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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벽함과 위대함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전 6:1-12(6)
여러분, 안녕히 주무셨습니까?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수요일 오늘의 번제 하나님 말씀 함께 봅니다. 전도서 6장 말씀입니다. 전도서 6장 1절부터 12절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1절부터 6절까지만 같이 읽겠습니다. 시작.
①내가 해 아래에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이는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②어떤 사람은 그의 영혼이 바라는 모든 소원에 부족함이 없어 재물과 부요와 존귀를 하나님께 받았으나 하나님께서 그가 그것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아니하셨으므로 다른 사람이 누리나니 이것도 헛되어 악한 병이로다
③사람이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그의 영혼은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또 그가 안장되지 못하면 나는 이르기를 낙태된 자가 그보다는 낫다 하나니
④낙태된 자는 헛되어 왔다가 어두운 중에 가매 그의 이름이 어둠에 덮이니
⑤햇빛도 보지 못하고 또 그것을 알지도 못하나이가 그보다 더 평안함이라
⑥그가 비록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행복을 보지 못하면 마침내 다 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 아니냐
우리가 함께 읽은 말씀 중심으로 ‘완벽함과 위대함은 강 건너 불이 아니다’ 라는 제목의 하나님 말씀 증거합니다.
완벽함과 위대함.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날마다 내 죄인됨의 어떤 처절함, 비참함을 확인하면서 죽어야하는 우리들에게 완벽함과 위대함이라고 하는 단어가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
근데 이 완벽함과 위대함, 이것이 우리에게 발견될 수 없다면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이 없다는 것이 오늘 전도서의 핵심되는 주제가 될 수 있습니다.
완벽함이 내게 없는 한, 나도 나의 완벽함을 발견하고 해서 확인할 수 없는 한 진정한 행복은 없다는 것이에요. 그리고 허무할 수 밖에 없다...
오늘 본문에 중압감에 대한 얘기가 나옵니다.
1절에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뭐가 무겁게 합니까?
2절 보면 그의 영혼이 바라는 바. 사람이면 누구나 마음으로 바랄만한 것들. 그게 뭐죠? 재물과 부요와 존귀.
재물은 그러니까 창고나 금고 안에 있는 금전적인 것들이라고 그러면, 부요함은 내가 아주 큰 집에 외제차를 타고 다니고 냉장고에는 육선이 즐비하고 그건 부요함이지요. 그런 부요함이 있고 존귀함이 있잖아요. 이 사회적으로 명망이 있고 명예가 있고 아주 귀인으로 존대를 받습니다.
그런 게 다 있다 해도 누리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누리도록이라고 하는 말은 ‘아칼’이라고 하는 히브리 말인데 ‘먹는다’는 겁니다. 먹습니다. 먹도록 허락을 못 받았다는 것은 한 마디로 배부름이 없다는 거예요. 배부름이라는 말은 또다시 만족이 없다는 겁니다. 근본적으로 그래서 행복이 없어요.
3절에 비록 백 명의 자녀를 낳고 또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 6절에 보면 장수하여 사는 날이 많을지라도를 반복하되 천 년의 갑절을 산다 할지라도 이 천년을 산다 해도 행복이 없으면 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본문에서 여러분, 행복이라는 말이 두 번 나오는데, 행복을 누리지 못하면 행복이 없다면 낙태되어 사산되어 나오는 아기가 더 낫다...
그 행복을 보지 못하면 이라고 하는 이 말에서 행복의 단어 뜻이 히브리어로 ‘토브’ 라고 하는 겁니다.
이 토브라고 하는 단어가 가장 인상적으로 나왔던 본문이 어디냐면 창세기에서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 하신 다음에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문귀가 나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이때 보시기와 6절에 행복을 보지 못하면 이게 같은 말 아닙니까? 행복이라는 단어가 바로 좋았더라 하는 단어입니다.
좋았더라. 토브...
