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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산업사회와 시인의 목소리
- 이선숙, 이행자, 박정애 시인의 시세계
김명옥(시인)
인간은 언제나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삶을 추구하는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탈 후반기 동인을 결성한 지도, 그리고 첫 동인지 `갈 수 있을까` 를 묶어 놓고 서로를 대견해 하며 열정적인 작품의 세계에 빠져 시간가는 줄 모르고 토론을 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그 동안 동인들이 시와의 피터진 투쟁으로 시혼을 불사른 결과 `나뭇잎처럼 앉아 있는 시간들`, `춤추는 알레그로`, `내일의 이름을 묻는다`, `그렇게 시간을 세척하며`의 동인지를 매년 거름없이 세상에 내 놓았다. 때로는 모진 폭풍우에 휘둘려야 했던 시간도, 긴 장마 비에 서로를 연민의 눈으로 아파했던 시절도, 동인들의 이합 집산으로 살을 애이는 고통도 있었지만 아픈 상처를 도려내고 새 살을 돋우며 이제 제 6집 발간을 눈앞에 두고 있다. 새로움을 향한 탈피의 고통을 참으면서 거듭 새로나기를 시도하는 동인들의 개인 시집 발간을 대할 때마다 기쁨은 배가 되곤 한다.
특히 각기 독특한 색깔을 가지고 있는 세 시인, 이선숙 시인의 `풍욕하는 그 여자 이야기`, 박정애 시인의 ` 봄언덕에 올라`, 이행자 시인의 ` 지금은 AM 5:32 `의 출간은 정말로 나에게는 신선한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제 이 세 시인의 시의 세계에 동참하여 그들의 시 세계를 함께 여행해 보고자 한다.
우리는 흔히 현대를 후기 산업 사회라고 규정하고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 철학이 부재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이러한 후기 산업 사회를 살아가면서 `진정 시인이 해야 할 일은 과연 무엇인가`를 두고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다. 특히 요즈음과 같이 진정한 작가는 없다는 개탄의 소리가 높아 가고 있는 때에, 엄청나게 쏟아지는 출판물의 홍수와, 날로 번창해 가는 재텍크의 문화 속에서 `과연 언어 예술이 획득할 수 있는 생명력은 무엇일까`를 두고 한번쯤은 고민을 해 봤을 것이다. 이제 이 세 시인은 이와 같은 고민을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극복해 가는지를 살펴 보자.
때로는
붉어진 그의 섬유질 얼굴에 미끄러지기도 하지만
어둠이 내려와 앉는 창가
바람의 체온을 가르며
나는 옷을 벗는다
이름 모를 별자리를 깔며
검은 새를 부른다
살아 있음은
거기 그렇게 너를 맞이하는 햇살의 눈부심일까
너와 내가 움켜 쥔 것은
바다로 가는 편도 승차표일 뿐
매저키즘의 사슬을 끄는
시간의 그림자
깃털이 숭숭 빠진 꿈]
검은 새 숲을 흔든다.
이선숙 <풍욕하는 여자>의 전문
현대인은 언제나 불안하다. 시작도 끝도 알 수 없는 불안은 인간을 초조와 긴장 속으로 몰아 넣었고 이선숙 시인 또한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었다. 그의 시에 나타나고 있는 색채 이미지는 ‘검은’색으로 나타나고 있다. 한때 유행처럼 번졌던 검은 색 가구, 검은 의상 등은 인간의 불안 의식과 그 불안 의식을 감추고 싶은 폐쇄적인 욕망의 표출이라고 하였다. 우리는 자신의 내면 세계에 도사리고 있는 무엇인가를 감추고자 할 때 검은 색의 안경을 착용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검은 색은 사물을 본래의 모양보다 훨씬 작게 보이게 하는 효과도 있어서 축소지향적인 인간의 내면 세계의 한 단면이기도 하다. 그의 시에 나타나는 공간 또한 ‘어둠이 내려와 앉는 창가’이다. 어둠이라고 하는 공간과 시간은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휴식과 안식의 장소를 제공하는 곳으로 밤의 시간이다. 그러나 그 안식의 장소 어둠이 지배하고 있는 곳으로 희망과 밝음의 세계를 지향한다고 보기 보다는 폐쇄적이고 안으로 웅크린 공간이다. 그리고 그가 바라는 대상 또한 ‘검은 새’이다. 흔히 검은 새는 흉조를 의미한다. 흉조는 우리가 싫어하는 존재이면서도 항상 인간 의식의 밑바닥에 살아서 꿈틀거리고 있는 존재이기도 하다. ‘깃털이 숭숭 빠진 꿈’ 속에서 ‘검은 새는 숲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인간은 약한 존재인 동시에 강한 존재이기도 하다. 그는 자신이 처 놓은 그물망에 걸려 발버둥치면서 언제나 ‘햇살의 눈부심’을 찾고 있다. 영원한 포기도 영원한 절망도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불안에서부터 탈출하고자, 햇살의 눈부심을 맞이하기 위해 새로운 공간인 ‘바다’로 간다. 그에게 있어 바다는 삶의 존재 의미를 확인시켜 주는 공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확보한 것은 ‘편도승차표 일 뿐’이었다.
