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초행길
홍 경 화
초행의 영국 여행길은 한 가지 걱정거리를 동반하고 시작되었다. 코벤트가든, 판크라스 역, 프리메이슨 홀, 파리의 북 역 도착까지 이름도 낯선 그곳들을 어떻게 찾아다니는가가 관건이었다.
먼저 영국 런던에 내려 판크라스에서 사람을 만나야 한다. 유학중인 딸이다. 도착하여 짐을 근처 숙소에 내려놓고 다음 코벤트 가든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서 패션쇼가 열리는 프리메이슨 홀을 찾아가야 한다.
집 나선 김에 서유럽 몇 개국을 돌아보는 여행길이긴 하지만 이번 여행의 첫 번째 목적은 딸의 패션쇼를 보기 위한 것이다. 자신의 작품을 첫무대에 올리게 됨을 격려해주고 같이 기뻐하기 위한 것이다. 예은이가 FAD 공모에 뽑히지 않았다면, 그래서 런던 패션위크 무대에 서지 않는다면 이번 겨울여행은 나설 길이 아니었다. 졸업시즌인 여름에나 런던에 갈 생각이었다. 아무튼 첫 여행길은 영국에 도착한 다음 저녁 7시 런던 코벤트가든의 프리메이슨 홀이 목적지였다. 그 다음 날 목적지가 파리 북 역이고.
우리는 파리 행 유로스타를 탈수 있는 판크라스 역 주변에 있는 숙소를 한국에서 인터넷으로 예약해두었다.
먼저 까만 택시를 탄 뒤, 기사 할아버지에게 판크라스 역까지 가자고 하니 할아버지는 그러마고 하는데, 그 목소리는 괜히 들떠 덩달아 우리까지 들뜨게 하는 마력이 있었다. 타지에서 첫 번째 맞닥뜨리는 출발치고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는 지하철 표, 오이스터 카드라는 것을 구입하여 절약도 할 겸 지하철을 탈 생각이었는데 변경하였다. 지하도를 오르락내리락 하며 커다란 짐 가방을 들고 다닐 생각을 하니 지레 기운 빠지는 것 같았다. 영국 택시는 짐 가방을 바로 내가 앉은 의자 앞에 놓을 수 있도록 차 안이 널찍하였다.
유쾌한 할아버지네, 하면서 한 10분쯤 가는데 문득 어딘가 들떠서 묻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라구요? 할아버지의 타고난 목소리가 원래부터 차분하지 않다는 걸 그때 느꼈다. 내심 긴장하며 판크라스요, 하니 알아듣지 못하고 몇 번이나 되묻는다.
한국식 발음을 못 알아듣나 싶어 팬크라스요 하기도 하고, 판크래스라고도 하며 몇 차례 바꿔서 반복하자, 고개를 끄덕거리더니 가던 길을 느닷없이 유턴하는 것이었다. 순간 의심스러웠다. 말도 잘 통하지 않고, 바가지요금 택시가 아닐까 싶었다.
그러나 난생처음 가는 생소한 길이므로 할아버지를 무조건 믿을 수밖에 없었다. 출발은 좋았는데, 가던 길 유턴, 거기다 런던 퇴근 무렵의 길은 몹시 막혀 더뎠고, 딸과 만나기로 한 4시 20분은 턱밑으로 이미 지나갔다. 처음 택시를 탈 때의 예상으로는 4시면 약속장소에 도착할 줄 알았다.
조바심이 난다. 먼저 역으로 갈게 아니라, 역사 옆의 숙소에다 무거운 짐 가방을 놓은 뒤, 딸을 만나러 가기로 계획을 수정해야겠다고 생각하고, 할아버지에게 숙소 주소를 적은 쪽지를 다시 내밀었다. 아, 오케이. 즉각, 흔쾌한 대답이 그나마 위로가 되었다. 역시 유쾌한 할아버지가 맞았다.
그래저래 불안한 중에, 러시아워를 뚫고 골목을 꺾어 들어가니 목적지가 눈앞에 나오긴 나왔다. 인터넷 위성지도에서 보았던 숙소의 보라색 대문집 앞에 내렸다. 안도의 숨이 새어 나오고 왠지 반가웠다.
택시에서 낑낑거리며 가방을 끌어내리고 보라색 대문을 두어 번 두드렸다. 한참 뜸들이더니 노파가 문을 열고 빼꼼 내다보았다. 그 표정이 신경질적으로 찌푸려져 있었다. 집주인 이름을 대자마자 문을 꽝 닫고 들어가 버린다. 순간 맨붕이 왔다. 뭔 일이람. 이 집이 아닌가.
위성지도에서 본 그 집 맞는 거 같은데, 잘못 찾았나. 오, 안 돼. 이 커다란 짐 가방을 얼른 숙소에 넣어 두고 예은이를 만나 행사 전에 프리메이슨 홀을 가야 하는데, 어떡한담. 이곳의 이러한 사정도 모른 채 진작부터 판크라스에서 기다리고 있을 딸이 걱정되었다. 더 큰 일은, 만약 예약한 그 집을 찾을 수 없다면 한국도 아닌 이 낯 선 곳에서 커다란 짐 가방을 끌며, 숙소를 다시 정해야 하는 건 아닌지 눈앞이 노랬다. 한마디로 길거리에 미아가 된 심정은 황당했다.
남편은 집주인에게 계속 전화를 걸었지만 받지 않는다고 했다. 당황한 남편이 정신을 차리고 골목에서 나오는 노랑머리 남자를 붙잡더니 주소를 보여주었다. 노랑머리는 저쪽 가게에 가서 한번 물어보라고 하며 스쳐갔다.
