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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잠언공부 2강
말씀/ 잠언 2-4장
요절/ 잠언 3:13,14절
지혜가 금, 은, 진주보다 낫다
“13 지혜를 얻는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14 이는 지혜를 얻은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본문이 길어요. 교재연구부에서 본문을 길게 나누었을 때 내부적으로 논쟁이 붙었습니다. “이렇게 할 것이면 차라리 주제별로 공부합시다.” 교육부장이 한마디로 짤랐습니다. “그것은 UBF식이 아닙니다. 본문 따라가는 말씀공부가 우리 방식이자 장점입니다.” 저도 그 말에 동의합니다. 본문 따라가는 최대 장점은 설교자의 자의적인 생각이 들어갈 공간을 최대한 줄이는 것입니다. 한 단어나 한 구절을 중심으로 설교자의 하고 싶은 메시지를 듣는 것이 본문을 따라가며 말씀 자체에 부딪힘으로 얻는 유익보다 못합니다. 오늘 말씀 ‘지혜가 금 은 진주보다 낫다’는 말씀의 제목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지혜는 금과 은으로 상징되는 세상의 어떤 탁월함보다 낫습니다. 그러므로 지루한 마음보다 초롱초롱한 마음으로 참여하기를 기도합니다.
2장을 보겠습니다. 2장 1-4절은 조건절입니다. “만일... 하면”입니다. “... 받고... 간직하며...기울이며... 마음에 두며... 소리를 높이며... 구하며... 찾으면”입니다. 지혜가 저절로 깨달아지는 것이 아님을 보여줍니다. 소원을 가지고 willing해야 합니다. 때로는 치열한 struggle이 필요합니다. 은을 구하는 것처럼, 돈을 벌기 위해 온 힘을 다하는 것처럼 노력해야 합니다. 금을 소중히 간직하듯이 받은 지혜와 지식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마음 깊이 간직해야 합니다. 진주를 사기 위해 간청하듯이, '제발 제게 팔아주세요', 고대시대 부자들은 진주를 얻고자 사방으로 수소문을 했는데, 그렇게 지혜와 지식을 얻고자 입을 열어 소리 높이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 어떤 선택이 좋을지 몰라 고민입니다. 저의 눈을 열어주시고 당신의 뜻을 보게 하소서” 세상 일을 이루기 위해서도 우리가 얼마나 열심히 수고합니까! 효진 사모는 업무가 밀리면 밤 11시 넘어 집에 돌아오고 자정을 넘기도록 업무를 감당한다고 합니다. 목표를 이루기 위해 그리 수고하듯이,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것입니다. 그리해야 유혹과 상처와 욕심과 염려가 끊임없이 교차하는 세상에 휘둘리지 아니하고 지혜와 지식을 얻습니다. 오래전 건축 현장에서 임금체불 문제로 현장 소장과 인부들이 밤새 대치상황을 벌였던 적이 있었습니다. ‘당신 같은 베테랑이 왜 미리 문제를 대처하지 못했는가!’ 추궁하자, 소장의 답이 이러했습니다. “목자님, 사람이 거짓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돈이 거짓말하는 것입니다.” 경험이나 좋은 머리로 모든 것을 꿰뚫어볼 수 없습니다. 겸손하고 가난한 마음으로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합니다. 예레미야 29장 13절은 말씀합니다. “너희가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나를 찾을 것이요 나를 만나리라”
그러면 어떤 결과를 얻습니까! 5절입니다. 5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 여호와를 경외하기를 깨닫는 것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왜 그리 중요합니까! 표를 보면 중간에 위치했습니다. 모든 노력이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 귀결되고, 하나님을 아는 것으로부터 각종 유익이 주어집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최베드로가 BTS 정국을 안다는 그런 정도의 의미가 아닙니다. 제가 윤선사모를 안다고 할 때의 아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며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세상을 창조하신 영원자입니다. 반면 인간은 육신에 갇혀 질병과 죽음으로 소멸되는 피조물입니다. 2차원세계에 사는 존재, 평면을 기어다니는 지렁이가 3차원의 세계, 날아다니는 나비를 이해하기 어려운 것처럼, 육의 세계에 갇혀 있는 인간이 영이신 하나님을 알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것은 위로부터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야고보는 하나님을 알 때, 위로부터 온갖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내려온다고 말씀했습니다.(약1:17) 6-8절은 하나님을 아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선물을 말씀합니다. 표를 보면 우측입니다. 6절에서는 지혜와 지식, 명철, 7절에서는 완전한 지혜와 방패, 8절에서는 보호와 보전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아는 자들에게 지혜와 지식과 명철을 주시고 방패가 되어 보호하고 보전해주십니다.