이 좋았더라고 하는 단어 토브의 뜻이 뭡니까?
행복을 보지 못했다 라는 뜻은 좋음을 보지 못했다 이 뜻입니다.
그럼 이 좋음이라고 번역된 행복이라고 번역된 토브의 뜻 중에 어떤 뜻들이 있습니까?
위대함, 완벽함 그리고 아름다움 이런 뜻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완벽했더라 이 뜻이에요.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위대했더라. 당신이 지으신 피조물들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참으로 아름다웠더라.
이런 얘기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본문에 3절과 6절에,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하고, 그러한 행복으로 만족하지 못한다.
그러한 토브, 그러한 토브로 만족하지 못한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여기서 3절에서 언급되어진 2절과 3절에 언급되어진 재물과 부요와 존귀, 이게 다 위대함입니다. 완벽함의 요소들입니다. 이 세상에서 정한.. 그렇잖아요?
그리고 백 명의 자손. 백 명의 자손이 있다 보면 별의 별 자손이 다 있을 거 아닙니까? 못난 자손도 있지만 잘난 자녀도 있을 거예요. 그렇죠?
이것도 이 세상에서 복되다, 위대하다, 완벽한 삶을 산다는 조건에 아주 귀중한 부분입니다. 거기에 장수를 누립니다. 천 년의 갑절을 삽니다.
그러한 토브로 만족하지 못한다. 무슨 뜻일까요?
이 세상이 정한 완전함, 위대함 그것이 다 있는데도 내가 행복하지 못하다. 다시 말해서 이거는 위대함이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위대함과 완벽함은 여러분, 그냥 거창한 말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그것이 실제 감동을 주는 것이에요. 감동을... 그리고 그 감동이 행복으로 차고 만족으로 바뀌는 겁니다. 감동이 없이 어찌 행복이 있겠어요. 감동이 없이 어찌 만족이 있겠습니까?
위대함과 완벽함이라는 것은 그저 도덕적 이상향을 말하는 것이거나 아니면 우리가 갖고 있는 가치기준의 아이디얼한 성취를 말하는 것만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내가 행복을 느끼기 위한 필수적인 조건이라는 겁니다. 토브라는 단어가...
여러분, 예를 한번 들어보면 좀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는지 모르겠어요.
도대체 완벽함과 위대함. 내가 만족을 느낄 수 있고, 감동이 이루어지고 그래서 행복해질 수 있는 완벽함과 위대함이라는 것은 어떻게 나타나는 것일까?
우리 그 김연아 선수. 올림픽에서 여자 피겨 스케이팅에서 1등을 하지 않았습니까? 금메달을 땄어요. 근데 그게 쇼트 프로그램과 프리 프로그램 두 번 연기를 펼쳐서 점수를 합산해서 메달을 정합니다. 여러분 다 아시잖아요. 그렇죠? 얼마나 굉장했는지...
그 예를 한번 들어보면 일본의 후지 TV에서 그 김연아 선수의 연기 장면의 해설을 단 것을 자막을 붙여서 동영상을 띠운 걸 한번 봤습니다. 거기에 바로 그 말이 그대로 나와요. 토브에 대한 말이 그대로 나옵니다.
뭐라고 그럽니까 여러분? 일본 방송 후지 tv에서 지금 중계를 하는 겁니다.
“기가 막힙니다. 대단합니다. 완벽합니다. 그리고 이 중압감에서 물 흐르듯이 자신만의 연기를 펼치는 김연아. 엄청난 집중력입니다.”
오늘 이 중압감에 대한 얘기가 그대로 나와요.
뭐라고 그래요? 1절에 사람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이라.
뭐가 무겁게 합니까 이 세상이 토브하다고 한 것, 위대하다고 한 것, 완벽하기 위한 조건들이라고 말한 것들을 다 가졌는데 배부름이 없다는 것이에요.
