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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누리길 4. (행주산성-일산호수공원-킨텍스) 1
◈ 일시 : 2023. 05. 02(화). 2차 2박 3일 중 첫날.
◈ 구간 거리 및 소요시간 : 19.2 km. 9시간 16분.
◈ 동행 : 아내.
◈ 지도.
◈ 트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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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정 정리.
지난 05.02(화) 평화누리길을 행주산성에서 시작해 첫날은 일산 킨텍스까지 가고
05.03(수) 둘째 날은 킨텍스에서 오두산 전망대를 거쳐 성동사거리까지 가고
05.04(목) 셋째날은 성동사거리에서 시작해 문산 가서 점심 먹고
반구정 가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해서 천안 자생한방병원에서 2주간의 입원치료를 하고
16일(화) 퇴원하여 통원치료를 받고 있다.
사고 경위는 도로옆에 따로 있는 인도를 가고 있는데 근처에 살고있는 83세의 노인 부부가
밭에서 일을 하고 근처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나오면서
앞에 가고 있는 아내만 보고 몇 미터 뒤에 오고 있는 좌측의 나는 돌아보지를 않고 내려와
내 우측 무릎 쪽을 드리 받아 내가 저만치 나가 떨어지며 왼손으로 땅을 짚어 좌측 팔꿈치와
좌측 엉덩이가 땅에 떨어지며 손목. 팔꿈치. 대퇴부에 상처가 나고 허리와 목에 충격을 받았다.
고관절 CT를 찍어보니 다행히 고관절은 큰 골절은 없다 하나 손목. 목과 허리. 무릎 쪽이 계속 아파 입원해서
다시 목과 허리와 팔목을 MRA를 찍고 입원치료를 받고 있다.
금년부터는 법이 바뀌어 중상이 아닌 경우엔 2주 이상은 입원이 안되고 통원치료를 해야 한다 하여
퇴원해서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데 시간이 좀 걸릴 듯싶다.
06 : 30. 천안 봉명역에서 서울역 행 전철 급행 타고
08 : 00. 영등포역 하차.
08 ; 12. 영등포소방서 앞 충무병원 정류소에서 고양 가좌동 가는 9707번 광역버스 타고(₩2300 x2)
08 : 40. 행주산성 입구(행주내동) 정류소 하차. 좌측으로 도로를 건너 자유로 지하도를 통과한다.
08 : 51/57. 행주산성 대첩문. 9시에 문을 열고 월요일엔 휴관.. 행주산성은 사적 56호. 권율장군 동상을 지나 도로 따라 올라간다.
09 : 12. 충장사. 권율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충장사 현판은 박정희대통의 휘호이고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09 : 26. 대첩 기념관. 도로 우측 위에 있다.
09 ; 36. 진강정 입구. 우측 아래로 진강정 가는 길. 정상을 다녀와서 진강정을 갈 것이다.
09 ; 39. 덕양정 정자.
09 : 42. 행주 대첩비각.-행주대첩비. 한강과 성산대교. 기양대교 조망
09 : 48. 충의정. 남산과 한강, 북한산, 고봉산조망.
10 ; 02. 다시 돌아온 진강정 입구. 방화대교와 인천의 계양산을 보곡 계단을 내려간다.
10 ; 05. 진강정.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10 ; 10. 쪽문을 나가 행주누리길에서 우측으로 간다. 이 쪽문은 월요일엔 정기휴관으로 문이 닫힌다.
10 ; 26. 삼거리에서 좌측 아래로 긴 계단을 내려간다.
10 : 30. 강가 데크 삼거리. 좌측으로 방화대교가 보이는 삼거리에서 우측 계단으로 올라 언덕을 넘어간다.
10 : 39/52. 언덕 너머 데크 쉼터에서 휴식하고 다시 언덕을 넘어간다.
10 : 58. 갈림길 합류. 우측으로 샛재골에서 능선을 넘어오는 길과 만난다. 행주산성 자연생태계안내판.
11 ; 08. 북카페. 옛군 초소를 개조해서 북카페를 만들었다. 방화대교와 행주대교 김포대교. 한강 건너로 개화산과 계양산 조망.
11 : 16. 역사공원. 행주산성 역사누리길 안내판. 이가순 관개 송덕비.
11 : 32. 행호쉼터. 표지석과 2층으로 행호루 정자.
11 : 44. 행주대교 아래. 우측으로 나가 자전길을 따라간다. 중간에 옛 초소옆에 쉼터를 지난다.
12 ; 06. 옛 초소를 개조한 2층 쉼터.
12 : 24. 100번 고속도로 김포대교 아래 통과. 계속 자전거길을 따라간다. 좌측은 한강 철책 울타리.
