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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 한 잔을 들고 트롯을 듣는다.
박 언 서
커피를 한 잔 먹어가며 트롯을 듣는다.
요즘 종합편성 프로그램 방송에서 트롯 열풍이 거세게 일고 있다.
각 방송사 마다 제목만 조금씩 다를 뿐 대한민국의 트롯 역사를 새로 써 내려가고 있는 것 같다. 모든 프로그램은 경연 방식으로 진행된다. 많은 도전자들이 갈고닦은 실력을 뽐내보지만 마스터들의 냉혹한 평가를 견뎌가며 생존해 나가는 모습을 볼 때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저 사람들은 과연 무엇을 위해 노래를 부를까?
노래 한 소절 가사 한마디 한마디의 결과에 따라 다음 라운드 진출과 탈락의 경계선을 오르락내리락하며 회차를 거듭할수록 도전자들의 문은 점점 좁아진다. 작은 실수 하나로 무대를 떠나야 한다는 중압감이나 잘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극복하고 끝까지 살아 남아야 한다. 참가자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꼭 살아 남아야 할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또한 참가자들의 연령을 보면 아직 어린 나이부터 환갑이 넘을 사람까지 다양하다. 누구는 먹고 살기 위한 몸부림일 수 도 있고 누구는 인생의 도전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기도 한다. 보는 사람들은 나름의 타고난 재능이나 끼가 있다고 말을 하지만 과연 그런 것일까?
난 아니라고 본다.
물론 타고난 재능이나 끼가 있어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하지만 그 재능이나 끼만 가지고 대한민국에서 트롯 가수로 성공을 할 수 있을까? 수 백 수 만 번을 부르고 또 부르고 목이 찢어지고 피를 토하는 고통을 참아가며 연습에 연습을 해도 10위권에 들기도 어려운 현실이다. T/V를 보는 순간 코끝이 찡하고 눈물이 핑 돌 때가 있다.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하면서도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하는 탈락자를 보면 안쓰럽기까지 하다. 그렇다고 어마어마한 실력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경연으로 최후의 1인을 가려야 하는 방식이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요즘에는 마스터들의 점수와 시청자들의 투표 점수가 합산 반영되는 평가 방식이다 보니 더욱 냉혹하다. 물론 시청자들은 다양하고 개성 있는 신인 가수들을 보는 것으로 만족하며 투표에 동참하지만 그 당사자들은 얼마나 부담스러울까 이해가 된다.
이제 대한민국에서 트롯 한 곡 정도 못 부르는 사람은 없다.
설사 음치나 박치라 해도 음악만 나오면 흥얼거릴 수 있다. 노래는 한 시대를 표현하는 문화이며 우리의 삶에 애환을 달래주는 중요한 공연예술이다. 그만큼 우리 삶에 밀접한 관계가 있다는 말이다. 유신정권에서는 노랫말을 문제 삼아 금지곡이라는 낙인을 찍어 방송이나 공연을 못하게 하는 시절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 대한민국의 트롯은 그 치옥과 오명의 시대를 넘어 역사를 새로이 써내려 가고 있는 것이다.
60년대 청춘을 말한다면 팝송과 영화음악으로 표현되었다.
그러나 요즘 MZ세대는 트롯으로 표현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남녀노소 누구나 흥겹게 부를 수 있는 음악이 바로 트롯이다 보니 한 시대의 장르로 자리를 잡았다는 말이다. 도시나 농촌 어디에서도 어른이나 아이 가릴 것 없이 트롯의 흥겨운 노래만 나오면 어깨가 들썩인다.
트롯은 그 옛날 막걸리 같은 구수한 노래가 아니다.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도 젊은 트롯 가수가 노래하는 영상을 보며 커피를 먹고 트롯을 흥얼거리는 시대다. 대한민국의 트롯 역사에 영원히 남을 한 획을 그은 것이다.
노래는 우리의 삶에 있어 기쁨을 표현하기도 하지만 애환을 달래주기도 했다. 세상사를 노랫말에 담아 목놓아 한 곡 뽑아대면 속이 다 후련해진다.
오늘 아침에도 커피를 한 잔 타 놓고 10살 나이가 믿기지 않는 “님은 먼 곳에” 영상을 보았다.
아! 내 아버지!
박 언 서
아버지!
문득 거울을 보다 아버지 모습을 보았다.
언제부터인지 모르지만 욕실에서 세수를 할 때 거울을 바라보면 아버지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내가 마지막까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다. 얼굴도 복장도 똑같다. 이른 아침 반바지 차림에 허름한 메리야스를 걸치시고 왔다 갔다 하시던 모습이나 표정도 그대로 보인다.
지금의 내 모습이 오래전 아버지의 모습인 것이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걸어오신 길을 나 또한 오늘도 걷고 있다. 그 세월 동안 아버지라는 길을 걷고 있지만 나도 나이가 들어감에 아버지 모습이 점점 더 또렷하게 보이는 것이다.