그러니까 그것을 안 가지려고도 할 수 없고, 가져봤자 만족하지도 못하고, 여기 중압감이 생긴다는 겁니다.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되느냐?
김연아 선수가 온 나라, 온 나라가 김연아 선수 어깨 위에 올라갔다는 표현을 써요. MBC에서. 한 나라의 무게가 저 어린 여성 위에 올라가 있다. 그 중압감을 이기고 대단하다, 기가 막히다, 완벽하다라는 해설하는 해설자들의 해설을 이끌어내는 연기를 합니다.
독일어 자막을 봤어요. 그 아나운서의 억양과 말이 아직도 기억이 납니다. 아주아주 유일하게 작은 단점하나, 불확실한 점 하나 발견할 수가 없다는 겁니다. 유로방송의 독일어 해설자인데 그분이 뭐라고 하시냐면 그 옆의 아나운서가
“이 경기는 너무 아름다워서 한번 더 보면 좋겠습니다.” 그랬더니 해설자가
“한번이 무슨 말입니까? 백번이라도 봐야 됩니다. 열 번이라도 봐야 됩니다. 백년 만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경기입니다.” 이러고 난리가 났더라구요.
프리 프로그램의 점수가 나올 때 150.06이 나오더만요. 근데 김연아가 그 전에 갖고 있던 세계 신기록이 133. 얼마예요. 150. 얼마를 받으니 전부 와우~ 훌랄라 하며 외국사람이 다 그러고 있더라구요.
여러분, 여기에 위대함의 생성과정이 있습니다.
위대함과 완벽함이라는 것 그리고 그 위대함과 완벽함에 감동이 따르더라구요. 행복이 따르구요. 온 국민이 다 행복해지는 거예요. 그걸 보니까.
이걸 뭐라 그래요?
토브를 보지 못하면 행복을 보지 못하면, 위대함과 완벽함을 보지 못하면 만족이 없다는 거예요.
근데 거기 위대함과 완벽함을 보았습니다. 그래서 김연아만 행복한 게 아니라 온 백성이 다 행복하고 심지어는 뭐라고 하는지 아십니까?
스웨덴 해설가는 이렇게 얘기해요.
“당신이 오늘 이 김연아의 연기를 보셨습니까? 축하드립니다. 이런 연기는 피겨 스케이팅 역사상 단 한 번도 보여진 적이 없습니다. 당신은 가장 위대한 피겨 스케이팅의 연기를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축하합니다.”
와! 여러분, 저는 피겨 스케이팅 전혀 몰라요. 전혀 모르고 무슨 사소한 오점도 없고 흔들림도 없었다. 내가 보기에는 흔들리기만 하더만... 다리 쭉 뻗고 갈 때는 다리가 흔들흔들 하던데요 뮈.. 근데 그 해설가 전문가들의 말을 듣고, 심판들의 점수가 나오고, 환호성이 질러지고 그 점수의 의미를 설명해줍니다.
“이제까지 피겨 스케이팅의 모든 역사를 완전히 새로 갈아 치워버렸다.”
그 해설가의 말을 듣는 순간에 피겨 스케이팅에 대해 모르는 제가 눈물이 펑 쏟아지는 거예요. 눈물이..
이게 감동 아닙니까!! 이게 행복 아닙니까!!
이런 행복감이 있어야 되잖아요. 이런 감동이 있어야 되잖아요.
그럼 어떻게 위대함이 생성됩니까? 지금.
김연아가 있는 힘을 다해 열심히 집중을 해서 연기를 했습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아무 것도 몰라요. 그냥 그것만 보고 있으면. 아무 것도 몰라요.
그런데 전문가가 해설을 해줍니다. 트리플 러츠 하는데 저는 아무 것도 모르겠어요. 근데 그 사람들이 빙그르르 돌고 내려오면 와우! 그래요. 그러면 감동이 밀려오는 거예요. 김연아가 위대해 보이는 거예요.