12 : 50. 직진길은 막혀있고 우측으로 자유로 지하통로를 건너가서 좌측으로 자유로 옆 도로를 따라간다.
13 : 01. 삼거리에서 우로 간다.
13 ; 05. 신평 로터리를 건너 북한산을 보며간다.
13 : 20. 호수로 삼거리에서 좌측으로 가고
13 : 24. 한국 예탁 결제원 삼거리. 평화누리길은 계속 직진해 가지만 점심을 먹으로 우측으로 가서
13 : 34/14 : 14. 우렁각시 쌈밥총각집에서 점심.
14 : 19. 우편집중국 정류소.
14 : 30. 백석중학교
14 : 52. 청평지 원형 광장.
15 : 05. 평화누리길 4코스 문.
15 : 10. 일산 호수공원.
15 : 19. 호수교. 누리길은 계속 호수를 우측에 두고 직진하지만 고양국제꽃박람회가 열리고 있는 호수 우측으로 가본다.
15 : 49. 고양국제꽃박람회장. 사람은 많고 복잡해서 통과. 입장료는 성인 15000. 경로 어린이 청소 12000
16 : 02. 달맞이 섬의 월파정 2층정자.
16 : 11/. 19. 고양 선인장 전시관. 누리길 복귀.
16 : 32. 평화누리길 5코스 킨텍스길 문.
16 : 43. 노래하는 분수대.
16 : 52. 육교로 도로를 건너간다.
17 : 15. 킨텍스 정문 앞. 오늘은 여기서 마치고 대화역 인근에 있는 예약한 숙소를 찾아간다.
17 : 31. 대화역.
17 : 46. 룩소르 호텔.
18 : 29. 룩소르 호텔 인근에 있는 이도옥 설렁탕집에서 왕갈비탕으로 저녁(18000X2)
06 : 30. 천안 봉명역에서 서울역 행 전철 급행 타고
08 : 00. 영등포역 하차.
08 ; 12. 영등포소방서 앞 충무병원 정류소에서 고양 가좌동 가는 9707번 광역버스 타고(₩2300 x2)
08 : 40. 행주산성 입구(행주내동) 정류소 하차. 좌측으로 도로를 건너 자유로 지하도를 통과한다.
행주산성 입구(행주내동) 정류소
좌측으로 도로를 건너 자유로 지하도를 통과한다.
자유로 지하도를 통과하여 우측으로 올라가며 뒤 돌아 본 덕양산 정상부.
고양누리길 14개 전구간 안내판.
고양누리길 4코스인 행주누리길 안내판.
08 : 51/57. 행주산성 대첩문. 9시에 문을 열고 월요일엔 휴관.. 행주산성은 사적 56호. 권율장군 동상을 지나 도로 따라 올라간다.
주차장과 대첩문.
대첩문.
**행주산성 ; [ 幸州山城 ]
사적 제56호. 지정면적 361,171㎡, 둘레 약 1,000m. 강안(江岸)의 돌출된 산봉우리를 택하여 산 정상부를 에워싼 소규모의 내성(內城)과 북쪽으로 전개된 작은 골짜기를 에워싼 외성(外城)의 이중구조를 하고 있다.
정확한 축성연대와 목적은 알 수 없으나, 강안의 험한 절벽을 이용하고 동·북·서로 전개된 넓은 평야를 감싸 안고 있는 것은 삼국시대 초기의 산성형식과 부합된다.
이곳이 백제의 초기 영역에 속하여 서해안으로의 수운(水運)과 관계된 중요한 거점으로 추측되며,
특히 나당전쟁(羅唐戰爭) 때까지 남북교통의 요충에 해당하여 고구려와 신라의 공방전도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현재 성벽은 산 정상부의 동남쪽 사면과 외성부의 동북쪽 성벽뿐이며,
서쪽 방면은 내성은 확인되나 외성 성벽은 육안으로 식별하기가 어렵다.
성벽은 내성의 경우 정상부를 깎아내어 다듬은 뒤에 둘레 약 250m 정도의 토루(土壘)를 형성하고 있으며,
정상에서 동북쪽의 산등성이를 따라 외성의 자취가 남아 있는데, 이 외성은 자연능선을 이용하여 양쪽에서 석심을 두고 판축한 양상을 보이고 있다.
계곡 쪽의 성벽은 유구를 찾을 수 없으나 산 중복을 돌아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러한 이른바 이중식산성은 삼국시대의 새로운 형식으로서 주목된다.
성안에서는 삼국시대의 적갈색 연질 토기편, 회청색 경질 토기편을 비롯하여 어골문(魚骨文)·수지문(手指文)의 기와조각도 발견되고 있어 고려시대까지도 간헐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 산성은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의 전적지로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으로 유명하다.
