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0화
- 지리산에 가고 싶다 -
상사화
울음도 닿지 않는
절벽의 세월
얼마나 사무쳤으면 꽃이 되었나
열일곱 여리고 고운 꽃
품을 수 없는 하늘 그리며
홀로 지새운 밤들
연분홍 핏빛으로 타올라
스미지 않는 달빛에
시나브로
하얗게 야위어 간다.
*조구호 :문학평론가. 전 경상대학교 연구교수. 저서로 ‘분단소설 연구’, ‘소설의 분석과 이해’, ‘한국 근대소설 연구’평론집 ‘성찰과 지향’, 산문집 ‘마음을 씻는 정자’등. 현 산청문인협회 회원
서울에서 그녀와의 마지막 밤을 끝으로 나는 우리의 사랑이 끝났다고 생각했다. 도무지 믿기지 않는 그녀의 결혼을 앞에 두고, 나는 완전히 침묵했고 어디에서나 고통을 생각했다. 내 삶은 서서히 망가져 가고 있었고 우리의 꿈은 저만치 달아나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나는 행여나 하는 기대감, 내게 다시 돌아올 것만 같은 그녀 때문에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일이 반복하였다. 하지만 먼지 같은 신기루가 허공에 뿌려질 때면, 나는 지독한 외로움과 그리움 그리고 지나간 추억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집에서 아내와의 관계는 냉랭했고 직장에선 그녀와 사적으로 말을 섞는 일이 없었다. 당연히 매일 밤 내게 오던 문자는 중단되었다. 나는 한순간 그녀와 단절되었으며 나는 나로부터 또 단절되었다. 추억과 기억이 중첩되면서 나는 도시의 방랑자가 되어 매일 밤 홀로 술집을 배회하였다.
그녀는 직장에 자주 연차를 내었다. 빌딩 지하실 식당에서 그녀를 볼 기회가 점점 적어졌고 연희와도 예전처럼 자주 만나지도 않았다.
그날도 그녀가 일찌감치 조퇴를 한 날이었다. 전날 마신 술이 아직 깨지 않아 커피라도 빼먹으려 자판기 근처에 갔을 때였다.
“소문 들었어?”
우리 사무실과 옆 사무실 남자직원들이 모여 잡담을 나누고 있었다.
“무슨 소문?”
“K 관세사 예쁘장한 서울내기 여자 있잖아.”
“그 여우 같은 애?”
“그래 직장을 그만둔데. 결혼식 날짜가 잡혔나 봐.”
그때, 그녀와 같은 사무실의 박 대리가 반대편에서 오다 그들과 합류했다. 평소 그녀를 짝사랑하던 녀석이었다.
“어이! 박 대리. 닭 쫓던 개 꼴이네.”
녀석은 그 말을 금방 알아들었다. 다른 직원이 빈정거렸다.
“그러게 말이야. 그대가 그토록 사랑의 세레나데를 불렀으면 뭔가 사건이 벌어져야 하는데. 이 꼴이 뭐야? 손이나 제대로 잡아봤냐?”
그러자 모두 폭소가 터져 나왔다.
“야야. 너무 그러지 마. 그래도 이 몸은 너희들과는 달리, 야밤에 단 둘이 술자리라도 가졌잖아. 그러는 너희들은 유희 씨에게 말이나 붙여봤냐?”
“대단하다. 우리 박 대리. 그깟 술자리 한번 가지고 유세를 떨다니. 오늘 그 여자 조퇴했다며?”
“응. 결혼 준비에 바쁘나 봐. 사흘 후에 온다 하네. 그날 결혼할 남자랑 함께 와서 우리 사무실 사람에게 회식 겸해서 인사하려는가 봐.”
나는 젊은 친구들의 입에서 유희의 이름이 나오자 솔직히 불쾌했지만, 내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었다. 사흘 후였다. 나는 그녀가 사흘 후에 그녀의 약혼자와 함께 내려온다는 말을 혼자 중얼거렸다.
그날 밤에 나는 K 관세사 대표이자 친구 한수와 회사 앞 선술집에 있었다. 그때 그가 부탁했던 돈을 융통해준 데에 대한 고마움의 인사치레였다.
“요새 왜 그리 표정이 어둡냐? 무슨 일 있어?”
