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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경주문화연구교사모임 원문보기 글쓴이: 월성
임고서원에 모셔져 있던 포은 정몽주 선생 진영(국립경주박물관 소장)
입암서원에 모셔져 있는 여헌 장현광 선생 진영
여헌의 제자 학사 김응조가 선산부사 시절 화공을 보내어 그리게 하였다.
병와 이형상 선생 자화상
영천 금호강변 호연정
병와가 제주목사직을 사임하며 가지고 온 한라산 고사목 단향목(전단목)으로 만든 단금
지도에 호연정이 나타난다.
입암, 입암정사(일제당, 우란재, 열송재), 계구대, 기여암, 소로봉, 운둔암, 상두석, 수어연 등
열송재-병와가 이틀 묵은 입암정사의 방
병와 선생은 <<여헌집>>에 실린 <입암기>를 읽고 오매불망 입암에 가보기를 소원하다가
1700년 3월 48세에 경주부윤에서 사직하여 영천에 은거한다. 그리고 한달이 지난 4월 19일-23일에
호연정에서 입암서원까지 후배인 안후정(군경, 완귀정), 박성세(호여, 석연정)와 함께
4박5일의 입암여행을 감행하였다.
아래에 <입암기>를 비롯하여 여헌과 노계의 입암 관련 시문 자료를 싣는다.
여헌선생문집 제9권 / 기(記)
입암(立巖)에 대한 기문
무릇 산과 들 사이에 바위가 혹 우뚝 솟아 있어 입암(立巖 선바위)이라고 이름하는 것을 내 많이 보았지만 가장 기이하고 특별하여 더불어 비견할 수 없는 것은 내 홀로 이 바위에서 보았다.
딴 바위에 이른바 ‘섰다[立]’는 것은 반드시 높으면서 크고 크면서 바르고 바르면서 곧지는 못하다. 혹 여러 바위 사이에 나열되어 있어서 홀로 서서 기울지 않은 상(象)이 있음을 볼 수 없고, 혹 산등성이와 벼랑 위에 자리하고 있어서 우뚝 솟아 스스로 빼어난 기이함이 있음을 볼 수 없으며, 혹 여러 층이 중첩되고 거듭 쌓여 높아져서 그 전체가 한 바탕이 아닌 것이 있고, 혹 어지러운 모서리와 기울어진 구멍이 있어서 기울고 벼랑이 있고 뚫려 있으며 좌우가 혹처럼 나와 모가 나 바르지 못한 것이 있으며, 혹 바위 밑부분이 거칠고 끝에 이르면 뾰족한 것이 있고, 혹 네모지고 둥근 것을 분별할 수 없어서 기울고 곧지 않은 것이 있다.
그리고 혹 바위는 기이하나 서 있는 곳이 제자리가 아니어서 만약 도시(都市)의 사이와 큰길 가에 있으면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자들이 혐의하며, 또 기상(氣像)이 이와 비슷한 자가 보고 즐길 줄을 아나 물을 좋아하는 지혜로운 자
그렇다면 바위가 서 있는 것을 얻기 어려우며, 이른바 서 있다는 것도 또한 품류(品類)가 많다. 그리하여 그 기이함이 한두 가지가 아니고 그 병통이 한두 가지가 아니어서 기이함이 많고 병통이 적은 것을 쉽게 볼 수 없으니, 하물며 완전히 기이하고 병통이 없는 것은 천백 개 중에 하나가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제 다행히 여기에서 얻었으니, 이 바위는 참으로 기이하다.
사방의 높이가 10여 장(丈)이 될 만하고 상하의 둘레가 7, 8심(尋 8척(尺)을 이름)에 가깝다. 여러 바위 사이에 서 있지 않으니 이른바 홀로 서서 기울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지형이 산등성이와 산기슭을 의지하지 않았으니 이른바 우뚝 솟아 스스로 빼어났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발끝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전체가 한 바탕이니 여러 층이 중첩되고 거듭 쌓여 구차히 높은 것이 아니며, 모서리지지 않고 구멍이 나지 않고 혹이 붙지 않고 움푹 꺼지지 않았으니, 기울고 결함이 있고 뚫려 있어 바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래로부터 위에 이르기까지 그 곧음이 똑같고 밑부분으로부터 머리에 이르기까지 그 큼이 똑고르니 바르다고 이를 만하며, 바라보면 둥근 듯하고 나아가 보면 네모진 듯하며 앞에서 보면 기울지 않고 뒤에서 돌아보면 치우치치 않으니 중정(中正)하다고 이를 만하다. 시장 곁이 아니고 큰 길거리가 아니며 깊은 산 가운데에 있으니 제자리에 서 있다고 할 것이요, 맑은 물을 끼고 깊은 못에 임해 있어서 지극히 고요한 것을 지극히 동(動)하는 가운데에 간직하고 있으니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자들이 모두 좋아한다. 나는 이 때문에 바위가 서 있는 것을 본 것이 많으나 지금 이 바위를 홀로 처음 보는 것으로 여기는 것이다.
비단 그 형체가 기이하고 서 있는 것이 특이하며 방위(方位)가 알맞는 곳을 점거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 한 바위가 가운데 서 있는데 여러 산들이 둘러 있고 여러 골짝이 싸고 있는바, 그 형세를 돕는 것은 뒤에는 운둔(雲屯)의 높은 바위가 있고 전면에는 우뚝 솟은 높은 봉우리가 있으며, 왼쪽에는 붕새[鵬] 부리의 뫼가 있고 오른쪽에는 거북이 엎드린 등성이가 있으며, 동구(洞口)에는 푸른 산이 중첩되어 있고 골짝 위에는 근원을 찾는 작은 오솔길이 있다.
그리하여 돌의 크고 작음을 따질 것 없이 모두 앉아서 잠을 잘 만하고, 나무의 늙고 어림을 막론하고 모두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을 쉬게 한다. 흐름을 따라 굽이가 있어서 모두가 바람을 이끌어 오는 자리이고, 돌에 부딪혀 못을 이루어서 모두가 낚싯대를 던질 만한 물결이다.
백운(白雲)은 무슨 마음으로 산마을을 덮고 있으며 푸른 송라(松蘿)는 무정한데 어이하여 들길을 막고 있나. 몇 두둑의 황폐한 밭은 콩을 심을 수 있고 천산(千山)의 새로운 산나물은 입맛을 돋을 수 있다. 구불구불한 돌길은 지팡이 소리를 아침저녁으로 울릴 수 있고, 지저귀는 새 소리는 제 스스로 울부짖는데 내 홀로 노래한다. 그리하여 물건을 만나 흥취를 이루고 눈을 붙여 생각을 일으키는 것이 비록 묘한 솜씨라도 다 그려낼 수 없고 비록 공교한 문장이라도 이것을 다 거두어 표현할 수 없으니, 그렇다면 한 바위가 간직하고 있는 기이한 경치를 이루 헤아릴 수 있겠는가.
바위 뒤에 작은 골짝이 있는데 땅이 그리 넓지 아니하여 수십 채의 초가(草家)를 용납할 만하며, 북, 동, 서 3면에는 모두 높은 산이 병풍처럼 둘러 있고 그 남쪽 어구는 곧 앞서 말한 운둔암(雲屯巖)이며 그 아래가 바로 이 입암(立巖)이다. 바위 아래에는 냇물이 있고 냇물 남쪽에는 또 봉우리가 있으며 봉우리 위에는 또 고개가 있다. 그리하여 지형이 이미 높으면서도 오목하게 파여서 냇물을 따라 가는 자들은 이곳에 마을이 있는 줄을 알지 못하니, 참으로 은자(隱者)가 살 만한 곳이다.
옛날에는 거주하는 사람이 없었고 혹 마을의 농부들이 이곳에 와서 농사짓는 자가 있었으나 땅이 척박하여 곡식을 경작하는 데 적합하지 않으므로 대부분 황폐한 채로 버려져 있었다. 임진년(1592,선조25)에 왜구(倭寇)가 쳐들어오자, 영양(永陽)의 선비 3, 4명이 뜻을 합하고 이 골짝에 들어와 사니, 3, 4명의 선비는 곧 나의 벗인 권군 강재(權君强哉), 손군 길보(孫君吉甫), 정군 여섭(鄭君汝燮)과 군섭(君燮) 형제였다.
네 친구들이 나를 보고 바위가 기이함을 극구 말하였으므로 나는 네 친구를 따라 지난해에 비로소 와서 구경하니, 과연 네 친구의 말이 허황된 칭찬이 아님을 징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금년에 또다시 찾아가 오랫동안 머물면서 지난해에 미처 보지 못한 곳을 두루 탐방(探訪)하니, 과연 볼수록 더욱 기이하고 오래 있을수록 더욱 싫지 않았다.
하루는 네 친구가 나를 보고 말하기를, “바위가 이처럼 신기하고 사는 곳이 이처럼 깊으므로 우리들은 이곳을 노년(老年)을 마칠 장소로 삼고자 하니, 공(公)은 우리들을 따르지 않겠는가? 또 우리들이 처음 취한 것은 이 바위가 신기하기 때문이었는데, 이 바위의 위아래와 사방에는 골짝과 시냇물과 돌이 모두가 아름다운 경치로서 이 바위의 도움이 되고 있으니, 곳에 따라 명칭을 붙여 우리들이 놀고 구경하며 탐상(探賞)하는 장소로 삼지 않겠는가?” 하였다.
나는 흥에 취하여 졸연(猝然)히 이를 승낙하고, 스스로 어리석고 졸렬하고 참람하고 망녕되며 또 시냇물과 산에 욕을 끼친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였다. 이미 이 바위와 산, 시냇물과 돌의 아름다운 경치를 얻었는데, 만일 깃들여 쉬고 거처하며 학문을 닦을 집을 만들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또 편안히 머물 곳이 없을 것이다. 또 처자식이 시끄럽게 떠드는 사이와 닭이나 개가 번잡하게 다니는 곳이 어찌 군자(君子)가 정신을 기르고 본성을 기를 수 있는 곳이겠는가.
이에 네 친구가 한 서재(書齋)를 설치하고자 하였는데, 바위 뒤 동쪽 가에 집 몇 칸을 세울 만한 곳이 있었다. 이 곳은 뒤는 마을과 막혀 있고 앞은 시냇물을 굽어보며, 바위를 등지고 서 있거나 바위 위에 걸터앉을 수 있어 앉고 누움에 그 모양을 모두 볼 수 있다. 또 바람을 막고 양지(陽地)를 향하여 비록 추운 겨울이라도 따뜻함을 취할 수 있다.
서재를 비록 세우지 않았으나 네 친구의 계책이 이미 정해졌으므로 나는 미리 이름을 짓기를 ‘우란재(友蘭齋)’라 할 것을 청하였다. 난초는 진실로 깊은 골짝에서 자라는 풀로 군자가 차고 다니니, 서재를 이름한 뜻을 네 친구는 묵묵히 알지 않을 수 있겠는가.
바위로부터 북쪽으로 가다가 마을 집에 미치지 못하고 마을로부터 남쪽으로 가다가 입암에 미치지 못하는 곳에 한 바위가 우뚝이 산처럼 솟아 있으니, 그 높이가 또한 4, 5길이 될 만하고 그 주위가 대략 땅을 측량하는 자[尺]로 재면 또한 수십 척(尺)에 내리지 않는다. 높이 솟아 있고 우뚝하여 진실로 구름이 주둔[雲屯]해 있는 듯하였다.
그 위에는 오래된 소나무 수십 그루가 용(龍) 모양의 가지가 서로 얽혀 있고 바람에 시달린 잎이 앙상하여 높은 산과 큰 산악의 형체가 의연(依然)히 있고 신선이 사는 지역과 절정(絶頂)의 풍취(風趣)가 은연(隱然)히 있어 우러러보는 자들로 하여금 정신이 엄숙하고 상쾌하며 마음과 생각이 깨끗하고 원대하게 하여 자연히 흥기(興起)하는 바가 있었다. 그러므로 칭하기를 ‘기여암(起予巖)’이라 하였다.
북, 동, 서 3면의 언덕에는 모두 작은 길이 있어 산에 오를 수 있으나 남쪽 언덕은 또 높이가 배나 되어 가팔라 오를 수 없으며, 남쪽 언덕의 밑은 곧 우란재의 터이다. 또 입암의 위, 기여암의 아래 중간에 평평한 바위가 있는데, 입암과 기여암과의 거리가 각각 10여 보(步)쯤 된다. 사람들이 마을로부터 올 경우, 기여암의 서쪽 곁을 따라 오면 굳이 산을 오르지 않고도 평평히 걸어 이곳에 오를 수 있으며, 그 아래는 깎아지른 듯한 절벽이 또한 7, 8길[丈]이 되어 내려다 볼 수 없고 그 가운데는 평평하고 둥글다.
네 친구는 지형을 따라 터를 닦고 그 주위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었다. 대의 좌우에는 두 그루의 높은 소나무가 있어 아침저녁의 햇빛을 가리울 수 있으며, 한낮에 그늘이 완전하지 않을 때가 있으므로 또 긴 나무를 두 소나무에 걸쳐 놓아 기둥을 삼고 딴 소나무의 먼 가지를 베어다가 덮어서 햇빛을 가리우지 못하는 부분을 보충하니, 종일토록 햇빛을 보지 않을 수 있었다. 대의 남쪽 귀퉁이에도 작은 소나무 몇 그루가 있는데 길이가 혹 몇 자쯤 된다. 네 친구들은 이 소나무를 사랑하고 보호하여 날마다 자라기를 기다리니, 이 소나무가 만약 자라면 굳이 딴 나뭇가지를 베어다가 덮지 않아도 그늘이 저절로 충분할 것이다.
