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십자가, 짊어질 때 사랑이 되는 이름 >
사랑에 대한 수많은 조언과 넘쳐나는 처방들이 사람들의 이목을 끕니다.
전문가들의 그럴싸한 충언에도 불구하고 사랑은 여전히 아리송하고,
상처받은 마음에는 적대감이 똬리를 틉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십자가=사랑’이라는 신비를 해답처럼 우리에게 주셨지만,
죽음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짊어지라는 말씀이
얼마나 경악스러웠을지 한 번 상상해 봅니다.
당대에도 지금도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기 바쁩니다.
그러나 사랑은 목숨마저 내어주는 희생에서
꺼지지 않는 생명을 움트게 하지 않던가요?
하느님을 부르면서도 삶의 방향 전환을 꾀하지 않는다면
십자가는 죽음의 형틀이고 사랑은 헛된 말 잔치에 머뭅니다.
평온하던 어느 날,
시골 수도원으로 편지 한 통이 배달되었습니다.
한눈에도 알아볼 수 있는 익숙한 어머니 필체였습니다.
“다시 한번만 잘 생각해 보거라!
어떤 유능하고 덕망 있는 신부님께서 차라리 다시 신학생이 되고 싶다셨다더라.
그러면 ‘사제의 길을 포기할 수도 있으니까.’라고!
남들은 축복이라는데, 이 못난 어미에게는 생이별의 고통뿐이구나!”
막 걸음마를 뗀 여린 수도자의 삶은
암흑 속 번민에 파묻혀버렸습니다.
“벗어버리면 길에서도 벗어나게 되는 거야.
짊어지고 가는 삶이란다.”
선배 수사님께서는
종이에 꾹꾹 눌러 익숙한 성경 구절을 적어주셨습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루카 9,23)
고독한 짐으로 여겨왔던 십자가의 무게가
축복을 예비한 하느님의 부르심으로 변모되었습니다.
신학생 김대건은 복통과 요통을 달고 사는 데다,
문장 실력도 편차가 심하며 행동마저 경솔하다는
교수 신부님의 판단을 받았습니다.
동료 신학생들과 대조되는 능력 부족,
견뎌내기 어려웠을 번뇌의 자리는 하느님을 향한 신뢰와
성모님에 대한 깊은 신심이 인내로 채워졌습니다.
“세상 온갖 일은 주님의 뜻 아닌 것이 없고,
주님께서 내리신 상이나 벌이 아닌 것은 없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마지막 편지글은
기꺼이 십자가를 껴안고 마침내 은총의 결실을 맛본 이의
신비 고백입니다.
십자가를 스스로 짊어지기 전까지는
두려움과 고통의 자리를 벗어날 수 없습니다.
만약 나의 일상이 ‘십자가’에 비유된다면,
그곳을 신앙의 자리로 준비해야 합니다.
김대건 신부님을 위시한 한국 순교자들이 그 귀감이요
희망의 동료이자 선배들입니다.
교우 여러분!
우리는 분명 갈음할 수 없는 기쁨에 벅차 오늘의 십자가를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보기에는 의인들이 벌을 받는 것 같지만
우리는 불사의 희망으로 가득 차 있고’(지혜 3,4 참조)
‘그 무엇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없기에’(로마 8,35 참조),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로마 8,37)
류지인 야고보 신부 |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