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바스코샤 파인힐의 트리오 선교사
윤경남 국제펜클럽본부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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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 한국일보 (public@koreatimes.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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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Nov 2015
파인힐 신학교 교정에서 내려다보이는 대서양연안의 보트들 photo by Yunice
'뉴 스코틀랜드' 노바스코샤는 전혀
캐나다 땅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7개의 언덕이 있는 에든버러 성에 온 기분이었으며, 우리나라의 산천을 닮아 더 정답다. 하얀 돛단배들이 한가롭게 떠있는
대서양 연안 소나무 언덕 위에 파인힐 신학교가 있다. 채플 벽에 한국선교 100주년 기념동판을 보고서야 여기가 캐나다로구나 했다.
그 동판은 윌리엄 존 맥켄지 선교사가 머나먼 조선의 황해도 소래에서 '한 알의 밀알'이 된 3년
뒤에 캐나다선교회가 정식으로 파견한 트리오 선교사와 그 뒤를 따른 많은 선교사들을 기리고 있었다.
1895년 로버트 머래이가 해외선교사 파송에 미온적인 장로교 '위트니스'지에 맥켄지 선교사의 사망기사를 내면서 후임자를 조선에 보내자고 제안하자, 파인힐
장로교 신학생인 롭이 이에 호응하는 긴 호소문을 교지에 올렸다. 그러자 캐나다교회 여전도회가 3명의 선교사를 책임질테니 선교사를 보내라고 촉구한다. 맥켄지의 후배들(Robert Grierson, William Rufus Foote, 고향 친구인 Duncan McRae)인 트리오 선교사 일행이 1898년 2월에 캐나다를 떠나 그해 9월 제물포 항구에 도착한다. 그때 세브란스병원의 에비슨 박사가 이들을 영접해준다.
곧 이어 맥켄지의 약혼녀로 알려진 루이스 맥컬리와 엘리자벳 맥컬리 두 자매가
조선을 향해 달려간다. 엘리자벳은 맥켄지의 생애를 '한 알의
밀알'로 쓴 한국 최초의 여선교사이다. 격렬한 삶의 이야기를
조용한 서사시처럼 썼다는 평을 받는 애달픈 이야기이다.
조선에의 소명감에 불타며 파인힐 신학교를 졸업한 맥켄지는 댈하우지 대학에서
의대 과정도 마쳤다. 그는 서상륜, 서경조 형제가 세운 소래교회에
복음 전도와 병든 이웃들을 모두 치료해주면서도 자신의 병을 치료하진 못한 듯하다. "어머니, 더 이상 글을 쓸 수가 없습니다. 너무 아픕니다. 어머니…" 어머니와 에비슨 박사에게 마지막 유서를 남기고
짧은 생을 마감했다. 맥켄지의 차가운 주검 옆에 제일 먼저 달려온 사람은 그에게 세례 받고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그의 곁을 지킨 어린 소년 서병호였다. 맥켄지의 머리맡에는 그의 분신 같은 성경책과 고향에서부터
들고 온 세인트 조지 깃발이 놓여있었다.
우리는 핼리팩스에서 남서쪽으로 페기스코브(Peggy's
Cove)를 향해 차를 달렸다. 거북이등처럼 이리저리 갈라진 넓다란 만년바위 위에 꿈에나
보일듯한 붉은 캡을 쓴 하얀 등대가 우뚝 서 있다. 그 옆엔 푸른 바다를 등지고 스코틀랜드의 짧은 타탄
바지에 검은 베레모를 쓴 백파이퍼의 구슬픈 음률이 흐른다. 그가 입은 타탄과 내가 입고 있는 조끼가
똑 같은 맥켄지 가문의 문양이라서 더 반가워 사진도 함께 찍었고.
Bagpiper가 입은 타탄과 내 조끼는 똑 같은 McKenzie가문의 문양이었다.