대 위는 10여 명이 앉을 만하니 차를 끓이고 술을 데우는 데 모두 적당한 장소가 있으며, 따라온 노비(奴婢)와 어린이들도 각기 곁에 편안히 앉을 곳이 있다. 대 위에 앉으면 3면이 모두 높은 절벽이어서 반드시 항상 깊은 못에 임한 듯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마음이 있으므로 이 대를 이름하여 ‘계구(戒懼)’라 하였으니, 계구는 대가 된 형세인데 계구의 뜻은 참으로 많다.
이 대는 뒤에는 기여암이 있고 앞에는 입암이 있으니, 다만 두 바위만 가지고도 한 구역의 좋은 경치를 점령할 수 있는데, 하물며 좌우와 원근이 모두 기이한 구경거리이다. 그리하여 형형색색(形形色色)으로 크고 작은 것이 나열되어 있어 기이함을 다투고 아름다움을 자랑하며 서로 신기한 구경거리가 되고 있음에랴.
한 줄기 푸른 물이 동쪽 벼랑으로부터 흘러와서 굽이굽이 감돌아 입암의 아래를 부딪히고 지나가는데, 해가 오래고 세월이 흐를수록 그 부딪힘이 그치지 않아 지금 바위 밑에는 물에 깎인 흔적이 역력하다. 이 물이 이미 서쪽으로 흘러갔다가 다시 남쪽으로 돌아서 혹 숲을 돌아 숨기도 하고 혹 돌을 지나 나타나기도 하며, 혹 느리게 흘러 못이 되고 혹 급하게 흘러 여울이 되며, 혹 나뉘어 섬[島]이 되고 혹 굽어 물가를 이루었는바, 대 위에서 7, 8리를 볼 수 있다.
대의 바로 남쪽에는 큰 산 한 줄기가 점점 낮아져 가운데가 줄어들었는바, 서쪽에서 와서 북쪽으로 돌아 입암과 마주한 곳에 이르러 봉우리가 우뚝 솟았으며 벼랑의 돌이 높이 솟아 있다. 이 봉우리는 시냇물 남쪽에 있고 입암은 시냇물의 북쪽에 있어 마치 서로 손을 잡고 읍(揖)하는 듯한데 이름을 ‘구인봉(九仞峯)’이라 하였다. 구인봉은 그 높음을 말한 것이나 구인이란 말은 공자(孔子)의 산을 만드는 비유에서 나왔으니, 우리들은 한 삼태기의 흙을 더하지 아니하여 아홉 길의 산이 되지 못함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대의 동쪽에는 뒷산 한 줄기가 있는데 이 역시 온 것이 점점 낮아진 뒤에 다시 일어나 봉우리가 되었는바, 봉우리의 모양이 단정하고 둥글어 마치 부용(芙蓉)이 물 위로 나왔는데 꽃봉오리가 터지지 않은 듯하였다.
대 위에 해가 저물고 산중 사람들이 막 즐거워하여 등불을 켜려고 하나 구할 수가 없고 촛불을 밝히려고 하나 마땅치가 않다. 이 때에 함께 주목(注目)하고 동쪽을 바라보며 달이 떠오르기를 기다리는데 한 조각 얼음같은 둥근 달이 봉우리 위로부터 나와서 마치 봉우리가 둥근 달을 토해내는 듯하였다. 그러므로 이 봉우리를 이름하여 ‘토월(吐月)’이라 하였으니, 대 가운데의 밤 경치가 이 달을 얻어 밝아진다.
대의 서북쪽에는 가장 높은 한 뫼가 있는바, 산인(山人)들이 산을 나가지 않고 때로 울적한 회포를 펴고자 하면 신을 신고 지팡이를 짚고는 벼랑을 따라 등라(藤蘿)를 부여잡고 이 뫼에 한번 올라, 선니(宣尼 공자)께서 동산(東山)에 오르고 태산(泰山)에 오른 놀이를 따른다면 한 조그마한 청구(靑丘 우리 나라)가 일찍이 한번 보는 시야(視野)에 차지 못하니, 이 뫼를 어찌 ‘소로(小魯)’라고 이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토월봉(吐月峯)의 동쪽에 깊고 빼어난 고개가 있는데 반은 감추어져 있고 반은 드러나 있으며 울울창창(鬱鬱蒼蒼)하여 나무하는 지아비와 약초를 캐는 나그네들의 발자취도 미치기 어려우니, 이곳을 이름하여 ‘산지령(産芝嶺)’이라 하였다.
지초(芝草)가 반드시 이곳에서 생산되는 것은 아니나 산지(産芝)라고 이름한 것은 어째서인가? 옛날 상산(商山)의 사호(四皓)가 시서(詩書)를 불태우고 선비들을 묻어 죽이는 진(秦) 나라의 학정(虐政)을 피하여 몸과 세상을 상산의 깊은 골짜기에 부쳐 두고 홀로 멀리 당(唐), 우(虞)의 태평성세를 그리워하였으니, 천 년이 지난 뒤에 자지가(紫芝歌)를 외우고 읊어보면 또한 그 금회(襟懷)가 세속을 초탈하였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그들을 그리워하나 볼 수 없으니, 그의 뜻을 숭상하여 높이 읍(揖)하는 자가 눈을 붙여 회포를 펼 곳이 없을 수 있겠는가. 이 때문에 고개 이름을 ‘산지’라 한 것이다.
산이 산지령에서 서쪽으로 간 것이 또 계구대(戒懼臺)의 동남쪽에 한 고개를 만들었으니, 곧 구인봉(九仞峯)이 온 곳이다. 대에서 바라보면 가장 가깝고 또 마주보고 있으며 둥글고 높고 농후(濃厚)하며 울창하고 밝게 드러났는바, 이곳을 이름하여 ‘함휘(含輝)’라 하였으니, 이는 주회암(朱晦庵 회암은 주희(朱熹)의 호)의 “옥이 묻혀 있으니 산이 빛을 머금고 있다.[玉蘊山含輝]”는 뜻을 취한 것이다.
이 산이 옥을 간직하고 있는지의 여부는 진실로 알 수 없으나 좋은 옥이 묻혀 있는 곳은 반드시 명산(名山)이며, 회옹(晦翁)의 이 시구(詩句)는 또 군자가 덕을 쌓아 순수함이 얼굴에 나타나고 덕스러운 모양이 등에 가득함을 비유한 것이니, 우리들은 이로부터 이 산을 바라보면서 반드시 그 이름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우리들 마음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 과연 덕이며 낯과 등에 나타나는 것이 과연 순수하고 가득할 것인가? 이 또한 어찌 스스로 닦는 도움이 아니겠는가. ‘함휘’라는 이름은 이것을 취한 것이다.
함휘령(含輝嶺)으로부터 남쪽으로 가면 또 한 고개가 아득한 사이에 높이 솟아 있으니, 계구대에 앉아 있는 자는 반드시 구인봉 위로 눈을 들어 올려다 본 뒤에야 이 곳을 바라볼 수 있다. 이 곳은 언제나 흰 구름이 정상에 모여 있어 혹은 관(冠)과 건(巾)을 머리에 쓴 듯하고, 혹은 빗긴 띠가 허리에 있는 듯하며, 혹은 벼랑과 골짝이 모두 가리워진 경우가 있고, 혹은 봉우리와 산이 반쯤 노출된 경우가 있으며, 혹은 처음에는 얇았다가 끝내는 빽빽하고 혹은 잠시 모였다가 곧바로 흩어지며, 아침에는 안개가 되고 저녁에는 노을이 된다. 그리하여 변화가 무상하고 가고 오는 흔적이 없는 것이 이 구름이다. 그러므로 이름을 ‘정운령(停雲嶺)’이라 하고 이에 도정절(陶靖節)의 “구름이 무심히 산을 나간다.[雲無心而出岫]”는 글을 읊으니, 또한 거두고 펴며 행하고 감추는 도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무릇 사면(四面)의 산이 모두가 높고 큰데 그 중에도 서산(西山)이 가장 웅장하고 높다. 한 시냇물의 하류에 있고 한 골짝의 초입구(初入口)에 있어서 마치 세상과 멀리 떨어져 있는 듯하므로 마침내 이름하기를 ‘격진령(隔塵嶺)’이라 하였다.
이미 이 고개가 있어 안과 바깥을 막고 차단하므로 우리 입암(立巖)의 시내와 산의 절경(絶景)이 스스로 한 구역의 비밀스러운 곳이 되어서 산 밖에 있는 진세(塵世)의 종적들이 함부로 들어올 수 없다. 한 골짝 가운데 고기잡고 나무하는 흥취를 다만 우리들이 홀로 즐길 수 있어 세상의 뜬구름과 같은 부귀(富貴)와 서로 바꿀 수 없으니, 이 고개를 ‘격진’으로 이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시냇물의 남쪽에는 한 들이 있는데 마을과의 거리가 겨우 1, 2리(里)에 불과하다. 이 들의 토지는 벼와 보리가 잘 자라고 기장과 수수도 잘 자라니, 만일 힘써 농사를 짓는다면 충분히 굶주림을 면할 것이다. 구름을 헤치고 밭을 갈며 비를 맞으면서 호미질하는 것은 진실로 산중의 좋은 일인데, 신야(莘野)에서 농사짓던 노인과 남양(南陽)의 와룡(臥龍)이 혹 요(堯), 순(舜)의 도를 즐거워하고 혹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게 자신을 비유하였으니, 우리들이 홀로 이윤의 뜻을 뜻하고 와룡의 마음을 마음에 간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들의 이름을 ‘경운(耕雲)’이라 한 것은 이것을 사모해서이다.
시냇물이 흐르는 곁에 숲이 연하여 푸르러 스스로 낳고 스스로 자라 어지러이 무성하다. 마을 사람들이 아침저녁으로 밥을 짓거나 노는 손님들이 차[茶]를 끓이고 고기를 삶을 적에 푸른 연기 한 가닥이 작은 색깔을 야기(惹起)하여 시인(詩人)들의 입에 제공하고 혹 돌아가는 새의 눈을 혼미하게 하니, 이 때문에 숲을 ‘야연(惹煙)’이라 이름하였다.
골짜기가 맨 아래 어구에 있는 것은 ‘초은(招隱)’이라 이름하였으니 벼슬길에 혼미하고 빠져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들을 불쌍히 여긴 것이며, 골짜기가 시내 위에 있는 것을 ‘심진(尋眞)’이라 이름 하였으니 참을 간직하고 깊이 은둔하는 자를 그리워하나 만나볼 수가 없다는 뜻이다.
골짜기가 정운령(停雲嶺) 아래에 있는 것을 ‘채약(採藥)’이라 이름하였으니, 약은 반드시 방외(方外)의 인사들이 단사(丹砂)나 석수(石髓)를 가지고 사람을 그르치는 것처럼 하는 것이 아니다. 한가로이 거처하며 병을 치료하여 수양하고 성명(性命)을 보전하는 데에는 약물이 없을 수 없는데 이 골짝에는 이러한 약물이 많이 생산되므로 이렇게 이름한 것이다.
입암의 밑 시냇물이 흐르는 가운데에 돌이 평평히 깔려있는바, 모가 나고 우뚝 솟은 것이 출몰하고 이리저리 종횡하며, 가운데에는 돌 틈이 있는데 길이와 넓이가 겨우 한 길쯤 된다. 흐르는 시냇물이 이곳에 멈추어 깊이 파이고 매우 맑아 한 작은 못이 되었다. 못의 위아래에는 돌이 노출되어 둥글게 서려 있는 곳이 있는데, 흐르는 물이 불어나면 침몰되고 수위(水位)가 떨어지면 나온다. 그러나 침몰될 때가 적고 나올 때가 많은바, 이 돌에 앉아 있으면 못을 굽어볼 수 있다. 혹 몸을 씻기도 하고 혹 양치질하면서 노는 물고기가 오고 가는 것을 구경할 수 있으므로 이에 이 돌을 이름하여 ‘경심대(鏡心臺)’라 하고, 이 못을 이름하여 ‘수어연(數魚淵)’이라 하였다.
바위 그림자가 못 속으로 거꾸로 드리워지고 파란 이끼와 푸른 숲이 마치 못의 물고기의 소굴이 된 듯하다. 다만 못이 다소 넓지 못하여 작은 배를 띄울 수 없고, 돌이 다소 높지 못하여 물이 불어나면 침몰됨을 면치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
경심대로부터 시냇물을 거슬러 올라가 한 굽이를 지나면 물이 돌아 물굽이를 이루었는데, 물굽이는 구인봉(九仞峯)의 동쪽 언덕에 있다. 바위가 물가에 임하여 평평하고 또 넓어서 몇 칸의 초가(草家)를 세울 수 있으나 다만 다소 높지 못하여 물이 불어나면 침몰되므로 집을 지을 수가 없다. 그러나 뒤에는 높은 산을 등지고 있고 앞에는 험한 물을 굽어보며 또 구인봉이 가리고 있어 그윽하고 아늑하며 깊고 조용하여 아득히 외인(外人)과 서로 접하지 않는 듯하므로 마침내 이름하기를 ‘피세대(避世臺)’라 하였다.
또 피세대로부터 시냇물을 건너가서 채 1, 2리가 못 되는 곳에 물을 가로지르는 돌이 있어 스스로 돌다리를 이루니, 만약 물이 불어나지 않으면 발을 적시지 않고도 건널 수 있다. 가운데에 두 개의 큰 돌이 높이 솟고 넓어서 그 위에 앉고 누울 수 있으며, 또 그 남쪽 벼랑에는 바위 틈이 있어 또한 한 대(臺)를 이룰 수 있는바, 한 장의 깔자리를 펼 수 있다. 그리하여 곧바로 시내 못을 굽어보며 낚시하기에 가장 적합하므로 마침내 ‘상엄대(尙嚴臺)’라고 이름하였으니, 엄은 엄자릉(嚴子陵)이다.
