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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명학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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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봉화 스크랩 진주강씨 만산종택 이야기
혜명 추천 0 조회 104 12.03.12 10:4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명 칭 :  진주강씨 만산고택(晋州姜氏 晩山古宅)
소 재 지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288
(원소재지 :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 288)
건 축 주 :  강용(姜鎔)
건축시기 :  1878년(고종 15)
소 유 자 :  강백기(관리자 : 강백기)
문 화 재 :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121호, 2000-04-10 지정, 4동

건축 배경
진주강씨 만산고택은 만산(晩山) 강용(姜鎔, 1846~1934)이 법전에서 춘양으로 옮겨 살면서 만대를 내다보며 지은 집이다. 『정감록』에도 예언된 ‘3재불입지(三災不入地)’의 명당에 자리를 잡은 것이라 한다. 물론 이것은 진주강씨 만산고택의 집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풍수가 아니라 진주강씨 만산고택이 자리 잡은 주변 일대의 풍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백산의 발치에 자리 잡은 춘양은 그 기슭 안에 폭 쌓여있는 형국이다.

그런 지리적 이점을 택하여 조선왕조에서는 태백산사고를 이 지역에 만든 것이라고 하겠다. 안전하게 실록을 보관할 수 있는 것으로 나라에서도 선택한 지형이니, 이곳이 인간이 일으키는 재해가 침범하기 어려운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산 역시 그런 지리적 이점을 염두에 두고 여기 집을 세웠을 것이다.

건축 구성
진주강씨 만산고택은 대문채·별채·정자 건물·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당히 넓은 공간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바깥마당이 아주 넓다. 본채와 대문채는 동향을 하고 있고, 정자 건물은 남향, 별채는 북향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전체 11칸에 이른다. 중앙에 솟을대문을 따로 두고, 좌·우에 각 5칸씩의 행랑건물을 붙였다. 밖에서 보았을 때 대문채 좌·우의 행랑채 외벽은 일관된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다. 대문 쪽 1칸은 왼쪽 5칸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정자 건물은 전체 건물 영역의 왼편 끝으로 나가 있다. 이 부분은 담장에 의해 본채, 또는 본채의 바깥마당과도 구분된다.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의 규모로 오른편 측면 끝으로 반 칸 규모의 처마가 덧대어져 있고, 벽으로 처리되어 있어 눈으로 보기에는 정면 4칸 반의 규모라고 할 수도 있다.

별채는 바깥마당의 오른편 끝에서 왼편을 바라보는 자세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사방을 쪽마루가 돌아가고 있는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이 건물에는 ‘서실(書室)’이라는 현판이 안채 쪽 벽면에, 그 옆 칸에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본채는 口자 건물이다. 앞 선으로 나와 있는 것은 정면 5칸의 사랑채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제 1선으로 나와 있는 각재기둥은 5칸이지만, 제 2선을 이루는 각재기둥은 5칸 반으로 차이를 보여준다. 이 부분은 측면 2칸 뒤쪽에서는 또 반 칸이 더 옆으로 밀고 나오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옆으로 반 칸의 쪽마루가 가설된 탓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 뒤편으로 오른쪽 연결채 건물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현판
칠류헌(七柳軒)
만산고택의 사랑채와 별채, 그리고 정자 건물의 처마 밑에는 온갖 현판들이 가득 게시되어 있다. 그런데 그 현판들은 불행하게도 진품도 아니고 모각도 아니며, 대부분이 현 종손 강백기가 두터운 종이에 사인펜으로 그린 것들이라서 정취를 느끼기는 어렵다. ‘칠류헌(七柳軒)’은 정자 건물에 게시되어 있다.
정와(靖窩)
‘정와(靖窩)’는 사랑채 건물에 걸려 있다.

 

문중 이야기
- 진주강씨 만산고택의 별미, 삿갓나물
삿갓나물은 해발 1천 m 이상의 고산에서 나는 것인데, 진주강씨 만산고택이 자랑하는 별미이다. 이 나물의 잎을 따서 진주강씨 만산고택의 방식으로 담가 놓으면 잎은 푸른데 그 물은 분홍빛이 나며, 특유의 향미가 있고, 입맛이 저절로 돋구어진다. 이 나물이 나는 시기는 3월 하순에서 4월 초순 사이이고, 진주강씨 만산고택에서는 이 나물요리를 사돈집에 보내는 선물로도 쓴다고 한다.