9-22절에서는 지혜와 방패와 보호의 손길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적용되는지를 크게 세가지로 말씀합니다. 첫째, 선한 길을 가도록 합니다.(9-15) 선한 길을 가는 자들(9-12)과 어두운 길을 가는 자을 대조하여 보여줌으로써 선한 길을 가는 자의 축복을 부각시킵니다. (13-15) 9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그런즉 네가 공의와 정의와 정직, 곧 모든 선한 길을 깨달을 것이라” 여기서 깨닫다는 것은 선한 길을 가는 것이 얼마나 값지고 축복인가를 아는 것입니다. 부자가 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선한 부자로 사느냐, 악한 부자로 사느냐임을 아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한 길의 소중함을 깨닫지 못하고 단지 부자가 되는 것만을 최고로 여깁니다. 그러나 부자가 될지라도 선한 길을 가지 못한다면, 그는 공연히 수고한 어리석은 부자가 되고 맙니다.(눅12:19-21) 선한 길을 가는 자들은 성공이 가져오는 유혹이나 교만에 휘둘리지 아니합니다. 마음과 영혼이 즐겁습니다.(10) 범사에 감사할 수 있는 눈을 가지게 됩니다. 선한 길을 감으로써 영혼이 즐겁고 감사하며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 알고 있습니까! 왼쪽은 건강한 뇌의 그림, 오른쪽은 알츠하이머 병을 앓는 사람의 뇌입니다. 알츠하이머는 뇌에 변형을 일으키면서 인지기능 저하 뿐 아니라 성격변화, 초조, 우울, 망상, 환각, 공격성 증가, 수면 장애 같은 정신행동 증상까지 흔히 동반합니다. 그런데 뇌과학자들이 놀라운 케이스를 발견했습니다. 맨 왼쪽 사진은 91세 수명을 마치기까지 인지기능이나 대인관계가 아주 좋은 분입니다. 그 분의 뇌를 사후에 스캔했는데 바로 오른쪽 뇌사진으로 나온 것입니다. 이 분을 추적 조사했는데, 결론으로 나온 것이 감사였습니다. 감사와 기쁨의 삶이 알츠하이머 뇌를 뛰어넘는 기적을 만들어낸다는 것입니다. 빛이 있으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하나님은 마음과 육신까지 보호해줍니다.(11) 악의 길에 빠지지 않으며, 악의 길에 빠졌다면 돌이켜 나올 수 있는 용기와 지혜를 공급받습니다.
