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 비타콘 원고 - 배울 학(學) 코너
주제: 21세기 가톨릭 신자의 신앙 감각
6월호 – 냉정과 열정 사이, 신앙의 여정
송용민 신부
냉정과 열정. 우리의 마음을 뒤흔드는 두 가지 흔적들이다. 내 마음의 문이 닫히면 한없이 냉정해지고, 누군가에게 내 마음을 여는 순간 열정이 생긴다. 무릇 사람에게만 그런 것은 아니다. 내가 하는 일, 내가 맡은 일에 대한 관심과 호기심이 크면 일에 대한 열정이 생기지만, 관심도 없고 호기심도 사라지면 냉정해지는 것이 순리다.
나는 개인적으로 로맨틱 영화를 좋아한다. 유독 사랑을 주제로 한 영화들에 감동하는 것은 아마도 어린 시절 내가 감동적으로 본 아씨시의 성프란치스코 영화 때문일지도 모른다. 성인의 삶도 감동이지만 영화 속의 프란치스코 성인과 글라라 성녀의 애틋한 사랑 이야기가 어린 시절 “나도 저런 사랑을 해봤으면...” 하는 소박한(?) 꿈을 꾸게 만든 탓이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서 로맨틱 장르의 영화들을 많이 봐왔지만 유독 마음에 남은 영화 한 편을 꼽으라면 ‘냉정과 열정 사이’(2001년작) 일테다. 내용은 다소 진부하면서도 애절한 남녀간의 사랑과 이별, 그리고 재회의 이야기이지만 이 영화의 주제가 말해주는 냉정과 열정이 서로에 대한 오해와 갈등, 그리움과 진심 사이를 오가는 우리 신앙의 이야기와도 맞닿아 있다. 한 사람에 대한 열정이 한순간에 오해로 냉정하게 돌변하면 사랑도 미움을 넘어 무관심으로 변해간다. 그러나 처음 서로에게 가졌던 순수함과 열정은 비록 사랑이 떠나간 뒤에라도 깊은 그리움으로 남고 그 그리움이 미련이 아닌 상대방에 대한 순수한 기억의 재현이 될 때 냉정은 정화되고 열정은 삶의 흔적으로 되살아나기 마련이다.
신앙도 이와 비슷하다. 막연하지만 하느님의 이름을 찾을 때 신앙은 갈망이 된다. 그 갈망이 구체적인 신앙 공동체 안에서 지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의무감으로 길들여지며 사람들과의 친교를 통해 확장되기도 한다. 그런데 그 갈망이 무뎌지는 순간이 생긴다. 하느님에 대한 궁금증이나 성경과 교리에 대한 배움의 열정이 사라지면 하느님은 내 삶의 관심에서 멀어진다. 미사 참례와 성사 생활이 처음 갖게 해준 행복감이나 거룩함에 대한 체험도 습관이 되면 감동도 줄어든다. 교우들과의 만남 속에서 세속적인 필요를 채워주고 인간적인 친교가 더 커지면 신앙은 친밀감 속으로 숨어들고, 자칫 왜곡된 신앙이나 변질된 믿음으로 뒷걸음치기도 한다.
신자들의 열정은 미사 전례 참여, 영성체와 고해성사와 같은 성사 생활, 성경 통독과 필사 등의 도전 의식으로 성장한다. 그러나 이 열정을 지속시키는데 적지 않은 장애들이 있음을 안다. 즐거움이 의무감이 되고, 자발성이 압박감으로 변하는 순간 신앙은 짐이 되고, 장애물도 되고, 부활 없는 십자가로 퇴색해버린다. 열정이 냉정함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여기에 믿었던 신부님이나 수녀님의 배신(?), 신자들의 모범적이지 못한 표양, 교회의 가르침이 현실과 괴리감을 느낄 때 차가워진 마음은 하느님과 교회로부터 닫혀버리고, 냉정함은 냉담으로 바뀌고 만다.
코로나19를 2년 넘게 보내면서 어느 정도 일상으로의 회복은 이루어졌지만, 그사이 우리는 교회 생활에서 적지 않은 것들을 잃었고, 재발견하였다. 신앙을 일상의 일부로 받아들이던 삶의 태도가 바뀌었고, 미사 참례와 성사 생활에 대한 열정은 비대면이라는 초유의 사태로 적당히 타협해도 되는 것으로 해석되었다. 교회 봉사와 책임은 개인적인 삶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뒷전으로 물러났고, 열정으로 보내던 봉사의 시간이 개인의 취미 생활과 세상의 즐거움을 찾는 편안함에 밀려났다.