이 분은 나와서 지존(至尊)인 천자(天子)를 가까이하면 천상(天上)의 별을 움직이고, 돌아가서 한 낚싯줄을 잡으면 한(漢) 나라의 구정(九鼎)을 붙들었으니, 진실로 또한 한 세상의 대장부(大丈夫)였다. 이 대를 명칭한 뜻은 그의 절개를 숭상한 것이다.
또 상엄대로부터 거슬러 올라가 몇 리쯤 되는 곳에 이르면 두 산 사이에 한 못이 있는데 못의 넓이는 중간 크기의 배를 띄울 만하며, 시냇물은 세 줄기로 흐르는데 폭포수가 떨어져 못 속의 물소리가 항상 들려온다. 못의 양 가에는 모두 반석(磐石)이 있는데 돌이 물에 씻기고 갈려서 너르고 평평하고 매끄러우며 빛나고 깨끗하므로 그 위에 앉아 있으면 마치 유리(琉璃) 자리를 깔아 놓은 듯하다. 동쪽 산에 있는 바위는 더욱 기이하고 장엄하여 파란 이끼와 푸른 등라(藤蘿)가 울창하게 덮고 있으니, 자못 세속 가운데의 사람이 놀고 쉴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이 못을 ‘욕학(浴鶴)’이라 이름하였으니, 이 또한 반드시 그 실재가 있는 것이 아니요 수석(水石)의 기이하고 깨끗함을 나타낸 것이다.
만약 경심대(鏡心臺)로부터 흐름을 따라 내려오면 물이 서쪽 벼랑을 부딪혀작은 못을 이루었는데, 못 위에 바위가 있고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으므로 인하여 대를 삼았다. 이곳은 비록 스스로 기이하지는 못하나 여러 산과 여러 봉우리, 여러 바위와 여러 돌로 무릇 한눈에 거두어 볼 수 있는 것이 황홀하여 형용하기 어려우며 마치 그림 속에 있어 진면목(眞面目)이 아닌 듯하므로 이름하기를 ‘화리대(畵裏臺)’라 하였다.
화리대로부터 또 서남쪽으로 2리쯤 떨어져 있는 곳에 바위가 겹쳐 언덕을 이루어 이 시냇가에 임해 있는데, 북쪽 산에서 흘러오는 시냇물이 차츰 이 시내로 떠내려와서 그 앞에 합류하여 또다시 한 곱절의 값을 더한다. 네 친구들은 이 위에 정자를 짓고자 하나 힘이 미치지 못할까 우려된다. 이곳을 이름하여 ‘합류대(合流臺)’라 하였다.
대의 앞 합류하는 곳에 물이 자못 너르고 깊으며 돌이 기이하고 아름다운 것이 많으니, 중국의 명승지인 위수(渭水)의 북쪽이 과연 이보다 나은지 모르겠다. 마침내 이 여울물을 이름하기를 ‘조월(釣月)’이라 하였다. 이는 시내 위의 상류가 모두 산 밑에 있어 달빛을 받는 것이 가장 늦으나 이 여울은 동쪽 산과 멀리 떨어져 있어 달빛을 먼저 받으므로 진실로 밤낚시하기에 마땅하니, 낚시는 곧 강태공(姜太公)의 일이다. 강태공은 몸에 세상을 구제할 도구를 간직하고 있으면서 한가로이 강호(江湖)의 사이에서 늙어가며 손에 한 낚싯대를 잡아 이대로 일생을 마칠 듯이 하였으니, 이 분이 아니면 내 누구를 따르겠는가. 이것이 이 여울물을 이름한 의의이다.
여울물을 따라 내려가서 초은동(招隱洞)의 어구에 이르면 시냇물이 못을 이룬 것이 있는데, 그 크기가 상류의 것보다 배나 되는바, 외부 사람으로 이 골짝에 들어오는 자와 산중 사람으로 이 산을 나가는 자는 모두 이 못을 경유한다. 그리하여 진세(塵世)와 선계(仙界), 신선(神仙)과 범인(凡人)들이 여기에서 모두 나누어지므로 못 이름을 ‘세이(洗耳)’라 하였으니, 이는 마음에 소부(巢父)와 허유(許由)를 따르고자 해서이다.
무릇 여러 기이한 절경을 거두어 입암(立巖)의 총관(總管)으로 돌아오는 것은 위로 욕학연(浴鶴淵)으로부터 아래로 세이담(洗耳潭)에 이르러 그치니, 그 사이 한 모래섬과 한 돌이 모두 이름을 얻을 만한 것을 어찌 이루 다 셀 수 있겠는가마는 지금 명칭한 것은 다만 가장 빼어나고 가장 큰 것을 취했을 뿐이다.
바깥길을 따라 마을로 들어오는 자들은 반드시 바위 아래로 흐르는 물을 건너기 마련인데 흰 돌이 옆으로 깔려 있어 쪽다리로 사용하는바, 다리를 밟을 즈음에 옥소리 같은 물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므로 이 다리의 이름을 ‘향옥(響玉)’이라 하였다.
계구대(戒懼臺)로부터 걸어 내려와 장차 경심대(鏡心臺)에서 고기를 구경하려고 한다면 들어올 때에 또한 반드시 한 돌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는 바위 밑 숲 속에 있어 돌바닥에 파란 이끼가 잘 자라므로 이 다리의 이름을 ‘답태(踏苔)’라 하였으니, 이 또한 그윽한 흥취를 돕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기여암(起予巖) 옆에 차갑고 또 시원한 우물이 있으니, 물건을 윤택하게 하는 공효(功效)가 넓지 않을 수 없으므로 《주역(周易)》의 정괘(井卦) 상육(上六) 효사(爻辭)를 취하여 ‘물멱(勿羃)’이라 이름하였으니, 우물에 덮개[羃]를 씌우면 우물의 공효를 베풀지 못한다.
입암의 곁에 돌이 일곱 개가 서 있는데 모양이 북두칠성(北斗七星)과 유사하므로 이름하기를 ‘상두석(象斗石)’이라 하였다. 사시(四時)의 운행과 해와 달의 운행이 모두 북두칠성에서 법을 취하니, 북두성은 성신(星辰)에 있어 그 관계가 가장 큰데 돌의 숫자와 상(象)이 마침 북두칠성과 부합하니, 이 역시 하나의 기이한 일이다.
이상 이름을 얻은 것이 스물여덟 곳인데 스물여덟 곳이 각자 좋은 경치가 있으니, 그렇다면 이러한 이름을 얻은 것은 진실로 당연하다. 그러나 한 입암의 기이함이 있지 않다면 스물여덟 곳이 스스로 좋은 경치를 자랑하지 못하여, 심상(尋常)한 가운데의 구릉과 골짝, 봉우리와 수석(水石)과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니, 그 누가 명칭을 붙여 일컫겠는가. 그렇다면 스물여덟 곳의 좋은 경치는 입암을 얻어 드러나고,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은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인하여 풍부해지는 것이다.
그러나 또한 한 계구대(戒懼臺)가 있지 않다면 진실로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을 빛내어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꾸미지 못했을 것이며, 또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드러내어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을 돕지 못했을 것이니, 이는 입암이 있으면 계구대가 없을 수 없는 이유이다. 이는 마치 북극성(北極星)이 28수(宿)의 높이는 바가 되고 28수가 빙둘러 향하지 않으면 북극성이 또한 홀로 높음이 될 수 없으며, 28수는 비록 각자의 자리가 있으나 한 북극성의 높음이 있지 않으면 또한 빙둘러 향할 곳이 없는 것과 같다.
그리고 또 그 가운데에 한 각수(角宿)가 28수의 첫번째 별이 되어서 이 각수가 제자리를 얻은 뒤에야 나머지 27개의 별이 차례를 따라 진열하니, 이는 입암이 스물여덟 곳의 종주(宗主)가 되고 계구대가 또 스물일곱 곳의 우두머리가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또 네 친구가 이곳에 나가 터를 잡지 않았더라면 입암의 빼어난 기이함을 또 누가 알겠는가. 사람이 알고 알지 못함은 입암에게 무슨 상관이 되겠는가마는 시내와 산, 물과 돌은 또한 천지 사이의 한 아름다운 기물이니, 천지가 이미 이러한 아름다운 기물을 가지고 있다면 어찌 한갓 스스로 아름다울 뿐이겠는가. 반드시 가장 귀하고 가장 영특한 인간으로 하여금 이것을 주관하게한 뒤에야 시내와 산, 물과 돌이 헛되이 버려지는 한 기물이 되지 아니하여 그 아름다움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네 친구가 이곳에 와서 터를 잡은 것은 그 또한 입암의 아름다운 만남일 것이다.
아! 천지(天地)가 개벽(開闢)된 이래로 곧 이 시내와 산이 있었건만 몇만 년 동안 황폐하여 매몰되었던 지역이 오늘날 비로소 우리들이 놀고 감상하는 곳이 되었으니, 운수가 그 사이에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또한 우리들의 먼 생각을 일으키게 한다.
혹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시내와 산은 아름다우나 시내와 산은 바로 조물옹(造物翁 조물주, 곧 하늘을 가리킴)의 공공(公共)한 물건이다. 또 애당초 정의(情意)가 없고 또 명칭이 없으니, 이곳에 사는 자들은 다만 밭을 갈고 물고기를 잡으며 나무를 하고 약초를 채취하여 자기에게 있는 즐거움을 즐길 뿐이며, 이곳에 노는 자들은 다만 다니며 보고 지나며 구경하여 한때의 눈을 상쾌하게 할 뿐이다. 이것이 조물옹의 공공한 마음을 순히 따르고 시내와 산의 자연의 본성을 온전히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제 마침내 정의가 없는 시내와 산에 정의를 가지고 시끄럽게 하고, 명칭이 없는 물과 돌에 명칭을 붙여 누를 끼쳐 공공한 시내와 산을 곧 자신의 물건으로 삼고자 하는가. 더구나 명칭이 그 실재를 따르지 않은 것이 많으니, 그렇다면 조물옹의 마음이 아니어서 시내와 산의 욕이 되지 않겠는가. 또 바깥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아 자신이 망녕되고 허탄한 짓을 하는 데로 돌아가지 않겠는가.”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그렇지 않다. 그대의 말과 같다면 이는 산하(山河)의 대지가 우리 인간에게 관여되지 않는다고 여기고, 천지 사이의 만물이 이 몸에 관여함이 없다고 여겨 우리들로 하여금 형적(形跡)을 없애고 공허(空虛)와 현묘(玄妙)에 뜻한 뒤에야 그만두고자 하는 것이니, 이 어찌 평상(平常)한 이치이며 광대(光大)한 도이겠는가.
조물옹이 만물을 만든 이유가 어찌 한갓 조화의 공을 허비하여 다만 쓸모 없는 물건을 만들고자 함이었겠는가. 한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한 물건의 쓰임이 있고 만 가지 물건이 있으면 반드시 만 가지 물건의 쓰임이 있어 먼저 쓰일 이치가 있은 뒤에 이 물건이 있는 것이니, 만약 쓰일 이치가 없었다면 마땅히 이 물건을 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천지가 이미 만물을 내고 또 반드시 이 인간을 낸 것이니, 그런 뒤에야 인간이 만물을 주장하여 각각 그 쓰임을 다하게 되는 것이다.
밭과 들에서 밭갈고 김매며 언덕과 육지에 거주하는 집을 마련하며 오곡(五穀)을 먹고 실과 삼[麻]을 짜서 옷을 입으니, 어찌 홀로 시내와 산만이 우리 인간에게 쓰임을 다하지 않겠는가. 물건이 있는데도 쓰지 않으면 도리어 물건을 만든 마음에 위배되는 것이다. 이른바 공공(公共)이라는 것은 이 물건을 헛되이 버리는 땅에 두는 것이 아니요 다만 사사로이 하지 않을 뿐이다.
시내와 산은 진실로 공공한 물건이나 내가 얻어 내가 즐거워하고 남이 얻어 남이 즐거워하고 천만 사람이 얻어 천만 사람이 모두 즐거워하여 각각 얻은 바에 따라 즐거워하니, 이 어찌 공공함에 해롭겠는가. 앞사람이 즐거워하고 뒷사람이 또한 즐거워하며 이 사람이 즐거워하고 저 사람 또한 즐거워하여 서로 사양하지 않고 모두 스스로 만족하니, 이 어찌 혐의할 것이 있겠는가. 또 만물이 어찌 반드시 정의(情意)가 있은 뒤에 사람의 쓰임이 되겠는가.
오곡은 사람의 밥이 되려는 뜻이 있지 않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오곡을 먹고, 실과 삼은 사람의 옷이 되려는 뜻이 있지 않으나 사람들이 스스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밭과 들, 언덕과 육지에 이르러서도 또한 모두 밭갈고 김매는 곳이 되고 거주하는 집이 되려는 뜻이 있는 것이 아닌데도 사람들이 스스로 밭갈고 김매고 거주하는 집을 짓는 것이니, 유정(有情)으로 무정(無情)과 사귀는 것이 한 이치가 감통(感通)하는 묘리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만물이 처음에 또 어찌 명칭이 있었겠는가. 명칭이 있는 것은 모두 우리 인간이 붙여준 것인데, 명칭을 붙이는 이유는 바로 쓰임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오직 이 시내와 산은 바로 깊고 궁벽한 한 구역이므로 또한 일찍이 명칭이 없었으며, 이미 명칭이 없었기 때문에 또한 일찍이 사람들이 놀고 감상하는 곳이 되지 못하였다. 우리들이 지금으로부터 비로소 명칭을 가(加)하고 영원히 놀고 감상하는 지역으로 삼아 헛되이 버려지는 시내와 돌이 되지 않게 하였으니, 이 또한 이 시내와 돌의 영광이 아니겠는가.