아사다 마오도 안 되고, 캐나다의 누구도 안 되고, 안 되는 것들을 김연아가 해내는 거라고 느껴지면서 위대함이 보여지기 시작하는 겁니다. 해설과 더불어.. 그리고 심판들의 점수가 150.06으로 나왔을 때 그 점수의 의미가 밝혀질 때 김연아는 저한테 완전히 위대한 소녀예요. 완벽한 소녀예요. 정말 눈물이 나더라니까요.
근데 그 전에 전문가의 해설이 없고 심판의 점수가 없을 때는 김연아의 연기 자체만 힐끔 힐끔 단편적으로 장면을 볼 때는 뭐 잘하는지 못하는지 모르겠어요. 아무 감동이 없어요.
무슨 뜻인지 여러분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토브하였더라.
위해하였고, 완벽하였고, 좋았더라.
김연아의 위대함은 어떻게 창조됩니까? 어떻게 생성됩니까?
내게 감동이 될 수 있는 김연아의 위대함과 완벽함은 전문가들의 해설을 통해서 전문가의 눈에 완벽해야 내 마음에 전달이 되더라는 거예요.
심판들의 눈에 김연아의 연기가 완벽하게 느껴져야 내가 완벽하게 느끼고 감동이 되더라는 겁니다.
김연아의 연기는 토브했습니다. 위대했고 완벽하고 아름다웠다는 거예요. 백 년에 하나 나올까 말까 한 연기라는 겁니다. 모든 피겨 스케이팅의 역사를 갈아 친운다는 겁니다.
그 말들 하나하나가 내게 감동을 주고 눈물까지 나게 만들어요.
그리고 고맙다, 진짜 고맙다. 대한민국 사람으로서 어떻게 저렇게 잘 할 수 있을까. 자랑스럽고 고맙고... 이 행복함 아닙니까?
여러분, 세상사람들이 위대하다고 하는 것 이제 영적인 차원으로 바꿔봐요.
돈 많이 번 게 위대합니다. 정주영씨, 돌아가신 이병철씨 얼마나 위대 합니까?
그런데 이병철씨는 위대하게 돈을 많이 벌었습니다. 세상의 가치 기준을 따라 볼 때 정주영씨 엄청나게 자수성가 했습니다. 김연아가 연기를 마친 것과 같아요.
근데 하나님이 보시기에 심판이시고 이 세상의 전문가이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그분의 해설이 위대하다고 나오질 않는다는 얘기에요. 오늘 본문은...
그래서 우리가 읽지 않는 부분을 보면 10절부터 12절까지 여러분, 10절을 보면 이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오래 전부터 그의 이름이 이미 불린 바 되었으며 사람이 무엇인지도 이미 안 바 되었나니 자기보다 강한 자와는 능히 다툴 수 없느니라
이게 무슨 얘기입니까?
이미 오래 전부터 이름이 불리워졌다. 이름은, 이름이라는 것은 인격을 대표하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그 성질을 대표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래 전부터 하나님은 이미 이 땅에 있는 모든 것들을 다 속속들이 다 아신다. 사람에 대해서도 다 아신다.
다시 말해 이 세상의 전문가가 누구냐? 하나님이다 이겁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다투지 말라는 거예요.
예를 들어 김연아 선수가 연기를 잘 했어요. 근데 그런 경우도 있었다면서요? 김연아 선수에게 무조건 나쁜 점수를 주는 심판이 있다면서요. 그래서 심판들이 그 사람을 따라서 점수를 낮게 주어버렸습니다. 그럴 수도 있잖아요.
실지 연기는 완벽한데 점수가 낮게 나올 수가 있어요.
그러면 그걸 아는 사람은 알지만 거기에 위대함과 완벽함이 생성되지를 않아요. 생성되지를 않는다구요.