나도 아버지가 되었지만 마주하는 곳이 비록 거울일지라도 아버지를 볼 때 마다 아련한 마음이다. 함께 할 수 없다는 현실과 생전에 늘 부족한 아들이었다는 자책감 그리고 지금의 우리 형제와 손자들을 볼 수 있었다면 얼마나 행복해 하실까 하는 마음에 더욱더 아련하다.
세월이 흘러 이제 나도 아버지가 걸어온 길을 따라 그렇게 아버지의 길을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비록 거울에서만 만날 수 있는 아버지의 모습이지만 그렇게라도 만나 뵐 수 있어 좋다. 나도 아버지 같은 아버지로 살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였다.
세월 앞에 장사 없다고 하니 순리에 따라 살아가는 수 밖에 없다.
말없이 흘러가는 세월은 아버지도 아들도 구분하지 못하고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흘러가고 있다.
우리 아버지는 직장에 다니시고 어머니는 초등학교 앞 구멍가게를 하셨다. 집 주변 조그만 밭에 채소도 심고 산을 개간해서 만든 밭에 콩도 심었다. 버스도 없던 시절 도로는 시골 꼬부랑길이라 읍내에 자주 나갈 수가 없으니 시장을 가는 일 또한 여의치가 않은 때였다. 그러다 보니 농사가 주업이 아니지만 시골에서는 반찬거리를 위해 무엇 하나라도 심어야 했다. 유일한 교통수단은 우마차나 자전거였지만 그 또한 아무나 가질 수 없어 먹고 살만한 집에나 있었다.
우리는 시골에 살았지만 아버지는 농사에 별 관심이 없었다.
또한 아주 산골이라서 농사지을 땅도 많지 않았고 눈에 보이는 것은 커다란 저수지 뿐이였다. 예전에는 황금 옥토였다지만 1964년도부터 물을 가두기 시작하며 수몰되어 농지가 물에 잠기게 되었다. 그런 산골 시골에서 땅을 일구고 곡식을 심고 자식을 교육시키기가 얼마나 어려운 현실이었는지 겪어 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고난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농사 도구도 변변치 못한 시절이다.
농사 도구라고는 대장간에서 만든 호미나 쇠스랑, 괭이가 전부다. 괭이로 파고 쇠스랑으로 이랑을 만들고 호미로 심고 밭을 매야 한다. 밭을 가는 쟁기 또한 한정적이었다. 농가에서 소를 키워도 쟁기를 끌 수 있는 소는 드물었다. 소가 쟁기질을 하려면 몇 날 며칠 멍에를 씌워서 물건을 달고 끄는 연습을 시켜야 쟁기질도 하고 마차도 끌 수 있었다. 그러다 보니 쟁기질로 밭을 갈기 보다는 삽이나 괭이 쇠스랑으로 파고 일구어 곡식을 심었다. 그런 농사일에 관심이 없는 아버지라 해도 시골에서는 어쩔 수 없이 힘든 일은 남자인 아버지 몫이었다.
시골살이는 하루도 쉴 날이 없다.
눈만 뜨면 논으로 밭으로 나가야 한다. 하지만 우리 아버지는 동네에 있는 직장에 다니셔서 평일에는 농사일을 못하셨고 어머니는 가게 보는 중에도 틈틈이 일을 하셨다. 아버지는 직장이 끝나면 동료들과 어울려 술자리는 자주 하셨다. 그 당시 시골에서는 직장이 끝나도 딱히 할 일이 없으니 술자리가 유일한 즐거움이었을 것이다.
술자리는 당연 가게 집인 우리집었다.
그러다 보니 아버지가 동료들과 어울리는 술자리에서 막걸리 주전자를 들고 술을 따라 드리던 기억이 난다. 어릴 때 사진을 보면 형과 내가 어른들 술자리에서 두 손으로 주전자를 들고 술을 따라 드리는 모습이 있다. 나는 그렇게 어려서부터 어른들에게 술을 따라 드리는 주법을 배운 것일까?.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술을 딸고 받는 술맛을 어땠을까? 상상이 된다. 얼마나 귀엽고 예뻐했으면 아버지가 술자리에 앉혀 놓고 함께 했을까? 아버지는 술을 정말 좋아하셨지만 자식에 대한 사랑 또한 지극정성이셨다.
엄격한 아버지의 자식 사랑은 남달랐다.
아버지는 항상 잘잘못에 대한 원칙이 있으셨다. 회초리를 들 때와 말로 타이를 때나 애정을 표현할 때마다 나름의 원칙이 있었다. 회초리는 잘못한 만큼의 대 수를 미리 정하시고, 말로 타이를 때는 앉는 자세를 정확하게 해야 했고 칭찬을 할 때도 나름 아버지만의 방법이 있으셨다. 물론 아버지가 군인은 아니지만 지켜야 할 것에 대한 당신만의 원칙이 확고하신 분이셨다. 그 시절 어느 가정이나 마찬가지겠지만 아버지들은 큰 잘못에 대해 꾸지람을 하시고 평소 자잘한 잘못에 대한 꾸지람은 주로 어머니 많이 하셨다.
