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최고의 복음화율을 자랑하는 그곳은 바로 전라남도 신안군이다.
크고 작은 섬들로만 이루어진 신안군의 복음화율은 35퍼센트로 전국 평균의 두 배에 이른다.
그리고 그 중에서도 증도는 주민의 90퍼센트 이상이 예수를 믿는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이다.
마을 사람 거의 대부분이 크리스천으로 주민 2,200여 명인 작은 섬에 교회만 11개가 세워져 있다.
예로부터 섬사람들은 토속 신앙을 믿으며 살아왔다.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그들로서는 바다의 신, 바람의 신, 태양의 신이 그들을 지켜준다고 믿었다.
이런 오랜 전통 때문에 섬은 기독교 신앙이 전파되기 가장 어려운 곳 중 하나였다.
이런 곳에 어떻게 개신교가 들어가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세워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을 만들 수 있었을까?
증도에 처음으로 복음을 전파한 사람,
신안에 흩어져 있는 수많은 섬들을 나룻배를 타고 돌아다니며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끈질기게 주민들을 설득하고 먹이고 입히고 돌보면서 교회를 세운 사람,
그 사람은 목사도 선교사도 아닌 연약한 한 여인이었다.
섬마을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그녀가 있었기에, 그녀의 눈물겨운 헌신의 삶이 있었기에,
그녀가 뿌린 숭고한 순교의 피가 있었기에 오늘날 신안군과 증도가 존재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증도는 새로난 광주 - 무안간 고속도로를 타고 20분 정도 가면
북무안IC로 빠져나와 우회전 방향인 60번 지방도(무안에서 현경방면 도로)를 타고 간다.
이정표의 지도와 증도 그리고 우전해수욕장을 따라가면 된다.
지도에 들어서서는 사옥도 지신개선착장을 찾아간다.
사옥도에서 증도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되며
차를 싣고 갈 경우에는 왕복요금이 18000원(사람 1인포함)이고
배삯은 일인당 3600원(왕복)이다.
배시간은 한시간에 한대 정도이다.
터진목 모래사장 옆에 위치한 순교현장
문준경 전도사 순교지 안내판
순교현장에 세워진 순교기념비
문준경 전도사
고 문준경전도사님 일대기 비문
故문준경 전도사님은...
전도사님은 섬 선교의 어머니이며, 성결의 신앙을 지키려는 성결교회의 상징적 인물이다.
1891년 2월 무안군(현 신안군) 암태면 수곡리에서 출생하셨다.
1908년 3월에 현 신안군 증도면 등선리 정씨 가문으로 출가하셨다.
그 후 1927년 故이성봉 목사님이 시무하던 목포 북교동교회에 입교했으며,
1931년 5월 서울 성서학원 (現 서울신학대학교)에 입학하여 복음 사역자로 첫발을 내딛는다.
1933년 임자 진리교회의 개척을 시작으로
그 이듬해인 1935년 증동리교회를 개척(1935년부터 순교시 까지 시무했음)하였고
쉬지 않는 걸음으로 대초리교회와 방축리 기도처(현 방축리교회)를 1936년에 개척하였고,
그 후 우전리교회와 사옥교회를 개척하고 병풍교회는 순교기념교회로 세웠다.
성서학원을 졸업한 후에도 문 전도사님은 나룻배를 타고
무안군(현 신안군)의 21개 섬들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 개척에 불길을 붙였다.
1년에 고무신 아홉 켤레가 닳아 없어졌다는 일화는
문 전도사님이 전도를 위해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였는지 알 수 있게 한다.
머리에 손 한번 얹으시고 “예수 믿고 천국 가거라”했던 아이가 지금에 예수를 믿어
권사가 되었노라고 그때를 기억하고 있을 만큼 성령의 불을 품고 다녔던 복음 전도자였다.