두엄 속에 묻었다가 잘 익은 다음에 꺼내 먹는 집장도 진주강씨 만산고택이 자랑하는 것 중의 하나이다.
진주강씨 만산고택 현판은 대부분 강백기가 두터운 종이에 싸인펜으로 그린 것들이다. 남의 집에 걸린 현판까지도 가져다 팔아먹는 우리의 타락한 자본주의 세태가 만들어낸 진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비단 진주강씨 만산고택에서만 아니라, 현판의 문제는 오늘날 거의 모든 고택이나 정자에서 부딪히게 되는 일반적인 것이 되어 버려서 입맛이 쓰게 한다.
봉성의 한 정자에서는 현판을 잃고 서울 인사동을 뒤져서 찾아냈는데 주인이 전람회에서 구입한 것이라며 엄청난 고가를 요구하여 사정하고 달래고 한 후에야 겨우 많이 깎아서 재구입을 하였다고 한다. 자기 것을 상당한 돈을 주고 다시 사와야 하는 것이 오늘날 문화재를 중심에 두고 벌어지는 웃기지도 않는 세태이다.
어떤 집에서는 신주를 가져가서 역시 상당한 돈을 주고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사왔다는 말도 들린다. 진주강씨 만산고택에서 보는 종이 현판들도 이러한 세태의 반영이라 할 것이다.


관련이야기
- 현판으로 뒤덮인 진주강씨 만산고택
진주강씨 만산고택은 만산(晩山) 강용(姜鎔, 1846~1934)이 법전에서 춘양으로 옮겨 살면서 만대를 내다보며 지은 집이다. 『정감록』에도 예언된 ‘3재불입지(三災不入地)’의 명당에 자리를 잡은 것이라 한다. 물론 이것은 진주강씨 만산고택의 집터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풍수가 아니라 진주강씨 만산고택이 자리 잡은 주변 일대의 풍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소백산의 발치에 자리 잡은 춘양은 그 기슭 안에 폭 쌓여있는 형국이다.
그런 지리적 이점을 택하여 조선왕조에서는 태백산사고를 이 지역에 만든 것이라고 하겠다. 안전하게 실록을 보관할 수 있는 것으로 나라에서도 선택한 지형이니, 이곳이 인간이 일으키는 재해가 침범하기 어려운 지역임을 쉽게 알 수 있다. 만산 역시 그런 지리적 이점을 염두에 두고 여기 집을 세웠을 것이다.
대문채·별채·정자 건물·본채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상당히 넓은 공간 위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바깥마당이 아주 넓다. 본채와 대문채는 동향을 하고 있고, 정자 건물은 남향, 별채는 북향을 하고 있다.
대문채는 전체 11칸에 이른다. 중앙에 솟을대문을 따로 두고, 좌·우에 각 5칸씩의 행랑건물을 붙였다. 솟을대문의 지붕은 양쪽 행랑채 지붕 위에 올라앉아 있는 모습이다. 두 지붕 사이의 간격은 많이 떨어져 있지 않고, 용마루 이쪽저쪽으로 횡보가 하나씩 놓여 그 위에 대문의 서까래가 올려 진 것이다. 그러니까 양쪽 행랑채 지붕과 대문채의 지붕은 들보 하나만큼의 사이를 두고 평행선을 그린다고 하겠다.
밖에서 보았을 때 대문채 좌·우의 행랑채 외벽은 일관된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지 않다. 왼쪽 5칸의 경우에는 각 칸이 횡으로 1대 3대 1 정도 비례로 나뉜다. 맨 아래 1은 주초 영역이다. 그 위의 3은 벽면이다. 대문 쪽으로 붙은 2칸은 백토가 칠해져 있고, 대문에서 먼 3칸은 나무판 벽으로 되어 있다. 맨 위의 1칸은 창문 영역이다.
대문으로부터 제 2칸에는 좀 큰 직사각형 모양의 방문 창이, 제 3칸에는 작은 유리문 창이 달려 있다. 오른쪽 5칸의 경우에는 대문에 붙은 1칸과 나머지 4칸이 다른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대문 쪽 1칸은 왼쪽 5칸과 같은 방식으로 처리되어 있다. 위에 직사각형의 방문창이 달려 있는 것도 같다. 나머지 네 칸은 옆의 1대 3대 1 정도로 분할된 벽면 중 아래 둘, 그러니까 주초 영역과 중간 영역이 통으로 벽처럼 되어 튀어 나와 있고, 이 부분에는 칸을 가르는 목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위의 1영역에서야 칸 사이의 구분이 눈에 보이게 되며, 벽면은 전체가 다 백토가 칠해져 있다.
