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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곡 마을은, 마을 주위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어 큰 시루와 같다하여 ‘대시'라고 부르다가 어원이 바뀌어 ‘대시리'라고 불렸다고 전한다. 또 한편으로는 대(竹)가 많은 고을이라서 ‘대실(竹實)'이라 칭하였다고 전하며, 죽곡이란 다름아닌 대실의 한자어이다. 현재까지도 봉황 사람들에게는 죽곡마을보다는 ‘대시리'라는 이름이 익숙하게 불리워지고 있다. 전해지는 말에 의하면, 정씨(鄭氏)가 약 300년 전부터 거주하였다 하나, 지금은 한 집도 없고, 130년 전 진주정씨(晉州鄭氏)와 풍산홍씨(?産洪氏)가 거의 같은 시기에 이거하여 지금까지 살고 있다.
현재는 8성씨가 거주하고 있으며, 일제시대 초 1912년에 면사무소가 본 마을에 있었다. 죽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금천면으로 가는 도로를 따라 북쪽으로 2㎞정도 가다보면 마을 앞으로 ‘안산'이라고 불리우는 얕으막한 산이 있고, 산 뒤쪽은 산의 머리쪽이 용머리 모양으로 생겼다하여 용머리라 하는 등성이가 있다. 남쪽으로는 동암배미라고 하는 죽곡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인 논들이 있다. 한편 이 마을에는 ‘죽곡천'으로 불리우는 공동우물이 있는데, 수량이 풍부할 뿐만 아니라 물맛이 좋다. 또한 마을뒷산에 ‘메밀샘'이 있는데 메밀과 같이 생긴 물구멍에서 물이 나오고 있다.
이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동계, 서계, 청년회가 있으며 친목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동계'는 100년 전에 창립되었으며, 인원은 36명이고, ‘서계' 또한 100년 전에 창립되었고 참여인원은 36명이다. ‘청년회'는 1983년에 친목을 목적으로 창립되어 현재 50명이 참여하고 있다.
본 마을에는 50년 전에 발견된 ‘장군묘'라 불리우는 개성 이씨의 고분(古墳)이 있는데, 주민들이 고분을 파다가 석곽이 나왔다고 전한다. 또한 이 마을에는 3채의 고가가 있는데 18세기 말에 세워진 정준성 고가와 19세기말에 세워진 나선순 고가, 홍상록 고가가 그것이다. 마을 공로자로는 재일동포로 마을 도로를 포장해준 정형대가 있고, 배출 인물로는 초대 면장인 정복원과 독립운동가인 홍민후가 있다. 홍민후는 광주학생사건에 가담하여 활동하다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대구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루었다. 포양문을 받은 인물로는 정병순, 양홍기, 양명영, 한동환이 있고, 장진철은 표창장을 받았다. 죽곡마을의 인구는 총 162명으로, 남자가 85명, 여자가 77명에 이르며, 총 52호 중 농가가 49호, 비농가가 3가구를 형성하고 있다. 면적은 밭 0.10㎢. 논 0.15㎢, 임야 0.20㎢로 총 0.45㎢이다. 주요 산업은, 쌀농사를 주로 하며, 특작물로는 수박과 무를 재배하고 있다. 성씨로는 풍산홍씨(?産洪氏) 14호, 진주정씨(晉州鄭氏)5호, 흥덕장씨( 興德張氏) 3호, 기타 8호로 총 52호가 살고 있다.
구석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북동쪽으로 1.0㎞의 거리에 위치한 비교적 큰 마을이다. 마을 입구에는 30년 전에 콘크리트로 보수공사를 한 구석교가 있는데 그 밑으로는 금천천으로 연결되어 있는 하천이 흐른다. 이 구석교를 지나면 인심이 좋고 단합이 잘 되는 구석마을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대체로 낮은 야산인 마을 뒷산이 마을을 둘러싸고 있어서 지형이 조리형이라고 전하며, 풍수지리상 좋은 터로 알려져 일찍부터 마을이 형성되었다.
