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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만 잘 지으면 낙원
(창 2:18-25)
오늘 우리가 읽은 말씀 중심으로 해서 ‘이름만 잘 지으면 낙원이 된다’라는 제목으로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을 보면 중요한 얘기들이 많이 나옵니다.
앞의 1장에 있었던 창조의 얘기가 반복되면서도 부분 부분 필요한 부분을 확대경으로 보듯이 아주 강조해서 세밀하게 묘사를 해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에덴에 태어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처음으로 과제를 주십니다.
아담이라고 하는 말이 아담이라는 최초 인간의 이름을 말하는 고유명사이기도 합니다마는, 히브리어에서 아담은 사람, 인생을 뜻합니다. 또 흙에서 나왔다고 해서 아담을 흙으로 지어진 사람 해서 인생 전체를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보통명사라고도 할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아담에게 하나님께서 에덴에서 허락하신 최초의 과제는 무엇이냐면 그 에덴동산에 있는 각종 생물들에 대해서 이름을 짓는 것을 아담에게 허락하신 과제였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담 개인에게 낙원에 살고 있는 한 사람에게 주어진 것이라고도 볼 수도 있지만, 아담이라는 말이 인류를 대표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그런 말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 인간들에게 원래적으로 과제로 허락하신 일이라는 것은 이름을 짓는 것이었다는 것이에요.
창세기의 창조 이야기를 통해서 참으로 놀라운 진리들이 많이 얘기가 되고, 오늘도 우리가 읽은 이 부분을 부분부분 뜯어서 자세하게 보자면 한이 없는 중요한 얘기들이 많이 나오는 부분입니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 허락받은 이 과제를 중점으로 생각해보자는 것이지요.
에덴이라고 하는 곳은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는 곳입니다. 그런 곳에서 최초의 인간 아담이 해야만 했던 그 일은 바로 이름 짓기였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인간은 피조물이라는 관계 속에서 나타나기도 합니다. 피조물이라고 하는 것은 피字가 들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조물 되어진 것들 속에 하나이면서 동시에 조물되어진 것들을 조물주에게 받는 사람들입니다.
기본적으로 인생은 내가 뛰어 나가고 내가 움켜잡고 내가 만들어가고 그러기 위해서 내가 계획하고 내가 주체가 되는 내가 능동적이고 적극적으로 인생을 살아가기가 되어 있지가 않는 것은 나는 피조물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내가 존재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에 의해서 수동적으로 가능했기 때문에 우리 인생의 기본은 받는 것이요, 만들어 가고 창조하고 움켜쥐고 내가 달려가는 것이 아니라 있는 자리에서 받는 것이 인생의 기본이라는 것입니다.
첫 번째 홈채플 시간에 말씀드렸던 그 제목이 ‘고수는 기본을 좋아한다’그러지 않았습니까? 인생살이에 있어서 고수, 고단수. 인생살이에 있어서 십단이 넘어갈수록 어떻게 됩니까? 받기를 잘 하는 자입니다. 사실은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지 말고 받기만 잘하면 됩니다. 모든 인생의 문제가 어디서 발생하느냐?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어떤 문인이 말하는 것을 들었어요. 만약에 오스트리아의 황태자가 조금 더 게을렀다면 조금 더 나태했다면 그래서 나가서 근무하고 집무실에서 일하는 대신에 들판을 산책하고 식사하는 시간을 좀더 늘렸다면 제1차 세계대전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제 2차 세계대전도 히틀러가 조금만 더 수동적이었다면 조금만 덜 적극적이었다면 2차대전도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이런 얘기를 문인이 수필에서 쓴 것을 기억을 합니다.
맞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일리가 있다는 것이에요.
우리 인생이 망쳐지는 많은 이유가 뭐냐하면, 수동적이지 못하기 때문이라는 것이에요. 뭘 자기가 나서서 하겠다고 난리를 치는 바람에 다 헝클어 놓습니다. 그냥 가만두면 저절로 자리 잡아갈 것들을 내가 나서서 하겠다고 내가 자꾸 머리를 씁니다. 있지도 않는 일을 예측을 해가면서 이렇게 하면 좋을까 저렇게 하면 좋을까...
