에서 독특한 自然環境을 볼 수 있는 좋은 機會라고 생각 했다. 非鋪裝道路라 車가 쉬엄쉬엄 가니까 車窓 밖으로 農村 들녘을 구경하면서 갔다. 약 5시간 정도 가니 ‘바기오’라는 都市가 나왔다.
(전국 道路의 1/7정도만 鋪裝되었는데 그것도 큰 도시만 鋪裝 됨)
< 休養都市 바기오(Baguio)>
마닐라 북서쪽 245㎞, 海拔 1,500m에 위치한 高山都市로서 연평균 17.9°C로 氣候도 시원하고 風光도 아름다운 休養都市다. 市內 한 가운데 있는 ‘번햄’ 公園은 湖水와 綠地로 아름답게 구성되어 都市 전체가 公園 같다. 한때 美國의 統治시대에는 미국인 避暑地였고, 2차 대전 전까지는 필리핀 政府機關의 여름철 首都였다고 한다. 大學이 많은 敎育都市라고도 한다.
마닐라 市內에서는 日程을 빨리빨리 진행하기 때문에 Guide를 따라 다니기가 무척 힘들었다. 병아리가 어미닭을 따라 다니는 것처럼 종종 걸음을 쳐야했다. 그런데 이곳에 오니 마음이 平安하다. 公園 綠地에 앉아서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모처럼 一行들과 잠시 談笑를 나누었다.
미국이 필리핀을 48年간 統治하면서 이곳을 避暑地로 이용했다면 왜 道路鋪裝은 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階段式 논으로 有名한 바나우에(Banaue)>
이곳에서의 볼거리는 경이롭기까지 한 階段式 논이다. 2000年 전부터 이곳 原住民인 ‘이프가오족’이 만들었다고 한다. 골짜기의 양옆이 온통 階段式 논인데 地域이 굉장히 넓었다. 올려다보면서 계단을 세어보려고 했으나 계단이 너무 많아 세기가 힘들어 포기해 버렸다.
<필리핀의 現在 政治상황>
필리핀은 1950년부터 1970년 초까지는 아시아에서 日本 다음으로 經濟 事情이 좋은 나라였는데 1965년 마르코스 政權이 들어선 후 獨裁와 不正腐敗, 그리고 이에 반기를 든 學生 시위, 都市 게릴라 태러 행위, 또 이로 인해서 촉발된 經濟 沈滯, 극심한 貧富隔差 등으로 經濟가 침체되고 있다고 한다. 마르코스는 1969년에 大統領에 再選되어 73년에 임기가 끝날 예정이었는데 72년에 親衛 쿠데타를 일으켜 戒嚴을 宣布하고 계속 집권하고 있으면서 자기의 政敵인 民主人士들을 잡아가두고 있어 필리핀 국내는 물론 美國을 비롯한 西歐 先進國들은 이번 쿠데타가 마르코스의 長期 執權을 위한 포석이 아닌가 하는 눈으로 지켜보고 있다고 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나라를 잃고 수세기 동안 떠돌아 다녔지만 결국 나라를 되찾았다. 필리핀 國民들도 300년이 넘는 기나긴 세월동안 植民地 생활을 하면서 잘 버텨왔기 때문에 지금의 獨裁政權도 잘 이겨내고 끗꿋이 다시 일어서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우리는 6·25 전쟁 때 필리핀의 도움을 많이 받은 나라로서 그 恩惠에 報答해야 한다. 돕는 방법은 여러 가지 있겠지만 民間次元에서는 필리핀으로 旅行 많이 가기, 필리핀 물건 사주기 등이 있을 것이다. 이제 독재 정권에서 벗어나 필리핀 國民들이 활짝 웃는 날이 하루 빨리 오기를 期待하면서 두 손을 모아 본다.
<필리핀의 당면 과제>
필리핀에는 해결해야 할 몇 가지 과제가 있었다.
첫째, 銃器 所有의 문제다. 이곳에서는 銃器를 아무나 소지 할 수 있고 價格도 저렴하다고 한다. 銃器 所有의 자유 때문에 治安이 不安한 것이다. 都市의 銀行이나 큰 가게는 私設 安全要員(警備員)을 배치하고 있지만 시골이나 섬 지역의 유명 觀光地에서는 저녁 시간에 다니기가 불안 하단다. 마르코스 정권의 獨裁와 不正腐敗에 抗拒하기 위해 銃器를 購入한 사람들이 많다고는 하지만 지금도 銃器 事故가 가끔 일어나고 있다는 게 문제다.