그렇다고 우리가 신앙에 대해 냉정해진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우리가 신앙의 본질을 보지 못하고 신앙의 화려한 표징들이나, 요란하게 치장된 교회 생활의 즐거움에 너무 심취해 왔다는 반성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더 많은 신자들을 모으고, 성당을 가득 채운 신자들과 늘어나는 헌금통의 액수에 집착했던 과거의 행태를 반성하게 하는 계기도 되었다. 여전히 신심 깊은 신자들이 교회를 지키고 있기에 아직까지 교회는 건재하다는 착각도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성당에서 줄어드는 청소년들과 청년들. 젊은 세대로부터 외면 받고 있는 교회의 현실에 눈 감고 전통적인 가톨릭 신심을 지닌 어르신 세대의 열정에 우리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볼 수 있게 되었다.
우리 신앙은 언제나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간다. 하느님과의 거리두기를 하며 살다보니 자꾸 커지는 마음의 상처와 슬픔을 견디기가 어려워진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가 바꿀 수 없는 세상의 현실의 벽 앞에서 아무리 불평하고 소리 질러도 변하는 것은 없다. 불공정한 사회와 경제적 양극화, 이념과 가치관의 차이를 인정하지 않는 독단과 편견의 늪에서 우리는 자괴감과 자책에 쉽게 빠진다. 냉정은 그래서 차라리 무관심이라는 자기애로 둔갑해버린다. 그래서 냉정이 열정으로 바뀌려면 엄청난 회심의 계기가 있어야 한다.
올해로 나는 사제 생활 25주년을 맞는다. 어린 시절 은경축을 맞은 신부님들을 연륜이 지긋한 어르신으로 보던 때를 생각하면 지금의 내 모습은 여전히 어린아이 같다. 사제 생활의 깊이와 지혜가 영성으로 체화되기보다 세속적 지혜와 꼼수만 늘려온 세월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하지만 사제 생활을 통해 한 가지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 있다. 모름지기 사제의 삶은 그가 한 인간의 삶에서 체험해온 냉정과 열정 사이를 오갈 수 있는 열린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제라고 언제나 열정을 쏟으며 살 수는 없고, 그렇다고 신자들의 눈빛과 갈망을 외면하고 자기 삶에 몰두할 수만도 없다. 열정에는 어느 정도 절제가 필요하고, 냉정에는 따뜻함과 자기 성찰이 필요하다. 그래서 냉정과 열정의 양 극단에 너무 오래서면 그것이 사제의 고집이 되기도 하고, 편향이 되기도 한다. 그래서 언제나 중용이 중요한가보다. ‘사이’를 지키는 일 말이다.
6월은 예수성심성월이다. 예수님의 뜨거운 성심의 열정은 십자가의 차디찬 냉정과 맞닿아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닮으려면 인생에서 하느님을 향한 예수님의 열정(passion)을 닮아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하느님께 다가설수록 예수님이 보여준 삶의 어두움, 외면할 수 없는 십자가의 무게도 견딜 수 있어야 한다.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태 16,24)는 예수님의 말씀에는 “내 멍에는 편하고 내 짐은 가볍다.”(마태 11,30)는 말씀이 숨겨져 있다. 편하고 가벼운 인생이라고 멍에와 짐이 없는 게 아니다. 우리의 열정 속에는 냉정에 대한 유혹이 있고, 우리의 냉정 속에는 열정에 대한 씨앗과 기억들이 남아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모든 것에는 시작이 있다면 마침도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마침은 언제나 새로운 시작을 위한 멈춤이어야 한다. 그리고 열정을 다시 얻기 위한 숨고르기를 잘할수록 우리 신앙은 성장하는 여정이 될 것이다.
첫댓글 신앙의 바른길을 제시하신 신부님 글 감사합니다.
신부님 글은 변함없이 반갑네요
변치않는 뚝심의 옹심이가 있어 좋아요
세월이 어찌나 빠른지~은경축 축하드리고
늘 건강하시길 기도합니다
추신: 매주 강론말씀을 글로 읽었으면 좋겠네요
오랫만에 읽게된 신부님 말씀이 하느님의 말씀처럼 들리네요
시들해진 신앙에 대한 회의와 자괴감 속에 있는 제게 다시 사랑을 얻기 위한 열정을 위한 숨고르기 일수 있겠다는 격려로 들려
다시 일어나 걷자 하는 용기를 불어넣어 줍니다.
감사합니다! 신부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