실재가 없으면서 물건에 명칭을 붙인 것으로 말하면 진실로 이러한 점이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시내와 산을 위하고 우리 사람들을 위하여 송축(頌祝)한 칭호이니, 또 어찌 나쁠 것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오늘날 명칭을 지은 것은 진실로 물건을 만든 쓰임을 이루어 시내와 산의 아름다움을 나타낸 것이다.”
혹자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명칭에 대한 뜻은 그러하나 다만 우리 인간의 사업이 과연 시내와 산, 구름과 돌 사이에 있어 그대가 마침내 이것으로 몸을 깃들이고 즐거움을 붙이는 장소로 삼는가?”
이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군자의 도는 넓으면서도 숨겨져 있으니, 어디를 간들 도가 되지 않으며 어느 것을 만난들 즐겁지 않겠는가. 어려서 학문을 배우고 장성하여 이것을 행하니, 그렇다면 천하 가운데에 서고 묘당(廟堂)의 위에 벼슬하여 그 군주를 요(堯), 순(舜) 같은 성군(聖君)으로 만들고 이 세상을 당(唐), 우(虞) 같은 태평성세를 만들어 위로는 천지를 편안히 하고 아래로는 만물을 길러주어야 이에 우리 인간의 능사(能事)를 다하는 것이다.
그리고 혹시라도 때를 만나지 못하면 물러나 산야(山野)에 살아 한 생애를 물 달, 바위와 시내 사이에 붙여 밭갈고 김매고 낚시질하고 고기잡는 것으로 일을 삼으며 바람과 구름, 꽃과 풀로 짝을 삼는 것이 또한 모두 이 도가 있는 것이니, 어찌 시내와 산에 자취를 멈추고 담박함에 마음을 두어 몸을 깨끗이 하기 위해 인륜을 어지럽혀 세상을 잊기를 과감히 하는 행위이겠는가.”
나는 이미 혹자의 논란에 대답하고 다시 네 친구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나는 내가 ‘계구(戒懼)’라고 대(臺)의 이름을 지은 뜻을 다 말할 것이니, 제군(諸君)들은 유념해 주겠는가. 한번 이 땅을 가지고 말하면 무릇 바윗돌이 이 바위보다 큰 것을 또 어찌 이루 다 셀 수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들이 반드시 이 바위를 취한 것은 이 바위가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니, 모든 물건이 반드시 선 바가 있은 뒤에 딴 물건에게 동요되지 않고 빼앗김을 당하지 않는다.
백 길이 되는 돌기둥은 서 있는 것이 확고하기 때문에 황하(黃河)의 파도가 부딪혀도 만고(萬古)에 흔들리지 않고, 천 길이 되는 큰 나무는 심겨진 뿌리가 견고하기 때문에 폭풍이 사납게 진동하여도 수백 년 동안 뽑히지 않는다. 이제 이 입암 역시 천지와 더불어 함께 시작되었는데 이미 만고의 전(前)에 기울지 않았으니, 또 어찌 만고의 뒤에 흔들리겠는가. 더구나 높고 크고 바르고 곧음이 또 딴 바위에 비할 수 없지 않은가.
우리 인간은 천지의 사이에 서서 어찌 선 바가 없이 사람이 될 수 있겠는가. 마음에 덕을 간직하여 본연(本然)의 정해진 성(性)을 간직하고, 몸에 도를 행하여 마땅히 행할 바른 이치가 있으니, 인의예지(仁義禮智)는 덕(德)의 조목이고, 효제충신(孝悌忠信)은 도(道)의 조목이다. 이 덕에 마음을 두어 변치 않고 이 도를 몸으로 행하여 옮기지 않은 뒤에야 서는 것이 마땅히 설 곳에 서게 된다.
이로써 빈천(貧賤)에 처하면 빈천이 나의 선 바를 옮기지 못하고, 이로써 부귀(富貴)에 처하면 부귀가 나의 선 바를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이로써 위엄과 무력을 만나면 위엄과 무력이 나의 선 바를 굽히지 못하여, 말재주가 소진(蘇秦), 장의(張儀)와 같아도 나의 뜻을 빼앗지 못하고, 용맹이 맹분(孟賁), 하육(夏育)과 같아도 나의 의지를 좌절시키지 못한다. 이는 성현들이 작은 몸으로천지에 참여되는 이유이니, 그 서 있는 바가 도덕이기 때문이다.
요(堯), 순(舜), 우(禹)가 세운 것은 중도(中道)였다. 그러므로 사흉(四凶)의 흉악함이 제요(帝堯)의 선 바를 흔들지 못하였고 천하의 안락(安樂)함이 순, 우의 선 바를 옮기지 못하였다.
탕(湯) 임금이 세운 것은 한 덕이요 문왕(文王)이 세운 것은 계속하고 밝히는 경(敬)이며, 무왕(武王)이 세운 것은 변치 않는 덕이었다. 관숙(管叔)과 채숙(蔡叔)의 유언비어가 동요시키지 못하였으니 주공(周公)의 세운 바가 어떠하며, 만세의 난신(亂臣)과 적자(賊子)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 공자(孔子)의 세운 바가 어떠하며, 양주(楊朱), 묵적(墨翟)의 말이 용납되지 못하였으니 맹자(孟子)의 세운 바가 어떠한가.
한 절개와 한 행실이 뛰어난 선비에 이르러서도 또한 반드시 세운 바가 있은 뒤에야 그 사업을 성취할 수 있는 것이니, 세움을 귀하게 여김이 이와 같다. 그러므로 바위에도 또한 서 있는 것을 취한 것이다.
지금 우리들이 입암의 위에 나아가 놀고 쉬니, 각자 스스로 설 것을 생각하여 시종 우리 바위를 저버리지 않는다면 매우 다행일 것이다. 그러나 그 세우는 요점은 또한 대 이름의 ‘계구’에 지나지 않으니, 대 위의 계구는 몇 길의 벼랑 위에 높이 임해 있는 못 때문이다.
대 아래의 못은 눈으로 볼 수 있고 그 깊음을 헤아릴 수 있으나 우리 인간의 한 몸 곁에는 몇 길의 형체 없는 못이 있고 몇 길의 가없는 구덩이가 있음을 그 누가 알겠는가. 한 생각을 잘못하면 귀신의 지역으로 말[馬]을 달리고, 한 마디 말을 가볍게 내면 풍파가 당장 일며 한 발걸음을 함부로 걸으면 그물과 덫에 빠진다. 그 위험함이 이와 같으니, 계구하는 것을 마땅히 어떻게 해야 하겠는가.
계구라는 것은 공경함을 이르니, 반드시 고요할 때에도 공경하고 동(動)할 때에도 공경하고 말할 때에도 공경하고 행할 때에도 공경하여야 한다. 이렇게 한 뒤에야 나의 서 있는 바가 나의 인의예지의 덕이 되고 효제충신의 도가 될 것이니, 어디를 간들 나의 선 바를 잃겠는가. 이렇게 한 뒤에야 나의 선 바가 또한 천지에 참여될 수 있는 것이다.
바라건대 친구들이 조만간에 만약 우란재(友蘭齋)를 완성한다면 서로 더불어 이 이치를 강론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런 뒤에야 입암을 대하고 스물여덟 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대함에 부끄러움이 없어 모두가 자신의 성정(性情)을 쾌적하게 할 것이다.”
마을은 바로 영양(永陽)의 경내(境內)인데 군(郡)과 몇백 리가 떨어져 있고 사방의 성읍(城邑)이 모두 본군(本郡)과 같이 머니, 참으로 궁벽한 곳이다. 내 이미 시내와 산의 명칭을 말하니, 네 친구가 인하여 그 말을 기록해 줄 것을 청하므로 마침내 혹자와 문답한 내용과 우리들이 서로 말한 것을 붙이는 바이다. 모월(某月) 모일(某日)에 쓰다.
[주-D001] 물을 좋아하는 지혜로운 자 : 공자는 일찍이 “지혜로운 자는 물을 좋아하고 인(仁)한 자는 산을 좋아한다.[智者樂水 仁者樂山]” 하였으므로 이 말을 인용한 것이다. 《論語 雍也》는 이 곳을 버리고 저 곳으로 가니, 바위가 물가에 서 있지 않은 것은 또 궁벽하다.[주-D002] 공자(孔子)의 산을 만드는 비유 : 《서경(書經)》 여오(旅獒)에 “아홉 길의 산을 만드는 데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목표한 것을 달성하지 못한다.” 하였는데, 공자는 이것을 빌려 “산을 만들 적에 비록 흙 한 삼태기가 부족하여 산을 이루지 못하고 중지하는 것도 내가 중지하는 것이며, 비록 평지에 한 삼태기의 흙을 쏟아 부어 전진하더라도 내가 전진하는 것이다.” 하였다. 《論語 子罕》[주-D003] 상산(商山)의 사호(四皓) : 상산은 중국 섬서성(陝西省) 상현(商縣) 동쪽에 있는 산이며, 사호는 진(秦) 나라 말기 상산에 은둔해 있던 네 노인으로 동원공(東園公), 하황공(夏黃公), 기리계(綺里季), 녹리선생(甪里先生)을 이른다.[주-D004] 자지가(紫芝歌) : 악부(樂府)에 실려 있는 거문고 곡조의 가사. 자지는 먹으면 장생불사한다는 영지(靈芝)를 가리킨다. 상산(商山)에 은둔해 있던 네 노인들은 한 고조(漢高祖)가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이 자지가를 지어 불렀다 한다. 《古今樂錄》[주-D005] 도정절(陶靖節)의……나간다는 글 : 정절은 진(晉) 나라 말기 은사(隱士)인 도연명의 시호임. 이 내용은 그가 지은 귀거래사(歸去來辭)에 보인다.[주-D006] 신야(莘野)에서……비유하였으니, : 신야는 유신(有莘)이라는 나라의 들이고 농사짓던 노인은 이윤(伊尹)을 가리키며, 남양(南陽)은 하남성(河南省)에 있는 지명이고 와룡(臥龍)은 누워 있는 용이라는 뜻으로 제갈량(諸葛亮)을 가리킨다. 관중(管仲)은 춘추 시대 제(齊) 나라의 명재상이고 악의(樂毅)는 전국 시대 연(燕) 나라의 명재상이다. 《맹자(孟子)》 만장 상(萬章上)에 “이윤이 유신의 들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요(堯), 순(舜)의 도를 즐거워하였다.” 하였고,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에 “제갈량이 남양의 융중(隆中)에 은거하여 스스로 관중과 악의에 비했다.” 하였다.[주-D007] 엄자릉(嚴子陵) : 자릉은 엄광(嚴光)의 자(字). 동한(東漢)의 고사(高士)로 일찍이 광무제(光武帝) 유수(劉秀)와 동문수학하였다. 광무제가 등극한 뒤에 그를 물색하여 간의대부(諫議大夫)를 제수하였으나 끝내 거절하고 부춘산(富春山)에 들어가 농사를 짓고 낚시질하며 일생을 마쳤다. 《後漢書 卷八十三 嚴光傳》[주-D008] 한(漢) 나라의 구정(九鼎) : 구정은 구주(九州)의 쇠를 모아 만들었다는 솥으로, 국가의 위신을 상징하기 때문에 말한 것이다.[주-D009] 세이(洗耳)라 하였으니……해서이다. : 세이는 추한 말을 들었다 하여 귀를 씻는 것이며, 허유(許由)와 소부(巢父)는 요(堯) 임금 때의 은사(隱士)이다. 요 임금이 허유를 초빙하여 황제의 자리를 물려주려 하자 허유는 이에 응하지 않고 추한 말을 들었다 하여 영수(穎水)에서 귀를 씻었다. 소부는 소를 끌고 가다가 이 영수에서 물을 먹이려 하였으나 이것을 보고는 오염된 물이라 하여 소를 끌고 상류로 가서 물을 먹였다 한다. 《高士傳》[주-D010] 사흉(四凶) : 요(堯) 임금 때의 네 흉악한 사람으로 공공(共工), 환도(驩兜), 삼묘(三苗), 곤(鯀)이다. 공공은 관명이고 삼묘는 삼묘의 군주인데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순(舜) 임금은 섭정을 하면서 공공을 유주(幽州)로 귀양보내고 환도를 숭산(崇山)으로 추방하고 삼묘를 삼위(三危)에 가두고 곤을 우산(羽山)에 가두었다. 《書經 舜典》 《孟子 萬章上》
여헌선생속집 제4권 / 잡저(雜著)
입암(立巖)에 대한 설
옛 친구인 정군 사진 군섭(鄭君四震君燮)은 관향이 연오(延烏)이고 몸이 영양(永陽)에 거주하였다. 그는 일찍이 나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본군(本郡)의 동북쪽에 한 마을이 있는데 시냇가에 우뚝 솟은 바위가 있기 때문에 마을 이름을 또한 입암(立巖)이라고 합니다. 바윗가에 임시로 거처하는 곳이 시냇물의 남북쪽에 있으며 남쪽 가에는 예부터 거주하는 백성이 있고 북쪽 가에는 빈 땅이 되었습니다. 이 마을은 농사를 지을 만한 토지가 있고 물고기를 잡을 만한 시내가 있고 물을 길을 만한 샘물이 있으며, 봄에는 수많은 골짝에서 산나물이 나오고 가을에는 여러 골짝에 과일이 풍성합니다. 만약 산에 대한 취미가 없는 사람이라면 그만이거니와 만일 산을 좋아하고 물을 좋아하는 자가 있으면 함께 살 만합니다.”
