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골에서 재산목록 1호는 대부분 집에서 키우는 소 한마리이다.
소는 무거운 짐을 운반할 때는 물론, 논밭에 쟁기를 갈기도 하고
외양간에 넣어주는 짚을 엄청난 똥오줌을 싸서 퇴비로 되돌려 주기도 한다.
게다가 우리집 암소는 매년 송아지 한마리씩 낳아서 열달 정도 키워
장날 내다 팔면 살림살이에 큰 보탬이 되었다.
풀이 많이 나는 여름철에는 산으로 몰고 가서 풀을 뜯어 먹이지만
늦가을부터는 가마솥에 쇠죽을 끓여서 먹인다.
그래서 가마솥 옆에는 커다란 작두가 있어서 수시로 나와 아버지는
볏짚과 콩대, 고구마 줄기 등을 잘라서 여물을 만들어야 했다.
내가 작두끈을 잡고 작두날을 번쩍 들어 올리면 아버지는 볏짚을 작두날 안쪽으로
손가락 길이만큼 바짝 들이밀고 나는 오른발로 발판을 힘껏 내려 밟는다.
그러면 짚 한단이 싹뚝 하고 반듯하게 잘려나간다.
그런 동작을 수백번 반복하여 여물을 넉넉하게 썰어놓아야 한다.
가끔씩 이런 작업 중 손가락이 절단되었다는 둥 멀리서 대형사고 소식이 들리기도 하였다.
해거름 무렵이면 마실에서 열심히 놀다가도 쇠죽 끓이러 가자 하면서
동무들과 헤어져 집으로 온다.
부엌 앞 단지에 가득한 구정물(쌀뜨물과 야채 찌꺼기 등)을 두어 바께쓰 떠와서
가마솥에 붓고 소 여물과 방앗간 등겨(미강)를 두 바가지 넣은 다음 불을 때기 시작한다.
땔감을 나무로 하는 시절, 산이 민둥산이라 연료는 방앗간 왕겨를 사용하였다.
불살개에 불을 붙인 다음 나뭇가지 몇 개 넣고서 왼손으로 왕겨를
그 위에 뿌리고 오른손으로 풍로를 돌리면 금방 불길이 솟는다.
같은 동작을 한시간 정도 반복하면 어느새 솥뚜껑 아래로 눈물이 흐르고
솥뚜껑을 열고서 기역자 나무도구로(이름이??) 여물을 아래위 뒤집고 잘 섞는다.
다시 뚜껑을 덮고 뜸을 들인다.
이 때 잔불 더미를 모으고 고구마를 식구 수대로 파묻어 둔다.
안방에서 밥 묵으러 오너라~~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저녁 먹고 후식으로 먹는 군고구마는 꿀맛이다.
밥 먹은 후 충분히 뜸이 든 쇠죽을 바가지로 바케쓰에 퍼담아서 두어번 왕복하면
하루 일과는 마무리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쇠죽 끓이는 일 외에도 가마솥은 아주 요긴하다.
돼지를 잡으면 가마솥에 물을 팔팔 끓여서 붓고 돼지털을 말끔히 뽑는다.
돼지털은 마루 밑에 보관했다가 엿장수가 오면 엿으로 바꿔먹는 재미가 쏠쏠하였다.
우리끼리 얘기로는 돼지털이 구둣솔 만드는 공장으로 간다고 쑤군거렸다.
겨울이 깊어가면 어느새 설날이 다가온다.
그러면 가마솥을 잘 씻어내고 샘물을 퍼날라서 물을 따끈하게 데운다.
저녁 먹고 나서 설 맞이 목욕을 하는데, 헹굼물을 한 대야 따로 퍼놓고
뜨거운 솥바닥에 송판을 깔고 들어간다.
엄마는 두툼한 손으로 온 몸에 물을 끼얹어서 때 불리기를 기다리며
머리를 감겨준다.
껌껌한데 호롱불 하나 걸어놓고 하는 때밀이 연례행사는 때도 충분히
벗겨내지 못하고 대충 헹굼으로 마무리 되고 만다.
묵은 때가 헤어지기 아까워서 착 달라 붙어있기 때문이다.
그래도 설맞이라는 기대감으로 기분은 아주 상큼해 진다.
가마솥의 기억 또 하나는 국민학교 입학 전의 과외 공부다.
어느날 큰 형님이 쇠죽 끓이는 내 옆에 와서는 국어를 가르쳐 주었다.
시커멓게 그을은 부뚜막에 부지깽이로 ㄱㄴㄷㄹ.... ㅏㅑㅓㅕ....를 써서
가르쳐 주었고, 태정태세문단세 예성연중인명선....을 입력해 주었다.
이런 기억은 강산이 여섯번을 변했는데도 생생하게 살아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