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월 하순(8수, 윤년29일분 1수 별도)
하루시조052
02 21
뉘뉘 이르기를
무명씨(無名氏) 지음
뉘뉘 이르기를 이 시절(時節) 말세(末歲)라ㅎ던고
천무열풍(天無烈風)하고 해불양파(海不揚波)하니 이 아니 성대(聖代)신가
우리도 성대(聖代) 만났으니 놀고 갈까 하노라
뉘뉘 – 누구누구가. 여럿이서.
말세(末歲) - 말세(末世)라고 고쳐야 함. 정치, 도덕, 풍속 따위가 아주 쇠퇴하여 끝판이 다 된 세상.
천무열풍(天無烈風) - 하늘에는 드센 바람이 없음.
해불양파(海不揚波) - 바다에는 드날리는 파도가 안 생김.
성대(聖代) - 성세(聖世). 성군(聖君)이 다스리는 시대.
태평성대(太平聖代)를 찬양하고 있습니다. 바람과 파도가 없다는 말은 국가 사회에 큰 사건 사고가 없다는 말로 읽힙니다.
그러나 몇 번 읽다보면 겉말 다르고 속셈 다르다는 느낌이 있습니다.
우선 지은이가 무명씨라는 점인데, 성군의 은택을 입은 바가 없을 터인데 까닭없이 시절을 성대라 노래할 까닭이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종장 후반에 ‘놀고 갈까’에 그런 해석의 단초(端初)가 있습니다. 반어법(反語法)이 엿보인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저와 다릅니까?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53
02 22
늙었다 물러가자
무명씨(無名氏) 지음
늙었다 물러가자 마음과 의논(議論)하니
이 님 버리고 어디러로 가잔 말고
마음아 너란 있거라 몸만 먼저 가리라
몸은 늙었는데 마음은 아직 덜 늙은 상태, 65세를 갓 넘긴 초로(初老)의 저와 같은 형편인 자의 노래입니다. ‘물러가자’는 누가 물러가라 하지 않았음에도 스스로 물러가야겠다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마음’한테 물어봅니다. 마음의 대답이 재미있습니다. 중장의 ‘이 님’은 마음이 저를 몸에 짝하여 부르는 이름입니다. 직접화법으로 고치면 “이 보쇼, 몸 님. 이 마음을 짝하여 님이라 할 땐 언제고, 이 님을 두고 혼자 어디로 가겠다는 거요? 나는 못 갑니다.” 정도가 되겠습니다.
종장은 몸이 말하는 것인데 아주 단호합니다. 마음 넌 있거라, 몸 난 먼저 간다.
결국 맘은 몸속에 담겨 있으니 함께 물러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몸과 마음을 한 음절 어휘로 ‘뫔’이라 적곤 하는데요, 나이가 들수록 맘이 몸을 따라 갈 수밖에 없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54
02 23
님과 나와 부디 둘이
무명씨(無名氏) 지음
님과 나와 부디 둘이 이별(離別) 없이 살자 하였더니
평생원수(平生怨讐) 악인연(惡因緣)이 있어 이별(離別)로 구태어 여의언지고
명천(明天)이 이 뜻 아오셔 이별(離別) 없게 하소서
구태어 – 구태여. 일부러 애써.
여의다 - 멀리 떠나보내다.
명천(明天) - 모든 것을 똑똑히 살피는 하느님.
님과 이별하지 않고 살게 해주십사 기도하는 마음을 노래했습니다. 초장에서는 두 사람이 한마음으로 한 맹서(盟誓)입니다. 중장에 등장하는 악인연은 둘 사이를 갈라 놓았고요, 종장에서는 저간의 사정을 훤히 아시는 천지신명께 다시 합쳐지게 해달라고 비는 기도(祈禱)입니다.
건성 읽자치면 중장에서 ‘여의다’고 하여 죽어 이별 즉, 사별(死別)을 당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겠으나, 단순히 ‘떠나보냄’으로 해석이 가능합니다. 다행히 우리말 사전의 풀이도 그런 한 가지가 있군요.