나는 마침내 친구들과 함께 이 마을을 찾아가니 과연 정군의 말과 똑같았다. 이 때 먼저 들어와 집을 짓고 사는 자는 권군(權君)과 손군(孫君)이었는데, 이들은 뒷산의 나무를 베어 초막을 만들고 앞 포전(浦田)의 곡식을 거두어 양식을 삼았다. 그리고 또 두 군(君)을 따라 출입하는 자가 많았다.
두 군은 우리들이 온 것을 보고는 산에서 빚은 막걸리를 내어와 몇 그릇을 마신 뒤에 저녁밥을 올렸는데, 밥은 돌밭에서 거둔 곡식이고 고기는 앞 시내에서 잡은 생선이며 채소는 북쪽 산에서 뜯어온 나물이고 과일은 가을 산에서 따온 것들이었다. 또 바닷길이 그리 멀지 않으므로 소금에 절인 생선들도 간간이 진설하였다.
이후로 나는 혹 왕래할 적에 친구들과 함께 이 곳을 찾지 않은 적이 없었다. 이 마을은 또 읍내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임진년과 계사년에 왜적이 와서 침범하지 못하였다. 금년 봄에 경성(京城)이 북쪽 오랑캐에게 함락되었으므로 나는 몸을 탈출하여 이 곳으로 들어오니, 마을 가운데의 시냇물과 돌이 옛날과 똑같았고 온갖 물건이 그대로 있었다.
손군은 아들이 없어 다만 양손(養孫)이 있을 뿐이었고, 권군은 아들 봉(崶)과 손자 상민(尙敏)ㆍ호민(好敏) 등 5남이 있어 그대로 고을의 주인이 되었다. 이들이 우리를 찾아와 서로 만나니, 한집안 식구처럼 정다웠으며, 또 부근의 여러 친구들이 바위 동쪽 10보쯤 되는 곳에 작은 집을 만들고 나에게 머물며 지내라고 하였으니, 이는 여러 친구들이 함께 경영하여 만든 것이었다.
다음날 나는 여러 친구들과 함께 바위에 가서 제사를 올리니, 권봉(權崶)은 바로 강재(强哉)의 아들이고 정전(鄭壂)은 군섭(君燮)의 아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전후의 산장(山長)으로 이 집을 짓는 일을 맡았기에 나는 이들에게 술과 과일을 장만하게 하였다. 그리고 좌랑(佐郞) 정호인(鄭好仁)에게 청하여 고유문(告由文)을 짓게 하고 진천 군수(鎭川郡守) 권응생(權應生)과 상사(上舍) 정사물(鄭四勿)과 상사(上舍) 박돈(朴暾)을 청하여 삼헌관(三獻官)을 삼았으며 여러 집사(執事)들은 어린 제군들로 하여금 맡게 하였다. 그리하여 날짜를 가려 제사를 행하였다.
바위의 동남쪽 밑바닥 부분은 산의 물이 돌을 돌며 부딪쳐 패어서 바야흐로 큰 구멍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마침내 여러 사람들과 약속하여 농사일의 틈을 기다려 돌을 가져다가 메우기로 하였는데, 이 약속을 금년 안에 이룰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전에 오고 갈 때에 앉아보지 않은 돌이 없었고 찾아보지 않은 귀퉁이가 없었다. 마침내 각처의 명목을 세웠으니, 마땅히 기문(記文)을 얽고 제목을 붙여 후일의 참고로 삼아야 할 것이다.
이에 다음과 같이 찬(贊)한다.
하늘이 열렸을 적에 열렸고 / 天開而開
땅이 열렸을 적에 열렸으니 / 地闢而闢
그 둘레와 길이를 / 其圍與長
어찌 길과 자로 잴 수 있겠는가 / 豈容丈尺
온갖 변화를 겪었으나 / 經過萬變
한결같이 서 있었네 / 惟一其立
비바람이 몰아쳐도 / 風雨以搏之
감손됨이 없었고 / 未有損缺
서리와 눈발이 어지럽혀도 / 霜雪以汨之
손상됨이 없었네 / 未有傷絶
도끼와 자귀가 근접하지 못하니 / 斧斤莫能近
오정이 어찌 그 힘을 쓸 수 있겠는가 / 五丁曷容其力
초군 목동들이 우러러보고 송연해하니 / 樵牧仰之竦然
소와 양이 어찌 발자취를 가까이하겠는가 / 牛羊曷邇其跡
삼황의 봄으로 햇볕을 쬐어도/ 烜之以三皇之春
일찍이 그 형체를 더하지 않았고 / 未嘗加其形
오제의 여름으로 데워도 / 燠之以五帝之夏
일찍이 영화로움을 내지 않았고 / 未嘗出其榮
삼왕의 가을로 춥게 하여도 / 肅之以三王之秋
더 이루어짐을 볼 수 없었고 / 莫見其加成
오패의 겨울로 괴롭혀도 / 苦之以五覇之冬
타락함을 보지 못하였네 / 莫見其墮落
그리하여 옛날에도 이와 같고 / 在古如斯
지금에도 어제와 같네 / 在今如昨
무정을 정으로 삼으니 / 以無情爲情
그 정고(貞固)함이 변치 않고 / 其貞也不易
기운이 아닌 것을 기운으로 삼으니 / 以不氣爲氣
그 확고함이 대적할 수 없네 / 其確也無敵
아, 이 가장 영특한 인간은 / 嗟此最靈
지킴을 항상하지 못하여 / 守不克常
굶주림과 목마름의 피해를 면치 못하니 / 不免飢渴之害
원문 빠짐 방패와 창의 마당을 견디겠는가/□耐干戈之場
이 때문에 바위를 / 所以於巖乎
우러러볼수록 더욱 높고 / 仰之彌高
뚫을수록 더욱 견고하니 / 鑽之彌堅
우뚝하게 서 있는 것이 더욱 강건하여라 / 卓爾所立之健剛
[주-D001] 오정 : 고대 촉(蜀) 땅의 장사로 절륜(絶倫)의 힘이 있어 마음대로 산을 옮겨 놓았다 한다.[주-D002] 삼황의 봄으로 햇볕을 쬐어도 : 삼황은 복희(伏羲)ㆍ신농(神農)ㆍ황제(黃帝)이고 오제(五帝)는 소호(少昊)ㆍ전욱(顓頊)ㆍ제곡(帝嚳)ㆍ제요(帝堯)ㆍ제순(帝舜)이며, 삼왕(三王)은 하(夏) 나라의 우왕(禹王), 은(殷) 나라의 탕왕(湯王), 주(周) 나라의 문왕(文王)ㆍ무왕(武王)이다. 오패(五覇)는 춘추 시대 제후 중에 다섯 패자로 제(齊) 나라 환공(桓公), 진(晉) 나라 문공(文公), 송(宋) 나라 양공(襄公), 진(秦) 나라 목공(穆公), 초(楚) 나라 장왕(莊王)을 가리키는바, 삼황 시대는 사람들이 순박하였으므로 봄이라 하고 세대가 내려옴에 따라 인심이 점점 야박해졌으므로 오패 시대는 겨울이라 한 것이다.
여헌선생문집 제9권 / 기(記)
입암 정사(立巖精舍)에 대한 기문
뜻이 같은 영양(永陽)의 네 친구들이 물의 북쪽 가장 깊고 궁벽한 곳에 나아가 한 골목을 얻으니, 골목의 입구에는 시냇물이 있고 시냇가에는 한 큰 바위가 10여 장(丈) 높이 솟아 있는바, 이것이 바로 입암(立巖)이다.
입암의 북쪽 10보(步)쯤 되는 곳에 끊긴 벼랑이 우뚝이 멈춰 있는데, 지형이 너르고 평평하여 무우(舞雩)에서 목욕하고 바람 쐬는 관동(冠童) 10여 명을 용납할 수 있는바, 몇 그루의 고송(古松)이 푸른 그늘을 짙게 깔고 있어 매우 시원하니, 이는 바로 계구대(戒懼臺)라고 이름한 곳이다.
계구대에서 다시 북쪽으로 약간 동쪽으로 가면 다소 높은 한 작은 석봉(石峯)이 있는데 기이하게 솟고 우뚝이 버티고 있어 은연(隱然)히 공동산(崆峒山)의 풍취가 있는바, 이름을 기여암(起予巖)이라 한다. 봉우리의 남쪽 밑에 옛터가 있는데 계단이 무너져 돌이 어지러이 널려 있으니, 어느 시대에 누가 쌓은 것인지 알 수 없다.
여러 친구들이 놀고 감상한 뒤에 마침내 서로 돌아보고 바라보니, 천 년의 늙은 거북이 적막한 물가에 형체를 드러내어 머리를 들고 공기를 마시느라 우뚝 버티고 바람과 해를 피하지 않는 듯한 것은 뒷봉우리가 현무(玄武)가 된 것이며, 산에서 군주 노릇을 하다가 이미 늙어 위엄과 소리를 거두고 발톱과 이빨을 거두고는 부자(父子)의 천성을 온전히 하고 장구히 꿇어앉아 떠나가지 않는 듯한 것은 대의 바위가 오른쪽에 백호(白虎)가 된 것이다.
잠겨 있던 물 속에서 나오고 숨겨진 곳을 떠나 처음에는 구불구불하다가 끝내는 서려 있어 마치 엎드려 있는 듯하고 일어난 듯하기도 하여 구름을 헤치고 여의주(如意珠)를 날리는 듯한 것은 토월봉(吐月峯)이 동쪽에서 청룡(靑龍)이 된 것이며, 큰 붕새[鵬]가 회오리바람을 타고 9만 리 창공을 날다가 이미 지쳐 땅으로 내려오되 오히려 머리를 들고 창공을 바라보는 듯한 것은 구인봉(九仞峯)이 주작(朱雀)이 된 것이다.
또 산지(産芝), 함휘(含輝), 정운(停雲), 격진(隔塵) 등의 여러 봉우리가 눈앞에 병풍처럼 배열되어 있고 담처럼 가리고 있으며, 한 시냇물이 굽이굽이 돌아 흘러오는 것이 마치 띠가 감아돌고 옷깃이 싸고 있는 듯하여 들어가는 것만 보이고 가는 것은 보이지 않으니, 위아래 수십 리의 시냇물과 산의 맑고 깨끗한 기운이 모두 이곳에 모여 있다.
여러 친구들은 이곳을 즐거워하여 옛터를 다시 닦고 한 모재(茅齋 초가로 만든 서재)를 설치하여 머물고 휴식하는 장소로 삼았는데, 좌우에는 방을 마련하고 가운데에는 대청을 두었는바, 각각 한 칸씩이고 두 방의 북쪽에는 감실(龕室)을 지어 수백 권의 책을 보관할 만하였으며 앞뒤를 다소 넓혀 여러 화훼(花卉)를 심어 놓으니, 꽤 볼만 하였다.
졸렬한 나는 다행히 여러 친구들에게 버림을 받지 아니하여 또한 항상 이곳을 오가며 함께하였다. 그러므로 감히 벗들을 위하여 다음과 같이 청하였다.
“작은 서재가 이미 이루어졌으니, 우리들이 이곳에 거처하면서 마땅히 무엇을 닦아야 하고 무슨 일을 하여야 하겠는가. 세상에 정자(亭子)나 혹 당(堂)을 경치가 좋은 구역에 만들어 두는 자들은 그 하는 바가 똑같지 않다. 술과 여색을 좋아하는 자는 주색을 즐기는 장소로 삼고, 활쏘기에 성벽(性癖)이 있는 자는 고함치고 떠드는 다툼을 일삼고,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는 자는 효로(梟盧 주사위의 일종)의 마당으로 삼는바, 이는 굳이 말할 것이 못 되니, 우리들은 이러한 것은 하지않을 것이다.
세속을 버려 인간의 일을 끊고 인륜을 버리며 공허(空虛)한 것을 말하고 현묘(玄妙)한 이치를 찾으며 숨은 것을 찾고 괴이한 짓을 행하여, 연하(煙霞)를 고향으로 삼고 바위와 골짝에 거하며 사슴과 멧돼지와 짝하고 도깨비와 벗삼는 자들이 혹 이러한 곳에서 은둔하고 감추니, 이 또한 좌도(左道)라서 유자(儒者)의 사모하는 바가 아니다.
오직 한 가지 일이 있으니, 세상의 분화(紛華)함을 등지고 말로(末路)의 부귀 영화에 치달림을 천하게 여겨, 책을 읽고 이치를 궁구하는 것이 우리의 급선무임을 알고 몸을 닦고 성(性)을 기르는 것이 우리의 본업(本業)임을 아는 자들이 여기에 머물며 학문을 닦는다면 바름을 길러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가 산 아래의 물에 형상할 수 있고, 옛 성인들의 훌륭한 말씀과 행실을 많이 쌓는 것이 산 가운데의 하늘에 법받을 수 있을 것이다.
뜰 아래에 흐르는 물이 밤낮으로 쉬지 않으니 근원이 있어 다하지 않음을 알고, 앞산의 오솔길이 잠시만 쓰지 않으면 띠풀이 꽉 차 길을 막으니 힘써 행함이 가장 귀함을 알 수 있다. 오직 나의 책 속에 있는 성현들이 앉거나 서거나 항상 나타나 이미 스승과 벗이 엄하지 않음을 근심하지 않는다.