아버지는 일주일에 한 두 번은 읍내에 나가셨다.
직장 일 때문에 나가시기도 하고 가끔은 장을 보러 나가셨다.
아버지는 읍내에 나가시면 많이 늦으시고 우리 식구들은 밤이 늦어도 아버지를 기다리고 있다. 어린 마음에는 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하기 보다 아버지의 보따라가 궁금해서 기다렸을 것이다. 읍내에서 생필품도 사오시지만 어머니나 우리 형제들이 좋아하는 것을 꼭 사가지고 오신다. 한 번도 빈 손으로 오시는 경우가 없으셨다. 술에 취하셨어도 가족을 위한 무엇을 내놓으신다. 물론 우리집이 가게를 하다 보니 과자나 사탕이 아닌 우리 집에 없는 것이나 시장에서 파는 특별한 것을 꼭 사오셨다. 아버지 집에 오실 때는 이미 기분 좋게 얼큰하신 모습이시다. 장에 나가 친구들을 만나 술을 드시느라 늦으신 것 같다. 이렇듯 친구들을 좋아하시는 아버지 주변에는 항상 사람들이 많았다. 친구, 동네 사람, 직장 동료, 사회에서 알고 지내는 사람 등 다양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셨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아버지는 남을 속이려 하지 않는 정직함에 신뢰가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우리 아버지는 부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남에 것을 탐하지도 않았고 허풍을 떨지도 못하며 부자가 되려는 마음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아버지는 늘 행복해 하셨고 아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다.
우리 아버지는 한 성질하시는 분이지만 의리가 있으신 분이다.
특히 직장이나 읍내에서도 아버지를 형님이라 부르며 따르는 사람들이 많았다.
우리 집은 사람들이 즐기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거기에 어머님 음식 솜씨까지 좋으셨다. 구멍가게를 하다 보니 동네 큰길가에 위치해서 우리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이나 물건을 사러오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주말이나 공휴일에 아버지는 아는 사람이 길가를 지나가면 불러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자연스레 술자리가 시작된다. 또한 일부러 매운탕이나 어죽을 먹으려고 찾아오는 사람들도 많았다 오죽했으면 우리집 고추장 항아리는 늘 부족했을 정도다. 언제라도 쪽대와 양동이 하나만 들고 나가면 매운탕꺼리를 잡을 수 있었다. 그물질 몇 번이면 충분하다.
이런 아버지의 일상은 항상 행복하셨다.
시골에서는 농사지은 것을 머리에 이고 지게에 지고 시장에 내다 팔아야 돈을 만질 수 있는 시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말단이지만 월급쟁이고 어머니는 가게를 하셨으니 항상 현금이 있어 생활이 궁핍하거나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그런 아버지의 자식 교육에 대한 엄격함은 원칙을 벗어나는 일이 없으셨다. 자식을 정직하고 바르게 키우고 싶은 마음은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정직을 중요하게 생각하셔서 거짓말에 대한 변명이나 체벌은 피해 갈 수 없었다. 어린 시절 형제간에 자잘한 다툼은 항상 있는 일이라서 일상적이지만 유독 남을 속이는 행동에 대해 무척 싫어하셨다. 그런 아버지의 회초리 덕분에 온갖 거짓이 난무하는 세상이지만 지금까지 나름 정직하게 살려고 노력을 해왔다. 그리고 내 자식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며 살았다.
엊그제 방송 예능 프로그램에서 착한 거짓말과 나쁜 거짓말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나는 거짓말에는 착하고 나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거짓말은 이미 거짓으로 시작되었기 때문에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착한 거짓말이라고 핑게를 대는 사람들은 자기의 거짓말을 합리화하기 위해 긍정적으로 포장해서 말하는 것일 뿐이다. 거짓은 애초에 신뢰성이 떨어진 것이기에 그 어떤 변명이나 구실을 댄다 해도 바뀔 수 없다.
지금 생각해 보면 어려서 거짓말 때문에 아버지의 꾸지람을 자주 들었다.
어린 마음에 친구들과 놀고 싶어 숙제를 안하고 나가거나 하는 일 때문에 듣는 꾸지람은 일상적인 것이었다. 인생에 있어서 공부가 중요하다 생각할 나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니 놀고 싶은 마음이 앞서 뒷일은 생각도 못하고 뛰쳐나가는 것은 아이의 당연한 행동일 수밖에 없다. 아버지는 그런 산만만 아이를 붙잡아 놓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천방지축 날뛴 짐승이나 무엇이 다를까? 그러다 보니 아버지는 조용조용 타이르기도 하고 꾸지람도 하고 화가 많이 나신 날에는 회초리도 들었다. 나는 아버지 말씀을 들어도 그만 맞아도 그만이다. 동네 친구들과 노는데 정신이 팔려 꾸지람이나 회초리는 이미 내 머릿속에 없었다. 아버지가 기분이 좋은 날에는 꾸지람도 안 하시고 넘어가는 날도 많았으니까.