일제시대 때에는 신사참배를 거부해 목포경찰서로 끌려가 고문을 받았으나
끝까지 믿음을 배반하지 않았으며,
교회가 경방단(당시 일제의 후방 치안담당기관)에 넘어가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문 전도사님은 6.25가 나던 그 해에 증도에 들어온 공산군들에 의해
목포로 끌려가서 죽음의 고비 를 맞았으나,
국군의 상륙 소식으로 자유의 몸이 되어 증동리로 돌아오려 하자,
故이성봉 목사님이 구약성경 이사야 26장 20절 말씀인
“ 내 백성아 갈지어다 네 밀실에 들어가서 네 문을 닫고 분노가 지나 가기까지 잠깐 숨을지어다”
는 구절을 인용하여 만류하였다.
그러나 이를 뿌리친 채 ‘비록 제가 죽을지 언정 저 한 사람 때문에 무고한 우리 신자가 한 사람이라도
죽어서는 안 된다’고 하시며 타고 갔던 풍선(돛단배)을 다시 되잡아 타고 증동리로 돌아 오셨다.
그 후 1950년 10월 4일 저녁에 공산군들이 다시 지도로 압송한다고 하며
여기 터진목 모래사장으로 끌고 왔다.
사형장인 이곳 모래사장에 문 전도사님과 함께 포승줄에 묶여 끌려갔던
생존자 김두학 장로는 그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한다.
"공산군 은 1950년 10월5일 새벽3시 새끼줄에 묶인 채 문 전도사님을
이곳으로 끌고 온 후 죽창으로 찌르고, 발길로 차며, 총대로 죽음에 이를 정도로 후려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문 전도사님은 ‘나는 죽이더라도 백정희 전도사와 성도들은 죽이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모래사장에 끌려 온지 얼마 되지 않아 공산군은 ‘너는 반동의 씨암탉 같은 존재이기에 처형한다’며
문 전도사님을 창으로 잔인하게 온 몸을 찔렀지만
숨이 끊어지지 않자 숨통을 끊는다고 하며 목에다 총구를 대고 총살하였다.
순교한지 며칠이 지난 뒤에도 공산군이 두려워 시신도 거두지 못하고 있을 때,
당시 청년이었던 이만성목사(증경총회장)님의 증언을 들으면
“터진목에서 백정희 전도사님과 조수용씨, 나와 같이 세명이
시신을 솔무등으로 옮겨 물을 떠다가 시신을 씻기는데,
뜨거운 햇빛에 이틀이나 노출되었던 얼굴은 피부가 벗겨졌었다”고 증언하고 계신다.
이처럼 교회와 성도들의 신앙을 지키다가 공산군의 총탄에 맞아 순교하니
복음전도와 헌신의 삶을 오는 세대에 물려주었다.
당신이 못 다한 사역은 남은 자의 몫으로 남겨두고 하나님의 품에 안기셨다.
순교한지 1년 동안 장례를 치르지 못하고 솔무등에다 가매장했다가
이듬 해 2월 호남지방회장으로 장례식이 거행되었으니 그 당시를 회상하는 사람들은 말하기를
“추모인파 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던 장례식이었으니,
백범 김구선생의 장례행렬보다 사람들이 더 많았다”고들 한다.
사역 중에는 모든 이의 어머니였고, 산모들에게는 산파였으며,
한숨 짖는 가정에 가서는 찬송으로 위로하였는데 천국가와 허사가를 불러 소망을 심었으니,
이를 들었던 사람들은 아직도 그 감동을 잊지 못하고 있다.
문 전도사님의 거룩하고 순결한 순교의 뜻을 이어받아
그렇게 한 알의 밀알되어 뿌려놓은 믿음의 씨앗들이 수 많은 열매로 맺혔다.
당신께 사랑의 큰 빚을 진 모든 이들이 그 뜻을 기리며 여기 기념비를 세우다.