하물며 저 입암(立巖)은 아침저녁으로 마주 대할 때에 우뚝 솟아 있어 천만고(千萬古)를 지나도 항상 그대로이다. 그리하여 세찬 물결도 어지럽히지 못하고 미친 바람도 흔들지 못하며 장마비도 썩히지 못하고 뜨거운 불도 녹이지 못하니, 이는 《주역(周易)》의 이른바 “서는 바에 방위를 바꾸지 않고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다.[立不易方 獨立不懼]”는 것이며, 《논어(論語)》에 이른바“더욱 높고 더욱 견고하여 드높이 서 있다.[彌高彌堅 卓爾所立]”는 것이며, 《중용(中庸)》에 이른바 “화하면서도 흐르지 아니하여 중립하고 기울지 않는다.[和而不流 中立不倚]”는 것이며, 《맹자(孟子)》에 이른바 “지극히 크고 지극히 강하여 빈천이 뜻을 옮기지 못하고 부귀가 마음을 방탕하게 하지 못하고 위엄과 무력이 굽히지 못한다.[至大至剛 貧賤不能移 富貴不能淫 威武不能屈]”는 것을여기에서 인식할 것이니, 각자 분발하고 진작하여 함께 자신을 세울 곳으로삼을 것을 생각함이 마땅히 어떠하겠는가. 이는 여러 친구들이 힘써야 할 것이다.
젊어서 배우지 못하고 늙어서 아는 것이 없어 이미 지나간 세월을 다시 돌릴 수 없고 이미 노쇠한 정력을 다시 강하게 할 수 없다. 다만 흰 머리의 나이에 수습하고 노년 시절에 스스로 힘쓰니, 다행히 밖으로 사모함이 없고 만년(晩年)에 취미가 있어 때와 시월(時月)의 사이에 만약 다시 만(萬)에 하나 전진이 있다면 이 또한 어찌 거처하는 곳의 도움이 아니겠는가. 이는 바로 노부(老夫)의 일이다.
혹 봄이 되어 산에 꽃이 만발하였는데 시원한 바람이 골짝에 가득하며, 여름이 되어 소나무 그늘에 저절로 바람이 불어와 뜨거운 햇볕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가을이 되어 단풍숲에 비단 물결이 떠올라 옥같은 시냇물에 붉은 단풍이 비추며, 겨울이 되어 눈꽃이 휘날려 골짝의 하늘이 아득하니, 이는 모두 사람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흥취이다. 그리고 앞 들에 안개가 걷히고 동쪽 산에 달이 떠오르는 것은 아침저녁의 아름다운 경치이다.
마침내 꽃을 찾고 버들을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발걸음을 옮기며 샘물로 양치질하고 돌 위에 앉으니, 어디든 적당하지 않은 곳이 없다. 작은 그물을 푸른 물결에 던지니 은빛의 생선이 쟁반에서 뛰며, 가느다란 연기가 바위 틈에 떠오르니 산중의 막걸리가 잔에 가득하다. 약간 취하여 높이 읊조리자 우주가 아득한 것은 어떠한 시절에 있어야 하는가. 이는 책을 다 읽고 강(講)을 마친 다음 정신을 쉬고 기운을 펴는 일인데 노부와 여러 친구들이 함께할 일이다.
그렇다면 이 서재에서 거처하는 우리들이 위로 우러러보거나 아래로 굽어봄에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 감히 이 약속을 위배하는 자가 있으면 이 입암이 지켜볼 것이다.”
이에 편액(扁額)하기를 입암 정사(立巖精舍)라 하였다.
만력(萬曆) 정미년(1607,선조40) 겨울에 쓰다.
[주-D001] 무우(舞雩)에서 ……10여 명 : 무우는 하늘에 기도하고 기우제(祈雨祭)를 지내는 곳이며, 관동(冠童)은 관을 쓴 어른과 동자를 이른다. 공자(孔子)가 제자들에게 뜻을 묻자, 딴 사람들은 모두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증점(曾點)은 “늦은 봄 봄옷이 이루어지면 관을 쓴 어른 5, 6명과 동자 6, 7명과 함께 기수(沂水)에서 목욕하고 무우에서 바람 쐬고 시 읊으며 돌아오겠다.” 하였다. 《論語 先進》[주-D002] 현무(玄武) : 북방(北方)의 신(神)으로 그 모양은 거북과 뱀이 어울려 있는 것이라 하는바, 동쪽인 왼쪽은 청룡(靑龍), 서쪽인 오른쪽은 백호(白虎), 앞인 남쪽은 주작(朱雀), 뒤인 북쪽은 현무이므로 말한 것이다.[주-D003] 바름을 길러……있을 것이다. : 《주역(周易)》의 몽괘(蒙卦)는 산(山)을 상징하는 간(艮)과 물을 상징하는 감(坎)이 모여 이루어졌는바, 사람에 비유하면 어려서 몽매함에 해당한다. 이 몽괘의 단전(彖傳)에 “산 아래에 험한 물이 있는 것이 몽괘이니……어렸을 때에 바름을 기르는 것이 성인(聖人)이 되는 공부이다.” 하였다. 또 대축괘(大畜卦)는 하늘을 상징하는 건(乾)과 산을 상징하는 간(艮)이 모여 이루어졌는바, 학문을 많이 쌓는 상(象)이 된다. 이 대축괘의 상전(象傳)에 “하늘이 산 가운데에 있는 것이 대축괘이니, 군자가 이것을 보고서 옛날의 훌륭한 말씀과 올바른 행실을 많이 기억하여 덕을 쌓는다.” 하였으므로 이 두 괘를 빌려 말한 것이다.
여헌선생문집 제1권 / 시(詩)
입암(立巖)에서 13수를 읊다.
○ 입암촌(立巖村)
외로운 마을 바위 밑에 있으니 / 孤村巖底在
작은 집이지만 본성 기를 수 있네 / 小齋性足頤
늙어서 갈 만한 곳 없으니 / 老矣無可往
이제부터 변함 없는 저 바위 배우리라 / 從今學不移
○ 만욱재(晩勖齋)
말로에 인간사 하도 많으니 / 末路人事茂
그 누가 일찍부터 노력할 줄 알까 / 誰從早時勖
이는 실로 늙은이의 고민이라 / 此固耄翁悶
부디 힘써 미치지 못할 듯이 하여야지 / 勉修如不及
○ 사사헌(四事軒)
강절의 이때의 뜻 / 康節此時意
산중 사람의 입에 회자되네 / 膾炙山人口
비록 세상 일 관여치 않으나 / 雖不關世務
가난한 가운데에 절로 부유함이 있다오 / 自有貧中富
○ 수약료(守約寮)
근래에 생각하니 노년의 사업은 / 近思耄年業
요약을 지킴이 제일 중요하네 / 守約爲大要
일마다 번거롭지 않으면 / 事事能不煩
이내몸 하늘 높이 솟아나리 / 身可出雲霄
○ 계구대(戒懼臺)
성인의 가르침 위미(危微)를 경계하였으니 / 聖訓戒危微
그 누구인들 이 마음 없을까 / 何人無此心
이 학문 전해지지 않은 지 오래이니 / 此學不傳久
묵은 책 어느 누가 다시 찾을런가 / 陳篇誰復尋
○ 학욕담(鶴浴潭)
산은 낙문사 뒤에 있는데 / 山在樂聞後
이곳에 학욕이란 못이 있다오 / 有潭名鶴浴
학 또한 영물인데 / 鶴亦物之靈
그림자 끊기니 언제나 한번 목욕할까 / 影斷何嘗浴
○ 피세대(避世臺)
시중에 은자(隱者)가 있으니 / 隱有市中者
하필 깊은 곳에서 찾아야 할까 / 何須深處覓
농군들 벼랑 길을 끊어놓으니/ 農人斷崖徑
나뭇가지가 자취를 쓰는 것보다 낫구려 / 猶勝枝掃迹
○ 인학산(引鶴山)
학욕담 위에 있는 산 / 浴鶴潭上山
인학산이라 칭해오네 / 山名稱引鶴
그동안 학이 오지 않았으니 / 邇來鶴不至
어떤 사람 우학이라 이름하였나 / 何人名耦鶴
○ 상천봉(象天峯)
수많은 봉우리 둥글게 늘어서니 / 團圓秀列峀
상천봉이란 이름 마땅하구려 / 得名宜象天
거주하는 사람들 산을 닮고자 한다면 / 居人欲象山
마음가짐을 어찌 편벽되게 하겠는가 / 立心盍無偏
○ 산지령(産芝嶺)
지초(芝草) 찾아도 지초 보이지 않으니 / 覓芝芝不見
황황하여 무엇을 잃은 듯하네 / 遑遑如有失
하필 밖에서 구할 것이 있나 / 何必求諸外
한 경(敬) 자 기이한 효험 진실하다오 / 一敬奇效實
○ 구인봉(九仞峯)
산봉우리 아홉 길에 이르니 / 有峯仞至九
어찌 삼태기의 흙으로 쌓아 만들었겠나 / 豈待簣土積
와서 입암과 상대해 있으니 / 來爲立巖對
아침저녁으로 항상 바라보며 향하노라 / 瞻向窮朝夕
○ 도덕방(道德坊)
몸 가는 곳마다 도 아님 없고 / 身往無非道
마음에 둔 것이 모두가 덕이라오 / 心存皆是德
우리 인간 똑같이 얻은 것이니 / 吾人所同得
지(知)와 행(行) 내 어찌 홀로 하겠는가 / 知行我何獨
○ 경운야(耕雲野)
산중에 살며 한 해를 마치려 / 峽居謀卒歲
쟁기와 호미 메고 새벽에 나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네 / 耒鋤以晨昏
구름과 연기 속에 왕래하니 / 往來雲煙裏
부자와 형제간 함께 한다오 / 父子與季昆
[주-D001] 위미(危微) : 《서경》 대우모(大禹謨)의 “인심은 위태롭고 도심은 미묘하다.[人心惟危 道心惟微]” 한 내용을 축약한 것이다.[주-D002] 농군들 벼랑 길을 끊어놓으니 : 공치규(孔稚圭)가 지은 북산이문(北山移文)에 “혹은 나뭇가지를 날려 수레를 부수기도 하고 혹은 나뭇가지를 낮게 드리워 속인(俗人)의 자취를 쓸어버린다.[或飛柯以折輪 或低枝而掃迹]”는 내용이 있는바, 농군들이 벼랑 길을 끊어놓으니, 저절로 속인들이 오지 않아 굳이 자취를 쓸어 없앨 필요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여헌선생문집 제1권 / 시(詩)
입암(立巖) 오언장편(五言長篇)
땅이 개벽할 초기부터 우뚝이 솟아 / 立從地闢始
지금까지 바뀌지 않고 있네 / 抵今方不易
풍우의 변고 몇만 번이던가 / 風雨幾萬變
그 오랜 세월 누가 기억할는지 / 歲月誰記曆
우뚝한 한 면목을 가지고 / 巍將一顔面
어찌 천 번 뒤바뀜을 따르겠는가 / 肯隨千飜革
이 모양 이미 만고에 그러하였으니 / 此樣旣往萬
이 모양 응당 억세에도 그러하리 / 此樣應來億
치우치지 않음은 바로 중도이며 / 不倚是中道
간사하지 않음은 떳떳한 덕이라오 / 不回惟經德
추위와 더위 절로 왕래하고 / 寒暑自往來
어둠과 밝음 닫힘과 열림에 맡기네 / 晦明任闔闢
시냇물은 흘러 다시는 돌아오지 않고 / 溪流流不返
꽃들은 어지러이 피었다 졌다 하네 / 百卉紛開落
구름과 내는 서로 태도 바꾸는데 / 雲煙互變態
너만 홀로 예나 지금이나 똑같구나 / 爾獨今猶昔
한번 서 영원히 우뚝하니 / 一立立終古
어느 물건이 너를 동요시킬까 / 何物能撓得
너를 위해 작은 집 지어놓고 / 爲爾設小齋
말을 잊은 채 밤낮으로 마주하네 / 忘言對日夕
여헌선생문집 제1권 / 시(詩)
정사(精舍)
바위 등지고 작은 집 지어 놓으니 / 負巖開小齋
시냇물이 앞으로 지나가네 / 澗流當前過
섬돌은 반석 위에 쌓고 / 階因巖趾築
처마는 송백과 가지런해 / 簷與松柏摩
무더운 여름에는 못의 시원한 바람 불어오고 / 炎夏納潭涼
추운 겨울에는 온화한 양기가 들어오네 / 凍寒來陽和
두서너 사람과 함께 머물며 / 同棲二三子
밤낮으로 절차탁마한다오 / 晝夜相切磨
상자에 경전을 구비해 놓으니 / 龕儲備經傳
서로 강마하기 편리하며 / 且便相講劘
해 저물면 몇 잔 술 마시고 / 日晡數酌罷
함께 남쪽 누대에 올라가 시 읊노라 / 携上南臺哦
골짝은 때로 정취가 다르나 / 洞天時異趣
입암은 항상 변치 않네 / 立巖恒不頗
노부가 친구들에게 당부하노니 / 老夫勖諸益
이 못난 백발 늙은이 어이 보지 않는가 / 盍觀醜頭皤
연령이 이순이 되었건만 / 年齡及耳順
진보를 못하고 그대로 머물러 있네 / 進步坐蹉跎
다리를 세움은 되도록 소년시절에 하여야 하니 / 立脚貴及早
세상의 시끄러운 파도 따르지 마오 / 勿追世奔波
학문을 닦음은 부디 날짜를 아껴야 하니 / 藏修宜惜日
세월은 베짜는 북처럼 빠르다오 / 歲月疾如梭
[주-D001] 이순 : 60세를 가리킨 것으로, 공자(孔子)의 “60세에 말을 들으면 저절로 그 뜻을 알았다.[六十而耳順]” 한 말에서 나온 것이다. 《論語 爲政》
ⓒ 한국고전번역원 | 성백효 (역) | 1996
여헌선생문집 제1권 / 시(詩)
계구대(戒懼臺)
대가 바위 끝에 있으니 / 臺在巖盡頭
아래는 대여섯 길이 되누나 / 下可尋五六
오르는 자 한번 실족하면 / 上者一失足
눈깜짝할 사이에 떨어지네 / 傾墜在瞬目
이 때문에 계구대라 이름하여 / 爲此名戒懼
마음 항상 깊은 골짝과 못에 임한 듯하네 / 常使心淵谷
경계하여 경계할 만함이 없음에 이르면 / 戒至無可戒
위태로운 곳을 밟아도 평지처럼 편안하며 / 履危如平陸
두려워하여 두려울 만함이 없음에 이르면 / 懼至無可懼
험한 것을 바꾸어 큰 복을 오게 하네 / 轉險來胡福
마음을 해이하게 하지 않으므로 / 由能不弛心
몸이 끝내 전복을 면한다오 / 身終免顚覆
만약 계구대라 칭하지 않았으면 / 若非戒懼稱
몇 사람이나 떨어져 골육이 진흙처럼 되었을까 / 幾人泥骨肉
세간에 위험한 곳은 / 世間危險地
이 계구대만이 아니네 / 不是玆臺獨
안에는 한 방촌이 있는데 / 內有一方寸
사방에는 천길의 깊은 못이오 / 四邊千尋瀆
밖에는 양장의 길이 있는데 / 外有羊腸路
수레의 축이 부러질 뿐만이 아니라오 / 不啻車絶軸
이 때문에 명철한 사람들은 / 所以明哲人
잠시라도 조심함을 잊지 않나니 / 不暫忘兢肅
부디 대에 처하는 마음 가져다가 / 須將處臺心
몸을 받들어 항상 조심하오 / 奉身恒踧踧
[주-D001] 방촌 : 마음을 가리킨 것으로, 심장(心臟)은 크기가 사방 한 치[寸]이며 마음이 심장 속에 있다 하여 붙인 이름이다.