어느 날인가 아버지가 읍내에 나가셨다가 중고 자전거 한 대를 사오셨다.
자전거 뒤에는 물건을 싣을 수 있도록 되었다. 아버지는 거기에 형과 나를 교대로 태워서 학교 운동장을 몇 바퀴씩 돌아 주셨다. 장에 나가시면 자전거 뒤에 짐을 싣고 혹여 떨어질까 고무 밧줄로 꽁꽁 묶어서 오셨다. 가끔 술이 얼큰하신 날에는 밧줄이 허술해 흘리기도 하신 모양이다. 그런 아버지를 엄마가 가만 놔둘리 없다. 한 바탕 소란 아닌 소란이 끝나고 나면 장 보따리를 풀어 놓으신다. 풀어놓은 보따리에는 생선이나 돼지고기 등 반찬꺼리와 장에서 파는 엿도 있고 아이의 눈에는 마냥 신기할 뿐이다. 아버지는 이미 기분이 좋을 만큼 얼큰하시고 형과 나는 오로지 먹을 것에만 관심이 있다. 그때는 아버지가 사오신 가락엿이 어찌나 달고 맛있는지 모른다. 그래서 요즘에도 가끔 시장에 가면 엿을 파는 곳에서 사 먹어 보지만 지금은 그때 그 맛은 아니다. 그 또한 추억일 뿐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어울리며 지내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중고 자전거를 사오신 이후부터는 읍내까지 약30여리 길을 자전거를 타고 나가신다. 우리 동네에 유일한 자전거였고 동네에서 물건을 나르는 수단으로 말이나 소가 끄는 마차가 전부였던 시절이다. 아마 우마차를 끄는 소는 1마리였고, 말마차를 끄는 말은 옆 동네에 2마리 정도로 기억된다. 말마차는 공사장에서 쓰는 모래를 퍼서 날랐고 가을에 쌀가마를 실어 날랐다. 또한 장날에는 읍내에 나갈 사람이나 짐을 가득 싣고 다녔다. 짐을 가득 실은 우마차를 타고 싶어 뒤를 쫏아가 뒤꽁무니에 올라타려고 하면 말마차 주인이 어찌나 혼을 내던지 참 많이도 혼났다. 짐을 가득 실은 마차를 끌고 가는 소가 어려우니 아이 하나라도 더 타면 소가 얼마나 어려운지 마차 주인은 알고 있기에 어린아이 조차도 마차에 타는 것을 못하게 한 것이다.
아버지는 술을 즐기셨지만 안주는 드시는 것이 한정적이었다.
술을 드실 때 안주는 주로 건어물 종류로 북어, 오징어, 노가리 등 배부르지 않은 것을 드셨다. 물컹거리거나 국물이 있는 안주보다 딱딱한 것을 씹어서 먹는 안주를 좋아하신 것 같다. 술의 종류는 막걸리나 소주, 맥주를 드셨는데 먹는 사람이나 분위기에 따라서 달랐다. 물론 안주는 항상 마른안주다. 가끔 아버지의 술자리에서 술도 따라 드리고 하면 안주로 드시던 북어나 오징어를 한 조각 나누어 주셨다. 짤짤하고 맛있다. 그래서 그런지 나도 술을 먹으면서 배가 부른 국물 안주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버지의 영향이 아닐까? 부전자전이 아닌가 싶다.
그 시절 시골에서 농사짓는 사람들은 소주보다 막걸리를 주로 먹었다. 그러니 가게에서는 양조장에서 통으로 배달되는 막걸리를 커다란 항아리에 담아 놓고 주전자로 술을 팔았다. 한 되 두되 됫술이다. 막걸리는 힘든 농사일에 새참으로 먹기도 했다. 밀가루로 만든 막걸리 한 사발 들이켜면 배가 든든하다. 막걸리 안주는 따로 없다 그저 김치나 짭짜름한 장아찌 한 조각이면 된다. 아니면 누구네 밭이라 할 것도 없이 우리집 근처에 있는 마늘밭에서 한 뿌리 뽑아 흙을 툭툭 털고 껍질을 까서 고추장에 찍어서 먹으면 그만이다.
그 시절에는 문명의 혜택이라고는 찾아보기 어려운 시골에서 자연이 주는 대로 먹어가며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어렵고 힘든 일이겠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 자체가 힐링이며 친환경이고 안전한 먹거리를 먹고 살았다는 말이다. 소나 돼지를 키워서 나오는 배설물이나 볏짚을 썩여서 만든 거름을 밭에 내어 화학비료를 대신하고 호미로 밭을 매가며 농약을 대신했다.