결국 이선숙 시인은 현대인의 불안 의식 속에서 탈출을 시도하였고 그 탈출하고자 하는 장소는 바다였다. 그러나 그는 편도 승차표만 확보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현대 사회로 되돌아오는 것을 망설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현상은 그의 시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다.
“타당한 목숨의 길목에 / 시간은 입술을 벌리고/ 좌절과 희망 사이/ 표류하는 기호와 기호가” < 어둠의 물보라>의 일부
“잿빛 도시에/ 그림자 누렇게 뜨고/ 생선의 눈동자는 황혼의 문을 연다/ 썪지 못한 어 제의 자국 위에/ 또 하나의 하루가 내려앉는다/” <길 속의 길>의 일부
“빠뜨리 샤 까스를 눈길질하며/ 카프카의 「심판」을 논하던 그들/ 기관지를 앓아가며 / 등사판을 밀던 구호들은/ 가로수를 부둥켜안고/ 군대에 밀려갔다/ 흑과 백의 늪에 서/ 한 갑의 담배를 사르던 그녀는/ 그해, 잿빛 도시를 삼켜 버려야 했다.”
<신촌 5월>의 일부
그의 시에서 보이는 검은 색 계열인 `잿빛 도시`의 의 색체 이미지는 모두 현대인의 불안 의식을 대표하는 것으로, 그 어둠의 잿빛 도시에서 인간은 어쩌면 그의 표현대로 `표류하는 기호`일 뿐일런지도 모른다.
초음파가 태아를 비춰 줄 때
숨겨둔 설레임으로
산부인과 문을 연다
접수창구 아가씨는
플라스틱 조각에
소변 한 방울 찍어 보고
진단해 버린다.
기쁨과 서글픔이 교차하는 순간
(순결에 일생을 걸고 법정에 섰던
그 여인을 생각하고 있을 때 )
아줌마, 어쩔거예요 ?
아가씨의 당돌함에
나는 무색해지고 만다.
이행자 < 지금 산부인과에선(1)>의 전문
산업 사회에서는 인간의 생명도 하나의 기호일 뿐이다. 인간이라고 해서 특별난 것은 하나도 없다. 기호들끼리 모여 사는 현대 사회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주위에서 일어나고 있는 많은 사건, 사고의 기사를 읽으면서도 무감각하고 무관심하게 지내기 일쑤다. 어쩌면 서로 모르는 척하고 사는 것이 더 현명한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모른다. 기술, 산업 사회에서 산부인과 병원이라고 하는 공간은 탄생을 준비하는 공간인 동시에 불필요한 존재를 제거하는 공간이기도 하다. 우리는 인간의 생명을 ‘플라스틱 조각’에 찍힌 소변한 방울로 간단하게 진단해 버리는 현대 문명의 이기 앞에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라고는 이미 기대할 수 없다. ‘숨겨둔 설레임’과는 반대로 ‘아줌마 어쩔거예요?’는 탄생의 기쁨으로 설레임보다는 인류 문명의 편리함과 그 편리함에 밀린 잉여 인간에 대한 냉혹할 정도의 잔인함에 몸서리 친다. 이미 생명의 줄은 끊어져 버리고, 아직도 `순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는 고세대의 인간을 폐품이나 유물처럼 여기는 아가씨 앞에서 ‘무색해지’는 것까지도 어쩌면 기술 산업 사회의 맹신적인 신봉자들 앞에서는 폐품이요 유물일런지도 모른다.
그의 시에는 현대인이 기술 산업 사회가 주는 달콤함과 편리함에 절대적인 추종의 자세로 무작정 달려가는 속에서 아웃 사이더로 밀려 갈등하는 부류의 또 다른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어느 금요일/ 레몬 향기로 불꽃이 일어서고/ 또 한번의 늦은 귀가에/ 노이로제 증상을 보이는 남편/” <지금은 A M 5 :32 >의 일부
“바람으로 돌아가는 것만이/ 영원하다고 믿으면서/ 문득/ 혼잡이 부러워지는 것은 웬일 일까?” <사월 그리고 바람>의 일부
철저하게 현대 사회에 뛰어들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초월의 자세를 견지하지도 못하는 그들은 `노이로제 증상`을 보일 수 밖에 없었고, 인간의 긍극적인 자세는 `바람으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믿으면서도 `혼잡이 부러워지는` 모순된 삶 속에서 고민하고 갈등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는 진실로 나무로 만든 사람
긴 날
짧은 날에도
붉은 해
머리에 이고 서 있다
해질녘이면
산을 가로막으며
우두커니 선 나무로 만든 사람
어떤 성격의 결함도 없는 그는
하나의 동그라미에
또 동그라미를 그리고
그 동그라미 수천 개를 남긴 채
돌아 앉은
그는 진실로 나무로 만든 사람일까?