여헌선생문집 제1권 / 시(詩)
피세대(避世臺)
우리 인간의 세상살이 / 吾人生世間
죽기 전에는 언제나 세상에 있나니 / 未死當在世
무슨 일로 세상을 피하려 하여 / 奈何欲避世
피세대라 이름하고 스스로 해탈하려 하였나 / 名臺思自蛻
희헌이 아득히 멀어 / 羲軒邈矣古
옛 도 지금과 어긋나니 / 古道今時戾
세상과 모순되는 종적으로 / 難將齟齬蹤
혹과 무사마귀처럼 세상에 처하기 어려워라 / 處世爲疣贅
대는 물의 북쪽 끝에 있는데 / 臺在水北頭
골짝이 깊고 산은 거듭 가리웠네 / 谷邃山重蔽
병풍바위는 뒤에 둥그렇게 높이 솟아 있고 / 屛巖後圓峻
푸른 시내는 섬돌을 끼고 흐르누나 / 碧潭流擁砌
다만 한정(閒靜)을 보전하기 적합하니 / 只合保幽貞
세속의 사람들은 옷깃을 던지기 어려워라 / 俗夫難投袂
천지가 오랫동안 이곳을 숨겼으니 / 天地久慳秘
응당 훌륭한 사람에게 주어 쉬게 하리 / 應畀碩人憩
이제 성명(聖明)의 시절 만나 / 方今値聖明
요순 같은 태평성세 보게 되었으니 / 佇見唐虞際
누가 다시 깊이 은둔하여 / 誰復遯嘉肥
궁벽한 산속에 부질없이 숨어 있나 / 窮山空自滯
홀로 버려진 이 한 사람 / 獨此一棄物
분수에 따라 무성한 계수나무 속에 머문다오 / 隨分棲叢桂
여헌선생문집 제1권 / 시(詩)
앞시내
작은 시냇물 서재 아래로 흘러 / 小澗流齋下
밤낮으로 졸졸 흐르누나 / 日夜響潺湲
근원은 깊은 곳에서 나와 / 源從底處出
나와도 나와도 어려움이 없고 / 出出會無艱
흐름은 깊은 곳 향해 돌아가 / 流向底處歸
돌아가고 돌아가 그치지 않네 / 歸歸且不慳
처음에는 꽃잎 떨어져 떠감을 보았는데 / 始見花爛浮
문득 황톳물 가득히 흘러가며 / 旋作黃流灣
금방 깨끗한 집이 담겨져 있음을 보았는데 / 纔觀玉宇涵
다시 얼음 밑에 여울소리 듣노라 / 復聽冰下灘
상쾌함은 솔바람이 이는 듯하고 / 爽或起松籟
노할 때에는 우주에 뇌성벽력이 치는 듯하네 / 怒或雷凝寰
지나가면 다시 이어짐은 나약한 이 뜻을 세우게 하고 / 過續足立懦
깨끗하고 시원함은 완악한 이 청렴하게 하는구나 / 潔淸能廉頑
누가 권하기에 끊임없이 흘러가며 / 誰勸往無已
누가 재촉하기에 바삐 달려가는가 / 孰催忙未閒
때에 따라 온갖 태도 드러내나 / 隨時呈百趣
쉬지 않음은 끝내 일반이라오 / 不息終一般
사랑스레 보느라 매양 물가에 임하니 / 愛玩每臨流
몸의 괴로운 병 깨닫지 못하겠네 / 不覺身恫癏
2)입암가
蘆溪先生文集卷之三 / 歌
[立巖歌 二十二章]
立巖 時旅軒張先生寓居本郡北立巖。公嘗從遊。代旅軒作此歌。
無情히서바회有情야보이다最靈吾人도直立不倚어렵거萬古애곳게선저얼구리고칠적이업다
江頭에屹立니仰之예더옥놉다風霜애不變니鑽之예더옥긋다사람도이바회면大丈夫가노라
卓然直立니法바담즉다마구깁흔峽中에알리잇사자오랴努力躋攀면奇觀이야만니라
精舍
草屋두세間을巖穴에부쳐두고松竹두빗치病目애익어시니이中에春去秋來를아므젠줄모로다
起予巖
夫子의起予者商也라드러더니오起予者말업바회로다어리고鄙塞던미암이절로새롭다
戒懼臺
戒懼臺올라오니믄득졀로戰兢다臺上애살펴보며이치저홉거든못보고못듯히야아니삼가엇지리
吐月峯
峯頭에소슨이이山中의비취노다九萬里長天이멀고도놉건마高山이揷天니돌우흐로나덧다
九仞峯
巍巍九仞峯이衆山中에秀異코야下學工程이이山하기갓건마엇디라이제爲山은功虧一簣게오
小魯岑
南魯岑이일홈을뉘라서지은게오夫子登臨도이東山아니런가萬古靑山이只麽히놉하시니아모줄모로다
避世臺
名利예지업서오막집고訪水尋山야避世臺예드러오니어즈버武陵桃源도여긔런가로라
合流臺
合流臺린물이보기예有術다彼此업시흘러가고左右에逢源니分時異合處同을이臺下애아라고야
尋眞洞
尋眞洞린물이巖下애구븨지어不舍晝夜야亭子압드러오니어즈버洛水伊川을다시본여라
採藥洞
솔알아들아네얼운어가뇨藥러가시니마도라오렷마山中에구룸이겁후니간곳몰라노라
浴鶴潭
浴鶴潭근물에鶴을조차沐浴고訪花隨柳야興을고도라오니아무려風乎舞雩詠而歸들블을일이이시랴
數魚淵
淵泉이하말그니가고기다보닌다一二三四를낫낫치혜리로다童子야새물에고기를다시헤여보아라
響玉橋
磯頭에누엇다가라니이다靑藜杖빗기집고玉橋를건너오니玉橋애근소를자새만아놋다
釣月灘
낙대를빗기쥐고釣月灘라려불근역귀헤혀고알안시니아모려桐江興味불을주리이시랴
耕雲野
沮溺의가던밧치千年을묵어거구을허혀드러두세이렁가라두고生涯를足다사가마부거업노왜라
停雲嶺
停雲嶺라보니天中에두렷괴야陟彼崔嵬면五雲蓬萊보련마病目애눈물이얼니바보기아득다
産芝嶺
産芝嶺올나오니一身이香氣롭다四皓商山도이芝嶺아니런가山路애구룸이깁흐니아모줄모로다
隔塵嶺
隔塵嶺하놉흐니紅塵이머러간다득이먹은귀싯슬록먹어가니山밧긔是是非非를듯도보도못로다
畫裏臺
江上山린긋솔아너분돌해翠嵐丹霞ㅣ疊疊이둘러시니어즈버雲母屛風을그린여라
[주-D001] 미 : 마
여헌선생속집 제4권 / 잡저(雜著)
박인로(朴仁老)의 무하옹 구인산기(無何翁九仞山記) 뒤에 쓰다.
산은 참으로 높고 높다. 층층의 봉우리로 아홉 길[仞]이나 되는 산들이 깎아지른 듯이 질서정연하게 서 있는데, 높고 견고하고 정(精)하고 엄함은 마치 배우는 자들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것과 유사함이 있다. 용이 서린 듯, 범이 쭈그리고 앉아 있는 듯한 것은 의연(依然)한 군자의 근엄함이며, 후중하여 변동하지 않음은 인자(仁者)의 기상(氣像)과 방불하며, 그윽하고 깊고 기이하고 빼어남은 신명(神明)이 붙잡아 주는 듯하다. 우러러볼수록 더욱 견고하니 선비의 책임이 무겁고 갈 길이 먼 것과 유사하고, 바라봄에 등급이 있고 절도가 있으니 또한 아래로 인간의 일을 배워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것과 같다.
옛글에 이르기를 “아홉 길 되는 산을 만드는 데에 공이 한 삼태기의 흙 때문에 이루어지지 못한다.” 하였으니, 어찌 오직 산만이 그러할 뿐이겠는가. 사람이 도(道)를 행함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도는 참으로 너르고 너르다. 도의 큰 근원은 하늘에서 나오고 사람에게 붙여 있어 편벽되지 않고 치우치지 아니하여 탁연(卓然)히 중립한다. 그리하여 비(費)와 은(隱)을 포괄하고 소(小)와 대(大)를 겸하여 소리도 없고 냄새도 없는 가운데 숨어 있고 일상 생활하는 동정(動靜)의 즈음에 드러나 인도(人道)의 표준이 되고 온갖 교화의 관건이 된다.
도를 보존하는 것은 누구인가? 삼재(三才)에 참여하여 우뚝이 서고 한 대(臺)를 세워 높이 건축하니, 그 대는 바로 영대(靈臺)이고 그 주인은 바로 성성옹(惺惺翁)이다. 영대 아래에는 누각이 있으니 이른바 성의관(誠意關)인데, 성성옹이 영대에 즉위하여 이 성의관에서 호령을 하는 바, 이것을 천군(天君)이라 한다. 선(善)을 좋아하고 악(惡)을 미워하여 온갖 몸이 명령을 따라 자기 몸을 닦고 남을 다스리는 도가 반드시 이 관문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러나 왕왕 해마(害馬)에게 유혹당하여 이리저리 치달리고 제멋대로 날아가서 그칠 바를 알지 못하면, 이 영대에 잡초가 무성해지고 이 관문이 황폐해져서 진흙과 모래가 뒤섞인 가운데 버려두고 찾을 줄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옛날 성인(聖人)과 신인(神人)이 이것을 두려워하여 교훈을 남겨 가르쳤으니, 사람으로서 이 도를 구하고 이 도를 밝히려는 자가 만약 격물(格物)ㆍ치지(致知)에 마음을 두고 성의(誠意)ㆍ공경(恭敬)에 대한 공부를 하여 아홉 길을 표준으로 삼아 나아가고 나아가 그치지 않으며, 날로 새롭게 하고 또 새롭게 하여 한 치를 얻으면 한 치를 지키고 한 자를 얻으면 한 자를 지켜 참됨을 쌓고 힘쓰기를 오래하면 좌우에서 근원을 만나게 될 것이다. 이렇게 되면 아래로 인간의 도리를 배우고 위로 천리(天理)를 통달하는 효험과 위를 통하고 아래를 통하는 공부가 이에 극진할 것이니, 어찌 성현의 경지에 이르지 못함을 걱정하겠는가.
공자(孔子)는 말씀하기를 “열 가호의 작은 고을에도 반드시 충신(忠信)한 사람이 있다.” 하였다.
우리 이웃에 무하옹(無何翁)으로 성(姓)이 박씨(朴氏)이고 이름이 인로(仁老)라는 분이 있으니, 그는 참으로 인의(仁義)의 사람이다. 항상 부자(夫子)의 말씀을 외며 자신을 책하기를 “아침에 도를 들으면 저녁에 죽어도 괜찮다. 이제 비록 늙고 또 병들었으나 어찌 그날그날 세월을 보내어 초목과 함께 썩을 수 있겠는가.” 하였다.