반면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어두운 길을 갑니다.(13-15) 세계관 자체가 어두운 것입니다. 웬만한 성공에도 감사하지 못합니다. 성공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좋은 일들이 정말 많은데, 그 좋은 기회를 다 날려버리고 악을 행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작은 좌절 앞에 하늘이 무너지는 것처럼 절망합니다. 좌절의 자리가 주는 연단을 받지 못하고 원망과 불신으로 발전할 기회를 놓쳐 버립니다. 사나운 마음은 악을 행함으로 스트레스를 풀고 즐거워합니다.(13,14) 삐딱한 시각으로 불평과 분노를 뿜어내며 패역하게 행동하기를 당연시합니다.(15) 이미 심판을 받으며 살고 있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을 아는 지혜는 가정을 지키게 합니다. 표를 참조하겠습니다. 16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혜가 또 너를 음녀에게서, 말로 호리는 이방 계집에게서 구원하리니” 음녀, 이방계집, 평소 우리가 사용하지 않는 단어입니다. 혐오조장 언어로 공격당할 위험소지가 있습니다. 아마 솔로몬은 음녀와 이방 계집이라는 단어를 700명의 후궁과 300명의 첩을 생각하며 구사했을 것입니다.(왕상11:3) 혹시 솔로몬을 부러워하는 남자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솔로몬은 ‘구원’이라는 단어를 사용했습니다. 믿음의 남자와 믿음의 여자가 믿음의 가정을 이루며 사는 거기에서 진짜 안전한 삶이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솔로몬이 젊은 날 놓쳤던 지혜입니다. 그는 정략 결혼을 통해 왕국을 안전히 지킬 수 있다고 생각했으며, 여인들 또한 자기 능력으로 얼마든지 컨트롤할 수 있다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정략결혼은 왕국의 분열을 초래하는 꼬투리가 되었고 쇠락의 길을 시작케 했습니다.솔로몬이 여인들을 컨트롤한 것이 아니라 이방 여인들이 솔로몬을 컨트론하여 우상숭배로 끌고 갔습니다. 망할 뻔한 인생이 되고 말았습니다.
남자는 세 여자의 말을 들어야 안전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어릴 땐 엄마, 어른이 되면 아내 그리고 운전 시에는 내비게이션 안내 방송 여자입니다. 그 중에 제일 고난도는 아내입니다. 결혼은 서로 다른 남자와 서로 다른 여자의 연합입니다. 한 지붕 아래에서 사는 부모와 자식도 소통의 어려움을 겪는데, 남편과 아내가 연합의 위기를 겪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합니다. 많은 가정이 그런 위기를 불행으로 여기고 가정을 깹니다. 2023년 대한민국 결혼 10년 미만 가정의 이혼율이 36.1%입니다. 이혼 사유를 보면 이렇습니다. 불륜이 피가 끓는 20,30대에서 높을 것으로 예상했는데, 오히려 40,50대에서 높습니다. 돈과 사회적 지위가 높아질수록 유혹에 약합니다. 유명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 대부분이 불륜문제를 안고 있는 모습이기도 합니다. 워낙 많은 유혹이 쏟아지는데, 그것을 물리칠 만큼의 지혜나 지식이 없기 때문입니다. 노인이 되면 그런 문제에서 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60대 이혼율도 30%가 넘습니다. 40년 전보다 20배가 늘었습니다. 이 점에서 이혼 케이스를 찾기가 쉽지 않은 UBF는 큰 복을 받았습니다. 저는 말씀공부와 일용할 양식에 비결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말씀공부를 통해 목자나 신앙 동료들을 통해 부단히 피드백을 받습니다. 일용할 양식을 통해 성령께서 비추어주는 지혜로 스스로를 돌아봅니다. 