“순교의 아름답고 숭고한 꽃이여 영원하시라”
추모 예배일 : 매년 3월 11일 주후 2003년 5월 1일
1950년 순교 현장에 처음 세워졌던 순교비
증동리교회에 세워진 순교비
문준경 전도사님 묘소
1935년 개척하고 순교할 때 까지 시무하셨던 증동리교회
1936년 개척한 대초리교회
1936년 개척한 방축리교회
문전도사가 고향인 전남 신안군의 섬들에 설립한 증동리교회, 진리교회, 대초리교회 등
10여 교회는 오늘날 기독교를 대표하는 수많은 목회자들
(김준곤 이만신 정태기 이만성 이성봉목사 등 30여명)을 배출하는 믿음의 산실이 되었다.
그녀의 복음전파에 대한 열정과 헌신, 사역은
섬을 중심으로 한 호남선교의 한 축을 이루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준곤 목사님과 문전도사님 순교 당시 생존자 김두학 장로
김준곤 목사님은 문전도사님의 묘소를 쓰다듬으시며
"문준경 전도사님은 나의 어머니 같은 분이셨다"는 말씀을 하시면서 눈시울을 붉히셨다.
부천예수비전교회 임병진 목사가 쓴 "천국의 섬 증도를 아십니까?"
문준경 전도사와 증도에 대해 쓴 책이다.
증도는 짱뚱어다리를 비롯한 아름다운 풍광을 지니고 있는 곳이어서
순교유적 답사와 함께 두루 돌아보고 오는 것이 좋겠다.
엘도라도리조트와 우전해수욕장
아름다운 우전해수욕장 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일생 | 다큐멘터리영화 ‘남도의 백합화’ | |
주기철, 이기풍, 손양원 목사의 영화와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권순도 감독이순교자 문준경 전도사의 일생을 그린 다큐멘터리 영화 ‘남도의 백합화’를 제작했다. 작품의 주인공인 문준경 전도사는 1891년에 태어나 17세가 되는 해에 결혼하여 절망적인 삶을 살았다. 어른들의 뜻에 따라 혼인하던 시절 이미 다른 여인에게 마음을 둔 남자와 결혼하여 생과부와 같은 삶을 살았던 것이다. 우연히 전도를 받아 부흥설교로 유명했던 이성봉 목사의 설교를 듣고 예수를 영접하게 된 그녀는 전도사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안군 섬 지방을 돌며 18년 동안 100 여개의 교회를 세웠다. 마치 한국의 사도 바울과 같았던 그녀는 6.25 발발 이후 공산당들에게 맞서다가 순교의 제물로 바쳐졌다. 문준경 전도사에 대해 몰랐던 권순도 감독은 문전도사에 관한 자료를 접하고 이를 하루속히 작품으로 남겨야겠다는 생각에 지난해 10월부터 목포와 신안군 섬 지방을 돌며 현지답사 및 생존자들의 증언을 카메라에 담았다.
실제로 촬영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결정적인 간증을 해 준 두 증인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작품이 더욱 빛난다.
작품은 증언자들의 증언을 기초로 제작됐고, 관객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중요한 장면은 실제 문 전도사가 활동했던 증도에서 재연으로 촬영하여 구성했다.
문준경 전도사의 젊은 시절 역은 탤런트 하은애, 순교 당시 역은 탤랜트 김석옥 권사가 참여하여 작품의 완성도를 높였다. 김석옥 권사는 큰 수술 후 요양 중 촬영에 참여하여 제작진들에게 산 순교의 정신을 그대로 전해 큰 감동을 주었다. 권순도 감독은 “요즘 들어 더욱 더 자극적인 매체로 변모하는 대중문화를 통해 영적, 도덕적 가치관이 희미해지는 이 시대에 많은 도전과 희망을 주는 작품이 되기를 바란다”고 제작 후 소감을 밝혔다. 작품은 영어로 번역되어 있어 해외선교에도 활용될 수 있고, 본편에 이은 순교자 이판일 장로의 이야기를 다룬‘아버지의 음성’또한 감동적인 작품이다.
기독교대한성결교회가 제작 지원한 이 작품의 상영시간은 총 42분. 상영요청을 받아 서울지방은 순회상영, 지방은 DVD 로 보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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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첫 성지순례 탐방열차 “출발!” ㆍ신안 증도 순교지 등
국내 최초 ‘기독교 성지순례 탐방열차’가 지난 19일부터 본격 출발했다.
