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양왕릉 - 고려 역사의 종점
고려의 멸망은 이상하게도 4자와 관련이 깊다. 34대 공양왕을 마지막으로 개국 474년 만에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으니 말이다. 또 고려의 역사를 보면 20대 신종(神宗)과 공양왕이 된 그의 7대손 왕요(王瑤)의 운명이 비슷하다는 점도 흥미롭다. 54세에 최충헌에 의해 왕위에 오른 신종은 허수아비노릇을 하며 60년간 정권을 빼앗긴 채 최씨 무인정권의 폭정을 지켜봐야 했고, 45세에 이성계에 의해 왕위에 오른 공양왕은 이씨에게 나라를 빼앗기는 아픔을 감내한 후 그들의 전횡을 침묵으로 지켜보다가 그들에 의해 1394년 4월 50세를 일기로 비참한 최후를 마쳤다.
공양왕은 왕위에 오를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이성계는 우왕과 창왕이 신돈의 자식이므로 가짜 혈통을 몰아내고 진짜 혈통으로 왕위를 세워야 한다는 명분, 소위 폐가입진(廢假立眞)의 논리에 의해 1389년 11월 왕요를 고려의 마지막 임금 자리에 앉혔다. 공양왕의 등극은 역성혁명의 걸림돌이 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한 방편이기도 했다.
그 당시는 위화도 회군의 동지였던 조민수와 유학자로서 문하시중에 있던 이색이 우왕(禑王)의 아들 창(昌)을 왕으로 세워야 한다고 주장하여 9세밖에 안 된 창이 왕위에 올라 있었다. 이는 조민수 세력의 득세를 의미하지만 역으로 왕손 중에서 덕망이 있는 사람을 왕으로 추대하자고 주장했던 이성계 세력의 약화를 의미기도 했다. 수세에 빠져 있던 이성계는 바로 공양왕을 세워 역전의 기회로 삼았다. 신돈의 자식 창을 제거하면 창을 왕으로 삼은 조민수와 이색을 제거하는 명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이 후 전권(全權)을 장악한 이성계는 공양왕으로 하여금 강릉과 강화에 유배되어 있는 우왕과 창왕을 죽이게 하고 공양왕은 덕이 없는 왕이라 하여 퇴위시켜버렸다. 그러고는 1392년 7월에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역성혁명은 이렇게 오랜 세월동안 권력 투쟁의 험한 과정 속에서 진행되었고 오백년 가까이 이어온 고려의 역사는 서서히 종착역을 향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개성왕씨들이 힘에 부쳐 지켜낼 수 없던 고려왕조의 종점은 어디였을까?
필자는 고려 역사의 마무리를 공양왕의 묘가 있는 고양에서 찾는다. 강원도 삼척시 근덕면 궁촌리에 공양왕의 무덤이라고 전해지는 무덤이 또 하나 있어 두 지역이 서로 연고권을 놓고 다투고 있지만 문헌적으로는 고양의 무덤이 신빙성이 있기에 나는 이곳에서 고려의 종말을 본다. 고려 왕조의 한을 안고 있는 고양, 이곳이 힘겹게 달려온 고려 역사의 종점이며 개성왕씨의 또 다른 고향인 것이다.
왕의 국가가 아니라 황제의 국가임을 자처한 나라, 고구려의 웅대한 역사를 이어받아 대륙과 어깨를 견주었던 왕국, 몽골 제국의 말발굽 아래서도 굴하지 않았던 삼별초의 투지와 청자를 구워내고 팔만대장경을 조판하던 예술적 안목을 지녔던 심미안의 나라 고려왕국이 이제 이 한적한 골짜기에 누워 지나간 세월을 반추하고 있다. 그 누구를 탓할 것인가. 누구의 잘못이라 따질 것인가. 왕조는 바뀌었어도 산천은 언제나 그대로 있고 강물은 언제나 변함없이 흐르건만 권력에 눈먼 사람들이 평화로운 땅을 피로 물들이며 왕조를 바꿔 민초들을 힘겹게 했다.