처음에는 ‘구석(舊蓆)'이라 부르다가 조리형을 상징하는 단단한 石(석)자를 蓆(석)자 대신 사용하여 현재의 ‘舊石'이라 칭하게 되었다. 이 마을은 원래 죽곡면 구석리에 속해 있다가,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는 봉황면 죽석리 구석리로 변경되었으며, 그 후 봉황면 죽석리 구석마을로 다시 바꾸어졌다. 이 마을은 남평현 죽곡면에 속하여 있다가 한일합방 초에 3개 면인 죽곡, 욱곡, 덕곡이 병합되었으며 그 때 초대면장인 정복원이 본 마을에 면사무소를 두고 행정을 수행하다가 1914년에 죽석리 신석마을로 면소재지가 옮겨졌다. 제주양씨(濟州梁氏) 양희열(梁熙烈)의 제 21대 선조인 양종황(梁宗皇)이 처음 이 마을에 이거하여 정착하자 그 뒤를 이어 흥덕장씨(興德張氏)와 밀양손씨(密陽孫氏)가 이거하여 마을을 형성하였다고 전하나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단지 마을이 이루어질 당시에 마을 어귀에 느티나무와 팽나무를 식재하였는데 느티나무는 1970년대에 고사하였고, 팽나무는 지금도 노거수로 남아 있는데 그 크기로 봐서 500년전으로 추정할 따름이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동계, 상부계, 위친계가 있는데, 동계는 1800년대초에 친목을 목적으로 생겼으며, 인원은 105명이 참여하고 있고 상부계는 1920년대 초에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설립되어 68명이 참여하고 있다. 위친계는 1940년대 초에 친목과 상부상조를 위해 모엿으며, 현재는 32명 정도가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민속유적으로는 마을 회관 입구에 있는 남, 녀로 구분된 2구의 석불로서 시대미상이며, 두상이 떨어져 없는 상태로 보존되어 있는데 이것을 석장으로 보는 이도 있다. 이 마을 사람들은 이 석불을 ‘미륵불'이라 부르는데 원래는 이 석불들이 각각 마을에서 300m 전방과 1,000m 후방에서 기와와 함께 출토되었는데, 15년 전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
구석마을의 인구는 총 390명으로 남자 184명, 여자 206명이다. 면적은 밭 0.29㎢, 논 0.42㎢, 임야 0.42㎢, 기타 0.01㎢로 총 0.96㎢이다. 주요 산업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는 수박을 재배하고 있으며, 마을 사람들의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다. 현재 마을의 총82가구 중 농가는 78호, 비농가는 4호가 해당된다. 성씨로는 진주정씨(晉州鄭氏) 13호, 김해김씨(金海金氏) 11호, 밀양박씨(密陽朴氏) 11호, 기타 47호로 형성되어 있다.
죽석리 고미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봉황초등학교를 지나 동쪽으로 0.7㎞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마을 앞에는 철천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흐르고 있으며, 농업용수로 이용하고 남은 물은 영산강으로 흘러간다. 마을 뒷동산에 소가 누워있는 형태의 바위가 있는데, 그 바위 모퉁이 끝에 있는 소의 꼬리부분에 터를 잡았다고 하여 돌아볼 고(顧), 꼬리 미(尾)자를 써서 고미라 칭하였다 한다. 1912년 조선총독부에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의해 편제된 을 살펴보면, 고미는 죽곡면 고미로 처음 나타나고, 1914년 행정개편 당시에는 죽석리 고미리(古尾里)로 변경되었다가, 그 후 고미(顧尾)마을로 다시 바뀌어 지금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서 마을 이름이 ‘고미'(古尾)에서 ‘고미'(顧尾)로 바뀐 것을 알 수 있는데, 그 확실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마을 형성시기는 알 수가 없으나, 입향조는 밀양박씨(密陽朴氏) 박문범으로 경남 밀양에서 살다가 박씨 문중의 소개로 아버지를 따라 본 마을에 들어와 터를 잡고 정착하여 마을을 이루었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동계, 위친계 등이 있다. 동계는 1800년대말 친목과 화합을 위해 창립되었고, 참여인원은 17명이다. 위친계는 1900년대 초에 상부상조를 목적으로 창립되어 현재 17명이 참여하고 있다. 이 마을 출신의 인물로는 의병난리 때 능주에서 활동하다가 전사한 최우평이 있는데 그의 행적을 실은 행적비는 다도면 풍산리 문산에 있다. 이 마을의 기본현황은 남자 70명, 여자 55명으로 총 125명이 살고 있고, 면적은 밭이 0.08㎢, 논 0.07㎢, 임야 0.01㎢로 총 면적은 0.16㎢이다. 마을의 주요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담배 재배와 배를 생산하고 있다. 가구 17호 모두가 농사를 짓고 있으며, 성씨는 강화최씨(江華崔氏) 3호, 밀양박씨(密陽朴氏) 5호, 이천서씨(利川徐氏) 7호, 순흥안씨(順興安氏) 2호가 살고 있다.