막걸리에 관한 추억은 나이가 든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어른들의 막걸리 심부름에 주전자를 들고 오다가 한 모금 먹은 기억이다. 논두렁이나 밭에서 일을 하다 막걸리 심부름을 시키면 어린 나이에 어른들이 왜 무슨 맛으로 먹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주전자 가득 채워준 막걸리가 조금씩 흘리는 것이 아까워 주전자 꼭지에 입을 대고 한 모금 빨아 먹으면 막걸리는 달달한 맛이 난다. 비로서 어린 나이에 술을 입에 대는 첫 순간이다. 그 맛이 더 궁금해서 한 모금 더 빨아 먹게 되는 막걸리는 가난한 농부의 배고픔을 채워주고 애환을 달래주는 술이었다. 하지만 이제 농촌에서 우리네 아버지들이 즐겨 드시던 막걸리도 발전을 거듭해 우리나라 전통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아버지의 술을 넘어 MZ세대들이 즐겨 먹는 술로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이다.
우리 가게에서 파는 막걸리는 저수지 건너 양조장에서 배달을 해주었다. 막걸리를 배달하는 통도 처음에는 와인을 만드는 오크통처럼 나무로 된 통이었지만 나중에는 플라스틱으로 만든 하얀 통으로 배달되었다. 커다란 통을 배에서 내려 자전거에 싣고 마을마다 있는 가게로 배달을 했다. 배달 환경 또한 열악하다. 시골길은 좁고 비포장이며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도 자전거에 한 통이라도 더 실어야 했다.
우리 동네에 유일한 교통수단은 저수지를 오고 가는 행정선(배)이었다. 하루에 서 너 번씩 면소재지에서 출발해 동네 선착장에 도착한다. 우리 가게에서 판매하는 담배도 저수지 건너에 있는 도매점에서 공급을 받아 팔았다. 막걸리도 담배도 과자도 학용품도 저수지를 오가는 배를 이용해서 가져다 팔았다. 행정선 외에는 나무판자로 만든 작은 배도 있었다. 낚시꾼을 위해 만든 배다. 나무로 만든 좌대를 대여해서 돈을 받으려면 배로 태워다 주어야 한다. 그런 용도의 배는 팔로 노질을 해야 한다. 배를 만드는 목수는 몇 안되었지만 우리 동네 목수가 가장 잘 만들었다. 넓은 나무판을 가지고 만드는 배는 나무를 이어 붙이고 그 틈은 목화솜으로 메우고 골탄(아부라)이라는 검정 물질을 그릇에 끓이고 녹여서 물이 들어오는 것을 막았다. 그런 배를 우리집도 한 대 가지고 있었다.
우리 아버지는 새로운 물건 사시는 것을 좋아하셨다.
자전거도 T/V도 동네에서 우리집이 가장 먼저 삿다. 새로운 문명 혜택은 가장 먼저였다. 전축이나 부엌에서 사용하는 석유 곤로나 선풍기 등 모든 것의 시작은 아버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시절 전기가 들어오자마자 아버지는 T/V를 사오셨다. 그런데 방송전파가 잡히지 않아 볼 수가 없자 아버지는 안테나와 선을 사오시고 약 2Km 정도를 연결해 산꼭대기에 안테나를 세워 부스터를 달고서 T/V를 볼 수 있었다. 안테나를 세울 때 아버지는 집 마당에서 나는 산꼭대기에서 방향을 돌려가며 소리를 지르고 T/V가 잘 나오는 방향에 고정을 시켜야 했다. 그러다 바람이라도 심하게 불면 안테나 방향이 틀어지기도 하고 가끔은 선이 끊어지기도 한다. 그때마다 아버지는 안테나를 향해 산으로 가야했다. 또한 T/V를 설치하고 난 후부터 저녁이 되면 동네 어르신들이 한 두 명씩 모여들기 시작한다. 연속극을 보러 오는 사람들이다. 올림픽이나 세계대회가 있는 날에는 방이 꽉 찬다. 특히 복싱이나 축가 경기가 있는 날이면 형이나 나는 앉을 자리도 없을 지경이었다.
아버지는 그런 일상 또한 즐기시는 분이셨다.
그 시절 늦가을에는 겨울에 군불 땔 나무를 미리미리 준비해야 했다. 도로기 비좁아서 연탄 공급이 원활하지 못했지만 가격도 비싼 때였다. 우리집은 겨울이 되기 전에 일하는 인부를 몇 명 고용해 나무를 해서 집 앞 밭에 쌓아 놓고 겨우내 잘게 잘라 아궁이에 불을 때서 난방을 했다. 그런 겨울 어느 날이었다. 학교 숙제를 하지 않아서 아버지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눈이 펑펑 내리는 겨울이지만 아버지가 물으셨다. 형과 나 둘 중 공부하기 싫은 사람은 산에 가서 나무를 해 오라고 하시기에 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일어나 지게를 지고 산으로 향했다. 어머니는 말리셨지만 정말 공부 보다는 노는 것이 좋아서 그랬다. 그리고 산에 가서 나무를 한 짐 지고 집으로 돌아왔다. 시간을 되돌려 보면 그런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심정을 어떠셨을까? 그런 아들을 붙잡고 말리던 어머니의 심정은 어떠셨을까?
지금 나는 코끝이 찡하다.