벽면을 칠한 백토의 색깔도, 새로 칠한 것과 전에 칠한 것이 뒤섞여있어 통일적인 색감을 보여주지 않는다. 안에서, 그러니까 사랑 쪽에서 보았을 때, 행랑건물의 벽면은 들쭉날쭉한 미학, 무신경하게 만들어 놓은 것 같은 자잘한 변화의 미학을 드러낸다.
특히 왼쪽 5칸의 행랑채 건물에서 그러하다. 이 왼쪽 5칸 중, 대문 쪽으로 붙은 1칸은 마루이다. 좌 우 각 1칸씩이고, 대문 바깥쪽과 왼쪽 부분 등 두 벽만이 벽으로 막혀 있고 나머지 두 방향은 그냥 열려 있는 마루이다. 제 2칸은 방이다. 여기 마루를 포함한 5칸의 벽면들은 횡목이 자리 잡은 위치가 조금씩 다르다. 벽면이 조금 내려가고, 조금 올라붙고, 하는 식의 차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오른편 5칸의 경우에는 대문쪽에 붙은 1칸 방을 제외하고 나머지 4칸은 동일한 방식의 나무판 벽으로 처리되어 있는 광이다.
정자 건물은 전체 건물 영역의 왼편 끝으로 나가 있다. 이 부분은 담장에 의해 본채, 또는 본채의 바깥마당과도 구분된다. 대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대문 앞을 횡으로 가로지르면 대문영역의 왼편으로 정자 건물의 바깥마당이 담장 밖으로 따로 마련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부분에는 담 사이에 정자 건물로 들어가는 쪽문이 가설되어 있기도 하다.
이 건물은 정면 4칸, 측면 2칸 반의 규모이다. 오른편 측면 끝으로 반 칸 규모의 처마가 덧대어져 있고, 벽으로 처리되어 있어 눈으로 보기에는 정면 4칸 반의 규모라고 할 수도 있다.
이 달아맨 반 칸 규모를 제외하고 말할 때, 앞 선으로 나와 있는 것은 두리기둥이다. 앞 선의 두리기둥은 중간에 마루 끝을 이루는 각재를 물고 있기도 하다. 마루 끝이 앞 선의 기둥 선과 일치하는 것이다. 앞 선의 원기둥과 제 2선의 각기둥 사이에는 반 칸 넓이의 앞마루가 있다. 앞마루의 양 측면은 벽으로 막혀 있다. 오른쪽을 막은 벽에는 방문이 하나 달려서 달아맨 반 칸 영역으로 출입할 수 있게 되어 있다.
앞마루의 뒤편으로는 왼편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마루방이 만들어져 있고, 오른쪽에는 정면 2칸, 측면 1칸 규모의 방이 앞뒤로 붙어 있다. 앞에는 통방이고, 뒤에는 각 1칸씩 나뉜 방이다. 이 정자 건물의 뒤쪽 벽 밖으로는 4칸 전체에 걸쳐 쪽마루가 만들어져 있다. 뒤에 달아맨 부분의 경우, 앞쪽 1칸 반은 밑이 마루처럼 들려 있고, 뒤쪽 1칸 영역에는 간이부엌이 있다.
별채는 바깥마당의 오른편 끝에서 왼편을 바라보는 자세로 자리 잡은 모습이다. 사방을 쪽마루가 돌아가고 있는 작고 아담한 건물이다. 이 건물에는 ‘서실(書室)’이라는 현판이 안채 쪽 벽면에, 그 옆 칸에는 ‘한묵청연(翰墨淸緣)’이라는 글씨가 걸려 있다.
본채는 口자 건물이다. 앞 선으로 나와 있는 것은 정면 5칸의 사랑채 건물이다. 그런데 이 건물은 제 1선으로 나와 있는 각재기둥은 5칸이지만, 제 2선을 이루는 각재기둥은 5칸 반으로 차이를 보여준다. 이 부분은 측면 2칸 뒤쪽에서는 또 반 칸이 더 옆으로 밀고 나오기도 한다. 전자의 경우는 옆으로 반 칸의 쪽마루가 가설된 탓이고, 후자의 경우는 그 뒤편으로 오른쪽 연결채 건물이 이어지기 때문이다.