이 작품을 보면서 이별이건 수난이건 우리네 행복을 시샘하는 듯한 형편들은 악인연에 의한 것이로구나 새삼 깨닫게 됩니다. 선종(善終)은 선생복종(善生福終)인데 굳이 수도자의 차지만이 아니라 선인연(善因緣)의 모든 중생들에게도 가능한 일이기를 빌어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55
02 24
님 그려 겨우 든 잠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님 그려 겨우 든 잠에 꿈자리도 두리숭숭
그리던 님 잠간(暫間) 만나 얼풋 보고 어디러로 간거이고 잡을 것을
잠깨어 곁에 없으니 아주 간가 하노라
꿈자리 - 꿈에 나타난 일이나 내용. 앞일의 길흉을 판단할 수 있는 조짐이 된다.
두리숭숭 – 뒤숭숭.
얼풋 – 얼핏. 언뜻. 지나는 결에 잠깐 나타나는 모양.
꿈에 님을 보고 잠 깨어 서운해 하고 있는 자신을 노래했습니다. 중장이 길어진 것은 꿈에서조차 오래 못 본 아쉬움 탓이겠지요. 종장의 탄식 ‘아주 간가’는 표현이 꿈과 현실의 진위가 뒤바뀌어 더욱 간절함을 읽을 수 있습니다.
꿈자리, 어릴 적에 할머니로부터 아침마다 자주 들었던 말입니다. 주로 ‘사납다’는 말이 따라 다녔습니다. 꿈의 한바탕은 너무 급히 돌아가서 논리가 없이 뒤죽박죽, 설명이 불가한데도 할머니는 마치 ’컬러 드라마‘인 양 세밀하게 중계방송 되곤 했습니다. 나중에 나이 들어가면서 그 때의 할머니는 훌륭한 이야기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56
02 25
님 보러 갈 적에는
무명씨(無名氏) 지음
님 보러 갈 적에는 검각(劍閣)도 평지러니
이별ㅎ고 돌아오니 지척이 천리오라
기약을 기다리니 일각이 여삼추라
검각(劍閣) - 촉(蜀)나라 국경에 있던 험로(險路)의 지명(地名).
지척(咫尺) - 아주 가까운 거리.
기약(期約) - 때를 정한 약속.
여삼추(如三秋) - 세 번의 가을, 곧 3년의 시간.
내용은 단순한데, 사용한 시어들이 먹물깨나 든 사람의 마음을 조금은 과장되게 표한 작품입니다. 특히 중국의 지명 검각을 들먹일 줄 안다니 공부 많이 한 사람이구나 싶습니다. 이별을 가운데에 두고, 만남과 가다림이 앞뒤에 있어서 초장 중장 종장을 차지하고 있군요. 아주 편안한 구성입니다. 다만 종장의 3-5-4-3 음수율은 엉망이 되었는데, 마음이 어린 후라 하는 일도 다 어린가 생각합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57
02 26
님을 보낸 후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님을 보낸 후(後)에 황혼(黃昏)은 무슨 일고
옷깃에 끼친 향내 분명(分明)한 님의 흔적
다시금 탈앙금(脫鴦衾) 퇴원침(退鴛枕)에 전전반측(輾轉反側) 하여라
탈앙금(脫鴦衾) - 원앙금(鴛鴦衾, 원앙을 수놓은 이불)을 벗다.
퇴원침(退鴛枕) - 원앙침(鴛鴦枕, 원앙을 수놓은 베개)을 물리다.
전전반측(輾轉反側) - 전전불매(輾轉不寐). 누워서 몸을 이리저리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함.
님을 보낸 후의 아픔을 노래했습니다. 님과 이별한 아픔에 더하여 님 없이 홀로 맞닥뜨리는 황혼은 비장한 느낌입니다. 옷깃에 남은 향내, 금침(衾枕)에 묻어나는 체취를 적시하는 용어가 한자어인지라 작가가 이름만 잃었지 배운 사람이요, 신분도 양반층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이별 후의 잠 못 드는 밤의 아픔이 어디 양반네만의 몫일까요. 문자로 드러내고 아니고의 차이만 있을 따름이겠지요.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58
02 27
님이 갈 적에
무명씨(無名氏) 지음
님이 갈 적에 지환 한 짝 주고 가시더니
지 자(字)는 갈 지자(之字)요 환 자(字)는 돌아올 환자(還字)라
지금에 지환이 무소식(無消息)하니 그를 설워
지환(指環) - 가락지. 요즘에는 ‘반지’라고 합니다.
