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향의 봄
도심에도 곳곳에 개나리와 벚꽃이 한창이다. 아파트 주변의 앙상한 낙엽수 가지에 까치의 동작이 분주하고, 그 울음소리가 소란스러운 걸 보니 아마도 새 보금자리를 꾸미려는가 보다.
어린 시절 고향의 봄은 가죽나무(假僧木) 향기를 타고 왔다. 사랑방 동창 밖 세모진 작은 꽃밭 모서리에 가죽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봄이 오면 가지 끝에 복슬복슬한 새 순이 특유의 향기를 풍기며 탐스럽게 돋았다. 그리고 으레 그 새 순은 맛있는 반찬이 되어 한두 번 밥상에 오른다.
가죽나무의 진한 향기와 더불어 온 집안은 봄 기운이 감돈다. 꽃밭에선 국화의 새싹이 돋고, 뒤안 찔래 덤불에 새 움이 트고, 정지 바라지문 밖 앵두나무에도 새 순이 돋는다. 이윽고 삽작 옆 수꿋대 울타리 안에 서 있는 복상나무 두 그루에 분홍 꽃이 피고, 방앗간 채에 기댄 살구나무 가지에 흰 꽃이 덮이면 고향의 봄은 절정을 이룬다.
이 화려한 봄의 향연에도 늦장을 부리는 게 있었으니 마당 앞에 우뚝 버티고 선 대추나무다. 아직도 잎을 피우지 않은 앙상한 가지 끝에 예쁜 초록색 열매 같은 것이 하나 달려 있다. 겨우내 대롱대롱 달려 있는 저게 뭘까? 기다란 빨랫대로 따서 보니 딱딱한 거죽 속에 무엇이 달각거린다. 번데기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예쁜 고치 속에서 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고치 이름이 팔마구리(유리산누에나방 고치)란다. 이름도 모양도 색깔도 예쁜 그것은 아이들의 마스코트였다.
마구간에서 송아지 달린 어미 소를 이끌어내어 삽작거리 앞 참나무 둥치에 이까리를 매어 놓는다. 아침 소죽을 먹고 나온 어미 소가 앞바람에 눈을 게슴츠레 뜬 채 새김질을 하는 동안, 어린 송아지는 연신 어미 배를 치받으며 부지런히 어미젖을 빨아댄다. 훈훈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동네 앞 저수지에 물결이 일면서 말(수초) 내음이 싱그럽게 풍긴다.
암탉이 노란 병아리 한 떼를 이끌고 수꿋대 울타리 아래 새로 돋은 풀잎을 부지런히 쪼아댄다. 그러다가 훠어이! 훠어이! 솔개 쫓는 아이들의 고함소리라도 나면 어느새 병아리들은 어미 닭 날개 속에 숨어 버린다. 동네 어귀 매재산 쪽에서 날아와 저수지 위를 빙빙 돌던 솔개가 허탕을 치고 사라진다.
겨울 동안 황량했던 들판에도 봄 기운이 완연하다. 갯밭에서 아지랑이 아물아물 피어 오르고 하늘
높이 노고지리 노골노골 우짖는 들판에, 걸금 나르는 황소의 워낭 소리가 청랑하다. 여기저기 논둑에서 나물 캐는 아낙과 아이들의 모습이 정겹다. 나생이, 달랭이, 돗나물, 쑥, 씀바구가 싸리나무 다래끼에 차오르면, 저녁 밥상에 오를 봄나물 반찬 생각에 벌써 입 속에 군침이 돈다. 아이들은 올미를 캐 먹으려고 논 바닥을 파 헤치기도 한다.
하교 길에도 봄은 와 있었다. 수업을 마친 아이들은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고 양철 필통을 달그락거리며 학교 앞 국도를 조금 걷다가 마을을 향해 논밭 사잇길로 들어선다. 그리고 약속이나 한 듯 길뚝 옆에 우뚝 솟은 미루나무의 물오른 가지를 꺾어 버들피리를 만들어 분다. 삐이~ 삐이이~ 버들피리 소리가 아이들과 함께 봄을 노래한다.
첨방 둑을 넘어서면 커다란 웅덩이가 있는 무논이 있었다. 이맘때 어른들은 이 웅덩이의 물을 퍼내고 미꾸라지도 잡고 메기도 잡는다. 고기잡이 구경을 하고 난 아이들은 다시 논둑길을 걷다가 무논 속에 손을 넣어 흐물흐물한 개구리 알을 건져 보기도 하고, 골뱅이도 주워 본다.
마을 가까운 멧등을 넘으면서 길섶에 핀 창꽃 잎을 따 먹기도 하고, 어린 솔가지를 꺾어 송구도 베껴 먹는다. 학교 화단이나 실습지에 작업이 있어 호맹이나 괭이 같은 농구를 가지고 등교한 날에는, 하교 길에 멧등에서 빼기를 캐 먹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잔대도 캔다. 멧등에는 하얀 솜털이 부드러운 보라색 할미꽃도 많았다.
“정이월 다 가고 삼월이라네
강남 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학교 운동장에서 단발머리 어린 소녀들이 고무줄놀이를 하면서 봄을 재촉하듯 부르던 노래가 반세기가 훨씬 지난 지금 고희(古稀)를 넘긴 중늙은이(?)의 귀에 아직도 쟁쟁하니, 인생의 봄이 그리워서인가.
첫댓글 전형진15.08.14 14:35
향수에 푹 젖어, 수필 잘 읽었습니다. 고향 사투리가 매력적이었습니다. 멋진 사진들을 용케 구했군요. 잔대, 올비, 송기 등 나도 많이 먹었습니다. 그런데 [늦장]은 [늑장]이 아닌지요?
15.04.19 07:48
그 못살던 시절이 왜 그리 사무치게 그리운지 모르겠네요. 봄이 오니 더욱 그러네요. 늦장은 어릴 때 입에 익은 말이라서 썼습니다. 마침 사전에 늑장의 동의어로도 사용된다고 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