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출신 故 신석정시인 고향품으로
들꽃을 꺽어들고 목놓아 울기도 했다
이고장의 자랑이자 扶安이 낳은 시인 辛夕汀. 현대 한국 시단의 거목이며 목가적 민족 시인이라는 평가받았던 석정이 세상을 떠난 지 24년만에 29일 부안군 행안면 역리 선영 가족묘지인 고향품에 안겼다.
생전에 휴양지로 삼았던 임실군 관촌면의 신월리에서 오래동안 타지에서 몸을 뉘었던 석정은 이날 먼저 가있던 아내와 아들과 함께 한 자리에서 만나게 됐다.
그동안 석정의 고향 부안 사람들과 문학인들은 변산반도 입구 해창공원에 석정시비를 세우고 부안읍 선은리의 고택 청구원을 복원해 석정에 대한 삶과 문학세계에 새롭게 조명할뿐만아니라 타지역에 안장된 그의 묘지를 고향에 들여오지 못해 항상 아쉬워 했었다.
이제 석정이 고향땅에 돌아와 부안은 석정문학의 향취를 듬뿍 느낄수 있으며 후학들이 그의 삶과 문학세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는 뜻깊게 자리잡아 갈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석정은 1906년 부안읍 동중리에서 태어났다 석정의 본명은 錫正이었으나 생일이 7월7일 칠석이라 석 夕 을 여기에 따서 석정 夕汀 이라 자호했다 석정은 부친을 따라 행안면 역리 송정부락으로 이사하여 살다가 다시 동진면 창북리로 옮겨 거기에서 대부분의 소년시절을 보냈다고 한다. 석정은 부안국교를 졸업하고 농사일을 돕다가 17세 때에 조선일보에 기우는 해 를 발표하면서 문단의 관심속에 데뷔했다.
그해 시인 장만영의 체제인 만경사람 박소정과 결혼했다. 결혼후 쓴 작품이 촛불 이다 일제에 밟힌 조국의 산하를 시로 표출 1930년 동국대학의 전신인 중앙불교전문학원에 들어가 박한영 문하에서 불전과 노장철학을 배웠다.
이때 석정은 타고르와 동양철학에 몹시 심취해서 철저한 자연에의 귀의를 소리쳤다고 했으며 이때의 석정의 시는 현실과 유리된 근심걱정 없는 모습을 띠고 있었다.
이때 무렵인 1939년에 나이에 맞춰 33편의 주옥을 울린 촛불 이 나왔다. 석정은 이보다 앞서 만주사변이 일어나던 1931년 박용철 김영랑등과 어울리며 시문학의 동호인이 되어 순수문학의 가치를 높이 들었다. 그리고 30년대 최초의 모더니스트라고 불리울만큼 중세기적인 무한과 깊고 가녀린 신비를 연모하는 서구낭만시와 한국적인 면을 가미한 문단의 거인으로 등장했다.
그후 석정은 잠깐의 공무원생활을 거쳐 1946년 김제죽산중과 부안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후진양성에 뜻을 두었다가 6.25가 끝나고 전주에 있던 태백신문에 잠시 몸담고 있었다. 그후 석정은 전주상업고등학교, 전주고등학교, 전북대학교강단에 서며 인생을 관조할 빙하시대 와 보고 또 보는 자연애로 들어간 산의 서곡 시대를 맞는다. 석정은 생활이 바뀌어 감에 따라 그 제재뿐만 아니라 언어 및 어법까지도 바뀌었다.
생활의 호흡이 그대로 시의호흡이 되고 생활의 언어가 그대로 시의 언어가 되었다. 석정은 1952년 전주로 이거할때까지 선은리의 청구원에 은행나무 백오동나무 자귀대나무 측백으로 울을 두르고 시상을 다듬었고 전주시 노송동에 시누대 호랑가시 낙엽송이 우거진 가운데 69세를 일기로 떠났지만 조국도 빼앗기고 민족도 흩어졌던 일제의 살벌한 박토위에서부터 질긴 시혼으로 뿌리내려 매를 모르는 다비데의 행복한 고향으로 퇴폐한 현대인의 안식처를 우리 시단에 내려줬다.