무소식(無消息) - 소식이 없음.
초장이 참 느낌이 좋습니다. 님이 ‘가셨다’고 깍듯이 존대를 했고, 가락지를 한자어로 ‘지환’이라 함을 끌어 왔는데 글쎄 한 짝만 주고 갔답니다. 이별의 정표(情表)로군요. 님이 그리우면 곧장 바라볼 수 있는 물건입니다. 유사시 쌍가락지만 만들면 내 님인 줄 서로 알게 되기도 하겠구요. 부러 한자어를 적지 않은 이유가 중장에서의 말놀음으로 이어지네요. 손가락 지, 고리 환을 갈 지 돌아올 환으로 풀기 위한 전략인 셈입니다. 떠나간 님이 갔다가 곧 되온다는 뜻이지요.
안타까움은 종장에 있군요. 무소식, 절대로 희소식(喜消息)은 될 수 없으니 답답할지라 무지무지요.
종장의 끝은 시조 창법에 따라 생략된 것으로 ‘하노라’ 정도로 읽으면 되겠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059
02 28
님이 오마더니
무명씨(無名氏) 지음
님이 오마더니 달이 지고 새별 뜬다
속이는 제 그르냐 기다리는 내 그르냐
이후야 아무리 오마 한들 믿을 줄이 있으랴
제 – 저가(님이)
내 – 나가
이후(以後) - 오늘 지금 뒤로부터
님이 준 약속에 대한 강한 불신감을 노래했습니다. 하룻밤 사이에 달이 지고 새별이 뜨도록 오마던 님을 기다리는데 오지를 않았군요. 중장에 기다리는 중 느끼는 오락가락한 생각에 거듭되는 질문이 꽉 차 있습니다. 님이 그른 것인데도 기다리는 내가 그른 것인지 헛갈리고 있습니다. 종장의 결론은 차라리 포기에 가깝습니다. ‘나쁜 남자’에 더 끌린다는 현대판 연인들의 역(逆)발상이라면 모를까, 이 커플은 이미 깨진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하루시조 059-1(060/366)
02 29(윤달용 예비)
물 아래 세가랑모래
무명씨(無名氏) 지음
물 아래 세(細)가랑모래 아무리 밟다 발자취 나며
님이 나를 아모만 괸들 내 아옵더냐
님의 정(情)을 광풍(狂風)에 짓부친 사공(沙工) 같이 깊이를 몰라 하노라
세(細)가랑모래 – 잔모래.
밟다 – 밟는다 한들.
발자취 – 발자국. 발로 밟고 지나갈 때 남는 흔적. 또는 그때 나는 소리. 족적(足跡).
아모만 – 아무리.
괸들 – 사랑한들.
아옵더냐 – (님이 주는 정의 정도를) 알지 못한다.
광풍(狂風) - 미친 듯 사납게 부는 바람.
짓부친 – 짓이겨져 불어제치는.
사공(沙工) - 뱃사공.
시조집 청구영언(靑丘永言) 가람본에 적힌 바에 의하면, 이 작품의 작가는 안동지방의 기생이라고 합니다. 철저히 기생으로서의 매몰찬 심사가 여실히 들어 있는 작품으로, 한양의 선비들은 이런 악에 바친 듯한 시조를 도리어 즐겨 불렀다고 합니다. 글쎄요, 지은 사람이나 부러 불러댄 한량들이나 내심 괴롭기는 마찬가지였겠습니다.
종장이 길어진 장형(長型) 시조입니다. [최이해 崔伊海 해설]
첫댓글 필사본으로 노래가사로 전해진 무명씨의 시조를 보면 아주 속 시원히 털어 놓는 삶의 여운이 진하게 담겨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