그런데 그때 철없는 자식의 행동을 바라보는 부모님의 심정을 정말 어떠셨는지 이해가 된다.
이제야 나도 아버지가 되어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어 죄송한 마음이지만 그때는 철없던 시절이기에 그저 코끝이 찡하고 눈가가 촉촉할 뿐이다. 잠시이지만 아무 생각도 말도 하고 싶지 않은 시간이다.
아버지!
부르는 순간 가슴이 찡해지는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는 부자지간이라고 한다. 그리고 누구나 아들이 아버지를 선택할 기회도 권리도 없고, 아버지가 아들 또한 선택할 권리도 기회도 없다. 그냥 운명처럼 만나 한 세상을 살아가는 것이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관계의 시작이다. 하지만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준 사람이 부모님이다. 세상 모든 고통도 감내해야 하고 자식의 잘못도 감싸야 하고 자식을 위해 목숨을 내주어도 아깝지 않은 것이 부모의 마음이다. 한 가정의 가장으로 가족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삶에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시고 평생을 사셨다.
그런 아버지를 생각하며 이 글을 쓰고 있는 순간에도 마냥 그립고 미안할 뿐이다.
어느날 문득 사무실에 우편으로 오는 신문을 보다 전원생활 수기 공모가 눈에 보여 글제를 보는 순간 “아! 나의 아버지”가 눈에 들어왔다. 몇 날을 고민하고 생각하다 글을 시작했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은 많지만 글로 표현하기에 많은 어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기에 선뜻 글로 옮길 수 없었다.
하지만 이 글을 쓰며 그래도 아버지를 생각하며 그리워 할 수 있어 좋았다.
이제 나도 그런 아버지가 되어 자식이 결혼할 만큼 성장해 10월에 혼인을 한다.
여러가지 생각이 복잡하다. 아버지도 나도 그런 과정을 거쳤지만 결혼식장을 걸어 들어가는 아들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이제 내가 그때 아버지의 입장에 서게 되었다. 나도 아버지처럼 차분한 모습으로 서운하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숨기며 마음속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까? 물론 자식이 혼인하는 날이니 기쁘기도 하겠지만 과연 기쁨만일까? 그 기쁨 뒤에는 말 못 할 사연들이 켜켜이 쌓여 있어도 표정을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 아버지다. 요즘 자식의 혼인을 앞두고 나도 아버지처럼 걱정은 되지만 일일이 내색하지 못한다.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걱정이다.
우리는 삼형제인데 그중 내 아이가 첫 번째로 혼인을 한다. 형님댁 조카도 혼기가 넘었는데 아직 미혼이다. 이렇게 성대한 날이 다가오면 올수록 아버지 생각이 더 아련할 것이다. 항상 자식 사랑이 많으신 분이셨는데 손자가 혼인하는 모습을 보셨다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눈에 선하다. 그나마 다행인 일은 장모님이 계셔서 천만다행이다. 혼인은 당사자간의 예식이기도 하지만 축하는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런 축하 중 당연 어른들의 축하가 무엇보다 더 값지고 의미가 있다. 집안 어른들께 혼인하는 모습 그리고 잘 사는 모습을 보여드리는 것이 효도다.
아버지와 이별한지 15년이 지나고 어머니는 6년여가 흘렀다. 항상 생각나고 아련한 마음은 평생 가겠지만 삶은 평생 함께할 수 없다. 이렇게나마 거울속으로 아버지의 모습을 찾아 볼 수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간다. 훗날 내 아이도 거울속에서 나는 볼 수 있을까?
문득 다가온 아버지에 대한 회상이 근 한 달여 동안 글을 쓰며 순간순간 코끝이 찡함을 느꼈다.
아마 이런 감정은 기쁜 일이 있거나 슬픈 일이 있을 때 마다 느끼지만 글을 쓰는 동안 아버지와 함께 대화하는 기분이라서 좋았다. 또한 아버지를 주제로 글을 쓰다 보니 어머니를 자주 불러드리지 못해 죄송한 마음이다. 이 글에 담지는 못했지만 어머니가 안계셨다면 지금의 이런 글을 쓰고 있는 나도, 항상 행복함을 즐기시던 아버지도 지금까지의 삶도 없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이 아버지가 되어 그 아들이 혼인을 하면 또 아버지가 된다.
누구에게나 아버지가 없는 사람은 없다. 또한 좋으나 싫으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잊지 못하는 것이 우리의 삶이다. 우연한 글제를 보게 되어 글을 쓰며 아버지를 회상할 수 있어 정말 감사한 마음이다.
아들의 혼인을 앞둔 아버지로서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과 감사함을 새삼 생각나게 하는 글을 쓰게 되어 정말 좋다. 아버지에 대한 지난날의 회상은 그 어떠한 미사여구로 표현해도 부족하지만 서운해도 여기서 마무리를 해야겠다. 이 글을 통해 마음속으로나마 내 자식 혼인에 아버지와 어머니께 청첩장을 전해드린다.
아 나의 아버지!