석정의 시상은 민족혼의 절절한 배양토였으며 그의 전원시는 하늘 끝 다하는 조국의 울부짖음이었다. 또한 석정은 아스팔트 냄새나는 거대한 공룡같은 대처를 멀리하고 흙냄새 풍기는 향토에서 한 겨울의 낙락장송처럼 곧은 절개로 그 특유의 문채로 문학세계를 이루었다.
시인 이동주는 석정의 조사에서 남쪽하늘이 텅비었구나 하고 슬퍼했다. 석정은 촛불 슬픈목가 빙하 마지막 시집인 대바람소리 4권과 중국시집 매창시집 명시조감상 공저 외에 수상집 난초에 어둠이 내릴때 를 남겼다. 슬하에 3남4녀를 두었는데 68년에 한국문학상, 72년에 국민표창, 그리고 1973년에 문화예술상을 수상했으며 전북예총에서는 지난 78년 덕진공원과 후학들이 부안군 변산면 해창공원에 그의 시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날 묘지 이장에는 가족들과 석정문학회원 문인들이 참석해 고향에 돌아온 석정을 반기고 참배했다.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깊은 삼림대(參林帶)를 끼고돌면 고요한 호수에 흰 물새 날고 좁은 들길에 야장미(野薔微) 열매 붉어 멀리 노루 새끼 마음놓고 뛰어다니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 나라에 가실 때에는 부디 잊지 마셔요 나와 같이 그 나라에 가서 비둘기를 키웁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산비탈 넌지시 타고 나려오면 양지밭에 흰 염소 한가히 풀 뜯고 길 솟는 옥수수밭에 해는 저물어 저물어 먼바다 물소리 구슬피 들려오는 아무도 살지 않는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어머니 부디 잊지 마셔요 그때 우리는 어린양을 몰고 돌아옵시다
어머니 당신은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오월 하늘에 비둘기 멀리 날고 오늘처럼 촐촐히 비가 내리면 꿩 소리도 유난히 한가롭게 들리리다 서리까마귀 높이 날아 산국화 더욱 곱고 노란 은행잎이 한들한들 푸른 하늘에 날리는 가을이면 어머니! 그 나라에서
양지밭 과수원에 꿀벌이 잉잉거릴 때 나와 함께 고 새빨간 능금을 또옥 똑 따지 않으렵니까? |
학창 시절에 누구나 한 번쯤은 읊어보았을 신석정 시인의 시다.
신석정 시인은 전주의 여러 학교에서 오랫동안 학생들을 가르쳤기 때문에 많은 문하생이 있었다. 그들이 가장 많이 읊는 시가 ‘이직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와 ‘그 먼 나라를 아십니까.’이다.
신석정 시인은 부안 출신이다.
그런데 그가 죽고 나서 처음 묻힌 곳은 부안이 아닌 임실이었다. 그래서 그곳이 어디인지 찾아 나서 보았다.
먼저 그와 친했던 시인 이기반 선생님이 살아생전에 들려준 이야기에 주목했다. 이기반 시인은 신석정 시인과 친한 사이였다. 그래서 전주 주변의 산과 들을 자주 돌아다녔다.
어느 날, 임실군 관촌면 신전리 앞산을 오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곳은 신석정 시인의 둘째 아들인 신광현 씨의 처가 동네였다. 그러한 연고로 이곳을 와보고 눈여겨보아 왔던 곳을 이기반 시인과 동행하여 산을 오르게 된 것이다.
그때에 신석정 시인은 이기반 시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떤가? 이 정도면 죽은 뒤에 누울만하지 않는가?”
신석정 시인이 세상을 떠나고 장지를 결정하는 초상 마당에서 이기반 시인이 그 말을 했고 사위인 최승범 시인이 동의하면서 신석정 시인의 처음 묏자리가 된 것이었다. 그런데 그 후에 부안군에서 신석정 시인을 대대적으로 조명하면서 부안으로 이장을 하게 되어 빈자리가 되고 말았다.
한 때는 처음 묏자리에 임실문학 회원들이 참배도 하고 시인의 시를 제자들이 낭송도 했던 자리였다.
20년도 더 지나간 1997년 11월, 한국문인협회 임실지부 회원 20여 명은 신석정 시인과 친했고 손수 장지를 권했던 이기반 시인과 함께 묘소를 찾았다. 그때에 시인의 묘소 치고는 너무 허술했던 것에 가슴 아파했다. 안내판 하나 없고 묘비 하나 없었던 것이다.