그래서 잘 받는다는 것은 인생살이의 기본인데 이 인생살이의 기본 중의 기본이 이름 짓기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19절 다시보면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각종 들짐승과 공중의 각종 새를 지으시고 아담이 어떻게 이름을 짓나 보시려고 그것들을 그에게로 이끌어 이르시니 아담이 각 생물을 일컫는 바가 곧 그 이름이라」
여기서 중요한 이야기가 다시 또 나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것들, 즉 하나님은 지으시는 분인데 지으신 그것들을 우리에게 줍니다. 이게 낙원의 삶의 패턴입니다.
하나님이 지으시고 우리에게 주시면 그 우리에게 주시는 것들을 아담은 이름을 지으면서 받으면 되는 겁니다. 이게 에덴의 삶의 기본 패턴이라는 것이에요.
그런데 이렇게들 생각합니다.
"나의 삶은 에덴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이름만 짓고 살수가 없지. 에덴처럼 만들어가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내 삶은 기쁨의 동산이 될 수가 없지. 그러므로 나는 적극적으로 나서야 된다."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지금 기쁨의 동산이 되고 있지 않은 이유를 왜 그런지 한번쯤 물어 보셨습니까?
그것은 여러분이 아담이 범죄한 이후에 나타난 가장 괄목할 현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이름 짓기가 타락했기 때문에 그런 것이에요.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삶을 허락하셨다는 것은, 사자를 만드시고 호랑이를 만드신 것 뿐만 아니라 상황을 만드신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자와 호랑이라고 하는 동물에 이름을 붙인 것이 이름 짓기가 아니라, 내게 하나님에 의해서 주어지는 모든 상황에 대해서도 우리가 이름을 지으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가 왜 삶의 이 환경이 기쁨의 동산이 아닙니까?
기쁨의 동산이 아닌 것이 아니라 여러분이 여러분에게 허락하신 지금의 환경에 대해서 하나님이 지어서 허락하신 환경에 대해서 여러분이 이름을 기쁠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이름을 지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이 그렇게 이름을 지은 것입니다.
"기뻐? 기쁠 수가 없는데. 내 자식이 공부를 못하는데 어떻게 기쁠 수가 있느냐?“ 이름을 그렇게 지은 것이라니까요 아직도 마음에 깨달아지지 않습니까? 이런 마음이 안 드십니까?
"돈이 없는데 어떻게 기쁠 수가 있느냐?“ 돈이 없음으로 기쁠 수 없는 상황이라는 이름을 여러분들이 지은 것이라니까요.
그러니까 아담이 타락하기 전에 이름을 지었던 방식을 우리가 깨달아야 합니다.
오늘 보면,
아담이 동물과 생물에 대해서만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갈비뼈를 취해서 지은 여자도 아담이 이름을 짓습니다. 그 여자도 하나님이 데려오신 것이에요. 내 뼈 중의 뼈요 살 중의 살이라고 이름을 짓습니다.
본문에 나와 있지 않지만 아담의 타락 이전에 이름 짓기 속에서 나타나는 기본적인 이름의 출발점이 무엇이었겠습니까?
이름의 출발점은 하나님이 지으셔서 내게 허락하신, 하나님이 허락해서 내게 데려오신, 하나님이 지으셔서 나에게 소개시켜준 전부 이런 단서가 붙는 거였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털 많은 짐승. 뭐라고 지을까? 사자.
하나님이 지으신 노란털이 있는 까만 줄이 있는 이 생물은 호랑이.
하나님이 지으신 나와 비슷한 그러나 기본적으로 구조가 다른 이 생물은 여자.
이렇게 해서 전부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이 허락하신, 아니면 우리의 상황으로 말하면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이 상황을 이름을 뭐라고 지을까?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이 상황을 뭐라고 이름을 지을까?