사랑채 정면 5칸 중, 왼쪽 끝에는 벽이 제 1선의 기둥까지 나와 만들어져 있다. 이 부분은 마루방인데, 사당 역할을 하는 곳이다. 나머지 4칸의 경우는 앞에 반 칸의 앞마루가 가설되어 있다. 안채 건물은 사랑채와 본채의 두 건물이 고매기까지 완벽하게 갖춘 모습으로 일선으로 늘어 서 있고, 그 사이를 좌우 연결채가 고매기 없이 이어져 있는 모습이다. 왼쪽 부분은 들고 나는 것 없이 일선을 이루고 있으며, 중간의 분할담 앞으로 2칸 뒤로 5칸의 규모이다.
안채는 정면 6칸, 측면 2칸의 규모이다. 중앙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마루를 두었으며, 왼쪽의 1칸은 반 칸 앞마루를 둔 방이고, 또 1칸은 왼편 연결채와 연결된 곳이며, 오른편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통방이다.
본채 건물의 측면 제 2칸 부분에는 옆으로 담이 쌓아져 안채와 바깥채를 구분하고 있다. 이러한 구조는 같은 의양리의 권신사댁에서도 살펴지는 것으로 보아 이 지역의 양식화된 공간구성 방식이 아닌가 여겨진다.

관련인물
- 교유 인물
이하응(李昰應),영친왕(英親王)
- 진주강씨 만산고택과 연관을 맺은 사람들
강용(姜鎔, 1846~1934)은 진주강씨이며, 자는 계명(季明), 호는 정와(靖窩), 또는 만산이다. 만산은 대원군이 직접 친필로 쓴 현판을 진주강씨 만산고택에 걸었다. 현재는 다른 곳에 보내 보관 중이다.
강용은 통정 대부, 이조 참의, 북청 부사를 지낸 백초 강하규(姜夏奎)의 3남이다. 덕망으로 1900년에 영릉 참봉에 제수되고, 1903년에 통정 대부에 올라 중추원 의관, 도산서원장을 지냈다.
1905년 이후 문을 닫아걸고 들어앉아 조용히 지내며 망국의 한을 학문으로 달래고, 후학양성에 힘썼다. 면우 곽종석과 나라를 걱정하며, 자택 뒷산에 ‘망미대’를 쌓고 조석으로 올라 국운회복의 일념을 담은 시를 읊었다. 『정와집』 10권 5책이 전한다. 위당 정인보가 지은 묘갈명이 봉성에 있다.(『봉화군지』 인용)
강용은 벼슬을 살 때 서울 궁정동에 집을 가지고 있었고, 여기서 대원군 이하응과 친분을 맺었다. 만산이라는 호를 그에게 지어 준 것도 대원군이다. 대원군이 여기 춘양에 내려왔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대원군과 강용은 상당히 친밀한 관계였다.
만산 강용은 도산서원장 직을 역임하였고, 대원군과도 친교가 있었으니, 지역사림에서도 많은 이들이 이 집에 출입하였을 것이다. 현 종손 강백기는 계남집(하계마을, 진성이씨) 종부로도 고모가 들어갔고, 번남집(의인마을, 진성이씨)에서 어머니가 오셨고, 하회 북촌집(풍산류씨)은 어머님 외가라는 인연을 강조하였다. 그러면서 강백기는 자신들이 소론이었지만 지역 사림에서 통혼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는 점을 누누이 말하였다. 그러나 만산 강용의 가계가 소론과 연결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만산 시대까지 소론의 당색을 갖고 있었는지는 따져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한다. 특히 도산서원장의 직책과 연관되어서 이 점은 흥미 있는 이야깃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진주강씨 만산고택의 오늘의 모습을 특히 매력적이게 하는 것은 이 집을 지키고 있는 현 종손 강백기의 집 가꾸기에 대한 열정이다. 강백기는 사랑채 뜰에 온갖 종류의 작은 화분들을 늘어놓고, 집을 찾아드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집안 이곳저곳을 모시고 다니며 설명을 하는 열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열정은 아무데서나 쉽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이들이 함부로 얼굴을 들이미는 종가나 고택에서는 특히 그러하다. 많은 사람들이 드나들다 보면, 한 두 번은 정성을 다하다가도 나중에는 지치고 힘들어서 불친절해지기 십상이다. 그러나 강백기의 열정은 아직 지치기에는 멀었고, 오늘도 그는 여전히 집을 찾는 사람들을 모시고 다니며 설명해 주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봉화 > 법전춘양권 > 의양리
- 철길 따라 만산고택 지나 태고정까지, 의양리
경상북도 봉화군 춘양면 의양리는 춘양면소재지가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봉화의 여러 면소재지 중에서는 가장 규모가 크지 않나 여겨진다. 그 이유는 아마도 춘양이 비교적 넓은 삶터를 갖추고 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고, 춘양목의 집산지였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봉화 현동 사이의 35번 도로는 방전에서 88번 도로로 갈라져 영월 쪽으로 북행한다. 방전으로부터 88번 도로가 춘양을 향한 북행을 시작한다면, 법전을 거쳐 온 철도는 수청거리에 이르러 춘양을 향한 북행을 개시한다.