이병철씨와 정주영씨가 그 좋아하고 모든 영혼들이 다 좋아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좋아해요. 그런 돈을 너무너무 많이 모았어요. 맨 손으로 시작해가지고.
위대합니다. 위대해서 정주영씨가 경기를 잘 마쳤어요.
근데 이 세상의 전문가요 해설자요 심판이신 분께서 점수를 주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위대함과 감동과 완벽함과 아름다움이 생성이 되지를 않더라는 겁니다.
이게 중압감으로 느껴졌다는 거예요.
사람이 좋다고 하고 세상이 좋다고 하는 모든 위대함을 다 내가 갖추었는데 다 연기를 했습니다. 훌륭하게 해 냈는데 전문가의 해설에서 위대하다 완벽하다 라는 얘기가 안 나오면 위대함과 완벽함은 창출되지 않고 그리고 우리 마음에 감동은 없다는 겁니다. 만족이 없다는 것이에요.
김연아 선수 그 소녀의 그 아기씨의 움직임 자체를 전문가의 해설과 심판의 점수가 없이는 우리는 다 느끼지 못해요. 어떤 의미가 있는 연기이고 어느 정도의 레벨인지를 몰라요.
그 스페인 해설가가 이렇게 얘기하더만요.
김연아의 연기는 여기에 참석한 모든 선수와 레벨이 다르다. 참, 미안하다. 그리고 유감이다. 김연아 선수와 한 시대에서 피겨 스케이팅 선수생활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유감을 표현한다. 점수가 어떻게 되었든지 간에 저와 같은 연기는 불가능하다.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얼음과 하나가 되었고 또 한 사람은 얼음 위에 떠서 움직인다고 표현을 합니다.
이런 말들이 미치게 만드는 거예요. 아~ 김연아! 김연아! 이렇게 만드는 거예요. 얼음 위에 떠 다닌데요. 전문 해설가의 표현이...
여기서 행복이 주어지더라는 겁니다.
나는 얼음판 위에 미끄러지고 다닐 때 애썼다. 안 넘어지고 잘 하네. 이 정도예요.
해설가들이 위대함을 창출해내는 겁니다. 전문가가 창출하는 겁니다.
이 세상에서 사는 우리의 삶의 모습. 여기서 위대함이 발견되어야 되요. 김연아도 심판들의 점수가 150.06으로 사상 최대의 점수로 나오기 전까지는 아직 감격이 없습니다. 자기가 노력하고 연습했던 것을 다 보여줬다는 후회없음이 있을 뿐이지. 근데 점수가 나왔을 때 감동하는 거예요. 전문가의 인침이 있을 때.
내가 이 세상에서 김연아처럼 연기하며 산다고 합시다.
자식을 기르는 것, 남편과 대화하고 아내와 대화하고, 한 가정을 꾸리고, 직장에서 생활하고, 형제와 형제가 만나고, 교회에서 목사님 모시고 신앙생활하고, 장로님들 당회하시고 하는 이 모든 것들이 다 연기입니다.
하나님이 보고 계세요. 심판이시자 전문가이신 그분께서 보고 계십니다.
거기서 하나님께서 하나님 보시게 토브하다. 하나님 보시기에 위대함이 있고 완벽함이 있고 아름다움이 있어야 된다는 겁니다. 그래야 내가 진짜 행복할 수 있다는 거예요.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위대하다, 세상 사람들이 아무리 존귀하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거예요.
내가 이천년을 살았어요. 하나님이 보실 때 별거 아니네...
이천년을 살아도 하나님이 보실 때 별 거 아니다 해버리시면 감동이 안 주어진다는 겁니다. 행복이 안 주어진다는 거예요.
사람들이 박수쳐주니까 잠깐 기뻤다가 지나면 끝이에요.
김연아 선수 그렇게 감동적인 장면도 벌써 한 달 지나고 두 달 지나면서 가끔 퇴색되어 비리고 말잖아요.
