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지우면
김 상 립
수필이 본격적으로 문학의 한 장르로 자리잡으면서 시작된 허구에 관한 논쟁이 꽤 오랫동안 있었다. 적지 않은 분들이 아까운 시간과 노력을 들여 허구에 대한 서로의 견해를 내놓기에 열심이었지만, 분명한 결론은 내지 못했던 것 같다. 더구나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에는 수필에 대한 독자들의 인식도 많이 변했고, 작가들도 나름으로 수필의 형식을 다양화시켜 독자들에게 다가가려 애쓰고 있어, 그런 문제는 수면 아래로 갈아 앉은 듯하다.
근래에 와서, 전통적으로 정형화된 수필은 상대적으로 줄어든 반면, 시의 형식을 취한 수필도 있고, 소설이나 콩트 스타일로 쓰여지는 작품도 있다. 또 세상을 꺼꾸로 보기 형식도 나오고, 옴니버스 기법도 응용된다. 사물수필이라 하여 볼펜이나 운동화, 옷가지 같은 사물들이 의인화되어 주인공으로 등장하기도 하고, 각 지방별 사투리를 구사하여 대화체로 작품으로 만들어 내기도 한다. 또 최근에는 단 수필이나 아포리즘 수필이 활발하게 나서고 있다.
그러나 원칙적으로는 누가 어떤 형식으로 글을 쓰던 간에 수필에서는 허구를 차용하면 아니 된다는 견해를 나는 아직도 가지고 있다. 수필은 어디까지나 진실과 정직을 기본으로 써지는 것이 옳다. 수필은 작가가 주인공이 되는 글이어야 하고, 그의 실제 체험이나 생각에서 글이 출발해야 한다. 만일 작가가 꼭 허구를 도입해야 한다면 해당 사실에 대해 독자들의 이해를 돕게 한다거나, 문학성을 가미하기 위해 표현의 격을 조금 달리하거나, 재미를 더하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 만일 작품에 쓰여졌던 허구로 말미암아 독자에게 전달하고자 한 작가의 뜻이 고의로 꾸며지거나 달라져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더하여 인터넷이나 책, 혹은 영화나 TV 등을 통하여 얻은 간접 체험은 분명 타인의 체험인데도 슬쩍 자기 것으로 만들어 끼워 넣는 것도, 작품에서 인용부분이 지나치게 많은 것도 결국은 허구와 결을 같이 할 것이다.
수필은 그 소재가 무엇이었던 간에 깊이 있는 사색과 선(善)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진실과 어울려 빛을 낸다면 좋은 수필이 될 것이다. 만일 그 위에 재미와 감동이 함께 펼쳐지면 금상첨화가 되겠지. 그러나 인간은 늘 자기자신이 가장 옳은 것처럼 보이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지고, 잘난 척 하고 싶은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작품에서는 자기 얘기를 써도 자기라는 존재를 너무 강조하거나 앞세우다 보면, 바람이 들고 그 바람은 허풍으로 변하기 마련이다. 슬쩍 슬쩍 행간에 나를 숨겨가며 쓸수록, 써진 작품은 독자들에게 읽혀질 기회를 더 많이 가지게 된다.
따라서 작가가 체험한 자기만의 체험을 끝까지 자기 얘기로만 한정시켜 끌고 가지 말고, 여러 독자들의 공통된 체험으로 확장시키고, 끝내는 인류의 보편타당성 있는 삶의 가치로 승화시키는 노력을 통해서 비로소 수필다운 수필이 만들어질 것이다. 또한 작가가 글을 쓰며 미사여구를 찾는 노고나 문학성을 내세우기 위한 고뇌도 중요하지만, 어눌하더라도 마음 깊은 곳에서 울어나는 생각을 있는 그대로 진솔하게 쓰는 데에 더 많은 힘을 쏟고 나면, 작가는 해당 작품에 대해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이런 결과는 자신의 일상생활에도 긍정적 영향을 주게 되니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문학이 인간의 삶과 별개가 아니듯이, 사람 사는 일이나 수필 쓰는 일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하지만 지금 세상은 허풍이, 거짓말이 판을 친다. 공개적으로 거짓말을 쏟아놓고도, 아니면 말고 그 뿐이다. 사과도 반성도 없다. 또 자신을 알아달라고 제 스스로가 나서서 자기 PR에 허풍을 동원하기 예사다. 심지어 어떤 자들은 일부러 남을 공격함으로써, 자기 존재를 과장하여 돈벌이 하는 것을 직업으로 삼고 산다. 기막힌 일이다. 이렇게 세상은 제 이익을 위해 무슨 짓이라도 해대는 악한 성향의 사람들이 춤을 추고 있다.
문학이란 어떻게 보면 사회정화를 위한 기능에 그 존재의미가 있다. 또 어느 문학장르보다도 수필은 세상을 향해 보편적인 선을 전파하기에 적극적으로 앞장서야 한다고 믿는다. 우리 수필이 잘 못되어가는 정치도 말하지 말고, 사회에 만연하는 마약도, 흉악 범죄도, 성 문제도 가급적 기피하자는 분위기에 빠져든다면, 나는 단호하게 붓을 꺾어버릴 것이다. 요즈음 보내주는 수필 속에서 은근히 자기 자랑을 하고 싶어 안달하는 문장을 만나고, 허풍이 섞인 글도 보며 착잡한 심정이다. 수필이 자기 자랑, 자기 광고를 위한 글 쓰기는 아니다. 사회가 수필을 닮아야지 수필이 사회를 닮아가서야 되겠는가?
작가가 글 속에서 자신을 잘났다고 들어내면 낼수록 독자들로부터 빨리 잊혀지고, 자신을 지우면 지울수록 작품은 더 오래 살아 남게 되는 이치를 알아야 한다. 작가는 모름지기 작품으로 듣고, 작품으로만 말하려 애써야 한다. 오늘따라 선행도 숨긴 키다리 아저씨가 몹시 그립다. 수필가들이 보다 당당하고 행복해졌으면 좋겠다.
첫댓글 "어떤 형식으로 글을 쓰던 간에 수필에서는 허구를 차용하면 아니 된다는 견해"와
"수필이 어떤 형식을 취하든 깊이 있는 사색과 선(善)을 추구하는 가치관이 진실과 어울려 빛을 낸다면 좋은 수필이 될 것이다. 만일 그 위에 재미와 감동이 함께 펼쳐지면 금상첨화" 라는 가르침에
적극 지지 합니다. 허구를 참인 양 쓰면 거짓말쟁이가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