술은 지금까지 내가 이야기했던 것 가운데 그 어느 것보다 더 내 삶과 존재에 중요했다. 그 강렬하고 달콤한 술의 신은 내 충실한 친구였으며, 지금도 역시 그렇다. 누가 그렇게 강렬하고, 누가 그렇게 아름답고 환상적이며, 열광적이고, 유쾌하고, 우울할 것인가? 그는 영웅이자 마법사다. 그는 에로스의 인도자이자 형제다. 그는 불가능한 일도 할 수 있다. 가난한 인간의 마음을 아름답고 놀라운 시로 가득 채워 준다. 그는 은자고 농부인 나를 왕, 시인, 현자로 만들어 주었다. 텅 비어 버린 인생의 조각배에 새로운 운명의 짐을 싣고, 조난자를위대한 삶의 급한 물결 속으로 되돌려 보내 준다.
바로 술이 그렇다. 그런데 술은 또 귀한 선물이나 예술 같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사랑과 요구, 이해를 받고자 하고, 또 애써 소유물이 되려고 한다. 그렇게 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래서 술이 수많은 사람을 멸망시킨다. 술은 그들을 늙게 하고, 그들을 죽이거나 그들 정신의 불꽃을 꺼 버린다. 그러나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축제로 초대하고, 축복의 섬으로 통하는 무지개다리를 만들어 준다. 그들이 피곤할 때 머리 밑에 베개를 놓아 주고, 슬픔에 사로잡혀 있을 때 친구처럼, 위로하는 어머니처럼 그들을 꼭 껴안아 준다. 술은 삶의 혼란을 위대한 신화로 바꾸어 놓고, 힘찬 하프 선율로 창조의 노래를 연주한다.
게다가 술은 어린애 같다. 비단 같은 긴 곱슬머리와 좁은 어깨, 섬세한 다리를 지니고 있다. 술은 당신의 가슴에 기대어 조그만 얼굴을 당신 얼굴에 마주 대고는, 그 사랑스럽고 큰 눈으로 놀란 듯, 꿈꾸듯 당신을 바라본다. 그 눈 안에서는 천국의 기억과 잃어버릴 수 없는 신의 천진성이 숲 속에서 솟아나는 샘물처럼 촉촉하게 빛나며 물결친다.
그 달콤한 술의 신은 봄밤에 깊은 산에서 졸졸 흐르는 물줄기와 같다. 또한 그것은 태양과 폭풍을 거센 파도 위에 놓고 흔드는 바다와 같다.
술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대화할 때면, 비밀과 추억, 시와 예감의 바다가 쏟아지듯, 아니 엄습하듯 그들을 감싼다. 그러면 낯익은 세계가 줄어들고 사라져 버리며, 영혼은 불안한 환희에 잠겨 모르는 세계의 길 없는 지평으로 내던져진다. 그곳은 모든 것이 낯설면서 친숙한 곳, 음악과 시인과 꿈의 언어가 표현되는 곳이다. - 87 ~ 88
- 페터 카멘친트/헤르만헤세/민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