나라를 개창(開倉)한 왕들은 왕이 되기 전의 업적과 개국의 과정에서 겪은 어려움 때문에 태조(太祖)라는 경칭 아래 그 이름을 쓴다. 태조 왕건, 태조 이성계처럼. 그러나 이방원같이 특별한 경우는 태종이라는 묘호보다는 이름을 쉽게 부르지만 모든 임금은 이름 뒤에 접미사처럼 왕(王)자를 붙여 00왕이라 하는 경우는 없다. 세종이나 영조 정조의 이름을 부르는 사람이 없듯 그의 업적에 따라 종(宗)이나 조(祖), 또는 군(君)의 시호(諡號)를 올려 부르는 것이 상례다. 그런데 우왕과 창왕은 한이 많은 고려의 역사의 아픔을 대변해주는 호칭이다. 우왕의 이름은 우(禑), 창왕의 이름은 창(昌)이다. 역사를 부정할 수 없어 차마 우(禑)와 창(昌)이라고 이름만 부르지 않은 것도 다행이지만 이는 민간인 취급한 것이나 다름없다. 신돈의 자식으로 매도했기 때문이다. (이 방법을 조선에 적용하면 요즈음 인기리에 방영되는 정조는 이름이 산이므로 산왕이라 해야 하고 세종대왕은 본명이 도(祹)이니 도왕이라 해야 한다)
공양왕릉에는 다른 곳에서는 볼 수 없는 석물이 있다. 장난감처럼 귀엽고 아담한 개의 석상인데 원래는 한 쌍이 있었다. 그런데 한 마리를 누군가가 훔쳐가 지금은 한 마리밖에 없다. 거기에는 전설과 같은 공양왕의 죽음에 얽힌 이야기가 전한다. 공양왕 내외는 삽살개를 키우고 있었는데 이성계 일파를 피해 이곳 고양에 숨어들 때 삽살개도 데리고 왔다. 그 때 주민들이 공양왕 부부에게 식사를 대접하였다 하여 그곳을 식사동이라 했다. 그런데 어느 날 주민들이 식사를 준비하여 왕을 찾았으나 공양왕 내외가 보이지 않자 행여 자객에게 당하지 않았을까하여 찾아 나섰다. 그런데 멀리 연못 주변에서 삼살개가 연못을 지켜보며 울고 있었다. 개가 노려보는 곳을 보니 그 연못 안에 공양왕 부부가 서로 끌어안고 죽어 있었다. 한 왕조의 최후치고는 너무 비참하다. 그래서 주민들은 주인을 끝까지 지킨 충성스러운 개를 돌로 새겨 공양왕 부부의 무덤 앞에 세워 놓았다. 그것도 영원히 배고프지 않도록 그 옆에 밥그릇도 함께 설치해 놓았다. 공양왕릉 앞 평지에는 당시의 연못을 조성해 놓았다. 지금은 크기가 15평방미터 정도의 작은 규모지만 살아있는 당시의 현장을 목격 할 수 있는 살아있는 현장이다.
역사는 승자의 것일 수만은 없다. 패자의 역사도 역사요 힘없이 짓밟힌 민초들의 역사도 지울 수 없는 우리의 역사다. 그 승자와 패자의 역사가 아직도 우리의 현실에서 아픈 흔적으로 남아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경우를 본다. 전주이씨 총각과 개성왕씨 아가씨가 서로 사귀다가 결혼을 앞두고 본을 따지는 과정에서 여성이 단호하게 우리는 절대로 결혼할 수 없는 사이라고 선언하며 일어난 일이다. 그녀의 집요한 국사 강의에 실망하여 결국엔 헤어졌다는 이야기는 역사가 무엇인지를 깨닫게 다. 아무래도 개성왕씨 측이 피해자니까 더 잊을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일제 강점기에 당한 아픔을 잊을 수 없는 경우와 비슷하리라. 오죽하면 조랭이 떡을 비틀며 이성계의 목이라고 했을 것인가. 명절이면 집안 식구들이 모이는 자리이므로 왕씨 집안에서는 전주이씨에 대한 감정을 토로하는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럴 때마다 조랭이 떡을 비틀며 자기들의 조상을 욕보인 이성계의 목이라며 감정풀이를 하는 행위가 패자의 단면을 보는 역사다.
고려왕조의 무덤은 거의가 북한에 있지만 강화도에 있는 21대 희종의 석릉과 23대 고종의 홍릉, 그리고 22대 강종비 원덕태후의 곤릉, 24대 원종비 순경태후의 가릉 등 4기의 능이 있다. 그런데 조선왕릉에 비하면 초라하여 고종릉은 사대부 무덤보다 못하다. 역시 패자의 무덤이라서 조선시대에 능을 잘 보살폈을 리가 없다. 그 중 공양왕릉은 그래도 능원이라도 넓어 시원한 느낌을 준다.
한 인물의 죽음을 기화로 역사가 끝난 것은 아니지만 역사의 왕조의 연속성에서는 시대를 마감하는 상징일 수밖에 없다. 공양왕이 살았던 고양의 식사동이나 그의 무덤이 있는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65-1 번지는 고려 왕조의 종말이자 고려 역사의 종점이다.
강기옥
시인. 한국문인협회. 펜글럽한국본부회원.
내외일보논설위원. 월간아트앤씨 편집주간.
국사편찬위원회사료조사위원.
서초문인협회부회장.
첫댓글 고려왕조의 패망과 그 아픔을 다시 한 번 되새길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감사합니다.
학창시절에 문학,국어 수업 다음으로 눈망울이 초롱초롱 한 수업시간은 역사 시간이었지요.
고려의 흥망을 한 눈에 되짚어 보고 갑니다.
귀한 글 고맙습니다.
역사 공부할 수 있도록 하여 주시어 감사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