그런 사람은 연합의 어려움속에서 새로운 기회를 발견합니다. 자기 발견의 통로로 삼기도 하고 인격 성숙의 통로로 삼기도 합니다. 그렇게 위기를 기회 삼아 온전한 연합으로 한걸음씩 나아갑니다. 17절을 보십시오. 그렇지 못한 자들은 갈등을 넘지 못해 젊은 날 그토록 사랑했던 짝을 버립니다. 하나님앞에 언약한 것을 깨버릴 정도로 겁을 상실합니다.(17) 가정을 깨는 것은 자유의 시작이 아니라 자기를 망치는 시작입니다. 한쪽 몸이 망가지면 다른 쪽이 무너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의 집은 사망으로, 그의 길은 스올로 기울어집니다.(18) 가정을 망치는 길로 가면서 생명을 얻는 길을 갈 수 없습니다.(19)
셋째는 하나님의 기업을 지키게 합니다. 21절을 읽겠습니다. “대저 정직한 자는 땅에 거하며 완전한 자는 땅에 남아 있으리라” 22절의 땅에서 끊어지겠고 땅에서 뽑힌다는 말씀과 대조됩니다. 이스라엘에게 가나안은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땅을 우리에게 적용하면, ‘부르심에 남는 것, 사명의 땅에 남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긴 것처럼, 우리 또한 사명과 부르심을 따라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어느 땅에 살든지 행복하면 되는 거 아닐까? 그런 질문을 던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르심과 사명 없이 행복할 수 없습니다. CS 루이스는 말했습니다. “진리를 찾는다면 결국엔 평온함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런데 평온함을 찾는다면 평온함도 진리도 얻지 못할 것이며 결국엔 절망할 것이다.” 우리는 한 영혼을 소중히 여기며 예수님을 배우고자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기도제목대로 순종하여 나아갈 때, 그것이 살아있게 하고 행복하게 만들어 줍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을 잃어버린 것처럼, 인간은 부르심을 버리고 사명을 떠나도록 끊임없는 유혹이나 압박을 받습니다. 현실 문제로, 상처와 인간 갈등으로, 세상 욕심과 정욕의 유혹으로 도전받습니다. 배후에는 악의 세력 사탄이 있습니다. 22절의 ‘끊어지고 뽑는다’는 표현이 그러합니다. 한 사람이 끝까지 부르심과 사명을 따라 살았다면, 그것은 사탄의 거센 시험을 물리친 위대한 승리입니다. 지혜와 명철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 바울은 순교를 앞두고 디모데를 향해 당당하게 권면했던 이유도 그러합니다. “나는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 날에 내게 주실 것이며,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도니라”(딤후4:7,8)
3장은 훈계와 그에 따르는 유익을 설명합니다. 1-12절까지 홀수절은 훈계이며, 짝수절은 훈계에 따르는 유익입니다. 예를 들어 1절에서 “잊지 말고 지키라”고 훈계하고 2절에서는 “그리하면 장수하고 평강을 더하리라”는 식의 구조입니다. 12절까지 구구절절 요절로 삼아도 될 정도로 은혜로운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이 의문점을 제기합니다. 정말 그렇게 되나요? 예를 들어 훈계를 잊지 않고 지키면 장수하나요?(1,2) ‘훈계를 따라 살면 하고 싶은 대로 못하고 스트레스를 받아 생명이 줄어들지 않을까요?’ 사람마다 정해진 생명의 년수, 하나님의 주권이 있으니 장수에 대해 객관적인 평가를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훈계를 무시하며 사는 것보다 훈계를 따라 살면 생명이 늘어나고 평안을 얻습니다. 첫 열매로 여호와를 공경하면 경제적 손해를 보는 것이 아니라 창고가 가득해지고 새 포도주가 넘치게 됩니다.