예를 들어, 자식이 공부는 안 하고 계속 컴퓨터 앞에서 게임만 한다면 우리는 그 상황을 이렇게 이름을 짓습니다. ‘공부는 안 하고 컴퓨터만 하는 저 놈은 저렇게 나가다가는 큰 일 날 놈!’이렇게 이름을 짓습니다. 이렇게 이름을 짓고 보면 큰 일 날 놈 이름대로 우리가 반응을 합니다. 먼저 내가 마음 속으로 ‘이대로 나가다가는 저 녀석 큰일 날 녀석이네!’라고 이름을 지어놓고는 그 이름에 반응을 합니다. 큰일 날 녀석이니까 뭔가 맞붙어서 해야 되지요.
그 상황을 ‘하나님이 지금 내 아이가 컴퓨터를 하고 있는 것을 알고 계시는데 지금도 보고 계시는데’ 라고 먼저 성(性)을 붙여놓고 하나님이 지으신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 이라고 먼저 상황의 앞부분에 성을 붙여놓고, 그 다음에 하나님이 보고 계시는데 공부 안 하고 컴퓨터만 하고 있는 저 아이는 도대체 하나님이 보실 때는 어떤 마음으로 느껴질까를 한 번 마음 속에 돌리고 그리고 접근하는 겁니다.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데, 하나님이 매를 들지 않는데, 내가 먼저 매를 들고 나서는 것이 좋은 건가? 내가 먼저 나무라기부터 가는 것이 좋은 건가?
그러면 무조건 방조하는 것이 좋은 건가??
‘하나님이 알고 계시는데’ 라는 이름을 지으려면 우리가 작명소에 가서 이름을 물어 보듯이 하나님께 묻게 됩니다.
"하나님, 지금 내게 허락하신 자녀에 대한 이 상황에 대해서는 하나님은 어떤 마음을 갖고 계시는 겁니까?"
그러면 때로는 이럴 수도 있습니다. "놔두어라. 지금 컴퓨터 게임을 하고 있는 중에 아주 중요한 깨달음을 내가 그 아이에게 주고 있노라."
그럴까요? 여러분.
우리가 자식을 다 압니까?? 자식 속을 다 모릅니다.
그런데 태목사,‘하나님이 허락하신’ 이런 식으로 이름을 지은 것이 어디 있느냐? 이러실 분이 혹시 있을지 몰라요. 그런데 여러분, 성경에 보면 맨 그런 이름 천지입니다.
예를 들어,
여호와 이레’- 하나님이 준비하셨다. 이게 이름입니다. 상황에 대한 이름입니다.
물건과 생물 단위에 대해서만 이름을 짓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대해서도 이름을 짓는 거에요. ‘여호와 하나님께서 준비하셨다.’
‘여호와 닛시’ - 여호와가 우리의 깃발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이렇게 이름 짓는 겁니다.
‘임마누엘’ -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는 이 상황에 대한 이름 이것이 임마누엘이다.
우리는 이것을 (0,1)로 이름을 지었지요? 괄호로 묶여서 십자가 붙잡고 zero되어야 하는 나와, 유일한 참 존재가 되시는 1 되시는 하나님이 함께 묶여 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임마누엘을 현대적으로 이름을 바꾼 것이지요.
주시는 상황에 대해서 전부 이스라엘 사람들 유대인들 히브리인들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는 겁니다.
사울이 다윗을 쫓아가며 죽이려고 할 때에 반대로 다윗이 사울을 역공으로 사울을 죽일 기회가 많았습니다. 다윗이 동굴에 숨어 있을 때 사울이 다윗이 숨어 있는 것을 모르고 다윗 바로 앞에서 용변을 보고 있었는데 뒤에서 칼로 찌르기만 하면 됩니다. 용변보고 있는 사람은 움직일 수가 없지 않습니까? 갑자기 어떻게 움직이겠습니까? 다윗은 찌르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다윗은 그 사람에 대해서 이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사람!"
그렇게 이름을 붙임과 동시에 주변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주변 사람들은 "원수다. 그러므로 죽여야 될 자다." 이렇게 이름을 붙입니다.
그런데 다윗은 원수라고 이름을 붙이지 않고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죽이지 않습니다.
이것이 하나님 마음에 든 것 아닙니까!!