둘째, 農場主 즉 地主들의 횡포다. 마닐라 부근에 小作農들이 많은데 地主로부터 땅을 배당받은 小作農들은 농사를 지은 후 50%정도를 地主에게 받쳐야 한단다. 받치고 나면 50%가 남는데 그 돈으로 농사짓는 過程에서 들어간 人件費, 肥料대 등을 지불해야 하니 생활하기 어렵다는 것이다. 貧富隔差 解消가 아니라 오히려 貧富隔差가 深化되고 있다는 것이다. 國家에서 地主들의 착취를 줄여보려고 노력하고 있으나 쉽게 해결되지 않는 모양이다.
셋째, 東·西洋文化의 混合이다.
필리핀은 地理的으로 보아, 예로부터 東南亞의 영향을 많이 받아왔던 곳인데 그 후 스페인 植民地 330여 년, 美國 統治 48년을 거치면서 西洋 文物이 많이 들어오는 바람에 東·西洋 文化가 混合되어 버렸다. 이런 과정에서 필리핀만의 獨特한 文化를 만들어 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기 때문에 오늘날 필리핀 靑少年들의 價値觀이 이 두 文化 사이에서 葛藤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다.
어렵겠지만 이들 課題만 잘 해결한다면 필리핀 國民들은 70년대 전반의 經濟 狀況으로 되돌릴 수도 있으리라 여겨진다.
<여행을 마치면서>
‘家和萬事成’ 이란 말처럼 家庭이 和睦해야 모든 일이 잘 이루어지는데 和睦을 만들어 줄 ‘둥지’의 키를 쥐고 있는 사람이 바로 家庭主婦인 ‘아내’라 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 여행은 남자 친구들이 그동안 家庭이라는 소중한 둥지를 가꾸기 위해 고생한 아내들을 慰勞해 주기 위해 마련한 것인데 가정을 오랫동안 비워 둘 수도 없고 해서 4泊 5日로 정해 놓고 보니 일정이 좀 빠듯한 감이 없지 않았다.
豫定된 日程을 모두 마무리 짓기 위해 旅行社 직원들은 일정을 빨리빨리 進行하려고 애를 쓰지만 우리 일행들은 海邊이나 바다를 보지 못하고 마닐라市 에만 머물러 있으니 가이드의 말에 아랑곳 하지 않고 느긋한 마음으로 夫婦끼리 정답게 걸으면서 여러 가지 이야기 하는데 情神이 푹 빠져있었다. 멀리 이곳까지 觀光 왔지만 遺跡地 눈요기 보다는 夫婦간 상대편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오순도순 이야기 하는 시간이 더 소중했던 것 같다. 내 눈은 가이드가 지적한 곳을 보고 있지만 내 귀는 가이드의 설명보다는 配偶者의 말을 듣고 있었다. 사랑의 동반자로 더불어 사는 세상에 둘도 없는 소중한 내 사람이 바로 남편과 아내가 아니던가?
1년 열 두 달, 삼백 육십오일 동안 매일 같이 있으면서도 무엇이 그리 바쁜지 夫婦만의 오롯한 짬을 내기가 어려웠는데 여기에 오니 그동안 못 다한 이야기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다. 夫婦간의 對話도 때와 장소가 중요한 것 같다.
여행을 왔으니 肉身의 눈으로 많은 것을 보았어야 했는데 마음의 눈으로 배우자의 마음만 보고 온 것 같은 아쉬움이 남는다. 눈요기 관광을 위해 많은 돈을 들였지만 마음의 눈으로 본 것이 훨씬 중요하고 값진 것 이라는 생각이 들어 흐뭇하기만 하다.
만남은 因緣이지만 關係는 努力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부부관계도 相互努力의 産物인 것이다. 夫婦가 각기 상대편을 먼저 配慮하는 利他心을 가진다면 家庭의 幸福은 저절로 찾아오리라 믿는다.
주어진 環境은 선택할 수 없어도 그것을 받아들이는 내 마음은 選擇할 수 있다고 했으니 幸福도 不幸도 모두 내 마음 먹기에 달렸다고 할 수 있다. 이번 旅行이 夫婦간에 서로가 서로에게 얼마나 所重한 存在인지를 깨닫게 해주는 계기가 된 것 같아 매우 뜻 깊은 여행이었다고 생각한다.
‘軍隊가면 사람 되어서 오고, 外國가면 愛國者가 되어 온다.’는 말이 있다. 내가 외국 다녀오면 잠시나마 愛國者가 된 느낌이다. 다른 나라에 가 보아야 우리나라가 얼마나 좋은 나라인지 새삼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필리핀의 한 政治 指導者가 私利私慾에 눈이 어두워 10여 年 이상 長期 執權하면서 不正腐敗를 저지른 결과 한 나라 經濟가 몰락되어 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리나라 指導者는 아직까지 그런 분이 없었다는 게 얼마나 多幸인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나라도 현재 장기집권은 하고 있지만 私利私慾으로 不正腐敗를 저질렀다는 말은 아직 들리지 않으니 다행스럽고, 고맙고 감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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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졸업60주년 기념문집 원문보기 글쓴이: 문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