머리로 계산만 하는 사람은 믿지 못할 말씀입니다. 훈계를 받은대로 순종해야만 체험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연예인 차인표씨는 봉사활동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본래 봉사와 무관하게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2006년 아내 신애라의 바가지같은 훈계에 떠밀려 억지로 갑니다. 제일 좋은 비행기 좌석을 타고 인도 빈민가로 향하는 개념 없는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거기 사는 아이에게서 오히려 격려를 받고 옵니다. 구질구질하고 자기 에너지를 빼먹기만 하는 봉사로 생각했는데, 오히려 자기를 살아나게 하는 세계가 있음을 체험합니다. 2년 동안 다 그만두고 자원 봉사합니다. 거기서 소설까지 쓸 수 있는 에너지를 얻습니다. 지혜의 훈계를 따라 순종하는 생활이 그러합니다. 힘들고 손해만 볼 것 같은데, 예기치 못한 기쁨이 있고 감동이 있습니다. 나를 살아나게 합니다. 성령께서 말씀으로, 사람들을 통해, 성령의 감동으로 우리에게 가르침을 주시는 대로 순종해 보십시오. 차인표씨가 억지로라도 순종한 것처럼, 지혜와 지식과 명철한 훈계를 받아들이고 마음에 새기고 움직여 보십시오. 절대 손해가 아닙니다. 내 삶을 풍성하게 하는 축복이 숨겨져 있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13,14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지혜를 얻은 자와 명철을 얻은 자는 복이 있나니 이는 지혜를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낫고 그 이익이 정금보다 나음이니라” 은은 오늘날로 말하면 돈입니다. 정금은 부를 상징입니다. 사람들은 부자가 되려고 얼마나 많은 노력을 합니까! 돈을 중심으로 움직입니다. 오늘날 청년세대가 여호와 신앙을 떠나는 가장 큰 이유도 돈입니다. 지혜가 왜 은보다 귀하고 정금보다 낫습니까! 지혜야말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주기 때문입니다. “돈으로 사람을 살 수 있어도 마음을 살 수 없다. 호화로운 집을 살 수 있어도 행복한 가정은 살 수 없다, 돈으로 침대는 살 수 있지만, 숙면을 살 수 없다..." 돈은 편리함을 주지만, 지혜와 지식은 평강을 주십니다. 돈은 생활을 변화시키지만, 지혜와 지식은 사람을 변화시킵니다. 시편 127:2절은 말씀합니다. "...여호와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잠을 주신다” 다음의 표와 같이 분석할 수 있습니다. 지혜의 소중함을 알 수 있습니다. 장수, 부귀, 즐거움, 평강을 줍니다. 지혜는 여호와 신앙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여호와를 창조자로 아는 것이 지혜이며, 여호와를 의지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안에 생명, 평안, 꿀잠, 담대함이 담겨 있습니다. 지혜와 여호와 신앙은 이웃과의 관계로 드러납니다. 이웃을 돕고 이웃에게 해를 끼치지 않고 이웃과 싸우지 않는 것입니다. 악인을 멀리하는 것입니다. 지혜는 여호와 사랑, 이웃 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32-35절은 결론입니다. 각 절을 형제와 자매로 나누어서 읽어보겠습니다. “32 대저 패역한 자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나 정직한 자에게는 그의 교통하심이 있으며 33 악인의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거니와 의인의 집에는 복이 있느니라 34 그는 진실로 거만한 자를 비웃으시며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나니 35 지혜로운 자는 영광을 기업으로 받거니와 미련한 자의 영달함은 수치가 되느니라” 지혜를 가진 사람이 이 말씀이 진리임을 알 것입니다. 지혜를 따르지 아니하고 욕심을 좇아 사는 패역한 사람은 여호와로부터 미움을 받습니다. 반대로 받은 훈계대로, 지혜와 지식에 정직한 자는 하나님과 교제하며 살아갑니다.(32) 악을 사랑하는 집에는 여호와의 저주가 있고 의를 사랑하는 집에는 여호와의 복이 임합니다.(33) 거만한 자는 신나게 사는 것 같으나 결국 비웃음을 당하게 될 것이며, 겸손한 자는 어디가든지 은혜를 얻습니다.(34) 지혜를 따라 사는 사람은 영광을 기업으로 받을 것이나 미련한 사람은 아무리 부와 권력을 얻을지라도 수치로 끝나고 맙니다.(35) 당장의 결과에 현혹되지 말고 잠언이 가르쳐주는 대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그로 말미암아 잠언의 지혜가 우리 각 사람의 체험적인 지혜가 되기를 기도합니다.