겨울 새벽 첫차
박 언 서
첫차를 탓다.
오늘은 저녁에 사무실에서 술 약속이 있어 차를 집에 놓고 버스를 타려 어제부터 마음을 먹었다. 보통 자동차를 가지고 출근하면 더 일찍 일어나야 하지만 버스를 타려고 하니 1시간 정도는 여유가 있다. 아침밥을 먹고 버스 승강장으로 가니 어둑어둑 텅빈 승강장은 싸늘했다. 하긴 누가 이 새벽에 버스를 탈까 생각했지만 조금 있으니 한 사람이 나와 통근버스를 탄다. 시내버스 보다 통근버스가 더 이른 새벽에 운행을 하는 모양이다. 그렇게 승강장 의자에 앉으니 바닥이 따뜻하게 열이 올라온다. 이 따뜻한 온기는 잠시지만 추운 겨울 버스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일지라도 마음으로 다가오는 감동은 길게 느껴진다.
버스를 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출발 시간 보다 미리 나오게 마련이다. 특히 이른 새벽에는 타고 내리는 사람들이 별로 없어 차가 빨리 온다. 혹시 차를 놓칠까 염려되어 서두르게 되는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버스가 조금 일찍 도착했다. 타는 사람은 나 혼자이지만 버스에는 맨 뒷좌석에 한 사람이 타고 있다. 두서너 승강장을 지나자 한 사람이 또 탄다. 그렇게 시내 버스가 도심을 지나 외곽으로 나가기까지 내린 사람은 없고 탄 사람만 모두 네 명이다. 그 중 한 사람은 산업단지 앞 정류장에서 내리고 다른 한 사람은 학생인가 보다 고등학교 앞에서 내린다.
그 다음은 내가 내릴 차례다.
도로에는 차도 사람도 별로 없다. 가끔씩 보이는 차량은 쓰레기를 수거하는 차량 뿐 도심도 외곽도 한산하긴 마찬가지다. 이른 새벽 첫차는 주로 어떤 사람들이 이용하는지 잘 모르지만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우선 첫차를 이용할 수 있도록 운행하는 버스 기사분이 있다. 그리고 직장에 출근을 하는 직장인은 왜 그리 일찍 나가야 하는지? 고등학생은 다른 학생들 보다 왜 일찍 학교에 가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이유가 궁금하기도 하고 다른 한 편으로는 참 부지런한 사람들이란 생각이 든다. 다른 사람들은 잠자고 있는 시간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일찍 움직이기는 그리 쉬운 일은 분명 아니다.
물론 나는 항상 새벽에 일찍 출근하는 습관이 있다.
일을 하다 보면 새벽 시간이 집중력이 좋고 방해를 받는 일이 적어 중요한 일이나 급한 사무를 처리하기에는 정말 좋다. 그래서 나는 특별한 일정이 아니라면 늘 이른 새벽에 출근을 한다. 이 또한 처음에는 피곤하고 어려웠지만 이제 습관이 되니 알람을 맞추지 않아도 일정한 시간만 되면 눈이 떠진다. 이런 나를 동료 직원들은 특이하다거나 나이가 들어서 새벽잠이 없어서 일찍 나올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사실은 이렇다.
몇 해 전부터 스스로 작정하고 습관을 들여서 지금까지 왔다. 다 설명을 하자면 너무 길고, 새로 배치된 부서에서 새로운 일에 집중하다 보면 들고나는 사람들에게 인사를 할 여유가 없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나니 상위부서에 있다가 내려와서 그런지 인사성이 없고 거만하다고 수군댄다. 그래서 고민을 하다가 생각해낸 것이 바로 새벽 출근이다. 조금은 불편하고 어려워도 일직 출근해서 일을 해 놓으면 들고나는 사람들과 인사도 나누고 대화도 할 수 있다. 그만큼 시간을 여유 있게 활용할 수 있어 좋고 여러사람들과 어울릴 수 있어 나만 좋은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도 좋다고 한다.
사무실에 나온 시간이 한 시간 가량 지났지만 아직도 밖은 컴컴하다.
겨울철이라서 밤이 길고 낯이 짧다. 도로에는 가로등 불빛만 보일 뿐 지나가는 사람도 없다. 하지만 밤이 길던 낯이 짧던 내 근무 시간은 정해져 있다. 다만 내가 이른 새벽에 출근함으로서 하루가 길게 활용하는 것일 뿐 누구나 하루 24시간이라는 동일한 시간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TV에서 첫차를 타는 사람들의 애환을 담은 내용으로 방송하는 것을 본 기억이 있다.
나도 그런 사람 중 한 사람이겠지만 조금의 불편함을 감수함으로서 내가 받을 수 있는 보상은 더 크고 많기에 새벽 첫차를 타는 것이 아닐까?
어느 개그맨이 한 말이다.
해봤어? 안해봤으면 말을 하지 말어!
이른 새벽 첫차를 타 본 사람들만 알 수 있는 하루의 삶에 대한 가치는 아무나 느낄 수 없는 첫차의 묘미가 있는 것이다.