그는 쉽사리 내 표정을 읽었다. 하지만 나는 또다시 그녀에 대한 문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이미 끝난 일이었고, 나는 아무리 그가 친구지만 이 일은 그에게 밝힐 수 없는 내 자존심에 관한 문제였다.
“참! 그건 그렇고 모레 시간 돼? 우리 사무실 회식할 건데.”
“뭐? 나더러 너희 사무실 회식하는 데 참석하라는 거야?”
나는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 대충 감이 잡혔다.
“아니, 억지로 오라는 말은 아니고. 너도 소문 들었겠지만, 유희 씨가 그날부로 그만두잖아. 마지막으로 인사 정도 나누는 게 도리이지 않나 싶어서. 그래도 한때 둘이 친했잖아.”
“그날 그녀뿐만 아니라, 서울에서 남자도 내려온다면서.”
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알고 있었네? 맞아. 그 친구가 내게 직접 전화가 왔어. 그동안 유희를 잘 보살펴주어서 고맙다고 정중하게 말하더군. 그러면서 마지막으로 자기가 고마움의 표시로 한턱내겠다는 거야.”
나는 순간 내 앞에 앉아 있는 자가 내 친구라는 사실이 믿기질 않았다. 설령 그가 나와 유희의 관계가 끝났음을 안다 하더라도, 어떻게 헤어진 여자의 남자가 있는 그 자리에 참석해달라는 건지 좀처럼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난 싫어.”
나는 짧게 내 의사를 표시했다.
그날이었다. 아침부터 연희가 사무실에서 직원들에게 그녀의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아마 내가 아침 간부 회의를 할 때 그녀를 만나 본 모양이었다. 회의를 마치고 사무실에 들어오니 연희의 주변에 직원들이 모여있었다.
“남자가 유명대학 출신에다 공인회계사라며?”
“집안이 좋아 돈도 꽤 있다 하더라고.”
“역시 여자는 예뻐야 해. 하긴, 유희 씨 정도라면 재벌 집 며느리라도 가능하지 않겠어?”
그녀에 대해 모두 입을 댔다.
“오늘 자기네 사무실 사람들에게 결혼할 남자가 크게 쏜다고 하네. 정말 멋지다. 나도 그런 남자 만나는 게 소원인데.”
연희를 비롯한 여직원들이 깔깔거리며 웃고 있을 때, 내가 헛기침을 하자 모두 흠칫한 표정으로 말을 끊었다. 나는 그들에게 스스로 멸시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고 생각했다. 내가 자리로 돌아가자 그들은 낮은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갔다.
“그럼 유희 씨도 오늘 그만 두는 거야?”
“그렇다네요.”
“계집애. 일 년 정도 이곳에 있으면서 우리 과장님을 비롯하여 숱한 남자들을 울려놓고 혼자 빠져나가는 것 봐. 역시 새침하기 이를 데없는 전형적인 서울내기야.”
“얘는? 목소리 낮춰. 과장님 듣겠어.”
“들으면 어때? 다 끝난 사이잖아.”
“그래도.”
칸막이 너머로 그들의 목소리가 다 들렸다. 나는 침울한 표정으로 뒤돌아서서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때 연희가 노크하며 들어왔다. 그녀의 한 손에는 커피가 들려 있었다.
“과장님.”
“응. 무슨 일이야?”
그녀는 커피를 탁자 위에 올려놓고 조심스럽게 말했다.
“오늘 유희가 마지막 날이어서 저랑 밖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거든요. 어때요? 같이 가지 않을래요?”
나는 그렇게 말하는 연희의 눈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유희가 같이 오래?”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 애도 아마 바라고 있을 거예요.”
“난 됐어. 둘이 가.”
“그래도 과장님. 이게 마지막이잖아요. 오늘 안 보시면 평생 보지 못할 건데.”
나는 실제 그렇지는 않겠지만 그녀가 내게 빈정대는 것 같았다. 몇 번이나 거절했건만 그녀가 재차 함께 가자고 하니 나는 그만 화를 내었다.
“싫다니까! 꼴도 보기 싫으니까 당장 나가.”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유희는 날 한참이나 노려보더니 제자리로 돌아가려 했다. 순간, 이럴 필요가 없었는데 내가 화를 내었다고 생각하니 스스로 내가 바보처럼 생각되었다.