밤바다를 지키는 등대의 모습을 다시 보고자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옛마을 린넨버그에서 이른
저녁을 먹고 해가 설핏해서 떠났는데, 페기스코브에 이르기도 전에 날이 어두워졌다. 가로등도 없는 외길을 남편의 운전솜씨만 믿으며 거북바위에 이르렀다. 깜깜한
밤바다를 사방으로 비추는 등대의 붉은 빛줄기는 정말 환상적이었다. 카메라를 꺼내 셔터를 누르는데, 찬바람에 손이 얼고 카메라도 얼어붙은 듯 작동이 안된다. 무조건
연속해서 셔터를 누르고 간신히 호텔로 돌아와 카메라를 열어보니 화면마다 붉은 점과 하얀 점들만 찍혀있다. 잘 '모시고' 다니다가 토론토에 돌아와 컴퓨터로 열었는데 모두 깜깜이다. 그래도 '휴지통trash'에
버리긴 아까워서 'I am feeling lucky'를 눌렀더니, 정말
운 좋게도 칸단스키의 기하학적인 그림이 되어 모두 되살아난 것!
회생한 페기스 코브의 등대
낮엔 못 보던 초월자의 실체를 깜깜한 밤을 지나 비로소 만난 기쁨! 우리의 삶은 어디서나 살아계신 그러나 보이지 않는 그리스도의 진리를 증거하는 일이므로, 눈에 보이이이는 사건만 보고 귀한 실존의 가치를 놓칠뻔한 잘못을 일깨워준 사건이어서 더욱 감사했다.
맥켄지의 묘소를 지키는 소년, 서병호 (자료사진)
황해도장연군 소래교회1895년(자료사진)
맥켄지 목사는 1861년
캐나다의
노바 스코티아 (Nova Scotia)주의
브리튼 섬
(Island of Cape Briton)에서 출생하였다. 그는 1888년
달하우지 대학
(Dalhausie College)을 졸업,
1891년에는 헬리팍스 장로회 신학교
(Halifax Prebyterian Colege)를 졸업하였는데,
신학교 재학 시에 한국에
관한 서적을
많이 읽고 한국에 가서 선교하겠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E.A.McCully, A Corn of Wheat, The Life of W.J.McKenzie of Korea,
P.233)
그는 선교 사업에
도움된다고 판단하여 의학을 공부하였다.
맥켄지 총회 본부를
방문하여 저축한 돈 1백달러를 내놓으면서
한국 선교사로 파송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러나 총회에서는 아직 한국선교를 위하여
준비한 것이 없다고
하면서 거절하였다.
기적적으로 한국에 갈
여비와 선교 자금으로 약 1년분이 모금되어 그는 선교회의
배경 없이 독립적 선교사로서 1893년 10월에 캐나다를
출발하여 부산을 거쳐
인천 제물포에 내항하였다.
새 해가 되면서
그는 곧 서울을
떠나 2월에
황해도 솔내로 갔다.
맥켄지 선교사는 자연히
솔내교회의 초대 목사처럼
되었으며, 희생적인
헌신의 결과로 1895년 7월 3일
교회당을 신축하여 헌당식을 거행하게 되었다.
이 교회당은 외국인
선교기관의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이 한국교인 스스로의
헌금으로 완공한 최초의
교회당이라고 하는데 뜻이
크다.
멕켄지 목사가 한국에
머문기간은 길지 아니하였다.
이렇듯이 숭고한 생활로
일관한 그가 1895년 7월 23일
너무나 무더운 여름
날에 피로에 지친
나머지 일사병에 걸려
고열로 신음하다가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H.G.Underwood The Call of Korea.P.140)
멕켄지 목사의 죽음의
소식은 캐나다 본국
교인들의 마음을 뜨겁게 뒤흔들었다.
솔내교회 교인들은 맥켄지
목사의 신앙생활을
본받아 살겠다는 결의를
표시하면서 선교사를 꼭
보내달라고
진정서를 캐나다장로회 총회에
발송하였다.
이에 호응하여 한국
선교의 개시를 촉구하는
글이 교회 잡지에 많이 기고하게
되었으며 그리어슨
(Robert Grierson,)의사 부부와 푸트(W R.Foote,)목사부부
그리고 맥래
(Duncan M.Mcrae) 목사 등이
선교사로 선임되어 캐나다
장로회 총회의 동해안
연합노회 (The Synod of the
Maritime Province)의 파송을
받아 1898년 9월 8일에
한국에 도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