그러므로 세상의 존귀함이 다 그렇다는 겁니다. 비유적으로 우리가 갖고 온 얘기지.
어떻게 해야 하나님이 보실 때 하나님이 보시기에 토브하다 말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은 우리 인간들이 실수 없는 삶을 살아야 완벽하다고 느끼시는 게 아닙니다.
우리가 절룩거릴 걸 아십니다. 우리가 쓰러질 걸 아십니다. 우리가 돈에 약할 걸 아시고 돈이 조금 없으면 걱정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아십니다. 몸이 어디라도 한 군데 아프면 당장 죽을 것 같이 벌벌 떨 수 밖에 없는 조재라는 걸 아십니다. 자식이 정말 금이야 옥이야 해서 마음을 차지할 수 밖에 없는 존재라는 걸 다 아십니다. 그런 존재에요.
그런데 이런 존재들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사랑하겠다고 주님의 십자가를 붙잡고 내 마음에 들어와 있는 모든 것들을 쫓아내고 그 모든 내 마음을 끌어 당기는 것들에 대해 내 마음이 죽은 자가 되기를 바라고 십자가를 붙잡고 하루하루 살아 나갑니다.
돈 문제가 생겼습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이 돈이 있으면 위대하다 합니다. 돈이 없으면 불안하다 합니다. 그런데 돈 문제가 생겼을 때 그 돈에 대한 마음의 염려의 줄을 끊어버리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돌리고 하나님께로 마음을 피난 갑니다.
이제 이렇게 돈 문제를 연기하면서 살았어요. 표현하면서 살았어요. 하늘의 천군천사들이 함성을 지릅니다. 그리고 천군천사 중에 누가 해설합니다. 그 해설이 어떻게 나타났는지 아십니까? 욥기에서..
사탄에게 말합니다.
“내 종 욥을 보았느냐?”
이게 무슨 얘기에요 여러분?
“저렇게 정직하고 순전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보았느냐?”
무슨 말입니까?
해설자가 말하는 거예요. 인류 역사상 이건 과장되서 하는 얘기입니다. 모세도 있었고 많이 있었잖아요? 인류 역사상 욥처럼 대단한 하나님 경외를 한 사람을 보았습니까? 아, 대단합니다. 굉장합니다.
하늘의 회의석상에서 언급되는 거예요. 이런 하늘의 회의석상에서 언급이 무관한 게 아니라는 겁니다.
토브. 하나님 보시기에 좋았더라 라는 토브. 하나님이 그걸 느끼시고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다, 보시기에 완벽하다, 보시기에 위대하다 라고 느끼시는 그 하나님의 느낌이 이제 내게 확실성과 담대함과 만족과 감동으로 역수입되어 온다는 겁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으로 사도바울이 아그립바 왕 앞에서 섭니다. 누가 위대합니까?
왕이 위대합니다.
누가 완벽합니까?
왕이 완벽합니다. 이 세상에서 볼 때...
누가 아름답습니까?
사도바울은 묶여 있는 거지입니다. 행색이... 왕이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이 말합니다. 전문가이신 이 세상 삶에 대해 전문가이시고 심판이신 분께서 내게 말씀하시기를 너는 십자가를 붙잡고 날마다 죽으며, 마음과 뜻과 힘을 다하여 하나님 사랑에 목숨을 걸고 있고, 내가 시키는 바를 위하여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말씀을 전하고 있으니 내가 보기에 너는 완벽하다 라고 감탄하시는 해설자되시는 하나님 말씀이 사도바울을 담대하게 묶어 줍니다.
그리고 왕 앞에서 하는 소리가, 왕이시여! 나처럼 되기를 바랍니다.
이거 정신병자지요. 감히 누구 앞에서 나처럼 되기를? 지금 묶여 있는 거지꼴입니다. 죄수의 형색입니다. 왕보고 나처럼 되라는 겁니다.
이게 바로 만족이라는 것이에요.
이럴 수가 있나요?