“연희 씨. 잠깐만.”
“…….”
“화내서 미안해. 내가 오늘 상태가 별로 안 좋은가 봐. 정말 미안해.”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까닥이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점심시간이었다. 일에 집중이 되지 않아 자리에 멍청하게 앉아 있는데 연희 자리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녀였다.
“왔어?”
“과장님은?”
“쉿! 자리에 계셔.”
그러자 그녀는 목소리를 낮추었다.
“같이 안 간데?”
“응. 오늘 몸이 좀 안 좋으시대.”
“그래? 내가 인사라도 할까?”
그 말에 나는 온몸이 굳어지면서 경련이 오는 것 같았다. 서울에서 헤어진 후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그녀였다.
“아니야. 그냥 나가자. 오늘 과장님이 저기압이셔. 괜히 건드리지 말자.”
“그럼 그러자.”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길로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런데 오전까지만 해도 조금 흐리던 하늘에서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기나 말기나 혼자 중앙동 거리를 걸어서 예전 그녀와 처음 갔던 자갈치로 갔다. 바다라도 보아야 마음이 풀릴 것 같았다.
가랑가랑 내리는 비는 자갈치 입구에 도착할 때쯤 세차게 퍼붓고 있었다. 나는 그날 유희와 앉았던 그 집에 있었다. 연탄난로 장어에 소주 한 병을 주문했다. 술을 마시면서 나는 어제 작성해두었던 사직서를 꺼냈다.
‘위 본인은 일신상의 이유로 오늘부로 사직하려 하오니 허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서명이 들어간 사직서를 마저 읽을 때쯤 눈물이 나왔다. 나는 그곳에서 꼼짝없이 앉아 소주를 네 병이나 마셨다. 그사이 연희를 비롯한 사무실 직원들과 거래업체 직원들의 전화가 수십 통이나 왔지만 나는 받지 않고 내리는 비와 바다만 바라보고 있었다.
퇴근 무렵 나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을비가 세차게 내렸지만 나는 우산도 없이 또 중앙동 거리를 걸었다. 비는 내 머리 위로 내 안경 안으로 콧물과 눈물과 함께 범벅되었고 나는 거의 물에 빠진 생쥐 모양이었다. 회사 앞에 도착하자 나는 연희에게 전화했다. 날 바라보던 연희는 아연실색했다. 나는 양복 안주머니에서 사직서를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사장에게 전해 줘. 그리고……, 유희는 지금 어디 있어?”
연희는 낯선 내 모습에 벌벌 떨고 있었다.
“요 앞, 빨간우산이라는 카페에요.”
“그동안 즐거웠어. 잘 지내.”
나는 뒤돌아서서 그 카페로 향했다. 뒤에서 과장님, 하며 연희가 불렀지만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그녀와 남자는 창가에 앉아 있었다. 예전 그녀의 서울집, 아파트에서 한 번 본 적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남자를 금방 알아내었다. 둘은 마주 앉아 재미있게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그녀는 날 보더니 연희와 마찬가지로 아연실색했다.
“아저씨!”
“…….”
나는 호주머니에서 그날 아침 모텔에서 그녀가 남기고 간 풀 반지를 꺼냈다. 그리고는 그녀의 앞에 툭, 하고 떨어뜨렸다.
“이 사람 뭐야?”
남자가 일어서려 할 때 나는 그의 뺨을 세차게 때렸다.
‘퍽!’
나는 쓰러진 그가 일어설 수 없게 이번엔 발로 몸을 짓이겼다. 그녀의 비명이 날카로웠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를 무차별 폭행했다. 그새, K 관세사 대표 한수와 직원들이 내 앞에 서 있었고 누군가 신고했는지 경찰들이 있었다. 나는 그 자리에서 폭행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나는 어이없어하는 한수와 손을 가리고 울고 있는 그녀를 뒤로하고 경찰에 의해 끌려 나왔다. 그 와중에 나는 그녀와 만난 지가 꼭 일 년이 되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유치장에 있을 때 소식을 들은 아내가 이혼서류를 가져왔다. 나는 말 없이 내 이름에 서명했고, 아내는 역시 침울한 표정으로 서류를 가지고 돌아갔다. 한수와 연희가 면회를 왔으나 나는 모두 거절했다.
나는 지리산에 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