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대 : 비당 윤치병 목사(1929.7.7.1930) 대한예수교장로회 영주제일교회에서 분립
조선어강습원에서 주시경에게 한글을 배웠다. 이때 기독교에 입교했고 일본 세이소쿠영어학교, 고베신학교에서 수학했다. 귀국후 홍덕학당 교사로 교회에 봉사하며 교육과 전도에 힘썼다. 주기철목사가 윤치병목사에게 보낸 편지로 유명할 만큼 한국 근현대 기독교교육 사상가 13명 중에 꼽혔다. 인생의 목표를 "누가 크냐?"에서 "그까짓 것"으로 선회하여 "자기 성찰"과 "섬김"으로써 겸손의 삶을 살았으며 "나눔"과 "내어줌"으로써 성빈의 삶을 살았다.
2 대 : 봉경 이원영 목사(1930~1933)
일제강점기 때, 안동의 독립만세시위를 주도하였으며, 신사참배를 거부하여 옥고를 치렀고, 해방 이후,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대표를 역임한 목사 · 독립운동가.
1930년 평양신학교를 졸업한 뒤 곧 경안노회로부터 목사 안수를 받고, 영주중앙교회에 취임하였다. 신사참배가 강요된 1938년 이후 이를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서너 차례에 걸쳐 투옥당하기도 하였다. 광복 후 안동서부교회를 시무하면서 안동성경학원을 개원하여 청소년교역자 양성에 진력하였다.
1945년 총회장으로 선출되어 대한예수교 장로회 교단의 대표직을 맡았다. 또, 1958년 안동서부교회 원로목사로 추대되었으며, 여러 차례에 걸쳐 노회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신사참배를 부인한 출옥성도였으나 신사참배에 응한 동역자를 비판한 바 없고, 특히 성경강해교수법이 유명하였다.
3 대 : 권찬영 목사((J.V.Crother)(1933~1940)
미국 호하마 장로교 신학교를 졸업하고 1910년 1월 북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내한 후 안동 최초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순직한(1909년 11월 장티푸스로 순직) 소텔의 후임으로 안동으로 배정되었다.
1921년 12월에는 2대 경안 노회장을 되어 노회를 이끌었으며, 안동 등 경북 북부 지역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이 때 영주중앙교회에서 임시 담임 목사를 맡았다.
4 대 : 강석진 목사(1940~1950)
경북 북부지역 최초의 기독사립학교를 강석진 목사가 주축이 되어 한일합방이 되던 1910년에 설립하여 주를 믿는 수많은 인재를 길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