그리하여 하루 아침 새로운 각오로 대인(大人)의 도에 뜻을 두고는 구인산(九仞山)을 찾아 들어가 산의 아름다움을 두루 구경한 다음 분발하여 밥먹는 것도 잊고 공부하며 늙음이 장차 이르는 것도 모르니, 내가 보기에는 마땅히 우리 동방(東方)의 호걸스러운 사람이라 할 것이다.
무하옹은 일찍이 활쏘기와 말타는 재주로 변방 고을에서 병부(兵符)를 차고 병졸들과 고락(苦樂)을 함께하였는데, 의롭지 않으면 취하지 아니하여 털끝만큼도 어김이 없었다. 이 때문에 정치를 잘한다는 명성이 자자하였고 병사와 백성들이 사랑하며 떠받들었다. 그러다가 2년이 지나 체직(遞職)되어 돌아왔는데, 돌아올 때의 행장(行裝)은 오직 몸을 지키는 장검(長劍) 한 자루가 있을 뿐이었다. 그리하여 송덕비(頌德碑)가 세워지니, 이 말을 들은 자들은 모두 우러러 사모한다.
무하옹은 지려(志慮)가 높고 원대하며 판국(辦局 사무를 처리하는 도량)이 크고 깊으며 언행(言行)을 삼가고 독실히 하여 사람들에게 신임을 받고 있으니, 비단 시골과 이웃에서 사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당대의 대인 선생(大人先生)들에게도 존경을 받는다.
나는 병든 가운데 일찍이 노인이 ‘무하옹전(無何翁傳)’을 지었다는 말을 듣고는 적이 나아가 보아 나의 근심을 잊고자 하였으나 고질병이 깊어 소원을 이루지 못하였다.
하루는 노인이 고맙게도 찾아와서 한동안 함께 회포를 나누었다. 내가 무하옹전을 보여줄 것을 청하자, 노인이 원고를 꺼내어 보여 주었는데, 문기(文氣)가 호방하면서도 일을 서술함이 자세하고 치밀하였다. 문장이 기이하고 준걸스러워 보통보다 만만번 뛰어났는데, 그 가운데에 구인산과 성의관 및 문답한 내용이 더욱 도리에 가까우니, 이 무하옹전이 어찌 우연한 것이겠는가.
아, 나처럼 불초한데다 질병까지 겸한 자는 비록 노인의 전(傳)에 대하여 감히 이러쿵저러쿵 의논할 수 없으나, 덕을 좋아하는 병이(秉彛)의 마음은 꺼져 없어질 수 없으므로 이것을 자리 오른쪽에 놓아두고 하루에 세 번씩 펴보니,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주는 듯하여 병든 회포에 매우 시원하였다.
또 이 산은 오직 인인(仁人)과 군자(君子)만이 찾을 수 있으니, 나와 같이 용렬하고 누추한 자가 어찌 볼 수 있겠는가. 다행히 노인의 이 전에서 산의 한두 가지의 대략을 거의 얻어 볼 수 있었다. 이에 용렬하고 누추함을 잊고 애오라지 뒤에 발문(跋文)을 쓰는 바이다. 박공의 무하옹전에 대략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옹(翁)은 어떠한 사람인지 알 수 없으며, 사람들이 세상의 실정에 너무 어둡다고 기롱하여 무하옹(無何翁)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옹이 지리산(智異山) 아래에 오수(烏叟)라는 도인(道人)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찾아가니, 오수가 말하기를 ‘구인산 가운데 한 영약(靈藥)이 있어 만고에도 오히려 향기로운데, 사람들이 이미 이 산을 모르니 또 어찌 이 영약이 있음을 알겠는가. 약을 캐는 방도는 반드시 뜻을 성실히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한 뒤에 얻을 수 있다. 그러므로 우왕(禹王)ㆍ탕왕(湯王)과 문왕(文王)ㆍ무왕(武王)과 공자(孔子)ㆍ맹자(孟子)가 서로 뒤이어 캤었는데, 그 뒤에는 이 약을 캐는 자가 아무도 없다.’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한 율시(律詩)를 주기를 ‘온 골짝에 봄이 장차 저무는데, 새 울고 꽃이 어지럽게 나는구나. 구인산은 어느 곳인가, 천 개의 봉우리 가까우면서도 아니네.[萬壑春將暮 鳥啼花亂飛 九仞山何處 千峯近卻非]’라고 하였다. 옹이 나아가 말하기를 ‘군자의 지극한 의논을 소인이 어찌 감히 엿볼 수 있겠습니까. 입덕문(入德門)과 성의관(誠意關)을 다시 말씀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니, 오수는 말하기를 ‘입덕문은 성의관과 통하여 하나의 편안한 집이 되는바, 이 집에 사는 자는 신명(神明)한 주인이다. 집 앞에 큰 길이 화살처럼 곧으니, 눈이 있는 자가 어찌 보지 못하며 발이 있는 자가 어찌 밟지 못하겠는가. 만약 알기를 분명히 하고 나아가기를 깊이 한다면 모두 그칠 곳을 알아 그치고 편안한 곳을 얻어 편안할 것이다. 높고 멀다고 생각하지 말라. 다만 걸어 한 보 되는 땅에 있을 뿐이다.’ 하였다. 옹은 사례하기를 ‘저는 활쏘기와 말타기를 대강 익혔을 뿐, 시(詩)ㆍ서(書)를 배우지 아니하여 10년 동안 오두막집에서 한갓 어쩔 수 없다는 한탄을 했었는데, 다행히 오늘밤 훌륭한 가르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비록 늦었으나 이 말씀에 종사하겠습니다.’ 하였다.”
[주-D001] 그 대는 바로……성성옹(惺惺翁)이다 : 영대(靈臺)는 ‘신령스러운 대’란 뜻으로 마음을 가리키며, 성성옹 역시 마음을 가리킨 것으로 깨끗한 마음은 어둡지 않고 항상 깨어 있다 하여 의인화(擬人化)한 것이다.[주-D002] 영대 아래에는……천군(天君)이라 한다 : 성의관(誠意關)은 뜻을 성실히 하는 공부를 관문에 비유한 것으로, 주자(朱子)는 《대학(大學)》을 설명하면서 성의의 관문이 가장 통과하기 어렵다 하고, 이 관문을 통과하면 다시는 악행을 저지르지 않는다 하여 선(善)ㆍ악(惡)이 판별되는 관문이라 하였다. 천군 역시 마음이 올바르면 사람의 몸을 자유롭게 검속(檢束)할 수 있다 하여 마음을 높여 부른 명칭이다.[주-D003] 해마(害馬) : 말을 해치는 짐승 따위를 이르는데, 후대에는 사람의 본성을 해롭게 하는 물욕을 가리키게 되었다. 《장자(莊子)》 서무귀(徐无鬼)에 “천하를 다스리는 자는 또한 어찌 말을 기르는 것과 다르겠는가. 말을 기르는 자는 말을 해치는 것[害馬]을 제거할 뿐이다.” 하였다.
蘆溪先生文集卷之一
무하옹전
無何翁傳
翁不知何許人。窮居落魄。不知老之將至。傍人譏其闊於世情。謂之無何翁。
무하옹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 궁하게 살고 혼이 나갔으며 늙어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주변 사람이 세상 물정을 모른다고 헐뜯으며 ‘쓸데없는 늙은이(무하옹)’라고 하였다.
翁聞智異山下有稱烏叟者博學多聞。往訪之。
무하옹이 지리산(여헌 장현광이 입암 28경 중 구인산을 명명) 아래에 오수(烏叟, 여헌 장현광이 실제 모델로 보인다)라고 하는 박학다식한 사람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가서 그를 방문하였다.
叟曰。九仞山中一靈藥。萬古猶香。世人旣不識此山。又安知有此藥也。採藥之道。凡有八條焉。苟不以其道採之。其可得乎。彼四皓。隱者也。但能採芝商山。而未得採藥之道。必須誠意正心。然後始可採之。故禹湯文武孔孟相繼採之。其後累百世。採者蓋寥寥矣。
오수가 가로되, 구인산 속에 한 신령스러운 약이 만고에도 오히려 향기롭지만, 세상사람이 이 산을 알아보지 못하니 또한 이런 약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인가. 약을 캐는 도는 모두 8가지(성의, 정심, 격물, 치지, 수신, 제가, 치국, 평천하?)가 있다. 진실로 그 도로서 그 약을 캐지 않는다면 얻을 수가 있겠는가. 옛날의 상산(商山)에 살았던 4호(晧)는 은자들이었다. 상산의 영지만을 잘 캤지만 영약을 캐는 도는 얻지 못하였다. 약을 캐는데 뜻을 정성스럽게 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는 誠意正心은 필수이다. 그런 뒤에야 비로소 영약을 캘 수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임금, 탕임금, 문왕, 무왕, 공자, 맹자가 그 도를 서로 이어와서 영약을 캤는데 그 뒤로 몇 백 세대가 지나서 영약을 캐는 자가 종적을 감추었다.
遂贈一律曰。
드디어 시 한수를 주어 가로되
萬壑春將暮。일만 골에 봄이 저무는데,
鳥啼花亂飛。새는 지저귀고 꽃잎은 흩날린다.
九仞山何處。구인산은 어디인가?
千峯近却非。일천 봉우리가 비슷하나 아니네.
翁再拜而進曰。大君子至論。小子何敢窺及。但入德門誠意關。願更聞之。
무하옹이 절하고 나아가 가로되, 큰 군자의 지론(至論)을 소자가 어찌 감히 엿볼 수가 있겠습니까. 단지 입덕문(入德門), 성의관(誠意關)으로 들어가서 바라건대 다시 그 지론을 듣기를 바라옵니다.
叟曰。入德門通于誠意關爲一安宅。而居之者。神明主人也。宅前大路。其直如矢。有目者孰不可見。有足者孰不可踐。苟能知之明而造之深。則皆可知所止而止。得所安而安。勿謂高遠。只在脚下一步地耳。
무하옹이 입덕문을 지나고 성의관에서 한 편안한 집을 삼아서 사는 것이 신명의 주인입니다. 이 집 앞의 큰 길이 곧기가 화살 같으니 눈 있는 사람은 누군들 보지 못하고 발 있는 사람은 누군들 실천하지 못하겠습니까. 진실로 그 지론을 밝게 알고 그 실천을 깊이 한다면 모두가 그칠 바를 알아서 그치고, 안락할 바를 알아서 안락할 것이다. 높고 멀다고 하지 말라 다만 발아래 한 걸음에 있는 땅이다.
翁起謝曰。粗習弓馬。不事詩書。十載窮廬。徒切已矣之歎。何幸今夕獲承盛敎。今雖苦晩。請事斯語矣。
무하옹이 일어나며 감사하며 가로되, 활과 말을 어설프게 익히고 시서예악을 일삼지 않고서 10년을 초가에서 궁하게 살며 한갓 어쩔 수 없다는 한탄만 하였습니다. 얼마나 다행하게도 오늘 저녁에 성대한 가르침을 얻어 이었습니다. 지금 비록 괴로운 늘그막이지만 청컨대 이 말씀을 섬기렵니다.
因呈短韻曰。
그리고서 짧은 시를 지어 올렸으니,
九仞爲山是底山。아홉 발 높이의 산이니 낮지만,
含輝隱耀冠千山。광휘를 갈무리하니 일천 산들의 으뜸이네.
許多奔走尋山者。허다한 사람들 이 산을 찾아 분주하지만,
不識人間有此山。인간사회에 이 산이 있음을 알지 못하네.
叟和曰。
오수가 화답하는 시를 지으니,
人去猶存萬古山。사람은 갔으나 만고의 산은 오히려 있으니,
光風霽月滿空山。광풍제월이 빈산에 가득하다.
樂山眞趣無文武。산의 참된 맛을 즐김에 문무가 따로 없으니,
願與吾君共此山。나와 그대 어울려 이 산을 함께 하기를 바라네.
傍有一童子隅坐而吟曰。
곁에 한 동자가 구석에 앉아 있다가 읊기를,
琢玉如磨九仞山。옥을 쪼고 갈아서 구인산이 되었으니,
浮空積翠照千山。하늘에 푸른 빛 쌓여 일천 산을 비추네.
何時滌盡泥沙汚。어느 때 세상 티끌 모두 씻을까,
努力躋攀陟彼山。한 걸음씩 걸어서 저 산을 오르도록 힘쓰네.
俄而翁告歸。更吟一絶曰。
잠시 뒤에 무하옹이 돌아간다고 고하며 다시 한 절의 시를 읊으니,
柳碧離愁暗。버들은 푸르러 근심을 여의고,
花紅淚濕襟。꽃은 붉어서 소매에 눈물 적신다.
秋期難可必。가을을 반드시 기약하기 어려우니,
千里夢相尋。천리를 꿈에서나 서로 찾으세.
叟和曰。
오수가 화답하기를,
愀然無一語。근심스러워 한 마디 말이 없고,
誰與敍幽襟。누구와 더불어 흉금을 풀 것인가.
智異丹楓下。지리산 단풍 아래서,
扶筇願更尋。지팡이 짚고 다시 찾아오시기를 바라네.
童子又吟曰。
동자가 또 읊기를,
今日傷心地。오늘은 상심하는 처지이지만,
何殊老少襟。어찌 노소의 흉금이 다르겠습니까.
秋來如訪我。가을에 저를 찾아오시면,
吾亦爲公尋。저 또한 공을 찾겠습니다.
詩罷乃還。
시회가 파하고서 돌아왔다.
(김희준 옮김)
첫댓글 깊이 있고 충실한 자료들 감사합니다.
이선생님과 함께 답사하면 언제나 즐겁습니다. 내년 10월에 태풍 타파 때문에 못한 입암여행 2부를 꼭 하십시다.