그리고 쫓기는 상황에서도 다윗은 자기 원수를 앞에 보면서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기의 원수이기 때문에, 원수에게 하나님이 기름 부으신 자라고 이름을 붙임과 동시에 원수와 대질하고 있는 가장 험악한 인생의 순간을 그는 에덴으로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똑같은 상황을 다윗은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 하나님이 허락하신 자라고 이름을 붙인 반면에, 다윗을 추종하는 자들은 죽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이름을 붙임으로서 끊임없이 이들은 적을 만들어 내지만, 다윗은 끊임없이 하나님 한 분이 주장하시는 나라 안에 거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다윗 추종자들은 자기들이 죽여야 되고, 자기들이 찾아야 되고, 자기들이 극복해야 되고, 자기들이 해야 되는 그렇게 이름을 붙임과 동시에 다윗은 주어지는 대로 받습니다.
그리고 왕위를 얻는 과정을 가만히 보면 다윗이 찬탈한 게 아닙니다. 골리앗을 죽일 때부터 ‘여호와 하나님을 모독하는 자들’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항상 하나님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이름을 그렇게 붙임과 동시에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고 그러면서 점점 왕으로 주어져 가는 것이지, 다윗이 왕을 차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러분!
우리가 삶을 살아갈 때 불행해지는 이유는, 아담이 타락한 이후부터 내가 움켜쥐어야 되고, 내가 적극적으로 인생을 계획해야 되고, 내가 뛰어 나가서 능동적으로 살아야 된다고 생각해야 함과 동시에 자기 마음대로 이름을 짓는 이름 짓기의 타락에 이유가 있습니다. 그 죄가 우리에게 유전적으로 내려와서 내 멋대로 이름을 짓는 것입니다.
남편을 바라봅니다. 남편에게 이름을 짓습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아내에게 이름을 짓습니다. 이러이러한 사람이다...
그러면서 전부다 하나님이 주신 남편, 하나님이 주신 아내에 대해서 내 멋대로 이름을 갖다 붙이고 내 멋대로 이름을 지으면서 천하의 몹쓸 남자, 천하의 몹쓸 여자가 되어버리고 맙니다. 그러면서 그 사람과 함께 자기가 이름을 붙인 대로 천하의 몹쓸 남자와 천하의 몹쓸 여자와 함께 사니 거기에 무슨 기쁨이 있겠습니까?
그러면 어떻게 이름을 짓습니까? 술 먹고 망나니짓하는 남편의 이름을 어떻게 지어야 될까요?
한번 이름을, "하나님이 주신 남편!" 이라고 이름을 붙이기에는 너무 화가 난다면 이렇게 붙여 보세요. "하나님이 주신 망나니!" "하나님이 주신 멍청이!" 그러다 보면 여러분 마음에 켕기는 것이 있을 겁니다.
즉, “아무리 하나님이 무슨 악취미가 있으시다고 내게 인생에 있어 가장 하등급의 남편을 주셨을까, 내게 인생에 있어서 허락하신 가장 하등급의 아내를 주셨을까” 이런 마음의 생각이 날 거에요.
그래서 마음이 바뀌면서 이름이 바뀌어 질 겁니다.
즉, ‘하나님이 주신 아들!’‘하나님이 주신 딸!’‘하나님이 주신 돈 못버는 상황!’ 전부 ‘하나님이 주시는’ 으로 바꾸다 보면 ‘여기가 바로 푸른 초장이고 여기가 바로 쉴만한 물가이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되요.
그런데 우리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습니까?
내게 주어지는 상황에 대해서 그렇게 바르게 응답하지 못하고, 바르게 이름을 짓지 못하고 세상이 가르쳐준 이름 짓기 방법이 있습니다. 그 방법을 따라 이름을 지은 것이에요.
세상은 어떻게 이름을 짓도록 가르치느냐?
돈이 최고다! 모든 상황에서 이렇게 성(姓)을 붙입니다. 돈이 최고인데 없으니까 아픈 상황, 돈이 최고인데 돈이 조금 밖에 없으니까 더 열심히 벌어야 될 상황, 돈이 최고인데 돈이 꽤 있으니까 나는 잘난 상황 이런 식으로 이름을 붙여가게 된다는 겁니다.
