쇄기벌레
쐐기벌레의 앞이란
동종의 꽁무니라 한다
우리 동네엔 누군가 꽁무니를 따라다니다가
크게 된 인물도 있고
남자들의 변하지 않는 연애 기법이기도 하다
그러니가 쐐기벌레들에게
꽁무니란 신뢰다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보폭의 법칙 같은 것이다
블루베리를 따다가 복병인
쐐기벌레에 쏘이고 온 저녁
퉁퉁 부은 팔이 가라앉고
내 뒤를 졸졸 따라오기만 하는
가려움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또 어떤 연령과 역할과
호칭을 무작정 따라가고 있었던 것일까
행렬을 벗어날 수 없는 습성으로
대열을 따라가고 있었을 뿐인
내가 바로 복병이다
대열이란 앞과 뒤가 같다는 것
파브르가 그려놓은 둥근 대형을 이탈하지 못하고
탈진해서 죽은 쐐기벌레처럼
우리는 이 대열로,인류 출현 이후로
집요하게 여기까지 온 것인데
무작정 맴도는 쐐기 같은 우리는
가렵고 욱신욱신하면서
때론 복병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시인 정연희의 시는 사물을 담담하게 관조하듯 대상을 읊조린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자칫 건조할 수도 있는 단점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작품에서는 건조함을 느낄 수가 없이 바쁘다. '쐐기벌레'를 소제를 제목으로 쓸 수 있는 시인이 몇이나 될까?
2023년 겨울에 펴낸 시집 <나무가 전하는 바람의 말>에서 이 시작법이 더욱 더 발전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 시는 월간 [모던포엠] 2020년 1월에 발표한 두 편 중 한 수이다. 그런데 이 작품이 눈에 띄는 것은 어떤 매력 때문일까?
꽁무니란 신뢰다
절대 어겨서는 안 되는
보폭의 법칙 같은 것이다
어떤 매력? 1연에서 태연자약하게 쐐기벌레의 생태를 설명하듯이 그려놓고는 그 꽁무니를 '신뢰'로 은유하고 '보폭의 법칙'으로 직유하며 감상자들을 희롱하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2연에서 어린 시절의 경험을 끼어넣어서 감상하는 이를 아련하게 그리움의 시절로 끌어들인다.사실은/ 익숙함에 속아 소중함을 잊지 말자/라고 '생텍쥐페리'가 한 말을 끌고 온 것이겠거니 하지만 말이다.
나는 또 어떤 연령과 역할과
호칭을 무작정 따라가고 있었던 것일까
어린 시절의 경험을 현실의 자신으로 불러들여서 슬쩍 의문형으로 바꿔놓은 수법 또한 예사롭지가 않다. 그래서 자신에서 우리로 영역을 확대하면서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무작정 맴도는 쐐기 같은 우리는
가렵고 욱신욱신하면서
때론 복병으로 살아가야하는 것이다
결국 쐐기 같은 우리도 하찮은 미물에 불과하며 때로는 복병으로 살아가야 하는 운명을 타고난 존재란 것이다.
오동나무의 때 時
시멘트 담장과 나란히
작은 홀씨 하나 날아와 뿌리를 내렸다
하늘을 다 덮어버리겠다고 마냥 커지는 푸른 잎은
대문을 들어서는 아버지 헛기침 같았다
굵은 줄기며 잎이
무섭게 자라던 내 나이 예닐곱 때
아버지는 딸 시집보낼 혹은 혼수 장롱 감이라며
칸칸의 눈금을 줄자에 박았다
넉넉한 햇살을 만나야
넉넉한 그늘이 된다는 오동나무는
물오름이 좋아
물 여러 장 공중에 펄럭이듯
오엽선으로 활활 타던 마당을 식혔다
담장을 밀어내기 전까지
탐스러운 그늘의 쓰임은 분명했다
씨앗만 보고도 미리 춤춘다는,
속을 태우고 비운 쓰임이 비로소 거문고였다
날아온 씨가
키운 나무도 격이 있어
봉황에게만 집을 내준다
모든 나무의 끝엔
그 쓰임이 기다리고 있어
휘어진 쓰임도, 곧은 쓰임도
나무들은 탓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들도 때를 아느냐고 비웃듯이
툭툭 지며 가을을 알린다
그냥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어울렁 더울렁 그저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제 쓰임과 본분을 곧거나 휘며 살아간다
**삭막한 시멘트 담장 너머로 훌쩍 날아온 홀씨. 우리 사람이란 존재가 그렇지 않을까. 이렇게 담담히 '오동나무'를 주인공으로 세워두고는 아버지의 지극한 딸 사랑을 가져다 놓았다. 예닐곱 살 때 혼수감으로 점찍어 뒀으니 말이다.
무섭게 자라던 내 나이 예닐곱 때
아버지는 딸 시집보낼 혹은 혼수 장롱 감이라며
칸칸의 눈금을 줄자에 박았다
이렇게 먼저 주제의 반이 드러나게 1연에 담을 쌓아놓고는 2연에서는 오동나무의 쓰임이 어떠했는지 '여름의 그늘'로 역할을 풀어놓고 있다. 그런 다음 3연에 와서 그 마지막 쓰임이 속이 빈 덕분에 거문고가 된다. 물론 자신의 쓰임이 무엇이 되던 탓하지 않고 곧든 휘든 자연에 맡긴다. 마치 세속에 초연한 도사처럼 말이다. 마침내 4연에서 시인의 시심이 드러난다. 황혼을 맞는 노년들을 탓하듯, 위로하듯 어울렁 더울렁 그렇게 살아간다.
오히려 사람들도 때를 아느냐고 비웃듯이
툭툭 지며 가을을 알린다
시인의 시심은 이렇게 독자에게 하고픈 말을 했다. 너는 과연 네가 왔다가 가는 적절한 때 時를 아느냐고. 주제의 나머지 반이 완성되는 순간이다.
첫댓글 계속 평론을 써 오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정연희 시인의 시와 선생님의 해설을 읽게 되어 좋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