코레일은 “신안 증도, 영광 수교지, 함평 나비엑스포 등 전남·서해안 지역의 기독교 성지와 주요 관광지를 둘러보는 ‘기독교 성지순례 탐방열차’를 운행한다”고 밝혔다. 이번 ‘기독교 성지순례 탐방열차’는 주민의 90%가 기독교 신자로 천국의 섬으로 불리는 신안군 증도의 고 문준경 전도사의 순교지를 시작으로 영광군 염산교회 순교지와 야월교회 순교기념관 등을 방문하는 일정으로 진행된다.
특히 여행객은 기독교 순례지뿐 아니라 아시아의 대표 슬로시티 신안군 ‘증도’에서 대규모 태평염전과 ‘짱뚱어 다리’ 등지를 둘러보고, 꿈의 휴양지 엘도라도 리조트에서 숙박을 하게 된다. 또 국내 최고의 지역축제 가운데 하나인 함평 나비엑스포 등을 관람하고, 함평의 대표 특산물인 한우 비빔밥도 맛볼 수 있다.
기독교 성지순례탐방열차는 당일 코스와 1박2일 코스로 운행되며, 여행안내에 관한 자세한 사항은 코레일 광주지사(062-605-2168)로 문의하면 된다. 신준호 코레일 광주지사장은 “전남·서해지역의 명물과 조합시킨 ‘기독교 성지순례 탐방열차’를 전라남도의 대표적인 지역탐방여행상품으로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 증도의 人生이야기
서울에서 꼬박 6시간 반을 달려가야 닿을 수 있는 섬, 증도.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외딴섬이지만, 약 1,500여 명의 사람들이 염전과 갯벌, 바다와 기름진 땅을 터전 삼아 살아가고 있다. 평생을 자그마한 섬 안에서 소금을 만드는 염부로, 갯벌의 낙지잡이로, 고기를 낚는 어부로, 땅을 일구는 농부로 산다는 건 보통 억척으로는 견딜 수 없을 만큼 고되다. 그러나 고단함 속에서도 해맑게 웃는 섬사람들, 그들의 인생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자.
■ 염전에서 피는 소금 꽃 증도엔 국내 최대의 소금 생산지가 있다. 여의도 면적의 2배가 넘는 광활한 소금밭, 태평염전. 1953년 6.25 전쟁 후 피난민들을 정착시키고 소금생산을 늘리기 위해 조성된 이 천일염전은 이젠 증도의 트레이드마크가 될 만큼 대표적인 명물이 되었다. ‘염부의 땀 한 됫박에 소금 한 됫박’ 이라는 말이 있듯이 소금 한 톨을 내기 위해서는 염부의 끊임없는 노고가 필요하다. 섬에서 염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소금은 하늘이 만들죠. 사람은 노력만 할 뿐이지 하늘이 만들어서 천일염(天日鹽)이에요』
새벽부터 염전에 나와 써레질을 하는 박형기 씨. 소금 장인이셨던 아버지의 뒤를 이어 2대 소금 장인으로 살아가는 박형기 씨는 강한 햇볕과 적당한 바람이 알갱이가 굵은, 고품질의 소금을 생산하는 비결이라고 말한다. 태양을 이용해 소금을 얻는 작업이다 보니 염부들은 한 여름, 장화에 땀이 흥건할 정도로 뙤약볕에서 일하는 게 가장 힘들다. 염전에 빗물이 들면 염도가 떨어지기 때문에, 다음날 비가 온다는 소식이 들리면 전날 한 숨도 못 자고 24시간 꼬박 작업을 하는 날도 부지기수라고. 고달픈 일상이지만, 소금이 많이 나올 때가 가장 행복하다는 증도의 염부들. 햇볕과 바람뿐만 아니라 이러한 염부들의 노력으로 매년 봄, 증도엔 소금 꽃이 만발한다.