집도 없습니다. 우리들처럼 그나마 자그마한 집 큰 집도 통틀어서 그나마 그러너 집이 없어요. 우리만큼 돈이 없어요. 사도바울이... 아무 것도 없어요.
그러나 왕 앞에서 나와 같이 되라 얘기합니다.
왜? 이 세상에서 전문가이신 그분께서 십자가를 붙잡고 날마다 죽는 죄인의 괴수, 괜히 한 말이 아니에요. 멋 부리려고 한 말 입니까 사도바울이? 자기를 죄인의 괴수라고 한게?
죄인의 괴수가 십자가 붙들고 나아갈 때 그리고 당신도 이렇게 십자가 붙들어야 된다고 전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향하여 내가 보기에 너는 아름답다, 너는 완벽하다, 너는 위대하다 라는 말씀을 해주신다는 겁니다.
그럴 때 내 마음에 감동이 오고 만족이 오고 행복이 온다는 것이지요.
이 행복을 솔로몬은 애타게 찾고 있는 겁니다.
이 세상이 위대하다고 여길 수 있는 요소들 재물과 부요와 이 세상에서의 존귀함과 백 명의 자손과 천 년의 갑절 이천년을 사는 위대함. 전문가이시고 심판이신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천년 사는 연기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33년 밖에 못 살아도 다 이루었다. 김연아가 마치 내가 연습한 걸 다 보여 드렸습니다. 주님이 다 이루었다 하고 돌아가셨어요 십자가에서. 아무 것도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 아버지의 명령 하나 만을 듣고 순종하기 위해서 다 이루셨습니다. 세상에 존귀하게 여겨지는 모든 기준에서는 어떤 것도 적용되는 위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빌립보서 2장에 보면 죽기까지 순종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예수님을 만물 위에 그 이름을 높이사 만물로 하여금 주께 무릎 꿇게 만드셨다고 합니다.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인류 역사상 가장 비참한 그 모습 속에서 하나님은 가장 위대하고 가장 아름답고 가장 완벽한 인간의 모습을 발견하셨던 겁니다.
내 마음에 만족함이 없어요. 기쁨이 없어요. 돈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식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남편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몸에 병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다 속는 것이에요.
심판되시고 해설자 되시고 전문가 되시는 하나님의 해설 속에 내게서 어떠한 위대함도 토브함도 발견하지 못하고 계시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완벽하다 얘기하실 때라야 내게 행복이 주어지는데, 솔로몬이 말합니다.
“당신이 돈을 벌지라도, 자녀가 대학을 들어갈지라도, 건강이 있을지라도, 미모가 주어질지라도, 이천년을 살지라도 당신은 해설자이신 하나님께 토브하다 라는 말을 못 들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게 부담이 됩니다.”
여러분, 주님의 십자가 붙잡고서야 완벽함이 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주님을 향하여 완벽하다 선언하십니다. 아름답다 선언하십니다. 그 십자가에 주님이 달리신 그것을 붙잡고 나가는 바울에게 완벽하다 선언하십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는 자만이 하나님의 입에서 완벽하다 위대하다 라는 말을 끌어낼 수 있을 것이며 그 하나님의 말씀이 있고서야 내 마음에 진정한 행복이 주어진다는 것이지요.
기도하시겠습니다.
하나님 아버지!
완벽함과 위대함. 진정한 행복의 조건이요 만족함의 조건입니다.
그러나 세상이 정한 위대함으로서는 결코 그러한 궁극적인 만족이 주어지지 않는다는 솔로몬의 선언을 받아들이게 하시고 이 땅의 전문가이시오 해설자이시오 심판이신 하나님의 입에서 나를 향하여 완벽하다 아름답다 말씀이 나올 수 있도록 주님 십자가에 달린 그 모습에서 나를 발견하고 매일 죽고 매사에 죽어가며 살아가는 영적인 김연아들이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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