현재 성안에는 1603년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1963년에 다시 세운 대첩비가 있다.
1970년에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벌여 권율을 모시는 충장사(忠壯祠)를 건립하고 정자와 문도 세웠다.
[네이버 지식백과]
권율장군 동상.
**권율 ; [ 權慄 ]
조선 중기의 명장.
금산군 이치(梨峙)싸움, 수원 독왕산성 전투, 행주대첩 등에서 승리했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전공을 세웠다.
본관 안동. 자 언신(彦愼). 호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시호 충장(忠莊).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式年文科)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가 되고, 전적(典籍)을 거쳐
1587년 전라도도사, 이듬해 예조정랑 ·호조정랑 ·경성판관(鏡城判官)에 이어, 1591년 의주목사(義州牧使)가 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수도가 함락된 후 전라도순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防禦使)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패하였다.
그 뒤 남원에 주둔하여 1,000여 명의 의용군을 모집, 금산군 이치(梨峙)싸움에서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小早川隆景]의 정예부대를 대파하고 전라도순찰사로 승진하였다.
또 북진 중에 수원의 독왕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면서 견고한 진지를 구축하여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遊擊戰)을 전개하다
우키타 히데이에[宇喜多秀家]가 거느리는 대부대의 공격을 받았으나 이를 격퇴하였다.
1593년에는 병력을 나누어 부사령관 선거이(宣居怡)에게 시흥 금주산(衿州山)에 진을 치게 한 후
2800명의 병력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주둔하여,
3만 명의 대군으로 공격해온 고바야카와의 일본군을 맞아 2만 4000여 명의 사상자를 내게 하며 격퇴하였다.
그 전공으로 도원수에 올랐다가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한성부판윤으로 재기용되어 비변사당상(備邊司堂上)을 겸직하였고, 1596년 충청도순찰사에 이어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提督)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명나라 사령관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예교(順天曳橋)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임진왜란 7년 간 군대를 총지휘한 장군으로 바다의 이순신과 더불어 역사에 남을 전공을 세웠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에 돌아갔다. 영의정에 추증되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으며, 충장사(忠莊祠)에 배향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장사 입구의 삼도삼문.
09 : 12. 충장사. 권율장군을 모신 사당이다. 충장사 현판은 박정희대통의 휘호이고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렸다.
원래 이름은 기공사(紀功祠)로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인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끈 권율 장군의 전공을 기리고 그의 호국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1842년(헌종 8)에 왕명으로 건립한 사당이다. 이후 6·25전쟁 때 소실되었으며 1970년 행주산성에 대한 대대적인 보수·정화작업의 일환으로 정면 3칸, 측면 3칸의 콘크리트 건물을 축조하였는데 이것이 현재의 충장사이다.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친필이고, 사당 안 장군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충장사 [忠莊祠]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현판은 박정희 대통령이 직접 쓴 친필이고, 사당 안 장군의 영정은 장우성 화백이 그린 것이다.
다시 돌아 온 충장사 입구.
09 : 26. 대첩 기념관. 도로 우측 위에 있다.
대첩 기념관.
대첩 기념관앞의 신기전.
변이중 화차.
09 ; 36. 진강정 입구. 우측 아래로 진강정 가는 길. 정상을 다녀와서 진강정을 갈 것이다.
진강정입구에서 본 방화대교.
정상을 다녀와서 진강정으로 갈 것이다.
09 ; 39. 덕양정 정자.
덕양정 정자에서 본 덕양산 정상에 있는 행주대첩비와 대첩비각.
덕양정 정자에서 본 남산과 창릉천.
덕양정 정자에서 본 관악산.
09 : 42. 행주 대첩비각.-행주대첩비. 한강과 성산대교. 기양대교 조망.
덕양산 정상에 있는 1963에 세운 행주대첩비와 선조 35(1602)에세운 대첩비.
1602년에 세운 대첩비(경기도 유형문화재 74호)
2기(基). 높이 178㎝, 너비 82㎝, 두께 18㎝. 1978년 경기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1593년(선조 26) 권율(權慄)이 행주산성에서 왜군을 물리치고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1602년(선조 35)에 설립하였다.
대리석재의 비로서 기단부는 묻혀 있다. 앞면의 상부에 약간의 균열이 있고, 측면에는 상부에서 하단까지 약 3㎝ 정도로 쪼개져 있으며, 마멸이 매우 심하여 부분적으로 수십자밖에는 알아볼 수 없는 상태이다.
비문은 최립(崔岦)이 짓고 한호(韓濩)가 썼으며, 김상용(金尙容)이 ‘元帥權公幸州大捷碑(원수권공행주대첩비)’ 9자의 두전(頭篆)을 썼다. 비음은 사위인 이항복(李恒福)이 짓고, 김현성(金玄成)이 썼다.