나는 길가에서 커다란 짐 가방을 지켜야 했다. 지나가는 노랑머리, 검은 피부 사람들이 생소한 동양 여자인 나와 짐 가방을 흘끔거리며 지나갔다. 저만치 남편이 노랑머리가 가르쳐준 가게로 헐레벌떡 뛰어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자니 낭패감과 낯선 두려움 비슷한 게 밀려들었다. 마침 빗방울도 후둑후둑 뿌리기 시작했다. 외투에 달린 모자를 뒤집어쓰며 남편이 들어가 함흥차사인 가게 쪽만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갈 곳 없이 앞에 놓은 커다란 짐 가방을 바라보자니 내 신세가 마냥 처량했다.
시간이 흘러갔다. 저 멀리 가게로 들어간 남편은 나올 시간이 지난 것 같은데 영 나오지 않는다. 초조하고 불안했다. 혹시 가게로 불러들여 납치하려는 유인책은 아니었을까. 길지 않은 시간, 나에겐 결코 짧지도 않은 시간, 별별 생각이 다 스쳐갔다.
얼마만 인가, 남편이 뛰어갔던 가게로부터 걸어 나오는 게 보인다. 납치는 아닌가 보다.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빗줄기는 점점 굵어지는 듯하였다.
어떻게 됐어, 그 집 알아냈어?
남편은 간절한 물음에 대답이 없다. 신통치 않은 표정을 짓는다. 아, 이럴 수가. 딸은 판크라스역에서 기다리는데, 더 어둡기 전에 근처의 호텔을 찾아 나서야 할라나 보다고 생각했다.
잠깐, 저 뒷골목 좀 다시 가볼게.
남편은 맨 처음 가방을 내려놓고 서 있던 바로 옆 골목길로 바삐 또 사라졌다. 잠시 후 나타났다.
찾았어. 위성에서 보았던 대문색깔이 그게 아니었어.
순간, 미아는 면했다는 긴장이 풀리며 안도의 한숨이 휴우 토해졌다.
2층이라던 숙소는 세 개 층이나 올라야 나왔다. 영국은 0층이 존재하는 나라다. 그래서 0층부터 시작하여 그 같은 착오가 생긴다. 좁아터진 계단을 성큼성큼 숨찬지도 모르게 올라 가방을 숙소에 던져놓고 판크라스 역까지 냅다 뛰다시피 하였다. 저만치서 손을 흔드는 예은이를 만났다. 그 순간, 낯선 곳에서 반가운 얼굴을 보는 심정은 참으로 남다르다고 느꼈다. 집을 못 찾고 허둥대다 만난 참이라 정신이 없어서 딸을 몇 달 만에 보고도 안아줄 생각도 못했다. 아직 쇼 오픈시간 전까지, 홀본 역에 도착해서 프리메이슨 홀을 찾아내야 할 일이 더 남았다.
부랴부랴 역사 기계 앞에 가서 딸은 오이스터 카드를 능숙하게 뽑았다. 초행인 우리였더라면 기계작동에 서툴러 시간을 또 한참 잡아먹었을 터이다.
드디어 런던 패션위크가 열리는 holbon역에 내렸다. 목적지에 한결 가까워졌다. 위성지도 앱에서 수차례 찾아보고 익혔던 대로, 맨 처음 코벤트가든 방향으로 나가서, 두 번째 별 다방(스타벅스)이 있는 코너를 돌아 내려갔다. 그리고 프리메이슨 홀을 물어물어 마침내 찾아냈다.
쇼가 진행되자 강렬한 불빛 아래 두 명의 늘씬한 모델이 딸의 작품을 입고 씩씩하게 걸어 나온다. 영국 전체 디자이너 학생들과 겨루어 그중 열다섯 명의 파이널리스트에 뽑혀 무대에 올리다니…, 대견한 자식. 사진으로는 모자라다 싶어 동영상을 찍어 남겼다. 집에 돌아가서 추억하며 두고두고 틀어보련다.
쇼의 마지막에는 세 명을 뽑아 상금까지 준다. 운 좋게 또 등수 안에 들었다. 자식이 빛나는 순간, 부모의 기분 또한 짱이었음을 자식은 알려나….
이제 내일은 파리로 건너가 루브르 박물관 앞에서 무사히 일행을 만나는 일만 남았다. 언어도 모르는데 잘 찾아가겠지….
첫댓글 홍작가님, 따님의 훌륭한 작품 발표회와 함께하심을 축하드립니다. 부모는 자식의 그림자에도 눈물이 나는데... 패션쇼피날레까지 장식했으니... 박수+환호+감격+눈물...
갑자기 생각났네요
5년전 어느 봄, 웨스트민스턴 브릿지에서 템즈강을 등지고 런던빅멘과 웨스트민스턴사원이 지나가는 관광객을 부동자세로 내려다보는 거리... 지하도로 빨려들어가는 자동차를 내려다보며 빨간공중전화 부스에서 예약한 숙소 주인장과 통화가 되었을 때의 감격이...
소환당한 추억과 함께 할 시간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상 잘 했습니다.
멋지네요... 한국을 빛냈습니다. 잘 감상하였습니다..
실감나게 읽었습니다.
숙소를 찾아가는 상황과 딸을 만나러 가는 촉박한 시간을.
멋진 딸을 두신 부모의 마음에 공감하며 읽었습니다.
동해안 여행중,읽었습니다 ㆍ따님의 런던유학 피날레를 멋지게 장식하셨네요ᆢ박수 보내드립니다
한 송이 고운 연꽃을 피우셨다는 생각이듭니다
빛나는 영광에 큰 박수 보내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