물론 나는 출근을 일찍 하지만 어느날 첫차를 타며 새로이 마음을 다잡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코로나19와 농촌
박 언 서
내가 농사를 짓고 있는 마을에서 정월대보름 풍년기원제를 지낸다는 방송을 들었다. 오랜만에 코로나19 마스크 해제(일부)가 되고서 찾아가 본 마을회관이자 경로당이다. 그래도 부모님이 생존에 계실 때에는 종종들려서 작은 성의라도 표시하곤 했다. 그런데 엊그제는 아무 생각도 없이 경로당에 들어갔다. 마을행사가 있다기에 일찌감치 서둘러서 들어갔는데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귤이라도 한 박스 사가지고 올 것을 그냥 왔다. 하는 수 없이 다시 읍내에 나가 귤도 한 박스 사고 돈도 찾아서 왔다. 내심 죄송한 마음이 가시지를 않는다. 평소 주말에 시골에 가면 일하기에 바쁘다 보니 허둥지둥 시간에 쫓기다 왔다. 경로당 한 번 제대로 들려서 인사도 못하고 다녔다. 경로당에는 당숙모도 계시고 친구 어머님도 계신데 그런 생각 조차 못하고 농사일을 핑계로 시간에 쫓기어 살았다.
농촌은 정월대보름이 지나면 농사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예전 같으면 마을 어르신들이 오전에는 방에서 놀다가 날씨가 따뜻해지면 양지쪽 마당에 모여 윷놀이도 하고 농사짓고 난 부산물을 모아서 태우곤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어르신들이 많이 없어 고스톱도 윷놀이도 시원찮다. 또한 산불 위험 때문에 논두렁이나 부산물을 태울 수 없다. 한마디로 말해 어르신들의 소일거리가 사라진 것이다. 농사짓고 남은 고춧대나 들깻대 등은 밭 한쪽에 모아서 썩히든지 아니면 파쇄기로 잘게 부수어서 밭에 뿌려야 한다.
옛날부터 경로당은 마을 어르신들의 사랑방이다.
여럿이 모여서 밥도 해서 드시고 오락도 하는 공유의 공간이다. 그런 어르신들의 유일한 놀이터 경로당이 지난 2년여 동안 코로나19 때문에 운영을 하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정부의 방침에 힘겹게 버텨왔다. 드디어 2년 3개월 만에 일부를 제외하고 마스크 해제가 되며 일상으로 돌아오니 모여서 운동도 하고 놀이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동안 얼마나 답답하고 지루했을까?
마음대로 다닐 수도 없었고 아파도 병원가기가 불편했고 초상이 나도 문상을 제대로 갈 수 없었다. 일상적인 활동을 억압당하는 일이었다. 물론 전염병이라는 특수한 상황이기에 정부의 방침에 따라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겠지만 사실 감내하기 어려웠다. 누구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기에 뚜렷한 대책이나 계획도 없이 방역당국에서 하라는 대로 하루하루를 견뎌야 했다.
특히 농촌에서는 농사 작업에 투입할 인력이 없어 난리가 났었다.
농산물은 적기에 수확을 못하면 상품 가치가 떨어져 가격을 제대로 받지 못하는데 동네 사람도 외국인도 구할 수가 없었다. 사람들이 모이지 못하니 농사 작업도 못하고, 각종 모임이나 행사를 못하니 농산물 소비가 줄어드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일이 없었다. 마스크를 써도 불안하고 예방접종을 해도 불안했다. 이제 그런 어둠의 시간이 지나고 반갑고 밝은 시간이 돌아와 봄의 시작인 입춘도 지나고 정월대보름도 지났다.
그 누구의 탓이라고 할 수 없는 시간이었다.
오롯이 함께 견디고 감내해서 스스로의 면역력을 길러야만 하는 시간이었을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 또한 시련을 견디며 성장해가는 숙명일지도 모른다. 세상의 모든 일에 완벽한 것이 없는 것처럼 건강도 질병도 아프고 치료하며 함께 공존하며 견뎌가는 세상인 것이다. 무엇이 없다면 그 무엇이 없어져야 하고, 새로운 무엇이 생겼다면 그 새로운 것에 필요한 무엇이 생겨나게 마련이다. 코로나19는 농촌뿐만 아니라 세상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아픔을 주었다. 다만 이 아픔을 슬기롭게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고 노력한 결과가 오늘인 것이다.
이러한 일들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옛날에도 역병에 걸리면 특정 지역을 봉쇄하기도 했다. 감염병의 원인인 변종 바이러스는 시대의 환경에 따라 무엇이 생겨날지 모르는 세상이다. 모쪼록 코로나19라는 생전 처음 경험하는 시련을 잘 견뎌온 만큼 우리 동네 어르신들이 밝은 모습으로 건강한 노후를 즐기며 살아가시기를 바랄 뿐이다.
그래야 훗날 먼저 가신 동네 사람들을 만나게 되면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생기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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