비문에는 막료와 사병들이 그의 공적을 사모하여 비를 세우게 되었다는 동기를 적고 있다. 즉, 1593년 2월 권율이 정예군 2,300명을 거느리고 행주산성에 주둔, 일본군의 공격에 맞서 육박전으로 승리하고 적군의 깃발·투구·갑옷·무기 등을 노획한 혁혁한 전과를 밝히고, 권율의 가문과 같이 좋은 가문에서 비롯된 인격과 덕은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밖에 없었으며 나아가 이를 기리지 않을 수 없어 비를 세운다는 등의 내용이 실려 있다.
글씨는 해서로서 왕희지 서풍에 가깝게 매우 정중하고 단정하게 썼는데, 품격은 그리 높다 할 수 없으며 자가풍의 석봉체(石峰體)이다. 비음은 송설체의 것으로 역시 뛰어난 것은 아니나, 비의 전체가 마멸이 심하여 서체상의 특징이나 그 평가를 객관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네이버 지식백과] 행주대첩비〈구비〉 [幸州大捷碑〈舊碑〉]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대첩비앞에서 본 남산(좌)-강변북고-가양대교, 성산대교-관악산(우).
인왕산-남산(우)
강변북로-여의도-관악산(우)
대첩비각. 덕양정과 방화대교.
09 : 48. 충의정. 남산과 한강, 북한산, 고봉산조망.
북도 한 번 쳐보고.
충의정옆에서 본 북한
10 ; 02. 다시 돌아온 진강정 입구. 방화대교와 인천의 계양산을 보곡 계단을 내려간다.
10 ; 05. 진강정. 다시 계단을 내려간다.
10 ; 10. 쪽문을 나가 행주누리길에서 우측으로 간다. 이 쪽문은 월요일엔 정기휴관으로 문이 닫힌다.
10 ; 26. 삼거리에서 좌측 아래로 긴 계단을 내려간다.
10 : 30. 강가 데크 삼거리. 좌측으로 방화대교가 보이는 삼거리에서 우측 계단으로 올라 언덕을 넘어간다.
좌측 방화대교.
우측으로 언덕을 넘어간다.
10 : 39/52. 언덕 너머 데크 쉼터에서 휴식하고 다시 언덕을 넘어간다.
10 : 58. 갈림길 합류. 우측으로 샛재골에서 능선을 넘어오는 길과 만난다. 행주산성 자연생태계 안내판.
11 ; 08. 북카페. 옛군 초소를 개조해서 북카페를 만들었다. 방화대교와 행주대교 김포대교. 한강 건너로 개화산과 계양산 조망.
행주대교와 김포대교.
개화산(좌)과 계양산(우측 뒤)
당겨본 계양산.
신,구 행주대교.
**신행주대교 ; [ 新幸州大橋 ]
길이 1,460m, 너비 14.5m이며 1995년 5월 개통되었다. 1978년 준공된 행주대교의 교량 너비가 10m에 불과해 비좁고 주변 지역에 신도시가 들어서 교통량이 늘어남에 따라 지역 교통난 해소를 위하여 건설되었다.
본래 1987년 공사를 시작하여 1992년 12월 완공할 예정이었으나 1992년 7월 31일 구조상의 문제로 일부 구간이 무너져 내려 오히려 수도권 일대의 교통난을 악화시키기도 했다.
이 붕괴사고를 계기로 1995년 정부에서는 ‘시설물 안전관리에 관한 특별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공공 시설물에 대한 미관을 중시하여 1997년 5월 한강 다리 중에서 최초로 조명시설이 설치되었다.
1996년부터는 제2신행주대교를 건설하기 시작하여 2000년 12월 16일 개통되었다. 이에 따라 신행주대교는 고양시에서 서울 방향, 제2신행주대교는 서울에서 고양시 방향으로 각각 일방통행하게 되었다. 각 노선은 편도 3차선이다.
그리고 그 동안 승용차만 다니던 행주대교는 비상도로로 활용하다가 철거될 계획이다. 현재는 자전거 다리로 이용되고 있다,
다리 북쪽의 덕양산(德陽山)에 행주산성이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방화대교.
11 : 16. 역사공원. 행주산성 역사누리길 안내판. 이가순 관개 송덕비.
역사공
11 : 32. 행호쉼터. 표지석과 2층으로 행호루 정자.
11 : 44. 행주대교 아래. 우측으로 나가 자전길을 따라간다. 중간에 옛 초소옆에 쉼터를 지난다.
행주대교 아래.
행주산성.
2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