옛날에는 이 마을 앞까지 배가 드나드는 곳이었다고 전하며, 그래서 마을 이름을 ‘신애' (新涯)라 칭하였다고 하며, 일명 마을 지형이 황새가 나는 형상이라 하여 ‘비가(飛加)‘라고도 부른다. 죽석리 신애마을의 위치는 면소재지에서 금하로를 따라 동쪽으로 약 1.25㎞ 떨어진 곳에 있다. 마을의 형성 시기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입향 성씨는 전주이씨(全州李氏) 이홍기 (李弘奇)가 영암에서 살다가 형제들이 분가 이주할 때, 본 마을에 터를 잡고 정착함으로써 마을이 형성되었다고 하며 거의 같은 시기에 해남윤씨(海南尹氏)도 들어왔으나 정착하지 못하고 떠났다고 한다. 마을의 행정구역 변천을 보면, 1912년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는 죽곡면 신애리로 나타나 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당시에는 ‘봉황면 죽석리 신애리'로 변경되었다가, 그 후로 봉황면 죽석리 죽석 3구 신애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마을에서 현재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는 자생조직은 위친계, 부녀회가 있으며, 창립 목적은 친목도모이며, 위친계는 1906년에 부녀회는 1976년에 창립되었으며, 현재 참여인원은 10명이다. 마을을 빛낸 사람으로는 윤주원(尹柱元)의 처 이씨(李氏)가 있다. 이씨는 병든 남편을 살리기 위해 자기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남편 입에 흘려 넣어 며칠을 연명케 하였으나, 남편이 죽자 예에 따라 치상하고 시부모님께도 효성이 지극하였다고 한다. 현재 마을 입구의 오른편에 이씨의 행적을 기린 비석이 있으나, 방치되어 비문조차도 희미해져 읽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50명에 남자가 28명, 여자가 22명이 거주하고 있으며, 면적은 밭 0.07㎢, 논 0.05㎢, 임야 0.01㎢로 총면적 0.07㎢이다. 주요산업과 주요 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무와 콩을 재배하고 있으며, 배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농가는 9호, 비농가는 1호로 있으며, 성씨는 청주김씨(淸州金氏) 5호, 김해김씨(金海金氏) 2호, 전주이씨(全州李氏) 1호, 기타 2호가 있다.
죽석리 망곡마을은 면소재지에서 동북쪽으로 약 1.5㎞지점에 자리잡고 있는 비교적 작은 마을이다. 1937년경에 철야에서 살던 진주정씨(晉州鄭氏) 정영준이 망골이라고 불리워지던 이곳에 복숭아 나무를 재배하여 그것을 관리하기 위해 6년 동안 혼자서 집을 짓고 살았는데 1950년 한국전쟁이 발생하자, 공산군들이 철야마을 뒤의 덕룡산에 숨어 있다가 밤이면 마을로 내려와서 식량, 옷, 가구 등을 요구하는 일이 잦아지자, 철야 마을 사람들이 지서가 가까운 망골로 피난을 와 집을 짓고 살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마을이 형성되었다. 이 마을은 형성되기 전부터 망골이라 불리워졌는데, 그 이유는 마을 위에 토끼가 옥에 갇혀 달빛이 아름답게 비추는 곳을 쳐다본다는 뜻을 가진 ‘옥퇴망골'이란 명당자리가 있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그 뒤 마을이 형성되자 ‘옥퇴망골'을 ‘옥동망골'로 바꾸어 불렀다. 또한 최근에 터를 잡고 정착하였다 하여 ‘샛터'로 불리우는가 하면, 사람들은 이 마을에 언젠가는 호구 총수가 만호가 들어설 것이라 하여, 한자어로 일만(萬)자를 사용하여 ‘만곡'(萬谷)이라고도 칭한다.
마을 주민들이 함께하는 조직으로 1979년에 윤두현이 주축이 되어 조직된 동계가 있다. 이 계는 마을사람들의 친목을 도모한다는 목적에서 설립되었으며 현재 그 운영이 매우 활발하다. 마을 공유 재산으로는 마을 입구에 지은 마을회관 겸 창고가 있고, 마을 총회는 8월 추석과 정월 3일에 두 차례 개최되는데 마을의 제반사항 및 농사에 대한 정보를 교환한다. 총회가 끝나면 간단하게 잔치를 열어 마을주민 사이의 친목을 도모한다. 이 마을의 특기사항으로는 민간신앙을 전혀 찾아볼 수 없다는 것인데 그 이유는 마을형성시기가 짧아 가구수도 몇 호 안 되며, 터가 좋아 제를 지낼 특별한 필요성을 못 느끼기 때문이라고 한다. 마을의 지명 유래에서 ‘옥퇴망골'이란 명당자리에 대해 언급했는데, 그밖에도 마을부근에 ‘비아탁시'라고 하여 날아온 까마귀가 송장을 쪼아 먹는 형국이라는 명당자리가 있다고 하나 아직 그 명당자리에 묘를 썼는지 안 썼는지에 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마을을 빛낸 사람으로는 정성균이 있는데, 그는 1960년에 신병으로 오랫동안 앓고 있는 아버지를 극진히 봉양하여 남평향교에서 주는 효자상을 받았다. 마을 공로자로는 새마을 지도자로 있으면서 마을 발전에 많은 공헌을 한 서상억이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은 총인구 73명에 남자 35명, 여자 38명이며, 총면적 0.09㎢에 전0.02㎢, 답 0.04㎢, 임야 0.02㎢, 기타 0.01㎢가 해당된다. 주요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마을의 특작물로 콩과 수박을 재배하고 있다. 총 13가구중 13호가 농사를 짓고 있다. 성씨로는 이천서씨(李川徐氏) 4호, 파평윤씨(坡平尹氏) 2호, 진주정씨(晉州鄭氏) 1호, 기타 6호가 있다.