여러분, 자식도 보면 결국 돈이에요. 자식 사랑한다고요? 아닙니다. 돈 사랑입니다. "돈을 벌어야 살지 이 녀석아." 이렇게 말하면 자식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 돈을 사랑한 겁니다.
여러분!
그렇게 이름을 붙이고 사방을 둘러보세요. 내가 이름을 붙인 것 중에서 낙원이 될 수가 있는가를...
돈이 없어서 나쁜 상황, 돈을 못 벌 놈이기 때문에 공부를 더 시켜야 될 자식, 돈을 못 버는 남편이기 때문에 내가 바가지를 긁어야 될 남편, 돈이 없는 부모이기 때문에 내게 별로 필요가 없는 부모, 이름을 다 이렇게 붙여놓고 사방을 한 번 돌아 보세요. 내가 이름을 그렇게 붙여놓았는데 거기에 낙원이 될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이 주신 내 아들, 공부는 못 하지만 하나님이 주신 은혜, 하나님이 주신 선물, 하나님이 맺어주신 아내, 이렇게 이름을 다 붙여놓고 봅니다.
그러면 갑자기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이 주신, 하나님이 주신 하면서 그것이 마음 속에서 기쁨이 샘솟기 시작한다는 것이에요.
모든 상황, 모든 사물, 모든 사람에 대해서 하나님이 주신, 심지어 예수님께서는 빌라도가 재판을 할 때 빌라도가 이렇게 말하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응하셨는지 아시지 않습니까?
빌라도가 이렇게 말합니다.
“너, 나한테 변호 안 해? 내가 너를 죽일 수도 있고 살릴 수도 있어.”
그렇게 말하는 빌라도를 향해서 예수님께서 뭐라고 이름을 짓느냐?
“하나님이 나를 죽일 수 있는 권한을 너에게 허락하지 않았다면 네가 그 권한이 없었으리라.”
세상에!! 나를 죽이려고 하는 그 원수의 권력까지도 하나님이 주신 권력이라고 이름을 지으십니다. 이름을 그렇게 지으시는 것이에요.
그러므로 원수가 아무리 해코지를 해도 하나님이 허락하신 원수의 해코지라고 이름을 붙일 때 부활의 능력이 그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모든 상황, 즉 아무리 악한 상황, 아무리 못난 상황이라도 그 상황을 역전시키는 비결은 하나님이 주시리라는 성(姓)을 갖다 붙이고, 하나님이 주신 이렇게 이렇게 안 좋은 상황.
예가 하나 있잖아요.
요셉의 형들이 요셉을 노예로 팔았습니다. 나중에 총리가 되어서 형들을 만났을 때 한 얘기가 “하나님이 형들이 행하신 악한 행위를 선으로 바꾼 상황”이라고 창세기 50장에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하지요?
저것들이 형이야? 나쁜 놈들. 이렇게 별의 별 이름을 붙였을 텐데, 요셉은 ‘하나님이 허락하신 형들의 악한 행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선으로 바꾸신 그런 상황’이라고 이름을 붙이게 됩니다.
오늘 하루 주어진 상황 어떻게 받느냐, 받는 것을 잘 받으면 됩니다. 받는 거만 잘 받으면 되는데 어떻게 잘 받습니까? 이름을 잘 지으면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이라는 성(姓)을 갖다 붙이고 모든 상황에 대해 이름을 붙여보세요.
아무리 상황이 안 좋아도, 아무리 내 마음에 안 들어도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주신 상황이다, 하나님이 주신 사람이다 이렇게 이름을 지으면서 사실 때 내 마음 속이 나도 모르게 솟아나는 에덴의 기쁨, 기쁨의 동산으로 우리의 삶이 바뀌어 가게 될 것입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오늘 하루만 생각하게 해 주세요. 그리고 오늘 하루 내게 주어져 있는 이 상황을 먼저 하나님이 주신 선물,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는 이름을 붙이면서 하루를 살 때 이름을 바꾸게 하시고 그럼으로 하나님이 주신 것들로 가득 쌓인 에덴동산으로 바뀌는 것을 간증할 수 있는 하루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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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indeedpapa님~~~! 설교를 글로 읽으니 또 다른 감동이군요.... 감사드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