4장에서는 아버지가 아들을 향해 구구절절하게 설득하는 모습이 나옵니다. 아들아! 곳곳에서 간절하게 부르는 호칭이 있습니다.(1,10,20) 여러 모습으로 다양하게 권면합니다. 주의하라(1), 떠나지 말라(2) 지키라(4), 얻으라(5), 버리지 말라(6), 얻으라(7), 높이라(8), 받으라(10), 놓치지 말고 지키라(13), 피하고 떠나라(15), 주의하며 기울이라(20) 지키라(21), 마음을 지키라(23), 멀리하라(24), 살피라(25), 든든히 하라(26), 떠나게 하라(27), 귀에서 피가 나도록 훈계합니다. 우리에게 익숙한 사랑의 표현은 이런 것입니다. ‘아들, 믿고 맡길게, 아들이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왜 이리 반복하여 권면하는 것입니까! 반발심으로 들으면, 그 말이 그 말인 것 같은데..., 다양한 상황에서 다양한 훈계가 필요합니다. 아들이라는 단어 하나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아들! 아들~ 아들?’ 같은 단어이지만 다른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처럼 말입니다. ‘아이 귀찮아’로 싸그리 무시할 것이 아닙니다. 예를 들면 1절의 주의하라는 건성으로 듣지 말고 깊이 생각하라는 의미이며, 2절의 떠나지 말라는 것은 지금까지 체험한 은혜를 버리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어리면 어린 대로, 성숙하면 성숙한 대로 때마다 권면과 훈계를 받아야 합니다. 체험적인 앎이 확신으로 굳어지기까지 여러 단계를 거치며 여러 어려움을 만납니다. 시간을 견디며 어려움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권면과 훈계가 이해와 사랑으로부터 출발했음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3절 말씀입니다. “나도 내 아버지에게 아들이었으며 내 어머니 보기에 유약한 외아들이었노라” 청년의 호기심과 자유분방함을 몰라서 훈계하는 것이 아니라 잘 알고 있기에 훈계하는 것입니다. 훈계받는 자들이 자주 놓치고 오해하는 부분입니다. 앞 세대가 겪었던 시행착오, 앞 세대의 뼈아픈 후회와 탄식을 겪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임을 알아야 합니다.
권면과 훈계는 한 지점을 향하고 있습니다. 2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모든 지킬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 육신은 헬스장에서 루틴대로 훈련한 만큼 눈에 보이는 변화를 만들어냅니다. 마음도 날마다 훈련하면 달라지는 데, 문제는 마음이 눈에 보이지 않습다는 것입니다. 성장하고 있는지, 달라지고 있는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나태해지기 쉽고 중도포기하기 쉽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알 수 있는, 측정할 수 있는 통로가 있습니다. 눈과 입과 손과 발입니다. 눈이 어디를 향하고 무엇을 보고 있는지가 마음을 드러냅니다. 냉소적이며 부정적인 세계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냉소적이며부정적인 것입니다. 입도 그러합니다. 구부러진 말, 삐딱한 말, 상스런 욕이나 음담패설, 남을 디스하거나 속이는 말을 내뱉고 있으면, 내 마음이 구부러져 있고 상스럽고 음란한 것입니다. 반대로 구부러진 말을 멀리하고 거칠고 상스러운 말을 뱉지 않고자 조심할 때, 구부러진 마음을 펴고 고상하고 매너있는 마음으로 만들어가는 훈련이 됩니다.(25) 그러므로 음란물이나 폭력물, 불신앙적인 사고를 끼치는 것들을 보지 않고 멀리합니다. 마땅히 가야 할 곳을 가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고자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고 있다면 마음이 건강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면 그렇게 움직임을 통해 마음이 건강해지도록 연단받는 것입니다.(26)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고 바른 길을 가고자 악에서 떠나야 합니다.(27) 그것이 마음을 지키는 것이며, 그렇게 마음을 지키는 자들에게 생명의 역사가 시작됩니다. 우리 각 사람에게 믿음 주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