그 자리에서 가지고 간 국화꽃을 봉헌하고 술을 따라 올리기도 하였다. 이기반 시인으로부터 신석정 시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고 제자인 문두근 시인이 학창 시절에 외워두었던 고인의 시를 낭송하기도 하였다.
임실문학회원들의 신석정 시인의 처음 묘소가 있을 때의 참배 장면
그때의 일을 떠올리며 신석정 시인의 처음 묏자리를 찾아 나서는 것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고 집을 나섰다.
전주에서 남원으로 향하는 춘향로를 따라가다가 슬치재를 넘으면 임실군이다. 슬치재 아래에 있는 관촌 소재지에서 좌회전하여 들어가면 진안 냉천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그곳을 향하여 조금 가다가 다시 좌회전하여 농로를 따라가다 보면 전에 상월초등학교가 있던 신전리 마을이 나온다. 그곳에서 앞산을 바라보는 곳에 신석정 시인의 묏자리가 있었다.
그런데 지형이 달라졌다. 산 중턱에 기다란 비닐하우스가 들어선 것이다. 어디가 어디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오랫동안 이 길을 지나다녔던 윗동네 상월리에 사는 김여화 소설가에게 자문을 구했더니 비닐하우스 왼쪽 끝의 조금 위가 신석정 시인의 처음 묏자리라고 알려준다.
비닐하우스 왼쪽 끝의 위가 신석정 시인의 처음 묏자리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 없네…”
그런데 산천도 의구하지 않고 인걸도 가고 없는 것이다.
인생무상이라는 말이 실감 나는 순간이다. 시인이 누워 있던 자리에 나무와 풀이 수북하게 자라 무상함이 더했다.
이제는 시신마저 없어져서 쓸쓸함을 더해주고 있다.
그래도 시인이 누웠다 간 자리이기 때문에 돌아오는 발길이 아쉽기만 하다.
시인 송하선(75) 전주 우석대 명예교수가 쓴 '신석정 평전―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푸른사상)이다. 석정은 송 교수의 스승. 그는 "1958년 전북대 재학 시절 처음 선생을 뵈었고, 그 직후부터 소명의식으로 55년 동안 자료를 모았다"면서 "지조 있는 한 선비로서 현실과 사회를 정관하며 평생을 살아온 시인의 진면목을 찾기 위한 노력"이라고 했다.
송 교수는 그동안 석정에게 부여된 잘못됐거나 과도한 호칭의 오해를 푸는 일로 평전을 시작한다. '목가 시인' '참여 시인' '민족 시인' 등이 그 오해의 이름들이다. 안서 김억이 석정에게 붙인 '목가 시인'은 서양적 개념으로 '그 먼나라를 알으십니까' 등 초기 시에만 유효하다는 것. 또 '참여 시인'도 옳지 않다고 했다. 이 범주에 거론되는 작품은 대부분 태작이거나 시적 완성도가 떨어져 석정 스스로 시집 출간에서 제외한 작품이라고 했다. 세 번째로 '민족 시인'이라는 표현도 어울리지 않는다고 했다. 이 호칭이 어울리는 시인은 직접 독립운동을 했던 이육사 윤동주 한용운 세 사람밖에 없다는 것. 대신 송 교수는 '지조 있는 한 선비'로서 석정에게 주목하면서 '전원 시인'이라는 호칭을 제안했다. 석정의 좌우명은 지재고산류수(志在高山流水). "속물이 되기 쉬운 것도 인간이요, 지조를 헌신짝처럼 버리기 쉬운 것도 인간이다. 그러므로 뜻을 저 고산과 유수에 두는 날, 명경지수 같은 마음으로 정신의 기둥인 지조를 끝내 지킬 수 있으리라 믿어 좌우명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송 교수는 "참여시인 저항시인 민족시인 등의 호칭을 붙여야만 훌륭한 시인으로 추앙받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몇몇 연구자들이 이를 고집하는지 정말 모를 일"이라면서 "그의 시와 삶은 난세의 스승으로, 후세에게 교훈을 주고 귀감이 되기에 충분하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