흠흠시조 029
꿈에 뵈는 님이
명옥(明玉) 지음
꿈에 뵈는 님이 신의(信義) 없다 하건마는
탐탐(貪貪)이 그리울 제 꿈 아니면 어이 보리
저 님아 꿈이라 말고 자로자로 뵈시소
신의(信義) - 믿음과 의리.
탐탐(貪貪)이 – 알뜰살뜰히. 마음에 들어맞게.
자로자로 - ‘자주자주’의 옛말.
뵈시소 – 보이소서.
지은이 명옥은 경기 화성의 기녀라고 합니다. 이 작품은 유명한 <춘향전>에도 등장합니다. 기원(妓苑)에서 자주 부른 노래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녀들이 지은 작품들의 주제가 곧 ‘연정(戀情)’인 것은 시대적 제약 속에서 자기 가슴에 들어앉은 연인을 볼 수 있는 방법이 꿈속일 경우가 대부분이라는 점을 발견합니다. 시대를 격한 감상자의 마음은 안타까울 수밖에 없습니다.
흠흠시조 030
어이 얼어 자리
한우(寒雨) 지음
어이 얼어 자리 무삼 일 얼어 자리
원앙침(鴛鴦枕) 비취금(翡翠衾)을 어디 두고 얼어 자리
오늘도 찬비 맞았으니 녹아 잘까 하노라
어이 – ‘어찌’의 옛말. 어째서. 어찌하여.
무삼 일 – 무슨 일(로). 무슨 이유로.
원앙침(鴛鴦枕) - 원앙이 수 놓인 베개. 부부가 함께 베도록 길게 만든 것이 많다.
비취금(翡翠衾) - 비취색의 이불. 비취는 깃털이 아름다운 물총샛과의 새. 몸의 길이는 17cm 정도이며, 등은 어두운 녹색을 띤 하늘색, 목은 흰색이고 배는 밤색이며 부리는 흑색, 다리는 진홍색이다.
이 시조의 내용을 특정하는 단어 ‘찬 비’의 한자 표기 한우(寒雨)가 곧 작가의 이름입니다. 선조조(宣祖朝) 명기(名技)라고만 알려져 있습니다. 다행히 이 시조의 창작 연기(緣起)가 되는 임제(林悌, 1549~1587)의 ‘한우가(寒雨歌)’가 있습니다. 짝하여 두 작품을 번갈아 읽어보면 저절로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멋진 사랑의 화답(和答)입니다. 찬 비를 ‘찬비’라 붙여 적어 명기 한우(寒雨)를 대신하게 하는 즐거움이 있습니다.
북천(北天)이 맑다커늘 우장(雨裝) 없이 길을 나니
산(山)에는 눈이 오고 들에는 찬 비로다
오늘은 찬 비 맞았으니 얼어 잘까 하노라
흠흠시조 031
청춘은 언제 가고
계섬(桂蟾) 지음
청춘(靑春)은 언제 가고 백발(白髮)은 언제 온다
오고 가는 길을 아돗던들 막을랐다
알고도 못 막는 길이니 그를 슬허하노라
언제 – 다른 데서는 ‘어디’로 되어 있기도 함.
온다 – 오는고? 의문형 종결로 봄이 좋을 듯합니다.
아돗던들 – 알았던들.
막을랐다 – 막을 수가 있었을까. 부정의 의미로 서술한 것임. 못 막는다.
지은이 계섬은 황해도 송화현의 노비 출신입니다. 심노숭(沈魯崇, 1762~1837)이 지은 ‘계섬전(桂蟾傳)’이 남아 있어 다른 기녀들 저자와는 달리 구체적인 기록이 남은 인물입니다. 다른 작품을 남긴 한섬(寒蟾)과 동일인으로 여겨지기도 합니다.
남겨진 시조 한 수는 그냥 읽어도 쉬이 읽히는, 노년의 한탄이지만 노래를 한 작가의 재질에 부응하여 함께 지낸 사람들이 내로라 하던 이들이었을 것입니다.