죽석리 신석마을은 1914년에 봉황면사무소의 소재지가 되어 각 기관이 본 마을에 들어서면서 급속하게 발전을 하여 큰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신석 마을에는 봉황면사무소, 봉황농협, 봉황우체국, 봉황파출소, 봉황어린이집 등 각급 기관이 밀집되어 있다. 또한 병원, 의원, 약국, 인터넷 게임방, 비디오방, 미장원 등 상가가 조성되어 있다. 면사무소 앞에는 철천으로 가는 금하로가 포장되어 있다. 신석마을은 400년전인 1590년경에 밀양손씨(密陽孫氏) 손계조(孫繼祖)가 능주에서 살다가 이미 자연마을이 형성되어 있던 죽석리 구석마을에 들어와 살게 되었으나, 구석마을에서 화재를 입어 1630년경에 신석에 터를 잡고 들어와 살기 시작하였다 한다. 그 뒤에 김해김씨, (金海金氏), 영광정씨(靈光鄭氏), 광산노씨(光山盧氏) 등 여러 성씨가 들어와 마을을 형성하였다. 마을 이름은 입향조인 손계조가 구석에서 신석으로 들어올 당시, 마을을 에워싼 작은 산능선이 바위로 형성되어 있어 새로운 돌을 보았다고 구석과 연계하여 신석이라 불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지방행정구역 명칭일람>에 ‘죽곡면 신석리'로 나타나 있고 1914년 행정구역개편 당시에는 봉황면 죽석리 신석리로 변경되었다가 그 후로는 봉황면 죽석리 죽석2구 신석마을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신석의 자생조직으로는 동계, 부녀회, 청우회가 있다. 역사 유적으로는 손긍훈을 모신 현충사가 마을회관 뒤에 있는데 음력 9월 중구날 제를 지낸다. 제 지낼 준비는 손씨들이 하지만 향교 유림들이 와서 제를 지내기 때문에 “유림행사”라고 한다. 현충사에 모셔진 손긍훈의 행적을 살펴보면, 신라말기에 진덕영왕이 실덕하여 괴귀가 횡행하게 되고 사람이 많이 죽어 인심이 흉흉해지자 괴귀를 바다속으로 쫓아 버려 나라안을 평안하게 하였다 한다.
신석마을은 새마을운동 후에 마을 안길이 확장되고 마을을 소도시처럼 가꾸었으며, 인구가 밀집된 마을로 변화하였다. 이 마을에 전기가 가설된 것은 1965년이었는데 철천, 구석, 신석, 송길이 처음이었으며, 전력은 남평에서 끌어왔다.
마을의 자생조직으로는 1930년에 창립된 동계에 110여명이 참여하고 있고, 1976년 창립된 부녀회에 45명이 참여하고 있다. 한편 상부상조와 친목을 위해 청우회가 1977년 창립되어 현재 41명이 참여하고 있다.
마을의 기본현황을 살펴보면, 총 인구는 931명으로 남자가 460명, 여자가 471명이 살고 있고, 밭이 0.54㎢, 논 0.79㎢, 임야 0.21㎢, 기타 0.01㎢로 총 1.55㎢에 해당된다. 마을의 주요 산업과 주소득원은 쌀농사이며, 특작물로 수박과 포도를 재배하고 있다. 농가는 140호, 비농가는 73호이며, 주요 성씨는 밀양박씨(密陽朴氏) 46호, 김해김씨(金海金氏) 37호, 영광정씨(靈光鄭氏) 26호, 기타 104호로 형성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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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아니! 이래 좋은자료를 ~~~~지기님 새해는 복+복+복 엄청받을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