박정애 <나무로 만든 사람>의 전문
현대인은 애정의 표현에 있어서도 다이내믹하고 초감감적이어야지 뜨뜨미지근한 그렇고 그런 사랑은 불필요한 것으로 여긴다. 그래서 그들은 뜨겁고 화끈하게 달아올라 물불을 가리지 않는 불나비와 같은 존재에 비유되거나, 아니면 혈관을 타고 흐르는 피가 싸느랗게 식어 버린 파충류에 비유된다. 인간이 불나비와 같은 존재이든 파충류와 같은 존재이든 그것이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옆에서 사람이 죽어 가도 모른 척 하고 지나치기가 다반사이고 보면 인간을 똥이나 쓰레기라고 한들, 인간을 나무라고 한들, 또 인간을 풀이나 꽃이라고 한들 무슨 관계가 있겠는가. 그러나 그는 오직 한 개만의 선택이 주어진다면, 희. 노. 애. 락, 생. 로. 병. 사에 시달리지 않는 나무가 되길 원하고 있다. 나무라면 ‘긴 날 / 짧은 날에도/ 붉은 해/ 머리에 이고 서 있을 수’ 있고, ‘어떤 성격의 결함도 없는’ 그래서 ‘수천 수만 개의 동그라미’를 그리고도 돌아앉을 수 있겠기 때문이다. 현대인이 남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는 절대 고독과 절대 고립감 속에서 살아야만 할 바에는 `성격의 결함도 없는` 나무의 세계와 일체감을 느끼면서 살기를 희망하고 있는 것은 어쩌면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의 당연한 바램인지도 모른다.
“옆에 앉은 소녀는 / 시를 외고 있는데/ 나는 그 소녀에게/무엇을 줄까/ 나는 동작에 서 내리고/ 그 소녀는 어디서 내려/ 집으로 갈까/” <지하철에서>의 일부
“수 십년만에 안/ 친구의 전화번호도 / 망각의 늪으로/ 밀어 넣어 버릴까”
<전화번호>의 일부
철저한 무관심과 그리고 그 무관심에 길들여지기 위해 `망각의 늪으로/ 밀어 넣어 버`리는리는 반복된 작업을 끊임없이 시도하는 현대인의 모습을 은근히 보여 주고 있다.
지금까지 이선숙,이행자,박정애 시인의 시의 세계에 뛰어 들어 그들의 시의 세계를 함께 동행해 보았다. 그들은 모두 하이테크의 시대, 기술 시대로 명명되는 현대 산업 사회를 살아가면서 제각기의 목소리를 찾아내고 있었다. 시인은 고갈된 인간의 영혼에 안식의 물을 담아주는 장인이다. 그들이 표현한 대로 현대 사회가 어둠과 검은 색의 이미지를 가지고 있고 인간의 감정이 철저하게 배제되는 사회, 무관심과 절대 고독이 판을 치는 사회라고는 하지만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건강한 모습으로 후기 산업 사회의 각종 이기주의와 부조리한 사회 속에서 목소리를 찾아내서 불태우고 있었다.
사랑에 야박한
우리들
올해는
촛불의 헌신을 배우며
태워
태워
또 태워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되어
그늘진 이웃에도 빛을......
박정애 <촛불>의 전문
관악산 꼭대기 전파탑에
하루를 걸어두고
4가지 색소로 변모하는 바다에서
X -R A Y 를 통과하는 섬유로 헤엄치면
일어서는 파도의 성감대
나는
그렇게 계절을
세척하고 있다.
이행자 <나는 그렇게 계절을 세척한다>의 일부
이제
기억의 숲 수풀더미에서 지체할
5분은 결재되지 않는다
횡단해야 할 이 거리에
파란 신호등을 그려 넣어야 한다.
이선숙 <푸른 일번지>의 일부
그들은 후기 자본주의 사회를 극복하는 방법은 서로 달랐지만 물질 문명과 황금 만능주의 그리고 하이 테크놀로지의 시대 속에서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는 방법을 찾고자 하는 목소리는 결국 하나였다.
스스로가 `태워/ 태워/ 또 태워/ 이 세상을 밝히는 촛불`이 되거나 `관악산 꼭대기 전파탑에/ 하루를 걸어 두고// 4가지 색소`로 변화하는 계절을 `세척하고 `있거나, 인간들의 따뜻한 정과 사랑의 소통을 방해하는 도시의 거리마다 `파란 신호등을 그려 넣`고 있었다.
상실된 인간성을 회복하고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우리는 시인이 해야 할 사명이 무엇인지를 이 세 시인을 통해서 확인해 볼 수 있었고, 또 가까운 시일 내에 다시 확인해 볼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바란다.
첫댓글 현대사회를 인간성이 상실된 사회 철학이 부재 하는 사회라고 말한다.......???
근대화 산업화 발전 이 후에 시인이 무슨 심각한 고민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