흠흠시조 032
당우를 어제 보듯
소춘풍(笑春風) 지음 1/3
당우(唐虞)를 어제 보듯 통고금(通古今) 달사리(達事理)하는
명철사(明哲士)를 어떻다고 저 설 데
역력(歷歷)히 모르는 무부(武夫)를 어이 좇으리
당우(唐虞) - 중국 고대의 임금인 도당씨(陶唐氏) 요(堯)와 유우씨(有虞氏) 순(舜)을 아울러 이르는 말. 중국 역사에서 이상적인 태평 시대로 꼽힌다.
통고금(通古今) - 지금과 옛적을 통하여.
달사리(達事理) - 사물의 이치에 통달함.
명철사(明哲士) - 세상 물정에 밝은 선비.
역력(歷歷)히 – 두렷이. 명확히.
무부(武夫) - 무사(武士). 여기서는 양반 중 무반(武班)을 비유함.
지은이 소춘풍(笑春風)은 성종(成宗) 때의 영흥부(永興府) 명기였습니다. 문반 무반이 연석한 자리에서 이 노래를 하였는데, 무신을 차등한 노래라 하여 무반들의 노여움을 사게 되자 곧바로 다음 번 소개할 시조를 불러 잘 넘어갔다고 합니다.
시조의 내용인즉, 고금을 통틀어 똑똑한 선비들이 하도 많은데 제 설 자리조차 구분 못하는 무신을 좇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흠흠시조 033
전언은 희지이라
소춘풍(笑春風) 지음 2/3
전언(前言)은 희지이(戱之耳)라 내 말씀 허물 마오
문무일체(文武一體)인 줄 나도 잠간(暫間) 아옵거니
두어라 규규무부(赳赳武夫)를 아니 좇고 어이리
전언(前言) - 앞엣 말.
희지이(戱之耳) - 농(弄)으로 했을 뿐.
허물 마오 – 꼬투리 잡지 마오. 마음 상(傷)하지 마시오.
문무일체(文武一體) - 문관 무관이 한 가지임. 차등(差等)을 둘 일이 아님.
잠간(暫間) - 잠시. 여기서는 조금.
규규무부(赳赳武夫) - 용감하고 늠름한 무사. 기세가 당당한 무반.
지은이 소춘풍의 앞서 소개한 시조에 이어지는 작품인데, 철없는 무부(巫夫)가 이니라 훤칠한 규규무부(赳赳武夫)라고 치켜세웠습니다.
한 마디로 양반들 사이를 오가며 시조 두 편으로 문반과 무반을 번갈아 들었다가 놓았다가 했던 것입니다.
흠흠시조 034
제도 대국이오
소춘풍(笑春風) 지음 3/3
제(齊)도 대국(大國)이오 초(楚)도 역(亦) 대국(大國)이라
조그만 등국(滕國)이 간어제초(間於齊楚)하였으니
두어라 하사비군(何事非君)가 사제사초(事齊事楚)하리라
제(齊) - 중국 춘추 시대에, 산둥성(山東省) 일대에 있던 나라. 주나라 무왕(武王)이 태공망(太公望)에게 봉하여 준 나라로, 기원전 386년에 가신(家臣)인 전 씨(田氏)에게 빼앗겼다.
대국(大國) - 큰 나라.
초(楚) - 중국 춘추오패(春秋五霸) 가운데 양쯔강(揚子江) 중류 지역을 차지한 나라. 뒤에 전국 칠웅의 하나가 되었으나 기원전 223년에 진(秦)나라에 망하였다.
역(亦) - 역시. 또한.
등국(滕國) - 서남쪽으로 초나라에, 동북쪽으로 제나라에 붙어 있던 작은 나라.
하사비군(何事非君)가 - 무슨 일로 임금이 아니리오.
사제사초(事齊事楚) - 제나라도 섬기고 초나라도 섬김.
지은이 소춘풍(笑春風)이 이 세 번째 작품으로 다소 어색해졌던 문무백관들을 달래고 마무리한 것이랍니다. 세 편의 노래가 순차적으로 이어진 시간적 이동이 치밀하고도 놀랍습니다. 여차직했더라면 구설과 모함에 들었을 법도 한데 잘 빠져나왔습니다.
시조의 내용은, 문반 무반은 제나라와 초나라요, 기생은 작은 등나라라 설정하고 둘 다 잘 섬기겠노라 다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