그 두 지점 사이의 북쪽 삼각점을 이루고 있는 것이 춘양면사무소가 있는 의양리이다. 북행을 개시한 철도가 고갯마루를 넘어서면서 처음 만나는 의양리 지역은 남산리이다. 남산고을은 철로 주변 산기슭에 자리 잡고 있으며, 북동향을 하고 있다. 의양의 남쪽 산록에 있다고 하여서 남산리, 또는 남산편이라고 한다. 남산편을 지난 철도는 평촌고을에 이른다. 이곳은 조금 평탄한 들로, 남서쪽 방향으로 의양에서 제일 넓은 들이 펼쳐져 있다. 돌마 또는 들마라고도 하며, 안동권씨가 세거하여온 마을이다.
평촌을 지난 철도는 괴정못티고을에 이른다. 만석봉 북동쪽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인데, 300년 전 재령이씨가 지은 괴정이라는 이름의 정자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괴정못티 위쪽으로 나아간 철길은 현말 서편을 훑고 올라간다. 현말은 현동 또는 현리라고도 한다. 이 마을은 고려 충렬왕 때 호군 김인궤가 개척하였다고 한다. 1907년 봉성에 위치하던 현청이 화재로 소실되자 이 마을에 현청을 두었다. 그러나 교통이 불편하여 현청은 1913년에 현재 봉화 읍내로 다시 옮겨갔다. 현말이라는 이름은 현청이 있었던 고을이라 하여 붙여진 것이다. 이곳은 현재 춘양면사무소 영역의 북서쪽 부분을 이룬다. 이곳의 북쪽으로는 만산고택이 자리 잡고 있다.
철길은 만산고택 서쪽으로 올라서서 태고정 아래쪽으로 휘돈다. 태고정 북쪽으로는 낙천당이 있다. 이 부분은 낙천당고을이라 불린다. 낙천당은 태고정과 나란히 서 있는 정자이다. 이곳에는 김해김씨가 임진왜란 이전부터 정착하여 마을을 개척하였다. 이곳에 김장군·강장군·곽장군 셋이 난을 피해 살다가 난리가 끝나 한양으로 돌아갈 때 즐겁게 지냈다고 하여 정자를 짓고 낙천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마을도 이 정자의 이름으로 불렸다.
태고정에서 휘돈 철길은 호를 그리며 돌아서 동쪽으로 굽어 내린다. 그리하여 현 마을의 동편에는 역사가 자리 잡게 된다. 역사의 위쪽, 철길 동쪽으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은 운곡이다. 마을 동쪽의 높은 산에 늘 구름이 머물고 신선이 사는 곳 같다고 하여 운중선인이라 하였고, 그 뜻을 담아 운곡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역사의 남서쪽, 시내 서편으로는 한수정이 있는 마을이 있다. 이 마을은 동촌·동마·한수리 등으로 불린다. 한수정은 충정공 권벌이 지은 정자이다. 여기에는 300여 년 전에 남양홍씨들이 자리를 잡았다. 의양리는 법전을 지나 동행한 철길이 춘양을 싸안으며 올라섰다가 다시 내려서는 곳, 그 엄지손가락처럼 돌출된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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