■ 갯벌에서 삶을 캐는 사람들
조수간만의 차가 가장 큰 보름사리. 큰물이 들었다가 크게 빠지면, 짱뚱어, 낙지, 농 게 등등 바다생물들이 갯벌 위에서 일광욕을 즐긴다.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사람들에게, 생선과 낙지, 굴 등을 내어주는 바다와 갯벌은 가장 중요한 생계일터다.
『한 푼이나 저축해놔야 나 죽게 생기면 그 놈 갖고 쓰지 나 죽을 여비돈은 해놔야 아그들에게 부담 안 주지』
일흔 여섯. 손자들 재롱을 보며 편하게 살 나이건만, 박일임 할머니는 오늘도 차고 질퍽한 갯벌에 맨손을 깊이 담그고 낙지를 잡는다. 쉰 나이에 홀로돼 억척스런 낙지잡이로 세 자녀를 보란 듯이 키워낸 낙지 할머니. 할머니는 자식들이나 오면 먹을까, 그 비싼 낙지를 어찌 자신의 입에 넣느냐며 손사래를 치신다. 허리까지 오는 갯벌에서 힘겹게 옮기는 한 발 한 발, 그것은 할머니의 삶이었고, 할머니의 굽은 손가락은 치열하게 살아낸 삶의 흔적이다.
■ 흙에서 얻은 농부의 지혜
바다 한 가운데 떠 있는 섬이지만, 이곳에도 꽃이 피고 식물이 자란다. ‘젊을 땐 바다를 보고 살고, 나이 들면 땅을 보고 산다’는 말처럼 증도의 젊은 어부들은 나이가 들면 농부가 되곤 한다. 노쇠한 몸으로 배를 탈 수도 갯벌을 누빌 수도 없을 때, 기름진 땅에서 일군 수확물은 노인들의 유일한 수입원이 된다.
『땅은 거짓깔을 안 해. 헛소리를 안 해!』
계절 별로 여러 개의 중절모를 바꿔 쓰는 증도의 멋쟁이, 선남동 할아버지. 올해 여든 여덟이 되신 ‘증도 토박이’ 선남동 할아버지는 평생 농사를 천직으로 알고 살아오셨다. 정성들여 돌본 만큼 열매를 내어놓는 땅은 할아버지에겐 자식과도 같은 존재. 한때는 돈을 많이 벌어 부자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었지만, 섬 생활 80여년. 부자가 되고 싶단 꿈은 어느새 죽는 날까지 몸 건강하다가 잠자듯이 이 세상을 떠나는 소소한 바람으로 바뀌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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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간히 보름사리 때면, 꼬챙이 하나를 들고 술안주로 삼을 ‘맛 조개’를 잡으러 갯벌로 나가신다는 선남동 할아버지, 그가 즐겨 부르는 단가 ‘사철가’에 세상 사람들에게 전하는 메시지가 들어있다.
“세상 청춘들아. 너희 홍안을 자랑마라. 오늘 백발이 가소롭다. 사람이 늙어 죽음이라~ ♬” ■ 고된 삶이지만, 그래도 웃는다.
『착실하게 살아야지, 욕심내지 말고.허욕 부리는 사람이 망하는 사람이 많고, 욕심낸다고 다 내 맘대로 되는 것이 아녀!』
| 섬 생활은 고되다. 염전, 갯벌, 바다, 땅... 어느 한 곳에서도 쉽게 얻어지는 것이 없다. 부지런히 움직이고 땀을 흘려야 비로소 노력한 만큼의 몫이 돌아온다. 떡시루를 닮았다고 하여 예로부터 ‘시루 섬’이라고 불리는 섬. 증도의 본토박이들이 물질에 욕심을 내어 돈을 쌓아놓으려고 하면, 시루 구멍으로 물 빠지듯 모은 돈이 모두 다 새어 나간다는 설(說)이 전해 내려오는 신기한 섬. 그런 연유에서인지, 증도 사람들은 부(富)에 대한 욕심이 없다. 욕심이 없으면, 날마다 행복한 법. 오늘도 증도 사람들은 햇살처럼 환한 미소로 또 하루를 맞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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